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 세간에 논의의 중심이 되고 있는 제주 4,3사건을 테마(Thema)로 한. 굳이 작가가 누구라고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작별하지 않는다,라는 소설을 밤사이 눈이 쌓인 서울에서 전혀 눈이 오지 않은 영서지방의 산악지대로
달리며 오가는 관광버스 안에서 짬짬이 읽으면서 가노라니 오전 11:00시경 금강산 건봉사 앞에 닿았는데 인향
(人香)이 느껴지는 넉넉한 절 인심으로 동지 팥죽을 드시고 가시라는 말소리가 보살님의 성음(誠音)처럼 훈훈
함을 느끼게 했고 소똥령으로 가는 장신교 중간에 서서 앞을 바라보니 길게 이어지는 강이 흐르고 아득히 보이는
크고 작은 산 봉우리들이 중국 계림(桂林)을 관광할 때 배를 타고 이강을 오르며 숲을 이룬 것 같은 산 봉우리들을
바라보던 때와 같이 느껴지는 명승지여서 흥보가 기가 막히다는 말을 절로 절로 되뇌이게 했답니다.
소똥령 홍보관앞에서 버스로 다음 회차에 트레킹 할 31코스 종료지점에 있는 미술관에 무료 입장을 했는데 대한
민국 미술계의 거장인 이중섭 화백의 모든 작품이 전시되고 있어서 관람시간이 참으로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미술[美術]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에서 아름다움을 조형적으로 형상화하는 회화·공예·서예 등의 예술 활동.
미술가
서귀포시에 현대 미술의 씨앗이 뿌려진 것은 한국 전쟁을 통해서였다. 이를 계기로 제주에는 이중섭·장리석·김창열·최영림·홍종명 등이 들어와 활동을 하였다. 이 시대 대표적인 인물이 화가 이중섭이다. 평안남도 평원 출신인 이중섭은 1951년 1월 서귀포시로 피난와 11개월간 거주하면서 「서귀포의 환상」·「섶섬이 보이는 풍경」·「바닷가의 아이들」 등 서귀포 시대의 명작을 남겼다. 서귀포 미술의 초석은 고성진이 닦았다. 그는 1942년 일본 태평양 미술 학교를 수료하고 귀국하면서 일본에서 미술 재료와 서적 등을 갖고 들어온 선구자였다. 직접 서귀 중학교에서 미술 교사로 후학들을 지도했다. 고성진이 싹틔운 서귀포 미술은 그의 제자인 고영우에게서 꽃을 피우게 된다. 고영우는 서귀포에서는 처음으로 홍익 대학교 서양학과에 입학했다.
또 일본 유학과 일본에서 작가로서 충분히 인정받고 귀국한 후 서울에서 교수로, 작가로서 활동을 하고 있던 서귀포 출신 서양화가 변시지가 1975년 제주 대학에 교수로 초빙되면서 제주 미술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되었다. 변시지는 제주 대학에 몸담은 후 독특힌 필치로 제주의 상황과 풍경들을 그리는 새시대를 열었다. 그가 창안한 암갈색 제주 색깔로 「탐라의 태풍」·「제주의 바다」·「돌담」·「조랑말」 등 대작을 남겼다. 이와 함께 서귀포를 대표하는 화가인 이왈종은 1945년 경기도 화성 출신으로, 1979년부터 추계 예술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가 1990년 교수직을 그만두고 돌연 제주 서귀포로 내려와 작품 활동을 이어나갔다. 당시 이왈종은 서귀포시 동홍동 정방 폭포 근처에 창작실을 마련하고 전업화가로 작품 활동에 정진하였던 것이다.
특히 제주에 내려온 1990년대 초부터는 제주의 자연과 생활 모습을 담은 ‘제주 생활의 중도’라는 작품을 시리즈로 그렸다. 이에 지난 2012년 3월 서울 갤러리 현대에서는 ‘제주 생활의 중도’라는 주제로 이왈종 작가의 작품들을 전시 선보이는 자리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왈종은 지난 2005년 3월 7일부터 서귀포시 평생 학습 센터에서 운영하는 ‘엄마랑 아이랑 함께 하는 미술 교실’의 강사로 참여하여 어린이들의 그림 지도를 도맡아 했다. 이 결과 2009년 1월 4일 ‘이왈종 화백과 함께 하는 아름다운 미술 세상’ 화보집 및 프로그램 운영 성과 보고서가 발간되기도 하였다. 이 외에 서귀포 지역 출신 가운데 활발한 창작 활동을 벌이는 작가로는 박용미, 한중옥, 허창훈, 현충언, 김남홍, 박성배, 김미영 등이 있다.
