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 26: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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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송) "끝내 찾아내리라..너를..." 모든 것으로부터 숨고 은닉하고 싶으며, 도저히 어느 것과도 접촉할 힘이 없을 때..그때도 끝까지 그런 나를 찾을 것이라고 하시는 주님. 결코 우리를 향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
(사건)
ㅇ 폐지를 주우며 인생의 마지막 여정을 이어나가는 빈곤한 노인의 세상, 장애를 가지고도 어떻게든 사회에 적응해 살아가려는 사람들의 세상, 감당하기 어려운 빚을 가지고도 하루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안 속에서도 자녀들을 지키기 위해 어떻해든 견뎌나가는 가족의 세상... 너무 심각한 질환을 가지고도 귀한 생명을 지켜나가려고 투쟁하려는 세상..... 그보다 더 많은 사연을 담고 살아가는 서민의 삶을 향해 총과 칼로 유린하려는
ㅇ 그래도 세계 유래 없이 평화적 방법으로 민주화를 지켜 나가는 사람들. 그 에너지가 어디서 나왔는가?(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는 원칙에 의해) 그 교훈을 생각하면, 세상에서는 패배, 허무하다고 판단되지만(바울, 그리스도의 제자들처럼, 그리고 예수님처럼) 결코 그렇지 않다는 영정 교훈.
ㅇ 가슴 아픈 것은 그 세력에게 온실을 마련해 주고 물을 뿌리고 양분을 주었던 주요한 세력이 기득권 기독교 목회자(김장환, 오정현 등 등)인데... 사건 후 어떤 회개나 코멘트도 없어. 그들은 악한 권력세력을 옹호하는 대신 세월호, 이태원과 같은 서민의 고통에는 유독히도 침묵했던 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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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 우리가 하나님에게 빚진 자라는 것. 그것을 제대로 거억할 수 있다면 정체성이 분명함 "채무자" 그렇지만 행복한 채무자. 그런 정체성이 뚜렷해야 하는 것임. 그런데 빚을 갚는 일이 행복한 삶. 행복한 빚을 갚는 신비함. 문제는 그 정체성을 쉽게 잊는 것. 정체성을 잊어버리면 삶은 표류. 정체성이 뚜렷해야 삶의 각이 잡힘. 잊지 말아야 진실을 너무 쉽게 잊어버리는 불행.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기억의 장치"가 작동해야 함.
안산에 반월공단 기업체 설교했음. 거기에 한 분이 다니엘 새벽기도에서 간증. 기업을 운영하며....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운영, 17년 간의 사투... 간증 1시간에 몰아 넣으니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가 너무 뚜렷해짐. 그런데 다시 이것을 17년으로 다시 늘리면 무감각해짐. 그러니 전혀 느껴지지 않는 지금도 하나님은 일하시고 계심. 이 사실을 우리의 기억장치로 입력시키자!!! 바울에게도 이러한 힘을 알고 있었음. 바울은 그 기억을 확인, 송환, 요청의 3가지.
<기억의 확인>
다메섹 도상에서 아나니아를 통해 바울에게 준 하나님의 약속. 임금 앞에서 오늘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그 중에 하나. 20년 이상이 흘렀지만 드디어 그 일이 실현, 현실화 됨. 시간은 흘렀지만 하나님의 그 약속이 진행되고 있음. '약속'. 약속은 일단 약속하는 편에서는 일종의 채무다. 약속을 지키기 전까지 채무자가 됨. 모든 정치인들은 약속을 통해서 그 자리에 갔음. 그 모든 것이 채무. 약속을 통해서 자리에 갔음. 그런데 채무자 역할을 망각하고 채권자 역할을 함. 국민을 볼모로 정치놀음. 일반 사람들도. 목회자도 복음을 들을 사람이 있기에 자리하는 건데 채무자인데...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 그러면 망가지기 시작. 채무자가 모두 채권자가 되기 때문에 이 땅에 살기 싫어짐. 어쨌든 약속은 채무. 하나님은 계속 자신이 우리에게 하신 약속을 상기시키신다. 스스로 채무자가 되는 것. 다윗과 요나단. 다윗이 요난단의 집안을 지킨다는 약속을 했지만 요나단의 가족은 다윗을 해하려는 세력이라는 딜레마.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다윗은 요나단 가족을 지켜려 노력. 이런 채무자 의식이 너무나 귀함. 사실 우리 모두는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아버지의 대적자들이 아닌가? 그런 감동의 일체가 우리의 채무의식을 일깨우는 것임. 그렇게 되어 깨달은 자는 행복한 채무자가 되는 것.
<기억의 송환>
아그립바 왕 앞에 선 바울. 20년 전의 약속을 기억하며 앞에 섬. 이그립바의 선조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죽인 원흉들. 그렇지만 그런 죽임들이 하나님의 세계를 확장시킨 역사. 그래서 바울은 어려움이 앞에 보이지만 오히려 기대감을 느끼고 있음. 바울은 사회 정치적으로 무고함이 이미 입증됨. 이제 바울은 종교적 이슈만 말하면 됨. 그래서 "내가 이제 돌려까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하겠습니다."라고 하며 자신이 아무 것도 모르면서 이상한 경험 하나로 떠들고 다니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을 당신이 잘 알지 않습니까? 라고 말함. 단지 부활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부활은 이미 성취되었음을 알기에 선포하고 다니는 것입니다. 라고 강력하게 호소.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담대'하다. 그래서 '지혜'를 얻는다.
