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글>
우리는 <국가보안법>을 철폐할 때가지
4월 9일, 오늘을 꼭 기억해야 한다!
신문 칼럼은 대체로 메마른 문체다.
그런데 칼럼을 보고 눈물을 죽 흘린 적이 있었다.
2002년 9월 26일 영남일보 유영철 논설위원의 칼럼
『[영남타워] 나의 아버지가 그렇게 됐다면...』이다.
1975년 4월 9일,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 판결을 받은 8분은 18시간 만에 교수대에 올랐다.
이때 나는 새내기 대학생이어서 이 사건에 대한 사회의식이 없었고, 박정희는 유신으로 언론 통제하여 남한에서는 보도할 수 없었다.
학년이 올라 사회의식이 생기고 나서 이 사건을 보니, 박정희가 간첩 사건을 조작한 뒤 사법살인을 저질렀다는 걸 알았다.
전쟁시의 즉결처분 같이 정치범을 그렇게 처형한 예는 상식적인 사회에서는 상상 조차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외신을 타고 보도되자 전 세계는 경악했다.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협회는 4월9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정했다.
이 사건 하나 만으로도 박정희를 더없이 잔인한 ‘야만인’이라 불러야 했다.
박정희는 1972년 유신을 선포하고 폭력적인 탄압을 해도 유신 저항이 수그려들지 않자, 간첩이 필요했고, 악명 높은 중앙정보부에 간첩을 조작하라고 지시했다.
어느 날 밤 영문도 모르고 끌려간 수 십 명은 간첩 자백하라는 모진 고문에 기진맥진 했다. 고문으로 터진 창자를 두 손으로 감싸고 영문도 모르는 재판을 받아야 했음에도 검사들은 신이 났고 판사들은 애써 외면했다.
1975년 4월 8일 최종 판결 후 18시간 만에 8분은 새벽부터 교수대에 차례로 올랐고, 아침에 그 시신을 가족에게 넘겨주지 않고 바로 화장을 했다. 고문 흔적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대부분 희생자가 대구 경북 사람이었다. 1987년 민주화 대투쟁 이후 나는 대구에서 희생자 가족을 자주 만났다. 몇몇 분들의 부인들을 내가 치과주치의 담당했다. 몇몇 분의 아들은 대구 지역 선후배 관계를 맺고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억울하고 잔혹한 죽음과 빨갱이 가족이란 어처구니없는 누명 속에 지낸 세월에 관한 가족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내 가슴 속에 슬픔으로 꽁꽁 얼려야 했다.
추운 겨우내 꽁꽁 얼었던 양동이가 봄이 오면 풀리기 마련이다. 김대중 정부 시절부터 이 사건의 명백한 진실이 얼음 녹듯 풀렸다.
어느 날(다시 신문을 찾아보니 그 날이 2002년 9월 26일이었다) 한 칼럼을 읽으면서 내 가슴 속에 꽁꽁 얼었던 슬픔이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그 분들이 화장당한 지 47년이 지났다. 그 분들의 원흉은 젊은 여자와 양주를 마시고 놀다가 부하의 총알이 가슴에 박혀 숨졌지만, 원흉의 충실한 주구들인 몇몇 판사와 검사들은 아직 살아 있는 것으로 안다.
판결을 양심에 따라 한다고? 여태 아무도 자신의 죄과에 양심 선언한 법조인은 없다.
허긴 촛불정부조차도 악법 가운데 최고 악법인 <국가보안법> 철폐에 일언반구도 하지 않으니 말이다.
19년 전, 아래 칼럼을 쓴 유영철 영남일보 논설위원을 며칠 뒤 만나 단번에 앞으로 형님으로 모시겠다고 다짐하고 술을 올린 기억이 또렷이 새롭다.
아래 칼럼을 보고 눈물을 흘리시는 분이 있다면 나는 그 분과 형제의 예를 표하고 술 한 잔을 나누고 싶다.
***
『나의 아버지가 그렇게 됐다면...
1975년 4월9일, 선배가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
"우리 여정남 선배가 죄도 없이 억울하게 사형을 당했는데, 우리는 보고 만 있어야 하다니...." 선배는 그날 오후 학교 앞 술집에서 절규했다. 그러나 우리 후배들은 내용을 제대로 몰랐다.
