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4:6절)
사람들은 예수 믿고 허기진 자신의 영혼을 대체물로 채우려고 허덕거립니다.
천국에 가거나 다시 오실 주님 앞에 설 자격의 결함을 메꾸려는 안간힘입니다.
사람들이 인정하고 칭찬하지만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입니다. 아무리 세어보고
달아봐도 함량이 미달이 된다고 여깁니다. 그건 여러분이 아니라 제가 그랬습니다.
바울의 말을 빌리면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다른 이물질을 섞어 혼잡하게 하여
복음이 가리어져 사람들을 망하게 하는 이 세상이 각색한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죠.
제대로 믿지 않고 보험에 가입하듯 적당히 발을 걸쳐 놓고 교회를 다니는 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교회가 별별 개그의 설교를 하므로 정작 진짜 성도들이 혼미하게
되어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의 비침을 받지 못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지 않는 쭉정이들이 즐비한 겁니다(고후4:4) 그 증거가 새 언약이라면
발끈하는 사람들의 심보이며 시중에 새 언약이라는 책이 사라진 이유이기도 합니다.
새 언약이란 말이 사라짐은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탄핵한 사탄의 승리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결코 양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시작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그 안에 나타내시길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아는 순간부터이기 때문입니다(갈1:16)
가라지같은 율법의 종이었다가 그리스도를 담은 알곡이 된 것입니다. 내 속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므로 생명이 되시고 빛이 되시고 하나님의 형상이 되시는데 어찌
다른 복음을 증거할 수가 있겠습니까? 치매가 아닌 다음에야 밥을 먹었는지 아닌지를
모를 수가 있겠습니까? 뱃속에서 나타나는 신호가 있는데 이를 모를 바보는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는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에 자랑스럽습니다(롬1:16) 인간이 입으로 먹고 코로 숨 쉬는 목숨의
귀중함을 본능으로 알듯 거듭난 사람 또한 영혼의 배고픔 곧 가난함을 주께 호소할
수밖에 없는 기본적인 본성을 가지게 됩니다. 마음의 입과 마음의 코가 작동합니다.
우리가 그 이름을 영접하고 믿는다는 말씀(요1:12)을 간단하게 여기면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말은 예수라는 인물을 믿고 마음에 모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영접은 그리스도의 존재와 그분이 하신 일을 다 수용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누구신가를 설명하는 말씀을 추적해야죠. 우리 주님은
만물을 지으신 창조의 근본이시며 그 빛이 되십니다. 빛은 바로 생명입니다.
이 빛이 어둠에 비치고 있지만 어둠이 깨닫지 못합니다(요1:4-5) 말씀을 깨닫는
정도의 빛이 아니라 우리 안에 비치는 영광의 복음의 광채이며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 빛은 바로 창조의 빛이며 빛이 있으라 하시므로 낮과 밤을 나눈 그 빛입니다(창1:3)
그 빛이 우리 마음에 비추셨다는 사실을 왜곡 축소시켜 적당히 버무리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보배와 능력이 질그릇인 몸에 담긴 줄을 모르고 질그릇의 무늬만
요란하게 덧칠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자유의지라는 헛소리를 하고 다닙니다.
심히 큰 능력은 우리 안에 비추신 그 빛에 있고 우리의 자유의지에 있지 않습니다.
결코, 다시 말하지만 절대로 우리의 자유의지에 하나님의 능력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안간힘을 쓰면서 죽어가느라 그 몰골을 드러내며 하나님을 안타깝게 만들 뿐입니다.
온 우주와 만물에 빛이 있으라 한 그 빛이 우리 안에 들어오셨는데 그 촉광이 도대체
얼마이겠습니까? 원자력 발전소 수천만 개 보다 더 큰 전력의 빛이 아니겠습니까?
그 놀라운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데 오직 예수하느라 그만 놓칩니다.
그래서 이사야가 말한 대로 시온의 딸들이 교만하여 목은 늘어뜨리고 정을 통하는
눈으로 다니면서 아기작거리고 발로는 쟁쟁거리는 꼴이 되는 겁니다(사3:16)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이 설정해 놓은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을 탄핵해 버리는 겁니다. 이게
바로 아담을 꼬드긴 사탄의 전략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세상 끝까지 똑 같습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경외하며 믿어 그 빛이 우리의 심령에 비치도록
자신을 내려놓고 그리스도를 높여 보세요. 그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짊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도는 구원을 받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건데 그건 주의 죽으심을 본받으면 주의 생명이 우리 몸과 육체에 나타나는
걸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고후4:10-11) 여기까지 비약시키는 글이 항상
부담스럽지만 일단 예수를 믿는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에 합한 세례를 받는 회심을 하여 세상의 신이 덮어 놓은 수건이 걷히고
주의 영이 우리 안에 계시므로 자유를 얻어 주의 영광을 보고 그의 형상으로
변화하여 그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러(고후3:17-18) 드디어 나도 사랑이 된다고
외치는 자리로 나아가도록 하십시다.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는 창조의 빛과
우리의 구원이 되는 생명의 빛이시며 무한대의 하나님의 능력이심을 노래하십시다.
첫댓글 아멘! 아멘! 입니다.
우리 안에 영접한 그리스도를 살아내는 경건의 훈련이 진정 그리도인의 삶이지요!^^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속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므로 빛이 되시고 생명이 되시고 하나님의 형상이 되십니다.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