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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 최만리(崔萬理)선생 묘(墓) 및 신도비(神道碑)
(향토유적 제32호)
1. 위치 : 안성시 원곡면 지곡리 산 45
安成 나들목을 나오면 우측으로 양성면으로 가는 길을 따라 3km정도 가면 원곡면 표지판이 보이는 좌측으로 4km가면 원곡면 소재지가 나오면서 나즈막한 산들이 시선을 끈다.
소재지에서 우측 다리목에 지곡리 이정표가 나오면서 계속 길따라 가노라면 상지곡리 돌 팻말이 나오는 우측길로 접어들면 산머리에 海州崔氏제단이 보이는데 그 길 따라 마을을 지나 農路길로 계속 가면 墓所 入口 우측 산기슭에 崔萬理先生神道碑가 나그네를 반긴다.
< 神道碑>
墓所 입구에 위치한 神道碑는 1962년에 건립된 것으로 화강암 옥개와 장방형 비좌를 갖추었고, 비신은 대리석이다. 비문은 이숭녕(李崇寧)이 찬(撰)했는데 비신은 높이178cm, 폭61.6cm, 두깨 33cm의 규모이다.
백운산(白雲山) 기슭에 위치한 묘소는 부인 중화양씨(中和楊氏)와 합장묘로서 묘(墓) 앞의 구(舊) 묘비에는 집현전 부제학 최공만리지묘(崔公萬理之墓) 정부인(貞夫人) 중화양씨 부전(附箋)라고 새겨져 있다.
묘역 안내문에는 조선시대(朝鮮時代) 세종조(世宗祖)에 문신(文臣)과 학자(學者)로 명성(名聲)이 있는 최만리(崔萬理)선생(先生) 묘(墓)라 적혀있다.
묘비 앞에는 상석, 향로석, 그리고 좌우에는 문인석, 망주석이 배치되었다. 묘비의 재료는 대리석이며 규모는 높이 95㎝, 폭 37㎝, 두께 18㎝이다.
2 . 形氣論
白雲山을 간좌곤향(艮坐坤向)으로 전체 형국(形局)은 우백호(右白虎)에 해당되는 용맥(龍脈)의 묘역(墓域)이다. 부친 崔荷公을 등에업고 선생의 墓가 있으니 父子지간의 情이 얼마나 두터웠으랴 !. 지사(地師)들은 묘(墓)를 보면 그 主人公의 생애(生涯)를 알 수 있다고 하는데?
청백리(淸白吏)로 일생(一生)을 보내셨다는 최만리(崔萬理)선생(先生)의 안산(案山)을 보니 재물(財物)을 품에 안기는 토산형상(土山形象)으로 보이는 듯 하나 왠지 허전하다. 그 것은 좌청룡(左靑龍)이 안산(案山)이 되기 때문일것이다.
풍수지리(風水地理)의 기본원리(基本原理)는 人作이 아닌 자연상태의 四神砂의 균형(均衡)과 조화(調和)라고 볼 때 白虎쪽은 미약하여 은둔의 기상이 없으니 편중(偏重)된 것은 좋은 점이 부족하다는 것으 로 財物보다는 청빈한 학자로의 고고한 기풍을 간직하는 결과라 하겠다.
<崔萬理 墓>
이곳의 묘역(墓域)에는 위부터 부친(父親) 최하공(崔荷公)묘(墓)가 있고 아래 최만리(崔萬理)선생(先生)의 묘(墓)가 있으며 그 아래 후손(後孫)인 듯한 묘(墓)도 있다. 또한 白虎 기슭에는 後代子孫인 치사봉조하(致仕 奉朝賀)로 기로서(耆老所)에 들어간 領議政 艮齋 崔奎瑞의 先代墓와 後孫들의 墓가 있다.
이곳 부친(父親)묘(墓)와 선생(先生)의 묘(墓)는 좋으나 그 아래에 후손(後孫)인 듯한 묘(墓)는 허혈(虛穴)로 보여지니 그 理由는 입수맥에 선익과 전순이 인작으로 되어있으며, 또한 봉분에 이끼가 많이 섞여 있는 점과 용맥(龍脈)을 무시하고 좌(坐)를 정(定)한 것이 이를 證明해 주고 있다.
先生의 묘(墓)를 자세히 보면 자연적인 선익(蟬翼)으로 단단하게 形成되어 穴을 잘 감싸고 있으며 혈장아래 순전(脣氈)이 墓를 끌어 안은 듯 거두어 주고 있으니 주변이 밝고 아름답다.
先生은 성품이 매우 청렴 강직한 외에 옛것을 몹시 좋아하는 호고주의(好古主義)자이기도 했다. 그는 언제나 사모(紗帽)를 썼는데, 한결같이 옛 制度를 그대로 따랏기 때문에 모든 官吏들은 이러한 그를 무척 두러워하면서도 존경하여 감히 바로 그를 처다보지도 못했다.
世宗은 일찌기 유신(儒臣)들에 명하여 세자를 모시고 學文을 토론하라는 명을 내렸는데 당시 萬理는 文學으로써 입시하여 혹은 古今의 아름다운 말과 어진 政治에 대해서 진언하기도 하고, 때로는 백성들의 어려운 형편들을 이야기하여 태자의 마음을 깨우쳐 바가 많았다고 소대기년(昭代紀年)에전하고있다.
<案山을 바라보며>
3 . 理氣論
선생(先生)의 묘(墓) 좌향(坐向)을 보니 간좌곤향(艮坐坤向)이다.
숲이 가려 파구(破口)는 정확히 판별할 수 없으나 경파(庚破)로 보인다. 팔십팔향법(八十八向法)에 의하면 문고소수(文庫消水)이다.
右旋龍에 左旋水가 合法이며, 좌측(左側)에 정마자양수(丁未自養水)가 상당하여 천간경자상(天干庚子上)의 욕방(浴方)으로 消水하니 문고소수법(文庫消水法)이다.
용진혈적(龍眞穴的)에 문고소수(文庫消水)면 녹존유진(祿存有盡)에 패금어(佩金魚)라, 즉 祿存方으로 거수되면 벼슬길에 오른다고 하였고, 또한 총명수재(聰明秀才)하여 특출문장(特出文章)하지만 소차(小差)라도 있으면 패절(敗絶)하니 조심하고 또 조심하라고 했다.
어찌보면 先生의 성품과 비슷하여 每事에 철두철미(徹頭徹尾)하고 청렴결백(淸廉潔白)함을 意味하니 後人들이여 옷깃을 여매고 생각해 볼지어니, 淸白吏. 淸白吏!.................!
다 . 領議政 최규서(崔奎瑞) 선생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해주(海州) . 시호 충정(忠貞). 자 문숙(文叔) . 호 간재(艮齋) 소릉(少陵) 파릉(巴陵) . 경기 광주(廣州) 출생.
숙종 6년(1680)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1689년 대사간(大司諫)이 되었으며, 이듬해 희빈(禧嬪) 장씨(張氏)의 왕비 책봉에 반대했다. 많은 벼슬을 거쳐 1699년 대사헌(大司憲) 대제학(大提學) 형조 이조 판서를 지냈다.
경종 1년(1721) 소론(少論)의 영수로서 우의정이 되어 노론(老論) 4大臣들이 世弟의 代理聽政을 건의하여 세제(世弟:英祖)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이 실시되자 이를 반대하여 철회시켰다.
이듬해 좌의정, 1723년에 영의정이 되었다가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봉조하(奉朝賀)를 받은 뒤 일선에서 물러나 낙향하였다.
영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저서 : 艮齋集>
<白虎자락 後孫 영의정 崔奎瑞 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