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惡人)도 이 정도면 마땅히 지옥에 떨어져야 할 운명에 다름아닐 것이라 하겠지만, 서양의 소설 대부분이 그렇듯 막이 내릴 즈음이면 자신의 추악한 과거를 반성하고 하느님에게 귀의하는 장면이 나온다. 뭐 그런 이야기의 흐름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게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의 마지막 장면이 아닌가 한다만...사실 기독교 종교관(宗敎觀)의 근간이랄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회개(repentance)'라는 개념이고, 일찍부터 기독교의 영향 아래 형성된 서양의 사상이 문학에 반영된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지만...소설 『느릅나무 밑의 욕망(Desire under the elms)』(Eugene O'neill, 신정옥 역, 범우, 2009)에 등장하는 두 주인공의 삶 역시 이러한 흐름을 따르고 있는 듯 한데...
희곡의 전편을 아우르는 주제는 '소유의 욕망과 갈등'으로 요약된다고 하는데, 여기서 소유의 대상은 농장이라는 물적 재산과 이프레임이 후처로 데려온 애비를 둘러싼 사랑을 말한다. 이복형들이 황금을 찾아 일찌감치 서부로 떠나자 에벤은 농장이 이미 죽은 자신의 어머니가 결혼 때 가져온 재산이므로 아버지가 아닌 자신의 소유라고 생각한다. 평생 땅을 파고 가축을 기르며 일을 하면서 뼛속까지 농부인 그의 아버지가 보기엔 어림없는 주장이지만 에벤의 의지는 확고하다.
그런데 말이지, 늙은 데다 별 볼일 없는 농부인 이프레임을 남편으로 맞은 애비는 처음부터 농장을 자신의 소유로 만들려고 작정하면서 사사건건 의붓아들 에벤과 갈등한다. 하지만 문제는 엉뚱한 데서 벌어지는데, 첫눈에 애비는 젊고 잘 생긴 에벤을 사랑하고 유혹하려 한다는 것이다. 뭐 이건 외디푸스 컴플렉스도 아니고, 비숫한 나이 또래의 젊은 남녀가 보자마자 사랑에 빠져드는 격이라 하겠는데...물론 에벤은 처음엔 농장을 탐내고 죽은 어머니의 흔적을 지우려고 하는 애비의 짓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경계의 눈초리를 늦추지 않지만, 결국 둘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게 된다.
이프레임 몰래 두 사람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아기까지 갖게 된다. 가만...결과적으로 족보가 뒤죽박죽으로 뒤엉켜 버리는구만. 에벤이 보기에 애비는 어머니이자 아내요, 아기는 동생인 동시에 아들이 되는 것이다. 물론 이프레임은 아기가 자기 자식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고...하지만 에벤은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아기에 대한 사랑과 양심의 가책 사이에 갈등하면서 마침내 애비의 곁을 떠나려 한다. 끝까지 에벤을 잃지 않으려는 애비는 아기 때문에 에벤이 자기를 떠나려 한다는 생각에 아기를 질식시켜 죽여 버린다. 갈 데까지 간 모양새이니 이후 이야기가 어디로 전개될지 가늠이 되지 않을 정도인데...
아기의 죽음에 에벤은 보안관을 찾아가 애비가 살인자라고 신고하자 보안관 일행이 애비를 체포하려고 들이닥친다. 이때 에벤이 앞에 나서서 애비뿐만 아니라 자기 역시 아기를 죽인 범인이라고 말한다. 애비가 자신이 단독으로 저지른 범죄라고 극구 주장하지만 에벤은 주장을 굽히지 않는 것으로 막이 내린다. 희곡에서 에벤과 애비가 저지른 행위로 보면 악인으로 손가락질 받아 마땅하지만 종국에 이르러 두 사람은 사랑의 진실을 깨우치고 함께 기꺼이 벌을 받고자 한다. 무릇 세상사에서 사랑이란 잣대를 들이대면 인간의 어떤 행위에도 손바닥만한 크기의 용서의 자리는 남아 있으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