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의 리더쉽
여호수아의 이름은 `야훼께서 구원하신다 또는 야훼는 구원이시다` 라는 뜻이다. 그의 이름은 모세가 지어 주었다(민수13,16). 신약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와 이름이 같다. 이름이 바뀌는 것은 정체성이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자유와 해방의 탈출로 이끌어 낸 지도자라면, 여호수아는 모세의 뒤를 이어 가나안을 정복하여 분배한 지도자이다.
여호수아의 카리스마는 오래전 탈출기 아말렉족과의 전쟁에서 이미 드러났다. (탈출 17,8-15). 여호수아는 젊은 시절부터 모세를 섬기며 동고동락한 사람이다.(탈출 33,11). 모세는 동족을 자유와 해방으로 이끌기 위해 평생을 바쳤지만, 그리던 땅을 목전에 두고 죽어가면서 대권을 여호수아가 아닌 자기 혈육에게 물려주고 싶었던 마음이 없었을까?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이런 대목은 없다. 여호수아의 이름은 모세가 주었을지라도 구원자 계승권은 주님의 몫이다. 주님은 일찍이 이 일을 암시하셨다.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사람은 칼렙과 여호수아이다”(민수기 14,30). 이 메시지는 중간에 다시 한 번 모세에게 각인시키셨다(민수 27,12-23). 가나안 땅 정복과 입성이라는 대업을 손수 이루고 싶은 모세가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주님께 애원했지만 주님의 계획은 요지부동이었다(신명 3,23-29;31,1-8;32,48-52;34,4). 모세의 역할 사명은 모압 평야까지였다. 그러나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모압 평원에서 만고불변 길이 빛나는 신앙교육을 삼 세 번이나 반복하여 시행했다. 이것은 땅의 정복과 분배를 넘어서는 것이다.
나의 주님은 여호수아의 어떤 점이 맘에 들었기에 이토록 그를 세우고자 하셨을까? 여호수아는 요르단강을 건너 첫 번째로 맞닥뜨린 예리코 성을 공략하기 위해 정탐꾼과 이방인을 매수하는 지략가이다. 성을 함락시킨 뒤 취한 조치는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에게 할례를 베풀었고, 하느님께 파스카 축제를 거행하여 야훼 신앙으로 무장시켰다. 완전봉헌물 규정을 어긴 아칸은 일고의 주저함도 없이 율법을 적용해 처형했다. 아이를 정복한 뒤, 스켐에 있는 에발 산과 그리짐 산에서 성소를 만들어 예배를 봉헌했고, 율법 사본을 만들어 냈고, 백성들에게 말씀을 가르쳐 교육시켰다. 여세를 몰아 다섯 아모리족을 몰살시키고 가나안 정복을 끝낸 후 그 땅을 지파별로 나누워 주었다. 그런데 그 방법이 참으로 특별하다. 제비 뽑기로 나누워 준 것이다(여호 14,2). ‘2,800년전 제비뽑기라니...’ 아주 특별한 리더쉽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제비라는 것이 완전한 투표는 아니나 제 손으로 뽑는 것이기에 개인이나 공동체의 불만을 상당히 완화시킬 수 있는 제도이다. 사실 제비를 뽑았다고는 하나 막강 세력을 지녔고 후에 왕국을 이끌었던 유다 지파의 영토 분배는 첫 순서로 나오고, 동서남북이 거론되는 크고 넓은 몫을 차지했다(여호 15장). 지파별 세력에 의해 차별이 있었다는 반증이다.
이쯤에서, 나에게 와 닿은 여호수아의 리더쉽은 위에 열거한 것들이 아니다. 전임 모세가 시행하고 마치지 못한 대업을 한치도 후임자로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완성한 충직함을 품은 겸손한 리더쉽이다. 어떤 분이 ‘후임이 못한다는 소문이 들려오면 마음이 상하는데, 잘한다는 소문이 들려오면 배가 아프다“라고 농담을했다. 그분의 인품으로 보아 과장된 표현이지만 참으로 공감이 가는 말이다. 인간의 자기 사랑은 하느님이 주신 본성이 아닌가? 인간은 물리적 목숨이 끊어지고 나서도 자기애는 3분을 더 살다가 죽는다고 한다. 육십을 넘어 칠십 가까이 이르면서 크고 작은 집단에서, 심지어 내 안에서조차 공명심의 남용과 오용을 얼마나 자주 보고 살아왔던가? 특히 요즘 국내외 정치인들의 세태를 목격하면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니 내 마음에는 전임 모세보다 여호수아가 한결 더 빛나 보인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스켐 집회로 불러내어 말하였다. “오늘, 너희는 어떤 신을 선택하여라. 나와 내 집안은 주님을 섬기겠다”(여호24:15). 믿음의 사람 신앙의 사람은 말할 때 ‘주어’가 다르다고 한다. `내`가 아니라 `하느님`을 주어로 한다. 그는 한평생 주님을 온전히 따라 살다(민수 32,12) 백열 살에 자기 주님의 품에 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