미술 단체- 대학, 공공 단체, 동호회
1973년 제주 대학에 미술과가 설립되면서 서귀포에도 미술 인구가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이후 많은 화가들의 활동과 함께 1982년에는 ‘상미 전시 공간’이 개관하였다. 상미 전시 공간의 개관으로 미술을 전공한 학생들의 전시는 물론 제주시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의 전시도 자주 접할 수 있었다. ‘상미’의 개관으로 서귀포 지역 출신 미대생들이 그룹 ‘동행’을 결성했다. 1990년도에는 서귀포에서 활동하는 젊은 작가들이 ‘산남회’를 결성했다. 이후 1987년 7월 기당 미술관과 그해 10월 덕수리 조각 공원의 개관은 서귀포시를 비롯한 산남 지역 미술사에 한 획을 긋는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후 1993년 서귀포 푸른 학생의 집, 1994년 서귀포 시립 도서관에 부대시설로 전시실이 마련되었고, 2002년 이중섭 미술관이 개관하였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서귀포 지역 미술인들이 모인 단체 산남회가 결성되었고, 1999년 3월에는 서귀포, 남제주군 지역의 한국 미술 협회 회원들이 모여 한국 미술 협회 서귀포 지부 창립을 위한 총회를 열면서 본격적인 활동에 돌입하였다. 서귀포시는 지난 2009년부터 이중섭 문화의 거리 내 ‘이중섭 미술관 창작 스튜디오’를 운영하여, 서귀포 지역주민을 위한 문화 체험 공간을 현재까지 제공하고 있다. 이에 창작 스튜디오에서는 유망 작가를 입주작가로 선정하여 창작 공간을 제공할 뿐 만 아니라 입주 작가를 포함한 도내외 미술 작가들에게 관객과의 소통을 위한 전시 공간을 무료로 제공해 창작 활동을 지원해 오고 있다. 지난 2012년 5월에 ‘2012 마을 미술 프로젝트 지원 협의체’를 본격 구성하였는데, 이를 통해 서귀포 이중섭 거리와 솔동산 문화의 거리 등 구도심 기능을 재생시켜 문화 예술의 메카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사항을 지원, 협의해 나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에 이왈종 화백을 위원장으로 추대하고 관련 지역 문화 예술인, 전문가 교수, 공무원 등 28명의 위원이 구성되기도 했다.
미술 행사
홍익대 미대 3년을 수료하고 고향으로 내려온 고영우는 1972년도에 고향에서 첫 개인전을 송미 다방에서 열었다. 이보다 앞서 1971년에는 현충언이 11점의 유화 작품을 갖고 명성다방에서 첫 개인전을 개최했다. 서귀포에서 미술전으로서는 첫 개인전인 것으로 기록된다. 1982년 ‘상미 전시 공간’의 개관으로 미술 전시에서 큰 붐이 일기 시작했다. 이후 서귀포 미술 협회 서귀포 지부 창립으로 1999년 ‘제1회 한국 미술 협회 서귀포 지부전’이 기당 미술관에서 열렸다. 2002년에는 월드컵을 축하하는 ‘서귀포 작가전’이 중문 관광 단지 내 한국 관광 공사 전시장에서 열렸다. 2004년에는 ‘제1회 서귀포 미술제’가 열려 다른 지역 출신 작가들과 교류를 넓혔다. 서귀포 미술제를 필두로 서귀포시 미술인들은 각 지역을 찾아다니며 미술 전시회를 개최하고 있다. 또한 지역 초등학생들의 미술 체험 활동을 넓히기 위해 매년 ‘서귀포 미술 나들이가다’를 열고 있다. 또한 지난 2012년 3월 30일부터 5월 30일까지 소암 기념관 전시실에서 기획적 ‘문봉선 서귀포 칠십리의 봄’을 마련하여 ‘서귀포 칠십리’, ‘구룡폭’, ‘월매’ 등의 작품 수십 편을 전시하기도 했다. 지난 2012년 5월 12일부터 6월 10일까지 약 1개월간 서귀포시와 유니세프가 협약을 맺고, 이중섭 미술관에서 이왈종의 판화전 ‘포옹’이 개최되었다. 이 특별 전시회를 통해 전시 작품과 아트 상품 총 210점이 판매되어 약 4,800만 원의 판매 수입을 올리기도 했다. 또한 서귀포 미술 협회는 2012년 5월 26일부터 6월 1일까지 이중섭 창작 스튜디오 전시실에서 제14회 서귀포 미술 협회 지부 회원 전시회를 열어 정회원 작품 19점과 준회원 6명이 그린 작품이 함께 전시되었다.
