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차 전북 부안/고창 일원(2005. 5. 28~29)
1. 부안 동/서문안 당산 2. 부안 매창시비 3. 부안 개암사
4. 부안 구암리 고인돌 5. 변산 격포 낙조 6. 변산 모항
7. 변산 내소사 8. 부안 우동리 당산 9. 고창읍성
10. 고창 상갑리 고인돌군 11. 고창 도산리 고인돌

1. 부안 동/서문안 당산/ 2. 매창시비 영상자료
1. 부안 동/서문안 당산과 장승
ㅇ 서문안 당산과 장승 사진자료

당산이란 마을의 수호신이 깃들여 살고 있는 것으로 믿어지는 일정한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며 동시에 당산신의 신체(身體)를 총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대개는 오래 묵은 나무가 신체가 되는 경우가 많지만, 솟대, 돌기둥, 장승, 마을 뒤의 숲이 신체가 되기도 한다. 삼한 시대의 소도와 천신제가 오늘날 호남 지방의 당산과 당산제로 이어지는 것으로 여겨진다. 당산은 마을의 안태길복(安太吉福)과 재액병마(災厄病魔)를 맡은 신이 사는 곳이며, 당산신을 잘 받드느냐에 따라 그 마을 사람들의 길흉화복이 달라진다고 믿어지는 만큼 예로부터 마을 사람들의 공동 신앙적 구심이 되어왔다.

중요민속자료 제18호로 지정되어있는 서문안 당산은 부안 군청에서 서쪽으로 약 100m 떨어진 원불교당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는 할아버지 당산과 할머니 당산이 찻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었는데, 관리를 위해 할머니 당산이 있는 곳으로 모아놓았다고 한다. 그래서 돌솟대 두 기와 돌장승 두 개가 한 줄로 늘어서있다. 서문안 당산은 부안 읍내 당산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어른신인 산신적 성격을 띠어서 마을 공동의 축원 외에 개인적 소원을 비는 일은 금지되어왔다.


할아버지 당산은 반석 위에 높다란 돌기둥(3.78m)이 서있고 그 위에 오리가 서쪽을 향하여 앉은 모습이다. 기둥에는 희미하나마 조선 숙종 15년(1689)에 마을 사람들의 발원과 읍내 지주들의 시주로 건립했다는 명문이 있으며, 반석에는 여러 개의 홈이 파여 있다. 길다란 기둥에 오리로 표현되는 솟대의 모습은 예전부터 여러 지역에서 신과 인간의 매개체로 여겨져왔다.
할머니 당산(2.08m)은 할아버지 당산과 같은 해에 건립되었다. 본래는 할아버지 당산과 같은 모습이었지만 중동이 부러져서 입석처럼 보인다. 없어진 오리대신 윗부분에 오리모양이 음각되어 있다.





이 곳의 남녀장승의 모습은 매우 특이하다. 할아버지 장승은 높이 2.2m로 머리에 망건을 썼고, 다른 곳의 장승과 달리 상원주장군이라는 글귀가 몸통 앞이 아니라 왼쪽에 새겨져 있다. 수염 끝이 왼쪽으로 구부러진 것으로 보아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린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높이 2.1m되는 할머니 장승의 몸에는 하원당장군이라는 글귀가 새겨져있다. 두 장승의 얼굴은 두 볼이 처질만큼 통통하다. 그래서 잡귀를 물리치는 무서운 얼굴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을 향해 호물호물 웃고 있는 듯이 보인다.







ㅇ 동문안 당산 사진자료



몸에 상원주장군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할아버지 장승은 높이 1.67m로 제주도 돌하루방과 비슷한 모습으로 벙거지를 쓰고 있다. 염소 수염에 퉁방울눈을 굴리며 으름장을 놓는 표정이긴 하지만 웃음기를 확인할 수 있다. 할머니 장승에는 하원당장군이라는 글귀가 새겨져있고 높이는 2.26m이다.
마을 앞에 얼씬대는 잡귀들을 물리치려는 듯이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이빨까지 드러냈지만, 역시 살짝 웃음기를 내보이고 있다. 이 지역에서는 장승을 벅수라고도 한다.






