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행복했던 여정
사랑합니다.
어떤 말로도 그 사랑을 다 표현하고 갚을 수는 없지만
이렇게나마 사랑과 정성을 모아 감사함을 이 패에 담아봅니다.
앞으로 더욱 건강하셔서 따뜻한 웃음 오래오래 보여주시고
저희와 오래도록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팔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올해는 내 나이가 80이라고 서울과 일본에 살고 있는 아들딸 3남매와 그 식솔들이 서울에 모여서 조촐한 잔치를 하면서 작은 기념패를 내민다. 고맙다. 하지만 내가 걸어온 인생길이 벌써 80년이나 되었다니 참으로 아득한 세월이다.
나는 중일전쟁이 일어나던 1937년 11월 4일(음력 10월 2일)에 태어났다. 하지만 그때 사람들이 대부분 그랬듯이 아버님도 출생신고를 반년이나 늦게 하여 호적상 생일은 1938년 4월 24일로 되어있다.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5년 4월에 쌍백초등학교에 입학한 나는 아침마다 ‘私共は、大日本帝國の臣民であります…(우리는 대일본 제국의 신민(臣民)입니다.…)’ 라는 황국신민선사(皇國臣民誓詞)를 외우면서 일본어로 공부를 하다가 수업이 끝난 오후에는 군수품 조달을 위해 산에 가서 관솔을 따가지고 다음 날 망태에 짊어지고 학교로 가야 했다.
태평양 전선으로 출정하는 장정들에게는 일본 국기인 히노마루를 흔들면서 ‘だいにっぽんていこくばんざい-!(대일본제국 만세-!)’를 외쳐주었고 교실에서 공부를 하다가 ‘くうしゅけいほう-!(공습경보-!)’하고 B29의 공습경보가 울리면 겁이 나서 울며불며 집으로 달려오기도 했다.
그런데 그해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일본 천왕이 항복을 하자 우리는 이제야 나라를 되찾았다고 ‘대한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그리고는 ‘가, 갸, 거, 겨-’ 하고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지만 교과서도, 노트도 없고 심지어는 연필마저 없어서 창호지와 비로 포대로 공책삼아 공부를 하면서도 우리글을 배운다고 좋아했는데 몇 년 후에 6·25 전쟁이 일어나서 생사의 갈림길을 헤매야 했다. 소를 치러 산으로 가다가 북한군에게 들켜서 3․8식 장총이 불을 뿜는 바람에 소고삐를 넘겨주고 목숨을 구하기도 했고 아군과 적군이 전투를 하는 전장에서 쏟아지는 총탄세례에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그런데 낙동강까지 밀렸던 전선이 인천상륙작전으로 반전되기는 했지만 우리학교가 불타버려서 초등학교 동무들은 느티나무 아래서 공부를 하다가 졸업사진 한 장만 촬영하고 뿔뿔이 헤어져 갔다.
그 무렵 아버님이 갑자기 별세하셔서 울며불며 장례를 지낸 3일 만에 중학교 진학을 위해 제1회 국가고시에 응시했지만 아버님의 사망에 충격을 받은 나는 답안지를 제대로 작성하지 못했는데도 성적은 예상보다 좋았다.
나는 큰형님의 뜻에 따라 부산중학교로 진학하려 했지만 전쟁 중이라 부산으로 갈 수가 없어서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진주사범병설중학교로 진학했다. 하지만 낙동강 전선이 무너지고 지리산으로 퇴각했던 북한군의 반격으로 다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중학교 입학식에 참석하기는커녕 또 한 번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다.
북한군이 물러가자 새로 입학한 학교를 찾아갔지만 전쟁으로 폐허된 학교마저 해병대가 주둔하고 있어서 수소문 끝에 우리학교가 있다는 진주여중 강당으로 찾아갔더니 새로 입학한 동급생들은 동서남북 벽을 보고 공부를 하면서 날마다 오후에는 대총으로 군사훈련을 하고 있었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진주사범학교로 진학한 나는 학교를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하지만 징집영장이 나와서 육군에 입대하여 철의 삼각지 금화 전선을 지키는 3사단 23연대 본부 인사과로 배치되어 행정병으로 근무하면서 3·15 부정선거를 경험했고 4·19 혁명을 맞으면서 많은 고생을 했지만 그래도 많은 것을 보고 또 배워서 내 나름대로의 인생관이 형성되었다.
내가 군대생활을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1959년 12월에 시행된 창군 이래 교범정리로 그 때문에 1주일동안이나 거의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교범을 정리했으니 내 생애 최악의 시련이었다. 오죽했으면 영하 20도의 날씨에 교범을 가득 실은 트럭을 타고 사단사령부로 가면서 잠을 잤고 사령부에 도착하여 교범을 인계하다가 착오가 나자 3일만 자고 와서 인계하겠노라고 사정을 했을까.
그 후 초등학교 교사로 복직하자 5·16 군사혁명이 일어나고 혁명정부는 ‘잘살아 보세-!’를 외치면서 새마을 운동을 펼쳐서 온 국민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밤낮으로 일한 결과 그제야 우리 국민이 해마다 겪는 보릿고개를 넘어설 수 있었다.
그 무렵 대학에 진학하려고 입시공부를 하던 나는 중등학교 교원자격고시검정시험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몇 년간의 주경야독으로 중등학교 교원자격고시검정시험 지리과에 합격했다.