참고문헌
『서귀포예총 10년사』(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서귀포지부, 2007)
『서귀포시지』(서귀포시, 2001)
『2011 제주문예연감』(제주문화예술재단, 2011)
「서귀포시평생학습센터, 이왈종 화보집 발간」(『제주일보』, 2009.1.4.)
「'이중섭 창작스튜디오' 문화체험공간으로 자리매김」(『서귀포신문』2010.8.10.)
「이왈종 서울전, 서귀포에서 부르는 ‘중도’의 노래」(『아트 뉴스』, 2012.3.27.)
「서귀포시 마을미술프로젝트 지원협의체 구성」(『서귀포신문』, 2012.5.21.)
「서귀포미술협회, 제14회 회원전시회」(『서귀포신문』, 2012.5.24.)
「이왈종 판화전 성황리 마무리」(『서귀포신문』, 2012.6.12.)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사명당[四溟堂]
구국의 의병장이자 뛰어난 선승
조선시대의 승려는 어떤 경계인(境界人)이었다고 말할 만하다. 그는 상당한 수준의 지식인이었고 삼국시대부터 내려온 유구한 전통과 영향력을 가진 종교인이었지만, 조선시대에 유교가 국시(國是)로 채택되면서 그런 지위는 팔천(八賤: 조선시대에 천역에 종사하던 천민으로 사노비, 승려, 백정, 무당, 광대, 상여꾼, 기생, 공장(工匠) 등이 해당됨)의 하나로 불릴 만큼 급락했다. 고려시대에 승려는 종교의 영역을 넘어 정치ㆍ경제 분야에서도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조선시대에는 몇 개의 예외적 사례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크게 위축된 입지에 머물렀다. 그런 예외적 사례의 대표적인 경우는 전란과 관련된 것이었다. 모든 국민이 동원되는 급박한 위기 상황에서 승려도 예외가 아니었고, 그때마다 승려들은 방대하고 전국적인 조직과 일치된 행동으로 뛰어난 전과를 올렸다. 전란의 규모가 클수록 그런 의병들이 많이 배출된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사명당(四溟堂) 유정(惟政, 1544~1610)은 그의 스승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 1520~1604)과 함께 임진왜란에서 가장 혁혁한 공훈을 세운 승병장이었다.
