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벽초경선
만공스님 법맥 잇고 선농일치 손수 실천
해뜨기 전에 나가 해지면 돌아왔던 스님이 있었다. 손수 농기구를 챙겨들고 사찰 전답(田畓)을 개간하는 일에 앞장섰던 벽초경선(碧超鏡禪, 1899~1986)스님. 덕숭총림 수덕사 방장이었지만, 단 한 차례도 법상에 오르지 않고 오직 울력만 했다. 만공(滿空)스님의 법맥을 이은 수좌로 선농일치(禪農一致)를 실천하며 후학들에게 모범을 보인 벽초스님의 생애를 덕숭총림 수좌 설정스님과 주지 옹산스님의 회고를 통해 정리했다.
만공스님 법맥 잇고 선농일치 손수 실천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자재한 삶 보여
전답 개간 ‘앞장’…황무지 옥토로 바꿔
<사진> 평생 울력을 실천하며 수행한 벽초스님. 이 사진은 덕숭총림 수덕사에 모셔져 있다.
○…‘수덕사 건설 주식회사.’ 벽초스님이 방장으로 주석할 무렵 덕숭총림 수덕사를 두고 스님들이 했던 말이다. 산사에 주식회사라는 세속 명칭이 붙은 데는 사연이 있다. 방장 스님이 손수 밭을 개간하고, 돌계단을 만드는 일에 앞장섰기에 비롯된 것이다. 어른 스님이 팔을 걷어붙이고 울력에 나서니, 대중이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노스님이 쉬지 않고 매일 일을 하는데 있었다. 몸이 고단해도 울력에 동참해야 했던 다른 스님들이 늘어놓은 ‘푸념’이다. “우리는 수덕사 건설 주식회사 직원이고, 방장스님은 그 회사의 회장님이시지.” 참선수행의 지침서라고 할 수 있는 <백장청규(百丈淸規)>에 나오는 “一日不作一日不食(일일부작일일불식, 일하지 않으면 먹지 말라)” 정신을 실천했던 벽초스님과 수덕사 대중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벽초스님은 당대 선지식인 만공스님 회상으로 출가해 정진했다. 출가후 만공스님이 원적에 들 때까지 한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때문에 벽초스님은 만공스님과 얽힌 일화가 많다. 만공스님을 모시고 만행에 나서 화두를 받을 때의 이야기다.
만공스님이 물었다.
“요즘에는 어떻게 공부하고 있느냐.”
벽초스님은 이렇게 답했다.
“눈으로는 보고, 귀로는 듣는 이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찾고 있습니다.”
제자의 답을 듣고 난 스승은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화두를 참구하도록 했다.
“너무 넝쿨이 많구나. 공부하는 법을 한 가지 일러주겠다.
너의 그 한 생각이 어디로부터 오는가를 찾아보거라.”
○…해방되기 두 해 전인 1943년 가을. 만공스님이 오대산 상원사 적멸보궁에 다녀왔을 때 거량했던 문답이 <만공법어>에 전해온다.
벽초스님이 만공스님에게 질문을 던졌다.
“스님께서는 보궁 앞에 있는 용의 콧구멍을 보셨는지요.”
만공스님이 곧바로 답했다. “그래, 봤지.”
벽초스님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러면 용의 콧구멍은 어떻습니까.”
만공스님의 답은 짧지만 명쾌했다. “식.”
〈만공법어〉에는 이 대목에 “英龍鼻裏放光(영룡비리방광)”이라고 적었다.
“영룡이 콧구멍 속에서 방광을 하네”라는 뜻이다.
○…만공스님 회상에서 정진하고, 총림 방장이었지만 벽초스님은 타인을 대할 때 언제나 하심했다. 가르침을 질문하는 이에게는 “이놈을 알라”고 답했고, 그래도 다시 물어오면 “난 그런거 잘 몰라유”라고 말했을 뿐이다. 깨달음은 밖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 스님의 가르침이었던 것이다.
○…벽초스님은 안거를 결제하거나 해제 할때는 물론이고, 방장 추대법회 당시에도 법상에 올라 법문을 하지 않았다. 또한 누군가 찾아와 3배의 예를 올리려고 하면 “그렇게 하지 말라”면서 1배만 받았다고 한다.
○…벽초스님은 만공스님의 가르침을 단 하나도 어기지 않고 철저하게 지켰다. 그와 관련된 일화가 있다. 어느 날 만공스님이 절벽 한곳을 가리키며 “저기에 조그마한 초가집 하나 지으면 참 좋겠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난 벽초스님은 곧바로 만공스님이 가리킨 절벽 위에 올라 건물을 지었다. 수덕사 큰절에서 정혜사 선방을 가는 산길에 있는 ‘소림초당’이 바로 만공스님 뜻에 따라 벽초스님이 지은 것이다.
