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륙사와 수륙재 / 민순의의 조선의 스님들
무주고혼 구제 외에 왕실 조상 추복 목적도 존재
진관사·개성 관음굴, 국가 차원 수륙재 설행 전담하는 기관
조선시대부터 무주고혼·왕실조상 위해 전국서 수륙재 봉행
진관사엔 수륙재 위한 별도의 공간으로 수륙사 조성되기도
지난 호의 글에서 진관사(津寬寺)에 대하여
세종 6년(1424) 불교 종단이 선교 양종으로 정리될 당시
속전(屬田) 150결과 소속 승려[居僧] 70명에
수륙위전(水陸位田) 100결을 지정받았다고 언급을 한 바 있다.
현재 서울 은평구에 위치한 그 진관사가 맞다.
지금에야 서울의 행정 구역 내로 들어오게 되었지만,
조선시대만 해도 이곳은 경기도 양주에 속한 지역이었다.
또 오늘날과 같이 비구니 스님들이 여기에 거주하게 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선 뒤의 일로,
조선시대의 진관사는 비구니[尼]가 아닌 비구[僧]가 관할하던 사찰이었다.
수륙위전은 그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수륙재의 설행을 위해 제공된 토지이다.
굶주린 채로 외롭게 물과 뭍을 떠도는 육도(六道)의 뭇 영가들을 거두어 먹이고,
그들의 명복을 빌며 법문을 설해 주는 바로 그 수륙재 말이다.
세종 6년의 위 기사에서 같은 날 수륙위전을 지급받았던 사찰로는
진관사 외에도 개성의 관음굴(觀音堀)이 있다.
관음굴에 할당된 속전과 승려와 수륙위전의 규모도 진관사와 같았다.
이는 곧 이 두 사찰이 국가적 차원에서 행해진 수륙재,
이른바 국행수륙재의 설행을 전담한 기관이었음을 의미한다.
수륙위전이 함께 거론되지는 않았지만
경상도 거제의 현암사(견암사, 見巖寺)와 강원도 동해의 삼화사(三和寺),
그리고 강원도 오대산의 상원사(上元寺) 등에서도 왕명에 의해 수륙재가 실시되었다.
그런데 당시의 국행수륙재는
크게 두 갈래의 목적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 주목을 요한다.
먼저 태조 이성계는 재위 4년(1395) 관음굴·현암사·삼화사에서
고려 왕씨를 위해 수륙재를 베풀며
이 세 절에서 매년 봄과 가을에 수륙재를 거행하게 하였다(‘태조실록’ 7권)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고려와 조선이 교체되는 시기
고려의 왕족에 대한 대규모의 숙청이 있었다.
삼척과 강화와 거제에 관원이 파견되어 왕씨 일족을 몰살하였으며,
고려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과 그의 두 아들 또한
여러 곳을 귀양 다니던 끝에 삼척에서 살해되었다.(‘태조실록’ 5권, 3년 2월26일)
결정은 조정의 의론에 따른 것이었지만
정작 태조는 이 참극을 상처와 회한으로 남겼던 것 같다.
그렇기에 왕씨 숙청 바로 이듬해부터
그들이 살해된 지역의 사찰에서 매년 2회의 수륙재를 상설화했던 것이다.
일족이 절멸하다시피 한 왕씨를 위한 수륙재는
무주고혼의 추복(追福)이라는 본래의 목적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물론 여러 무주고혼 중에서도
특별히 왕씨를 우선하여 고려했다는 점에서 특별함이 있기는 하다.
왕씨 추복을 위한 이 세 사찰 중 삼화사는 얼마 후 오대산의 상원사로 교체된 것으로 보인다.
상원사 수륙재에 대한 ‘실록’의
첫 기록은 천재(天災)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설명이지만
“관음굴·진관사·상원사·현암사에서 (이제까지는) 매년 2월15일에 수륙재를 행하였는데,
금후로는 정월 15일에 행하는 것으로써 항식(恒式)을 삼으라”는
전지가 내려진 데에서(‘태종실록’ 27권,) 그러한 추정을 가능케 한다.