출가와 구도
사명당대장진영(四溟堂大將 眞影). 사명당의 진영은 현재 10여 점이 전해지는데, 이것이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된다. 좌측 하단에 ‘가경원년병진(嘉慶元年丙辰, 1796년, 정조 20)’이라고 씌어 있어 그려진 시기를 알 수 있다. 가로 78.8센티미터, 세로 122.9센티미터. 보물 제1505호. 대구 동화사 소장.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사명당의 속명은 임응규(任應奎)로 본관은 풍천이고 자는 이환(離幻)이다. 사명당은 그의 법호이고, 널리 알려진 또 다른 이름인 유정은 그의 법명이다. 경상남도 밀양 출신으로 아버지는 임수성(任守成)이다. 사명당은 14세에 어머니를 여의고(1558년, 명종 13) 이듬해에 아버지까지 돌아가자 김천 직지사(直指寺)에서 신묵(信默)의 제자로 출가했다. 그 뒤의 외교적 활약과 성과가 잘 보여주듯이, 사명당은 뛰어난 지력(知力)을 갖고 있었다. 그는 출가한 지 3년 만에 승과에 급제했고, 수준 높은 지식을 바탕으로 여러 유생과 교유했다. 유생과 승려는 상극의 사이 같지만, 조선후기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과 초의선사(草衣禪師, 1786~1866)의 교유가 보여주듯, 학문과 인격에서 깊이 사귀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사명당이 친교를 맺은 대표적인 인물은 박순(朴淳, 1523~1589)ㆍ임제(林悌, 1549~1587)ㆍ노수신(盧守愼, 1515~1590) 등이었는데, 모두 당대의 뛰어난 인물이었다. 박순과 노수신은 모두 영의정까지 오른 고관이었고, 임제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 시인이었다. 나이로 판단할 때 박순ㆍ노수신과는 사제 관계에 가까웠고, 임제와는 친구 사이였을 것이다. 실제로 사명당은 노수신에게서 [노자]ㆍ[장자]ㆍ[열자] 등 제자백가서와 시를 배웠다고 한다. 그러나 승려로서 그의 본분은 구도(求道)였다. 그는 직지사의 주지를 지낸 뒤 1575년(선조 8) 선종의 으뜸 사찰인 봉은사(奉恩寺)의 주지로 천거되었지만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普賢寺)로 스승 휴정을 찾아가 수도했다. 사명당은 3년 뒤부터 팔공산ㆍ금강산ㆍ청량산ㆍ태백산 등 전국의 주요 명산을 돌아다니며 구도한 끝에 1586년(선조 19) 충청북도 옥천산(沃川山) 상동암(上東庵)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속세의 나이로 42세 때였고, 출가한 지 27년만의 일이었다.
임진왜란에서의 활약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사명당은 48세였다. 그때 그는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 있었는데, 근처 아홉 고을의 백성들을 구출했다. 승병장으로서 본격적인 활약은 그 뒤에 시작되었다. 사명당은 조정의 근왕문(勤王文)과 스승 휴정의 격문을 받고 승병을 모아 평양 근처의 순안(順安)으로 가서 휴정과 합류했다. 그는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으로 승병 2천 명을 이끌고 평양과 중화(中和) 사이의 길을 차단한 뒤 1593년 1월 평양 전투에 참전해 큰 공로를 세웠다. 그 전투는 명군(明軍)과 연합해 평양을 탈환함으로써 임진왜란의 흐름을 바꾼 중요한 계기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 뒤 성호 이익(李瀷, 1681~ 1763)은 이 전투에서 명의 장소 이여송(李如松)이 병법을 몰라 퇴각하는 왜병을 뒤쫓아 섬멸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고 비판하면서 " 이 때 우리나라가 쇠잔했지만, 그래도 군사가 많았고 유정(惟政)이 거느린 승군이 참전해 기이한 작전을 많이 썼으니 이여송을 기다릴 필요가 있었겠는가"라고 지적했다([성호사설] 제11권 인사문(人事門) 이제독부지병(李提督不知兵)). 이런 평가는 사명당의 뛰어난 지휘능력과 승군의 강한 전력을 잘 보여준다. 사명당은 두 달 뒤에도 서울 근교의 노원평(蘆原坪) 전투에서큰 전과를 올렸다. 노원평 전투는 1593년 3월 25일부터 사흘동안 치러진 격전이었는데, 사명당은 양주목사 고언백(高彦伯) 등 관군과 연합해 3천 명의 병력으로 왜군을 맞았다. 한달 전 행주산성에서 대패한 왜군 5만 명은 한양에 집결한 뒤 식량과 보급품을 조달하기 위해 양주로 군사 일부를 보냈는데, 사명당은 매복 작전으로 그들을 섬멸한 것이었다. 이 노원평 전투는 왜군을 한양에서 물러나게 만든 중요한 계기로 평가된다. 이 공로로 사명당은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에 제수되었다. 한양을 수복한 뒤 사명당은 영남 지방으로 이동해 전투와 축성(築城), 군량미 조달에 계속 참여했다.
