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상’에 대한 소고(11)
‘선(jhāna)’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
<원시불교의 ‘선사상’>과 <대승불교의 ‘선사상’>이 만나는 곳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
<‘안으로(ajjhattaṃ)’와 ‘밖으로(bahiddhā)’>와 <조주스님의 ‘평상심’>을
비교해 보는 것이 가장 빠르겠다. ........라고 ‘아위자’가 생각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둘은 ‘같은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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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jhāna)’은 <‘안으로(ajjhattaṃ)’에만 머물고 있으면>
‘선(jhāna)’이 아닙니다. <기와를 갈아서 거울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
<‘안으로(ajjhattaṃ)’에만 머물고 있는 것>이고, <마구니 소굴에서
꼴값 떨고 있는 것>입니다. <正定(올바른 三昧)>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왜 그러한가? ........를 ....... <원시불교식>으로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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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요자나를 보시면, 쌍요자나는 <‘안으로’의 쌍요자나(ajjhatta-saṁyojana)>와
<‘밖으로’의 쌍요자나(bahiddhā-saṁyojana)>로 구분되기도 합니다.
관련 경문이 <Aṅguttara Nikāya 제1권 63페이지 22번째 줄에서부터 65페이지 31번째 줄까지> 언급되는데요, 경문에 의하면, <‘안으로’의 쌍요자나(ajjhatta-saṁyojana)에 묶이어 있는 자(=오하분결과 오상분결에 모두 묶여 있는 자)>는 ‘[욕계로 반듯이]다시 돌아오는 자’이고, <‘밖으로’의 쌍요자나(bahiddhā-saṁyojana)에 묶이어 있는 자>는 ‘[욕계로는]다시 돌아오지 않는 자’[=색계나 무색계에 태어나는 자]입니다.
엄청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잘못 이해하면 <반대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쌍요자나에서는 반듯이 <쌍요자나의 대상이 되는 ‘法(dhamma)’>만을 ‘法(dhamma)’이라고 부릅니다.[☜다른 것들도 당연히 ‘法’이지만 반듯이 그렇게만 부른다는 말] 그래서,
<‘안으로’의 쌍요자나(ajjhatta-saṁyojana)에 묶이어 있는 자>는
<탐진치라는 ‘法(dhamma)’에 쌍요자나 되어 있는 자>를 말합니다. 그리고,
<‘밖으로’의 쌍요자나(bahiddhā-saṁyojana)에 묶이어 있는 자>는
<명색이라는 ‘法(dhamma)’에 쌍요자나 되어 있는 자>를 말합니다.
구조적으로 표시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心←욕탐→탐진치라는 ‘法(dhamma)’>에 쌍요자나 되어 있는 것과,
<心←욕탐→명색이라는 ‘法(dhamma)’>에 쌍요자나 되어 있는 것과의
‘결과론적 차이’가 앞서와 같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탐진치라는 ‘法(dhamma)’에 쌍요자나 되어 있는 자>는 사실 ‘보통사람’입니다.
그러나 <명색이라는 ‘法(dhamma)’에 쌍요자나 되어 있는 자>는 ‘禪師’입니다.
‘선(jhāna)’은 <‘안으로(ajjhattaṃ)’에만 머물고 있으면> ‘선(jhāna)’이 아닙니다.
그러한 것은 ‘좌선’이라고 부르는 것인데요, 아직 아무것도 해결하시지
못하신 분입니다. 心이 명색에 쌍요자나 되어 있다는 것은, <欲貪>을 제외하고는 心에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이 ‘명색’이라는 말씀이거든요. 놀라운 수행자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 말은 ‘서현희 박사님’이외에는[☜제가 아는 범위에서] 이해하시기가
어려우실 것입니다. 이미 심해탈은 하신 분이어야만 가능한 것이
<명색이라는 ‘法(dhamma)’에 쌍요자나 되어 있는 자>입니다.
<心(citta)과 有身見[☜’有身(=오취온)‘이 아님]과의 관계>를 설하는 경문을 인용해 봅니다.
… 有身見에 사로잡히고 정복당한 心(citta)으로 머물면서, 이미 생겨난 有身見으로부터 벗어남(出離)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그러한 有身見이 굳어지고 제거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그에게 五下分結이다.
… sakkāyadiṭṭhipariyuṭṭhitena cetasā viharati sakkāyadiṭṭhiparetena, uppannāya ca sakkāyadiṭṭhiyā nissaraṇaṃ yathābhūtaṃ na ppajānāti; tassa sā sakkāyadiṭṭhi thāmagatā appaṭivinītā orambhāgiyaṃ saṃyojanaṃ.[MN. vol.1. p.433]
心(citta)과 ‘그 어떤 法(dhamma)’의 관련성이 언급되면, 이유 불문하고 그것은 <쌍요자나>에 대한 말씀입니다. 아니면 <‘선(jhāna)’에서의 상황>인 것입니다. 같은 상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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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띠(sati, 念), 반야(paññā, 慧), 평정(upekhā, 捨)>의 ‘셋’은 공통적으로 ‘法(dhamma)’에 대한 <사띠(sati, 念)와 반야(paññā, 慧)와 평정(upekhā, 捨)이> 언급됩니다.