늘 웃으면서도 과묵한 편인, 시를 쓰는 그 선배가 탈기한 채 울부짖던 모습은 그 후 볼 수 없었다. 그 일이 있은 뒤 학교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몇몇 후배들이 찾아봤지만 알 길이 없었다. '자살했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그 후 지금까지 그를 본 사람은 아는 이들 가운데 아무도 없다.
지난 12일 국가기관인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인혁당 사건은 중앙정보부의 조작이었다."고 공식 발표했을 때, 선배의 얼굴이 27년 만에 또렷하게 떠올랐다. 웃음을 띤 평소의 얼굴이었다.
74년 4월 중앙정보부는 "도예종 등 23명이 인혁당 재건위를 결성, 북한의 지령을 받아 민청학련을 배후조종하여 정부를 전복하고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하려 했다"고 발표했다. 이 인혁당 사건으로 23명이 구속 기소돼, 8명이 군사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사형수 대부분은 대구 경북 사람이었다.
1년 뒤인 75년 4월9일 새벽, 대법원의 확정판결 후 20여시간만에 서도원, 도예종,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우홍선, 송상진, 정남씨 등 8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됐다. 그게 조작이라니. 있지도 않은 사건을 만들어 죄 없는 8명 을 사형시키다니.... 일제시대 악질경찰과 밀정들에 의해 저질러졌을 법한 악행이 해방 30년 뒤에도 유령처럼 되살아나다니. 그것도 TK정권에서, 중 정의 TK출신이 조작에 적극 관여, 향토의 사람들을 번제물로 삼다니....
선배는 그런 거짓된 세상에 대한 환멸감, 혼자로는 감당할 수 없는 중압감, 그리고 계속 살아간다는 게 죄를 더 짓는 일이라는 죄책감에서 이승 을 떠난 것인지도 모른다. 중앙정보부의 조작이 드러난 지금 그렇게 유추 할 뿐이다.
그때는 조작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시대였고, 조작이라는 사실을 알더라도 발설할 수 없는 시대였다. 진실에 근접한 사람들도 침묵했다. 언론도 중정의 발표만 보도했을 뿐 진실 추구에는 침묵했다.
73년 10월 유신헌법 이후, 다음해 초부터 대학가에서 유신철폐 시위가 일어난다. 긴급조치 1호가 선포된다. 긴급조치에도 시위는 계속 확산된다. 정권은 정권유지 차원에서 긴급조치만으로는 모자란다고 판단, 유신 반대 투쟁의 예봉을 꺾기 위해 인혁당 사건을 조작하게 된다. 이런 분석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최근 발표 이후 일반화되고 있을 뿐이다.
인혁당 사형수들은 갖은 고문을 받는다. "내가 왜 이 자리에 서게 됐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 최후진술을 한다. "언젠간 모든 일이 밝혀질 것이다", "언젠가 이 더러운 정권은 망한다"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둔다. 그 후 유족들은 '간첩의 아내' '빨갱이의 아들'이라는 손가락질을 당한다.
작년 말 천주교 인권위원회가 인혁당사건의 진상을 추적해 펴낸 자료집의 제목은 '사법살인, 1975년 4월의 학살'이다. 그 '사법살인의 가해자인 박정희 정권, 사건을 조작한 중정의 부장과 핵심간부들, 공판조서를 허위작성한 군사법원 재판부, 피고인의 상고를 이유 없다고 기각한 대법원장 및 대법원 판사, 그들은 지난 27년 동안 어떻게 살아왔나. 이제까지 그들 중 어느 한 사람도 참회하지 않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게 부끄러운 일이다.
유족들과 인권단체의 '계란으로 바위치기'식의 부단한 노력이 이제 진실 의 실마리를 풀었다. 다시는 우리나라에 그와 같은 정치공작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진상은 규명돼야 한다. 하지만, 그동안 우리는 어떻게 해서 모르 고 지냈는지, 외면하고 있었는지도 자성해야 한다. 만약 내가, 내 남편이 ,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됐다면 어떠했겠는가. 그런 일을 당하지 않은 우리는 죄 없이 죽은 그분들을 추모하고, 우리 가까이 있는 유족들을 위로해 주어야 한다. 선배 같은 분들의 고통도 함께 기억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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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이 철폐될 때까지
우리는, 우리는
결코, 결코 4월 9일을 잊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