바울은 부활을 말하는 사람들을 박살내려는 열정자였다. 그런데 다메섹에서 큰 변혁. 거기서의 음성에 크게 각성됨. 잘못된 사실과 잘못함을 행하는 자신을 걱정하시는 존재. 그때 부르심과 사명이 같이 옴. '내가 너에게 온 건 너가 나를 본 일에, 너를 종과 증인이 되게 하려는 것'. 네가 본 빛이 바로 하나님인 나다. 요한복음 8장 12절. '나는 세상의 빛, 나를 따르면 어둠에 거하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는다." 어둠에 갇히게 하는 것을 버리고 생명의 눈을 뜨게 하는 빛을 전하라! 고후 4장 6절.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에게 비추었다. 최소한 2가지 측면에서 채무자 의식이 생겼음. 청년사역할 때(90년대 후반), 30대때 엄청 열정적일 때, 파트타임일 때.. 생활비를 집에 못 줄 때. 또 여성 신자와 어울리는 것이 신경 쓰일 때. 아내는 오히려 알바를 해서 그 일을 극복. 바울이 일생을 걸고 비난했던 존재가 나를 일깨우고 오히려 나를 종이 아닌 아들로 부르시고 영원히 연합할 이로 부르시니 스스로 채무자가 되는 것임. 또 다른 이들을 채무자로 부르셨기 때문에. 타인들을 행복한 채무자로 부르심. 결론적으로 아시아와 유럽을 완전히 바뀐 대단한 사람. 세상적 방법이라면 지금 대적자들을 압도할 수 있으나 그렇게 하지 않고 끌려 다니며 행복한 채무자로 살아가는 것을 자원. 행복한 채무자로 사는 것은 '매우 어려우면서도 매우 쉬운 길임.' 지난 주 묵상집에서 아낙네들이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요.' 사울은 그것을 듣고 머리를 숙이고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을 주목(경계)하였기 때문에 문제가 됨. 엎으렸다면 채무자 의식이 발동한 것이지만, 다윗을 주목함으로써 채권자 의식이 발동하는 것임. 만약 다른 부목사들이 새로운 부목사를 위로 노골적으로 올리면, 담임목사가 그것을 시기 질투하는 경우와 같은 것임. 이해는 되지만 망하는 길임. 그렇지 않으려면 하나님 앞에 머리를 숙여야 함. 안산동산교회 담임목사에게 '요즘 설교가 부실해지지 않았나요?'라고 하니, '그래서 하나님이 설교가 좋은 목사님을 보내셨잖아요... 그 분들 설교 들으시면 되잖아요.' 너무 감동받았음. 안산동산교회 사례 하나 더. 어떤 부목사가 설교를 너무 잘해. 그 다음 주가 목사님인데. 그때 하나님이 주신 마음을 상기하기 위해 감사의 제목 10가지를 쓰고 기도했음. 약 6개월 동안 그렇게 했더니 목사님이 성도들과 함께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 다윗도 왕의 사위가 되고 싶은 욕망이 끓고 있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엎드려 채무자 의식을 회복하면서 통제. 18절. '그 눈을 뜨게 하여... 죄사함과 나를 믿어..." 채무자가 안 되면, 채권자 의식이 생겨서 예수님을 전하는 듯하면서도 '나'를 은근히 전하는 죄를 범한다. 행복한 채무자 의식을 잃지 않는 방법 밖에 없다. 행복한 채무자 의식이 있었기에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너무나 자유롭다. 아그립바 왕은 로마의 눈치를 보는 존재이지만 바울은 선명한 결기가 있었음. 성도는 그렇게 선명한 결기가 있어야 함.
<기억의 요청>
19~20절. 당신이 로마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가능성보다 제가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을 가능성이 더 적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기억을 기억하라는 것. '박열'을 떠올림. 일본에서 재판. 재판 과정에서 일체 눌리지 않음. 오히려 사형시키라고 함. 재판정을 일본을 비판하는 언론 브리핑 자리로 바꿈. 그의 기세에 눌려 박열을 살려줌. 이와 같이 바울은 로마 제국 왕에 가려는 의지로 당당함. 총독 베스도가 바울에게 '너 미쳤어? 많은 지식으로 그렇게 되었니?' 바울은 총독을 무시. 26절에서 아그립바에게만 집중하는 모습. 아그립바는 흔들림. 너가 나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려는 거냐? 라고 하면서 뒤로는 바울이 죄가 없다고 함.
행복한 채무자 의식을 의도적으로 가질 필요가 있음. 딸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을 시인하라고 하는 것이 사실 싫었지만, 채무자 의식으로... 자신의 딸들이 엄마, 아빠 철들게 하려고 얼마나 수고가 많았던지?? 막내 딸이 아버지를 철들게 하려고, 빗나지 않으려고 얼마나 수고가 많은지...??? 행복한 채무자 의식, 우리가 누구에게나 행복한 채무자. 사람을 도우려고 내 것이 줄어드는 줄 알지만 오히려 풍성해지는 기적, 위대한 삶으로 주님께서 우리를 끌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