○…벽초스님이 평생 선방 보다는 울력 현장에 있었던 이유가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만공스님의 당부 때문이다. 17세의 나이에 만공스님에게 비구계를 받던 날 “불사 많이 해야 되네”라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 스승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 벽초스님은 평생 울력과 불사에 모든 것을 던졌다.
○…어느 날 한 젊은이가 찾아와 벽초스님을 친견하고 출가의 뜻을 밝혔다. 말을 듣고 난 벽초스님은 다른 말없이 “그러면 네가 나무 아홉 짐은 하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출가하면 참선하고 경전 읽고 염불하는 것인 줄 알았던 젊은이는 순간 의아했지만, “스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하겠습니다”라고 답했다. 나무를 아홉 짐이나 하려면 얼마나 많은 힘이 들 것인가. 그만큼 수행자로서 살아가는 일은 무엇보다 인내가 필요하다는 가르침이었다.
벽초스님의 노년모습. 불교신문 자료사진
■ 어록 ■
“눈으로는 보고, 귀로는 듣는 이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찾고 있습니다.”
“스님께서는 보궁 앞에 있는 용의 콧구멍을 보셨는지요.”
“이놈을 알라 … 난 그런거 잘 몰라유”
“(나에게) 3배는 하지말고, 1배만 하세요”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이 모두 공부다”
“다시 태어나도 출가해 중이 되겠다“
“이제 가려고 하니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라”
“장례를 간단히 치르도록 하라”
■ 행장 ■
벽초스님은 1899년 충남 청양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마씨(馬氏). 10여세인 1908년 마을에 탁발 온 만공(滿空)스님에게 감화를 받아 출가 사문이 됐다. 이때 속가 부친 마정식(馬正植)선생도 함께 출가했을 만큼 불가와 인연이 깊다. 만공스님과 처음 인연이 된 장소가 청양 장곡사(長谷寺)라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만공스님 회상서 정진
보현보살의 화신 ‘별칭’
출가 후 벽초스님은 줄곧 당대 선지식인 만공스님 회상에서 정진했다. 덕숭산 수덕사 뿐 아니라 금강산, 오대산, 지리산 등에서 만공스님을 시봉하며 수행했다. 20대에는 맨손으로 늑대를 사로잡았다고 할 만큼 용력(勇力)이 대단했다. 만공스님 법맥을 이은 벽초스님은 1940년부터 1970년까지 30년 간 수덕사 주지 소임을 보며 가람을 중창하고 대중을 외호했다.
<사진> 수덕사는 지난 4월23일 덕숭총림 초대 방장 혜암스님과 2대 방장 벽초스님의 부도 제막식을 거행했다. 사진은 수덕사 부도전에 봉안된 벽초스님 부도. 이시영 충남지사장
황무지나 다름없던 사찰 전답(田畓)을 손수 개간하여 옥토(沃土)로 만들었으며, 수덕사에서 정혜사까지 이르는 1080 돌계단을 쌓는 등 선농일치를 손수 실천했다. 또한 나무 다루는 솜씨가 뛰어나 불사를 할 때면 스님 손을 빌리는 일이 많았다.
스님은 1985년 혜암스님의 뒤를 이어 덕숭총림 2대 방장에 추대되어 후학을 지도했다. 스님은 방장이 되어서도 손에서 일을 놓는 일이 없었다. 수좌들에게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이 모두 공부”라고 강조했다. 또한 스님은 평생 단 한 차례도 법상에 올라 법문을 하지 않았을 만큼 스스로를 낮추었다. 말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몸소 실천하는 행(行)으로 제자들을 가르쳐 ‘보현보살의 화신’이라는 평을 들었다.
또한 스님은 원적에 들기 몇 해 전 인터뷰를 하기 위해 찾아온 불교신문 기자에게 “다시 태어난다 해도 출가하겠다”면서 “정말 한 웃음이로구먼”이라고 80평생을 회고했다.
열반에 들기 며칠 전 스님은 시자에게 일력(日歷)을 가져오게 했다. 다섯 장을 떼어 낸 후 스님은 “이때 갈란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닷새뒤 당신이 지정한 바로 그날 원적에 들었다. 벽초스님은 1986년 5월 원적에 들었다. 입적하면서도 스님은 따로 임종게를 전하지 않았다. 오직 제자들에게 “이제 가려고 하니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라”면서“장례를 간단히 치르도록 하라”는 당부만 남겼을 뿐이다. 세수 87세, 법랍은 74세였다.
수덕사=이성수 기자
[출처 : 불교신문 2526호/ 2009년 5월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