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4 편 아담과 이브 (줄거리)
1. 예루셈 시절의 아담과 이브
유란시아로 오려고 선택되었을 때, 아담은 이브와 함께, 예루셈의 물리 실험실에 고용되어 있었고, 1만5천 년이 넘도록 생명 수정에 적용되는 실험 부문에서 지도자였다. 또한 훨씬 전에는 예루셈에서 새로 도착한 자들을 위한 여러 시민 학교에서 선생이었다. 이 예루셈 쌍은 사타니아의 서울과 다른 곳에 자손 아들 50명과 딸 50명을 남겨 두었는데, 이 아이들은 진보의 함정을 피한 훌륭한 사람들이었고, 부모가 유란시아를 향하여 떠날 때, 관리자로서 모두 임명되었다.
2. 아담과 이브의 도착
에덴의 언어는 안돈 족속의 방언이었다. 반과 아마돈은 24 글자로 된 새 알파벳을 만들어서 이 언어를 개량했고, 아담과 이브는 예루셈을 떠나기 전에 이 방언을 통달했기 때문에, 아마돈은 새 통치자가 자기 방언으로 말을 거는 것을 들었다. 천사장들의 선포가 들렸고, 가브리엘의 방송하는 목소리가 사타니아의 606번 행성에서, 유란시아의 둘째 심판 점호, 제2 섭리 시대에, 잠자고 있던 생존자들이 부활될 것을 선포하였다. 영주의 섭리 시대는 지나갔고, 아담 시대가 열렸다.
3. 아담과 이브가 행성에 대하여 배우다
정식으로 취임하고 난 뒤에, 아담과 이브는 지구가 고립된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귀에 익었던 방송은 조용했고, 행성의 통신회로도 단절된 상태였으며, 함께 왔던 동료들도 돌아갔다. 유란시아는 반란으로 모든 것이 변해 있었다. 아담은 한 번 보고, 모든 물질 생물의 기원과 성품과 활동을 묘사하는 이름을 줄 수 있었다. 아담이 온 사타니아에서 가장 노련한 해부학자 중의 하나인 것을 사람들은 몰랐다. 이브는 똑같이 능숙했고, 아담의 능숙함과 노련함에 동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4. 첫 소동
아담과 이브의 출현은 이들에게 벅찬 일이었다. 사람마다 존경심과 숭배하는 마음으로 겸손히 절하고 엎드려서, 그 고귀한 쌍을 정오에 아버지의 성전으로 모셔오자고 함께 휩쓸렸고, 정말로 진지했다. 에덴에서는 항상 성전에서 이 일곱째 날 정오 집회를 헌정하였다. 오전에는 육체의 질적 개선, 한낮은 영적 예배, 오후는 문화에 신경을 쓰며, 저녁은 함께 기뻐하며 보냈다. 이것은 한 번도 에덴에서 법이 되지 않았지만, 아담의 행정부가 땅에서 지배하는 한, 관습이었다. 이것이 안식일 전통의 기원이었다.
5. 아담의 행정
아담은 멜기세덱들의 조언에 따라, 바깥 세계와 무역 관계를 시작하려고 공업 기술을 육성하기 시작했다. 에덴이 붕괴되었을 때, 1백 개가 넘는 원시 제조 공장이 가동하고 있었고, 가까이 있는 부족들과 널리 무역 관계가 수립되었다. 아담은 이미 여러 중대를 모두 에덴 연맹으로 연합시켰다. 그러나 동산 바깥으로 나가서 아담의 동료들이 일을 시작하는 순간에, 칼리가스티아와 달리가스티아의 저항에 부딪쳤다. 몰락한 영주는 아직도 땅에 있으면서 저항하고 있었다. 에덴 사람들 사이에서도 칼리가스티아의 가르침에 갈팡질팡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이들은 아담에게 늘 문제를 일으켰다.
6. 아담과 이브의 가정 생활
아담 가족의 집터는 12.8 평방 킬로미터가 조금 넘었다. 이 집터 둘레에서, 30만 명이 넘는 순수한 자손들을 돌보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겨우 첫째 건물 단위가 완성되었을 뿐이다. 아담손은 유란시아에서 보라 인종의 맏아들이며, 멜기세덱들이 떠나기 전에, 이브는 다섯 아이―세 아들과 두 딸―의 어머니였다. 임무의 불이행이 일어나기 전에, 딸 32명과 아들 31명을 낳았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 동산을 떠났을 때, 가족은 4대로 이루어졌고 순수 핏줄 후손은 1647명이 되었다. 동산을 떠난 뒤에 필사자와의 공동부모로서 2명을 제외하고 아이들을 42명 두었다.
7. 동산의 생활
아담의 아이들은 서쪽 학교를 4년 동안 다녔고, “에덴의 동쪽”에서 살고 일했다. 16살이 될 때까지, 예루셈 학교의 방법으로, 지적 훈련을 받았고, 16살부터 20살까지 여러 유란시아 학교에서 가르침을 받고, 거기서 낮은 학급에서 선생으로 봉사하였다. 서쪽 학교 체계의 목적은 온통 교제였다. 오전은 원예와 농업에, 오후 시간은 경쟁하는 놀이에 쓰였다. 저녁은 사회적으로 교제를 가지고 개인의 친교를 개발하는 데 이용되었다. 종교 및 성(性) 교육은 가정의 분야, 부모의 임무로 여겼다.
8. 천지 창조의 전설
유대인 사제들이 (바빌로니아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천지창조 이야기를 마쳤고, 이 이야기를 모세가 적었다고 주장했다. 모세의 가르침이라고 소문난 이 가짜 서적은 프톨레미 왕의 눈에 뜨였고,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새 도서관을 위하여 70인 학자 위원회에게 이것을 그리스어로 옮기게 하였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나중에 “성서”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신학 체계들과 동일시됨으로 오랫동안 많은 서양 민족의 철학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