임진왜란에서 사명당의 활약은 군사적 부분에만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좀 더 중요한 성과는 외교에서 거뒀다고도 평가할 수 있다. 사명당은 모두 네 차례에 걸쳐 일본과의 강화(講和) 회담에 나아가 의견을 조율했다(제1차: 1594년 4월 13∼16일, 제2차: 1594년 7월 12∼16일, 제3차: 1594년 12월 23일, 제4차: 1597년 3월 18일). 널리 알려졌듯이, 5개 항에 걸친 일본의 강화 조건은 매우 황당한 것이었다(명의 황녀를 일본의 후비(後妃)로 삼고 감합무역(勘合貿易: 감합은 입국을 확인하는 행위로 당시 조선과 명이 일본ㆍ여진과 시행한 무역의 일반적인 형태를 말한다)을 재개하며, 조선 8도 중 4도를 할양하고 조선 왕자 및 대신 12인을 인질로 삼을 것 등). 사명당은 이런 조건의 비현실성과 불합리성을 논리적으로 지적했다. 1604년(선조 37)에는 일본에 파견되어 협상 끝에 이듬해 4월 왜란으로 일본에 끌려갔던 3천여 명의 백성을 데리고 귀국하는 중요한 성과를 올렸다. 이런 공로로 사명당은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종2품)에 임명되었다.
입적과 그 뒤의 영향
표충비는 1738년(영조 14) 사명당의 제자인 남붕조사(南鵬祖師)가 세운 비석이다. 사명대사의 충절을 기리고 있는 비로, 일명 ‘사명대사비’라고도 불린다. 국가에 큰 어려움이나 전쟁 등의 불안한 징조가 보일 때에 비에서 땀이 흐른다 하여 ‘땀 흘리는 표충비’로도 잘 알려져 있다. 대리석으로 전체 높이는 4미터고, 탑신 높이는 270센티미터다. 앞면에는 사명당의 행장인 <송설대사비명(松雪大師碑銘)>이, 뒷면에는 스승 서산대사의 행장인 <서산청허당휴정대사비명(西山淸虛堂休靜大師碑銘)>이 새겨져 있다. 표충사에서 동쪽으로 약 4킬로미터 떨어진 경상남도 밀양시 부안면 무안리에 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15호.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사명당은 그 뒤 병으로 해인사에서 요양하다가 1610년(광해군 2) 8월 26일 설법을 마친 뒤 가부좌를 틀고 입적했다. 세속 66세, 법랍 51세였다. 종교적 성취와 세속적 인정을 모두 충족시킨 영광스러운 생애였다고 평가할 만하다. 사명당의 이런 군사적ㆍ외교적 활약은,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상승 작용을 일으키면서, 민간설화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그뒤 ‘사명당 설화’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그 이야기의 내용은 대체로 사명당이 일본에 가서 신이한 행적으로 왜왕을 굴복시켰다는 것이다. 예컨대 왜왕이 사명당을 큰 무쇠 방에 들여보내고 불을 땠지만, 사명당이 ‘빙(氷)’자를 천정에 써 붙이고 도술을 부려 방문을 열자 수염과 눈썹에 고드름이 달려 있었다는 것 등이다. 사명당을 기리는 대표적인 사찰은 그의 고향인 밀양에 세워진 표충사(表忠寺)다. 그 사찰의 이름은 사명당의 가장 대표적 면모인 국가에 대한 충성을 표상하고 있다. 그리고 국난이 있을 때면 땀을 흘린다는 ‘표충비’도 유명하다. 승려로는 드물게 [사명당 대사집](7권 1책)이라는 문집을 남긴 것도 특기할 만하다. 1612년(광해군 4) 제자 혜구(惠球)가 간행한 그 문집에는 허균(許筠, 1569~1618)이 서문을 썼으며, 다양한 시(254수)와 상소, 게송(偈頌: 불교적 교리를 담은 한시) 등이 실려 있다. 종교가 지나치게 현실에 개입하거나 민감하게 반응하면 부정적인 측면이 더 클 것이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급박한 위기상황에서도 그런 태도를 고수하는 것도 적절치는 않을 것이다. 사명당은 종교인의 자세를 견지하면서도 필요하고 적절한 현실적 참여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어떤 전범을 보여주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사명당 기념사업회, [사명당 유정 : 그 인간과 사상과 활동], 지식산업사, 2000; 신동흔, <사명당 설화에 담긴 역사인식 연구 - 역사인물 설화의 서사적 문법을 통한 고찰>, [고전문학연구] 38, 2010; 조영록, [사명당 평전], 한길사, 2009.
출처:(인물한국사, 김범, 장선환)
2024-12-21 작성자 명사십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