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물 한 컵 마셔도 돼요?
윤승원 충남지방경찰청 정보과
소년은 오후 두 시만 되면 어김없이 나타났다. 석간신문이지만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사무실에는 배달 시간이 비교적 빠른 편이다.
내가 근무하는 청사는 5층 건물인데, 소년이 그 많은 신문을 다 들고 다닐 수 없으므로, 한 다발은 1층 계단에 놓고 또 한 다발은 3층 계단에 놓은 다음, 필요한 만큼 옆구리에 끼고 다니면서 각 사무실에 배달하게 된다.
신문 배달은 뭐니뭐니해도 신속과 정확성이다. 독자는 매일같이 신문을 받아 보는 시간이 일정하게 길들여져 있으므로, 제 시간에 늦지 않도록 배달해 주어야 하고, 또한 한 사람의 독자도 빠짐없이 돌려야 하는 게 배달 소년의 책무다.
그러나 처음 배달을 시작한 소년은 곧잘 배달 사고를 내기 때문에 구독자들로부터 불만의 소리도 듣게 된다. 그러한 착오는 모든 분야가 다 그렇듯 숙달되기 전까지 거쳐야 할 하나의 단계가 아닌가 한다.
내가 근무하는 사무실에 신문을 배달하는 소년도 처음엔 실수가 많았다. 신속히 배달하는 것만이 요령인줄 알고 급히 서두르다가 빼먹기 일쑤였다. 그래도 독자들은 가급적 핀잔을 삼간다.
어린 소년의 남다른 각오와 의지력, 그리고 꿋꿋한 마음으로 자립해 보려는 그 정신이 갸륵해 보이기 때문이다.
배달 소년들이 웬만큼 숙달이 되면 사무실 문을 열고 닫는 시간을 단축하기 위하여 뛰어 가면서 신문을 복도 바닥에 떨어뜨려 놓고 신발 끝으로 톡 찬다.
그러면 문틈 사이로 정확히 투입되는데, 우리 사무실에 신문을 배달하는 소년은 이런 방법을 쓰지 않았다. 사무실 문이 닫혀 있으면 모르되, 실내에 근무자가 있으면 발로 차 넣는 법이 없다.
문을 열고 신문을 책상 위에 공손히 놓고 나가면서 꼭 "안녕히 계세요." 라고 인사를 했다. 그러면 직원들은 이구동성으로 "수고했어요."라고 인사를 받아 주었다.
시간은 다소 지체되지만 그래도 소년에게는 따뜻한 인사 한 마디가 큰 힘이 되는 모양이다. '신문 사절'이라는데 왜 자꾸만 넣느냐고 핀잔하는 사람도 많은데, 그에 비하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소년이 신문을 놓고 나가면서 멈칫 멈칫하더니, "물 한 컵 마셔도 돼요.?" 하고 묻는 것이었다. 그러자, 직원들이 여기저기서 말했다.
"그래라, 얼마든지 마시렴."
물을 따라 마시는 소년의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을 보면서 얼마나 힘이 들면 저런 갈증을 느낄까 싶어 참으로 딱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소년이 유독 우리 사무실에 들러 물을 따라 마시는 까닭이 무엇일까? 그것도 벌써 여러 날 째.
다른 사무실보다 인사를 받아 주는 직원들이 많아서일까? 아니면 물 주전자가 눈에 잘 띄는 곳에 있어서일까?
어쨌든, 소년이 물을 따라 마시는 모습이 나는 보기 좋았다. 소년이 다른 사무실 보다 우리 사무실 직원들을 편안하게 느꼈다면 얼마나 고맙고 다행스런 일인가.
그런데 소년이 연일 물을 따라 마시고 나가는 모습을 보고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다.
"조 녀석들 말야, 포장마차에서 쏘주 한 잔씩 걸치고 다닌다구, 그러니까 목이 탈 수밖에…"
고참 형사 특유의 예리한 직관력이라 생각되었다. 나는 그 말을 들은 뒤부터 소년이 미워지기 시작했다.
신문을 배달하는 것은 가상하다마는, 그 돈이 어떤 돈인데 술을 마시는가! 아니, 그 보다도 학업을 하는 녀석이 자세가 틀렸잖아. 싹수가 애초에 글러 먹은 놈이야!
나는 아예 삐뚤어진 불량 소년쯤으로 단정해 버렸다. 이젠 녀석이 물을 따라 마시고 나가는 모습이 왠지 밉게만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녀석에게 접근했다. 술 냄새를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러나 녀석에게서 술 냄새는 풍기지 않았다. 뛰어 다녀서 그런지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지만, 그것을 주기(酒氣)로 보기는 어려웠다. 나는 녀석에게 물었다.
"몇 학년이냐?" "고 1이예요." "점심은 먹었니?" "………"
끝의 질문에 대하여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쓱 문지르며 보리차만 한 컵 들이키곤 휭 나가 버렸다. 그 뒤로 나는 바쁜 일과에 파묻혀 소년에 대하여 별다른 관심 없이 지냈다. 그런데 얼마 후, 배달 소년이 바뀐 것을 알게 되었다.
'녀석이 사고라도 친 게로군!'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새로 배달을 시작한 소년에게 녀석의 안부를 물었다. 아니, 안부라기보다 녀석의 평소 품행에 대하여 알고 싶었다. 그러자 배달 소년은 이렇게 말했다.
"이사 갔어요."
얘기를 듣고 보니, 그 소년은 부모 없이 할머니와 두 동생을 보살피는 '소년 가장'이었다고 한다. 낮 12시경 보급소에 나가 신문을 챙겨 가지고 나오면 점심을 굶는 날이 많았다고 한다.
'아, 그랬었구나!'
점심을 먹었느냐는 나의 물음에 아무 말 없이 나가던 소년의 얼굴이 떠올랐다. '갈증'과 '허기'를 구분하지 못한, 그 작은 오해가 나의 마음을 한동안 괴롭혔다. 선입견만으로 대상을 바라보다가 실체적 진실을 놓쳐 버린 자괴감이었다.
엄격히 말하면, 오해도 과실(過失)이다. 그렇다면 속단(速斷)도 무형의 죄가 아닐까?
뜨거운 가슴으로 감싸주고 용기를 북돋아 주어야 할 대상을 소홀히 지나치고, 때로는 사안을 쉽게 단정해 버린 또 다른 우를 범하지 않았는지 잠잠히 생각해 본다. ■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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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 대전수필문학회 단톡방에서
◆ 박영진(교육자, 수필가) 4.13. 오후 2:13
고맙습니다.
저도 종종 성급하게 판단하여 과오를 범하는 일도 있어요.
▲ 답글 / 윤승원(필자) 4.13. 오후 2:47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판단 착오나 실수, 또는 오해를 모아 수필집을 펴낸다면
아마도 한두 권으로는 넘칠지도 모릅니다.
영화 속의 학교 선생님은 마지막 장면에서 성급한 판단을 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학생에게 회초리를 주면서 때려달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도 회초리를 맞아야 할 사람이 어디 한두 사람일까요.
도솔산 등산하면서 나무의자에 앉아 정직한 나무들에 물어봅니다.
감사합니다.
영화 제목이 명언입니다.
"너무 성급하게 판단하지 마라
당신은 결코 진실을 모른다."
살아가면서 깊이 새겨야 할 명언입니다.
숨어 있는 진실을 모르고 성급하게 판단할 일이 아니군요.
착각 속에서 살아가는 인생.
실체를 꿰뚫지 못하는 지혜의 부족.
그러기에 고민해야 합니다.
부단히 성찰하고 자신을 돌아다봐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