Yad api bhikkhave ajjhattaṃ dhammesu sati tad api satisambojjhaṅgo, yad api bahiddhā dhammesu sati tad api satisambojjhaṅgo. Satisambojjhago ti iti hidaṃ uddesaṃ āgacchati, tad aminā petaṃ pariyāyena dvayaṃ hoti.
비구들이여, 안으로(ajjhattaṃ) 法(dhamma)들에 관한 사띠(sati)도 念覺支이고, 밖으로(bahiddhā) 法(dhamma)들에 관한 사띠도 念覺支이다. 念覺支는 이러한 설명에 이르러, 이 방법에 의해 두 겹(dvaya)이 된다.
Yad api bhikkhave ajjhattaṃ dhammesu paññāya pavicinati pavicarati parivīmaṃsam āpajjati tad api dhammavicayasambojjhaṅgo. Yad api bahiddhā dhammesu paññāya pavicanati pavicarati parivīmaṃsam āpajjati tad api dhammavicayasambojjhaṅgo. Dhammavicayasambojjhago ti iti hidaṃ uddesaṃ āgacchati, tad aminā petaṃ pariyāyena dvayaṃ hoti.
비구들이여, 안으로(ajjhattaṃ) 法(dhamma)들에 대해 반야(paññā)로써 ‘조사하고, 고찰하고, 두루 성찰함에 도달하는 것’ 그것도 擇法覺支이고, 밖으로(bahiddhā) 法(dhamma)들에 대해 반야(paññā)로써 ‘조사하고, 고찰하고, 두루 성찰함에 도달하는 것’ 그것도 擇法覺支이다. 擇法覺支는 이러한 설명에 이르러, 이 방법에 의해 두 겹(dvaya)이 된다.
Yad api bhikkhave ajjhattaṃ dhammesu upekhā tad api upekhāsambojjhaṅgo, yad api bahiddhā dhammesu upekhā tad api upekhāsambojjhaṅgo. Upekhāsambojjhago ti iti hidaṃ uddesaṃ āgacchati, tad aminā petaṃ pariyāyena dvayaṃ hoti.[SN. vol.5. pp.110~111]
비구들이여, 안으로(ajjhattaṃ) 法(dhamma)들에 관한 평정(upekhā)도 捨覺支이고, 밖으로(bahiddhā) 法(dhamma)들에 관한 평정(upekhā)도 捨覺支이다. 捨覺支는 이러한 설명에 이르러, 이 방법에 의해 두 겹(dvaya)이 된다.
위 경문에서 <안으로(ajjhattaṃ) 法(dhamma)들>이란 ‘안으로’라는 영역에 위치해 있는 法(dhamma)들을 의미하며 <탐진치>를 지칭하는 표현이고, <밖으로(bahiddhā) 法(dhamma)들>이란 ‘안으로’라는 영역에 위치해 있는 法(dhamma)들을 의미하며 <명색>을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두 겹(dvaya)’이라는 표현는 ‘포개어져 있는 상태, 겹쳐져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데요, <상호 관련성이 있는 것들>이라고 보아도 무방하고 <연기관계에 있는 것들>입니다. 즉 <法(dhamma)과 法(dhamma)>이 ‘분리되지 않고[=無縫塔처럼]’, 양자역학에서 전자들이 <관찰자의 ‘관찰’에 따라> 동시에 두 장소에 위치하는 것처럼 그렇다고 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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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조주스님의 ‘평상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平常心是道라는 말씀은 ....... 밖으로(bahiddhā)도 ‘그저 그렇다’라는 것으로
“차 한 잔 하게.”라는 말씀의 다른 표현인데요, <평정(upekhā, 捨) 상태>에서
밖으로(bahiddhā)의 것들을[=명색들을] 표현하신 말씀으로 저는 이해합니다.
소란스러운 ‘일상생활’ 속에서 三昧에 들어 계신 모습인데요. 凡人의 삼매가 아닙니다. 부처님의 삼매인데요, <삼매 속에서의 ‘앎(ñāṇa, 智)’>을 <‘현실’의 일상생활 속에서> 실천하시는 상황입니다. 그것을 ‘요중공부’라고 하는데요, 한글로는 알겠는데 한자로는 ‘진흙 淖’를 쓰는 건지 ‘떠들 譊’를 쓰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하여간 그러한 것이 ‘선(jhāna)’이고 平常心是道라는 말씀.