중요민속자료 19호로 지정된 동문안 당산은 부안에서 김제로 빠지는 길, 부안 읍내가 끝나는 부안읍 동중리 길에 있다. 돌솟대 한 기와 돌장승 한 쌍 그리고 당산나무 한 그루가 서있다.
동문안 당산의 주신으로 그 자체가 당산이라 불리며, 꼭대기에는 통통한 돌오리 한 마리가 서북쪽을 향해 앉아 있다. 오리와 기둥 사이에 각각 요철 홈을 파서 끼워 얹은 것이다. 돌기둥에는 지난번 당산제 때 줄다리기에 썼던 굵은 동아줄을 감아놓는데 감는 도중에 줄이 땅에 닿아서는 안된다. 줄의 길이가 기둥에 딱 맞으면 그 해에는 풍년이 든다고 한다. 돌솟대의 높이는 3.2m, 오리 길이는 59cm이다.


2. 부안 매창시비 사진자료

[공원 중턱 문예공원에 서 있는 매창시비]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나를 생각는가
천리(千里)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도다'
봄날 하얀배꽃이 질 때는 눈이 내리는 것 같다. 부안의 시기(詩妓) 매창(梅窓ㆍ1513~1550)은 흩날리는 배꽃을 보고 ‘이화우(梨花雨)’라고 불렀다. 그의 마음에 눈물비가 내리고 있었던 탓이다. 연인을 떠나보낸 날에 지는 배꽃은 그에게 애처로운 빗줄기로 보였으리라.
번잡스런 도시 모양을 닮아가는 부안을 감싸안은 성황산이 눈에 들어온다. 성황산 기슭의 서림(西林)공원은 매창의 시비가 자리한 곳이다. 매창 시비는 1974년 이 고장 태생인 문필가 김태수(金泰秀ㆍ작고)가 세운 것이다. 앞부분에 매창이 남긴 유일한 시조인 ‘이화우’를 새겼고, 뒷부분에는 매창의 행적을 기록했다.
시비 위쪽에는 매창이 앉아 거문고를 타곤 했다는 바위 ‘금대(琴臺)’가 있다. 주변의 너럭바위들은 오래전 이 고장의 현감, 시인들이 각명해 놓은 시구로 가득하다. 이곳은 매창과 시인들이 시회(詩會)를 열었던 장소이다. 매창 시비를 세운 김태수의 아들인 김민성(金民星ㆍ74) 부안문화원장은 “지금 이곳에선 매년 노인들이 모여 전국 시조회를 개최하고, 초중고교생들이 ‘매창 백일장’을 열고있다”고 전했다.