그리하여 거제고현중학교를 거쳐서 고향인 합천농업고등학교에서 근무하다가 야간대학에 진학하여 더 공부를 하겠노라고 사표를 내고 교사채용순위고사를 거쳐서 서울북공업고등학교로 발령을 받았다.
그런데 북한 민족보위성정찰국 소속 124군 부대 김신조 일당 31명이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할 목적으로 1․21 청와대 기습사건이 일어난데다가 북한의 미국 푸에블로호 나포사건 등 한반도 전쟁 기운이 최고조에 이른 시기여서 정국이 불안한데다가 부산의 명문인 경남여자고등학교에도 발령이 나는 바람에 소꼬리보다는 닭대가리가 낫다고 생각하고 부산으로 와버렸는데 그것이 내 생애 가장 큰 잘못이었음을 훗날에야 알았다.
부산에 정착한 나는 지리학과가 개설되어있는 대학이 없어서 진학은 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경남여고와 부산진고, 경남고, 부산상고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지리참고서 3권을 집필하고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도 작성해보았으며 대한교육연합회가 주최하는 현장교육연구대회에 논문을 제출하여 1등급으로 푸른 기장증을 받기도 했고 현지답사로 시작한 국토여행은 노산 이은상 선생의 서문을 받아서 국토기행문집 ��산이 있기에 물이 있기에��를 출판했다.
그 후 부산시교육청 기획감사 담당관실과 중등교육과 장학사로 근무하면서 그 무렵 국가적인 중대사안인 교원노조 업무를 총괄하다가 격무에 지쳐서 또 한 번 죽을 고생을 했다. 그리고는 부산남고와 부산동여고 교감을 거쳐서 1996년부터 부산 부흥중학교 초대 교장으로 근무하다가 정년이 단축되는 바람에 4년 6개월만인 2000년 8월에 퇴직 했다.
자유의 몸이 된 나는 수필을 쓰고 유화를 배우면서 한라산과 지리산 등 전국의 명산대천을 찾아다녔고 전공을 살려서 배낭을 짊어지고 일본 여행길에 나선 것을 시작으로 세계 5대양 6대주를 무던히 쏘다녔다.
그중에서도 2003년 겨울 32일간에 걸쳐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칠레 등 남아메리카 5개국을 배낭여행한 것은 내 인생의 꽃이었고, 그다음 해도 33일간에 걸쳐서 인도와 아프리카의 남아프리카공화국, 케냐, 탄자니아 등 5개국을 배낭여행한 것은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백두산을 종주하고 부산에서 통일전망대까지 동해안길 700km를 25일 동안에 걷기도 했다. 고희에는 부산노인복지회관에서 중국어 몇 마디를 배워서 사범학교 동기생이랑 둘이서 1달 동안 중국 일주 배낭여행을 한 것은 내 생애 커다란 보람이었고 그 후에도 몇 년 동안이나 계속되었으니 참으로 값진 경험이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48회에 걸쳐서 세계 65개국을 여행했으니 독학으로 지리학을 공부한 값은 한 셈이 아닌가.
그리고 내가 낙서로 쓴 ��기계새끼들��이 1978년 8월호 ��신동아��에 발표되고 그것이 일본어로 번역되어 ��아시아공론(アジア公論)��에 전재되면서 쓰기 시작한 수필은 몇몇 문학회에서 활동하면서 수필집 ��가을에 그린 초상화��, ��징검다리가 있는 마을��, ��고희의 꿈��을 출판하여 국제문화예술상을 수상하고 에세이부산문학회를 창립했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수필부산문학회장을 거쳐서 지금은 부산문인협회 자문위원으로 있다.
그런데 오늘 내가 살아온 80년의 세월을 되돌아보니 내 인생의 초반기에는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 등 잔혹한 전쟁으로 얼룩진 세월이었고 중반기에는 새마을운동이 일어나 우리도 잘 살아 보자고 하면서 허리띠를 졸라매고 밤낮으로 일을 했으며 퇴직을 하고 난 후에야 내가 좋아하는 수필을 쓰고 등산과 여행을 하면서 비교적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고 보니 나는 중일전쟁과 일제식민지 생활, 태평양 전쟁과 광복, 미군정, 대한민국 건국, 6·25 전쟁, 4·19 혁명, 5·16 군사정변, 계엄령, 대통령 암살과 민주화, IMF, 대통령 탄핵 등 다른 나라에서는 하나도 구경하기 힘든 일들을 모두 지켜보며 살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보릿고개에 시달리던 세계 제일 가난한 나라에서 벗어나 경이로운 경제발전을 이룩한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에서 노년을 보내고 있으니 나야말로 인류역사상 가장 큰 변화를 많이 경험한 사람이 아닐까. 더구나 호롱불로 공부를 하던 내가 요즘은 LED형광등 아래서 스마트폰으로 친구들과 통화를 하고 컴퓨터로 이 글을 쓰고 있으니 말이다.
요즘 나는 그동안에 써 온 여행기를 정리하여 2013년에는 ��그 찬란한 배낭여행기 인도��를 출판하고 그다음 해 출판한 ��내 생애 가장 황홀했던 남아메리카 배낭여행��은 그해 문화체육관광부 교양 도서로 선정되었으며 2015년에는 ��맨발로 돌아본 일본��을 올해는 ��야생의 땅 아프리카��를 출판하면서 여생을 보내고 있으니, 사람들이 지나간 세월은 아름답다고 하더니 나의 80평생도 되돌아보니 나름대로 값지고 행복한 삶을 살아온 것 같아서 마음이 흐뭇하다.[9.27. 에세이부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