안으로(ajjhattaṃ)든 밖으로(bahiddhā)든 <안팎이 一如>가 되어야 ‘선(jhāna)’이라는 관점에서는 <대승불교나 원시불교나> 같은 말씀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저는 ‘대승불교도’입니다만, ‘대승불교’에는 웃기는 코미디들이 엄청 썩여있어서 <정말 웃기는 측면>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지만 그러한 <모습>에 속아서는 ‘진면목’을 보시기 어려워집니다. 대승의 <一心 二門>인 ‘유전문과 환멸문’의 <一如>를 보셔야만 ‘앎과 봄(ñāṇa-dassana, 智見)’이라는 것이 <왜 ‘열반의 조건’에서 가장 마지막 조건인가?>를 이해하시게 되신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앎과 봄(ñāṇa-dassana, 智見)’이 ‘있으면(有)’> 그로부터 명(vijjā)이 시작되고,
<‘앎과 봄(ñāṇa-dassana, 智見)’이 ‘없으면(無)’> 그로부터 무명(avijjā)이 시작 됩니다.
‘유전문과 환멸문’의 갈림길이라는 것인데요, 心에 그러한 것들이 생겨나는 것이거든요.
<解脫智見(ñāṇadassana)蘊>이라는 <해탈에 대한 ‘앎과 봄(ñāṇa-dassana, 智見)’의 쌓임>이란
진짜 위빠사나인 것입니다. 위빠사나가 <왜 ‘앎(ñāṇa)’을 강조하고, 왜 ‘봄(dassana, 見)’에 관련되는가?>를 이해하신다면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法(dhamma)념처의 ‘法(dhamma)수관’인
<오개—오취온—육내외입처—칠각지—사성제>에서
‘오개와 칠각지’는 ‘앎과 봄(ñāṇa-dassana, 智見)’에 관련된 것이고,
‘오취온과 육내외입처’는 <모두 ‘명색’>으로서 ‘밖으로(bahiddhā)의 것들’입니다.
<반야>와 관련된 것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사성제’는
<원시불교 최고수준의 ‘반야’>입니다.
첫댓글 <안에서 세던 바가지는 밖에서도 셉니다>, <안에서 세지 안던 바가지가 밖에서 셀 턱이 없지요>
안에 없는 것은 밖에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안 살림살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禪師님들은 강조하십니다.
'안 살림살이'가 엉망인 사람이 <밖으로 '그럴듯한 행동'>을 하는 것은 '위선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자들을 <귀신 같이> 알아 보는 염라대왕이라는 말이고, <티벳 사자의 서>가 그 말을 하는 것입니다.
밖으로 <그저 그러하신 분들>....... 그저 오셨다가 공부하시고 가시는 분들 ........
있는 그대로 오셨다가 가시는 분들......... 커피 한 잔 조용히 마시고 가시는 분들..........은
<조주스님의 '차 한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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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죽는다고 온 동네 떠들고 지랄발광이는 발광은 다 떨고 가시는 분들도
<조주스님의 '차 한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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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새로운 커피숍 생겼소? 하시는 분도
<조주스님의 '차 한 잔'>!
삭제된 댓글 입니다.
<識이 의존하고 있는 모든 것>
명색=삼계, 오온, 현실세계, 우주,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 산, 물,
명이란 <수, 상, 사, 촉, 작의>이고 색이란 <사대와 사대소조>.
명색이란 <심의식의 관점에서 볼 때, 그러하다는 것>임.
<심의식의 입장>에서는 <법(dhamma)>과 <명색> 뿐임.
그러할 때, <법(dhamma)>이 <심의식의 고짜라>라는 말.
즉, 지옥도 <명색>이고 <심의식의 관점에서는 '法'>임.
<명색>은 '밖으로(바히다)'라는 영역에 위치하고 있음.
<심의식의 고짜라> '밖'이라는 말.
오직 <心>의 입장에서만 보면 <육내입처(=안이비설신,意)>가 <명색>이고 '밖으로'임.
<三昧나 쌍요자나>는 <오직 '心'의 관점>에서만 이야기 하는 것임.
@歡喜奉行 <식과 명색의 관계>는 .............. 불교학자분들의 논문이 많이 도움이 될 것임.
<서로 의지해서(=기대어) 있는 관계>인데.......<심의식의 고짜라 '밖으로' 위치해 있는 것>이기 때문.
@아위자 그런데......... 우리는 지금 <명색(=오온)>에 들어와 있거든..........
그래서 <유대촉>을 겪어야 하는 상황인 것임. 일종의 <지옥>에 들어와 있는 거지.
조심스럽게 이야기 하지 말고 까놓고 이야기 하면 .... 지금 <지옥>에 있는겨!