매창은 1513년 부안현리 이양종(李陽從)의 서녀로 태어나 1550년 37세로 세상을 떠났다. 본명은 향금(香今)이며, 자는 천향(天香), 호는 매창·계생(桂生)·계랑(桂娘)이다. 시조와 한시를 비롯하여 가무와 탄금(거문고나 가야금을 탐)에 이르기까지 다재다능한 부안의 명기로서, 개성의 황진이와 더불어 조선 명기의 쌍벽을 이루었다.
"이화우" 시는 고교 국어교과서에 실려있다. 이 시는 매창이 19세 되던 해에 만난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과 멀어진 뒤 지은 작품이다. 촌은은 천민 출신이지만 청절(淸絶)한 시문(詩文)으로 이름을 날렸던 인물.
1532년 부안에 내려온 그는 명기 매창을 만나게 된다. 용모는 뛰어나지 않았지만 한시와 거문고에 능하고 성품이 바른 매창을 가까이 하면서 촌은은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파계했다"(‘촌은집ㆍ村隱集’).
깊은 정분을 나누었던 두 사람은 그러나 2년 뒤 촌은이 한양으로 올라가면서 헤어지게 된다. 사랑하는 님과 이별한 뒤 매창은 고통스런 심정을 시조와 한시로 달랬다. 후세 사람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것은‘가곡원류(歌曲源流)’에 남겨진 한글 시조‘이화우’이지만, 그가 남긴 글은‘이화우’한 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한시다.
이별의 아픔을 노래한‘억석(憶昔)’이 그 하나이다.
‘임 귀양살이 간 것은 임진, 계사였어라/ 이 몸의 시름과 한을 뉘와 더불어 풀었으리/ 호올로 거문고 끼고 고란곡을 뜯으면서/ 구슬픈 마음으로 삼청 세계 계실 그대를 그려보네’
謫下當時壬癸辰
此生愁恨興誰伸
謠琴獨彈孤鸞曲
悵望三淸億玉人
(이하 역문은 崔榮伊의 ‘매창 문학 연구’를 따름)
기생으로서는 이미 늙은 나이인 28세에 매창은 허균(許筠)을 만났다. 허균은 전국 방방곡곡을 기생들과 함께 돌아다니는 난봉꾼이었지만 매창의 한시와 노래, 거문고에 반해 10년 동안‘정신적인’교분을 나눴다. 그는 매창의 재주를 사랑했고, 절조 높은 뜻을 헤아려 오랫동안 시들지 않는 관계를 유지했다. 매창의 말년 시 세계가 도선 사상에 가까워진 것도 허균의 권유에 힘입은 바 크다.
‘증우인(贈友人)’이라는 시에서 매창은 허망한 이승 생활에 집착하지 않고 초월적인 선계(仙界)를 지향하는 태도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술병 속의 세월은 차고 기울지 않았지만/ 속세의 청춘은 젊음도 잠시일세/ 후일 상제께로 돌아가거든/ 옥황 앞에 맹세하고 그대와 살리라’
壺中歲月無盈缺
塵世靑春負小年
他日若爲歸紫府
請君謨我玉皇前


한평생 부안을 떠나지 않은 매창은 말년에 이르러 외로움과 눈물로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한시로 노래하곤했다.
‘독수공방 외로워 병든 이몸이/ 굶고 떨며 사십년 길기도 하지/ 인생을 살아야 얼마나 사는가/ 가슴 서글퍼 하루도 안 운적 없네’
空閨養拙炳餘身
長任飢寒四十春
借間人生能幾許
胸懷無日不沾巾
기생의 운명이 그러하다. 유난히 섬세한 감정을 타고 났지만 신분의 제약이 그의 운신(運身)을 옭아맸다. 정들만 하면 떠나고 마음 붙일만 하면 헤어지는 이별을 받아들여야 했다. 마음의 고독과 육신의 질병에 시달리던 매창은 37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1668년 부안에서 가장 큰 절인 개암사(開岩寺)에서 매창을 기리며 ‘매창집(梅窓集)’을 발간해 그의 한시 57수를 후대에 전하게 됐다.
부안 사람들이 매창에게 갖는 정은 각별하다. 백발 노인부터 나이어린 꼬마들까지 ‘매창 할머니’라고 부르며 매창의 한시를 읊는다.




[매창 무덤은 탐방일정에 쫒겨 직접 가보지 못하고 아래 두장을 다른 사진으로 대신했다.]

부안읍에서 주산면 쪽으로 2㎞쯤 가다 보면 오리현 아라지 방죽 곁에 매창공원이 있다. 매창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부안 사람들은 이 무덤이 있는 곳을 ‘매창뜸’이라고 부른다. 매창이 죽은 뒤 45년 만인 1655년 무덤 앞에 작은 돌비석이 세워졌다. 매창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나무꾼과 농사꾼 같은 보통 사람들이 세운 것이다.
매창뜸을 지나가는 사람들도 누구라 할 것 없이 해마다 서로 벌초를 하며 매창이 누운 자리를 다듬었다. 그만큼 부안사람들이 매창의 거문고와 시를 사랑하고 아낀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