한편 왕씨 추복 이외의 목적을 지닌 수륙재도 여러 곳에서 다양하게 행해졌다.
태조 5년(1396)에는 한양 성문 밖 세 곳에 수륙재를 베풀어
역부(役夫)로서 죽은 자의 혼령을 위로한 바 있으며,
정종 1년(1399)에는 흥천사(興天社)의 사리전(舍利殿)이 낙성되자
수륙재를 베풀어 왕실의 조상과 조졸(早卒)한 자손들에게 제사지냈다(‘정종실록’ 2권).
또 태종 8년(1408)에는 태상왕 이성계의 구병(救病)을 위한 수륙재가
덕방사(德方寺)에서 행해지기도 하였다(‘태종실록’ 15권).
하지만 조선 초 왕씨 혹은 무주고혼 추복 이외의 목적으로 눈길을 끄는
수륙재 사찰은 단연 진관사이다.
권근(權近, 1352∼1409)은 ‘진관사수륙사조성기(津寬寺水陸社造成記)’에서
태조가 재위 6년(1397) 정월에 내린 명령을 이렇게 전한다.
“내가 나라를 세우게 된 것은 오직 조상이 쌓은 선행에서 비롯한 것이므로
그 덕에 보답하기 위해 힘쓰지 않으면 안 된다.
또 이제 신하와 백성들이 혹은 공적 업무[王事]에 (힘쓰다) 죽고
혹은 제 명이 다 하여 죽기도 하는데,
제사를 맡을 사람이 없어 저승길에서 굶주리고 엎어져도
구원하지 못하는 경우를 생각하니 내가 매우 근심스럽다.
(그래서) 옛 절에다 수륙도량(水陸道場)을 짓고 해마다 (수륙재를) 설행하여
내 조상의 명복을 빌고 또 중생들에게도 이익에 되게 하고 싶으니,
너희들이 가서 합당한 터를 살펴보아라[爾往相之].”(‘양촌집’ 제12권)
이 글은 당시 진관사에서 수륙재를 행한 중요한 목적이
무주고혼에 대한 구제 뿐 아니라 바로 왕실 조상의 추복에도 있었음을 잘 보여 준다.
조선 초 진관사의 이러한 위상은
“진관사는 곧 선왕(先王)을 위하여 수륙재를 베푸는 곳”이라고 명시한
문종 대의 기사에서도 한 번 더 확인된다(‘문종실록’ 1권, 즉위년 2월26일).
진관사에는 수륙재 설행을 위한 별도의 공간으로 수륙사(水陸社)가 조성되었다.
‘진관사수륙사조성기’에 따르면 상중하의 3단으로 각각 3칸짜리 집을 마련하였으며,
중단과 하단의 건물에는 좌우로 3칸씩의 욕실(浴室)을 설치하고,
하단 건물의 좌우에는 다시 왕실의 조상을 위한 영실(靈室)을 8칸씩 설치하였다.
또 대문‧행랑‧부엌‧곳간 등을 두루 갖추어
이 공간에 세워진 건물의 전체 규모는 총 59칸에 달하였다고 한다.
이를 통해 볼 때 당시 진관사의 수륙재도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상중하 3단의 시식공궤를 중심 재차로 두고[3단의 집, 부엌‧곳간],
영가에 대한 관욕[욕실]과 대령[영실]의 절차 또한 구비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수륙재 설행을 위한 공간을 절 사(寺) 자를 사용한 수륙사(水陸寺)가 아니라
제사 또는 단체를 의미하는 사(社) 자를 사용하여
수륙사(水陸社)라고 불렀던 것도 자못 의미심장하다.
이는 수륙사(水陸社)가 사찰에 세워져 불교 의례를 담당하는 장소였을지라도,
단순히 절의 부속 건물임을 넘어 죽은 이에 대한 명복을 비는
행사 그 자체를 지향하며 나아가 그 행사를 주관하는 사람들까지
아우르는 의미를 지녔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수륙사는 복합 건물로 구성된 물리적 공간과 그 공간을 관리 경영하며
국가적 의례 행사를 대행하여 주관했던
스님들의 인적 구조가 결합된 하나의 제도였던 것이다.
2022년 9월 7일
민순의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