이 삼계는 <스펙트럼>이 묘해서 '지옥'의 관점에서 보면 '모두 지옥'임. 일체개고!
@아위자 ㅋㅋ. <공부 좀 빡시게 하라는 것임>! ......... 지옥은 아무나 오나?
실력이... 감당할 실력이 되어야 오는겨! ........ 무색계 애들은 <상상만 해도 '무서워서' 못 오고 벌벌 떨어> ㅋㅋㅋ ... 우리야 이 얼마나 <용감한 용사들>인지....ㅎㅎ....... 공부하려면 이 정도 배짱은 있어야 하거든!
@아위자 이 삼계는 그 어느 곳이든 간에 <본인이 원하지 않는데도> 배치되는 경우가 없어요.
그런 강제는 없다는 말. 그래서 <무한자비문중>이라고 하는겨.
@아위자 오온을 잘 보라구. <色界, 수계, 상계, 행계, 식계>거든!
거기에 <욕탐>하면? ㅎㅎㅎㅎㅎㅎㅎㅎ <삼계>지? 안 그려? 우리가 모두 지니고 있는겨.
그래서 <오온>을 떠나면, 그것이 바로 <삼계>를 떠난것임.
삭제된 댓글 입니다.
12연기에서 <행(들)>이 아닌 것이 무엇임?
그리고, <탐진치>는 '안으로'라는 영역에 위치해 있다고 되어 있어.
그래서 제거가 힘든 것임. 그리고 <명색>은 <'밖으로' 명색>이라고 설해짐.
안팎을 구분하여, <올바른 三昧>란 반듯이 '안으로'라는 영역에서의 三昧여야 됨.
실수실참에 관련된 이야기들은 <좀 무리>일텐데.
머리로만 이해하기에는 만만치 않거든.
@歡喜奉行 허허~~~~~~~~~~ <공부할 '대상'을>.... 공부하는 분위기를 조성할 생각은 안 하고........
'해결사처럼' 행동하네...... 학교 다 부수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건만.
일단 공부부터 하고.......... 졸업하고나서는 <맘대로 하든지 말든지>!
@歡喜奉行 <명색>인 '안이비설신意'를 잘 보면 '거기에' <意(manas)>가 이미 들어와 있자너!
그렇지만 '그 意'는 <자신의 고짜라>인 <法>을 별도로 가지고 있지? 그렇지?
아무때고 간에 <고짜라 들고 '튀면'> 그만인겨! ....... 그것이 바로 <자나(禪)>에 들면, 귀신도 못 찾고 빠삐만도 못 찾는 이유여.
@歡喜奉行 거기가 안전하기는 안전한 곳인데.........그렇게 도망만 다니려면 <뭐하러 학교(=삼계)에 오는것>임?
항구에 메어 있는 배는 <안전하지>만, 배를 항구에 폼으로 메어 놓으려고 짓나?
@아위자 <삼계윤회>는 다 <반야>를 얻으려고 '생고생'하는 것이라니까.........
사서 일부러 하는 고생인데........ '苦'라는 현찰 지불하면서 하는 '생판 생고생'여!
어느 놈은 <학교(=삼계)> 다니고 싶어서 다니나? 당연히 마구 놀고 싶지만......... 열반(=졸업)하려면..... 다니는 수 밖에........ 열반(=졸업)해서 마음대로 놀라구.
@아위자 아니면......... 무색계로 가서 <약 일억년> 놀다가 오라구. 좀 쉬면서........ 신청혀!
부처님이 그 정도 안 들어 줄 것 같에?
@아위자 부처님 좀 <꽉 ~~ 믿어>! 그 양반 마음씨 좋기로는 소문난 분이셔...........
<자비희사 '사무량심'>으로 넘치는 분임. 중생들 울리는 사기치시는 분이 아님. 협박도 안 하심.
염화미소로 유명한 분이심.
@아위자 <빈자일등>에 감격하시는 분임. 진실됨이 곧 <자비희사>거든. 무량심이고.
@아위자 주리반특 스님도, 물고기들도, 새들도, 환희봉행도, 연쇠살인범도, 히틀러도 ......... 다 챙기시는 분인데.......... '아위자'만 빼 놓고 ........ <자비희사>가 뭐여? ........
모든 중생들이 다 자신만 <빼 놓은 것 같다>고 아우성!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아위자 이 세상에서[=삼계에서] 가장 힘든 것은 <진실됨>임. 불가사의 해탈경계가 바로 <진실>!
@아위자 주리반특 스님 정도 <진실 되신 분>은 이 '삼계'에 그냥 놀러 오신 것임.
더 이상 무엇을 배울 것이 있었겠느냐만. 부처님 계시니까 놀러 오신 분 같음.
다쌍가의 '계정혜'를 요약하면 <진실>이거든.
@아위자 힘든겨. 힘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