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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기행문
여행하며 쓴 일기, 여행기이니, 자연이든 인사(人事)든, 낯선 풍정(風情)에서 얻은 감상을 쓰는 글이다.
여행처럼 신선하고 여행처럼 다정다감한 생활은 없다. 보고 듣는 모든 것이 새것들이다. 새것들이니 호기심이 일어나고 호기심을 갖고 보니 무슨 감상이고 떠오른다. 이 객지에서 얻은 감상을 쓰는 것이 기행문(紀行文)이다.
객지에서 얻은 감상, 그러니까 우선 어디로든 떠나야 한다. 가만히 자기 자리에 앉아서는 쓸 수 없는 글이다. 멀든 가깝든, 처음이든 여러 번째든, 어디로든 떠나야 객지일 것이니, 기행문에는
(1) 떠나는 즐거움이 나와야 한다
대붕(大鵬)으로 하여금 북명(北溟)에 날게 하라. 그러나 나는 오히려 이와 꼭 같은 말을 사람들에게 주고 싶다.
광야와 대해가 어찌 무인(武人)에게만 허락된 곳이겠느냐. 글은 상머리에서 쓰는 법이로되, 생각은 오히려 대자연 속에서 얻는 법이니, 단공(短笻)에 몸을 맡겨 진구(塵區)를 벗어나매 분방한 생각이 마치 천마(天馬)와 같다.
넘기는 책장으로 인하여 안막(眼膜)에 좀이 먹더니 이제 장풍(長風) 한 번에 씻은 듯이 맑아지고 유리보다 더 투명하여 가히 먼뎃것을 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유쾌하냐.
자연의 신광(神光)이 눈앞에 번쩍이고 역사의 수시(垂示)가 발끝에 뻗힌 것을 분명히 느끼면서, 우리 한라산 순례자 53인은 7월 24일 오전 7시 50분 경성역을 떠나 목포로 향하였다.
차중(車中)은 담소로 떠나갈 듯하다. 그러나 이것은 그대로 대자연 앞에 바치는 귀향곡이요 법열로 가득 찬 교향악이다. 이만하면 활연(豁然)히 트이는 것을 삼척안두(三尺案頭)에 소견이 그렇게도 좁으랍던가. 이만하면 닫지 못하도록 열리는 입이 그다지도 무겁게 침묵했던가.
-이은상의 「탐라 기행」의 서두
얼마나 즐거이 떠났는가? 날뛰는 기쁨이 아니라 심호흡을 하듯 깊숙한 큰 즐거움이다. 긴 기행문의 서두답다. 이렇게 그 자신이 기꺼해야 독자도 기대를 가지고 읽게 되는 것이다.
(2) 노정(路程)이 보여야 한다
경성역에서 차를 타고 35분도 못 걸리어 신촌·수색을 지나서 능곡역에 내리었다. 한가로운 향촌의 소역(小驛)이다. 양장(羊腸)같이 꾸불꾸불한 야로(野路)를 걸어 한 5리쯤 가면 권 도원수(權都元帥)의 기공사(紀功祠)가 있다. 넓은 들에는 벼가 한창 무성하여 자란다. 야로를 한참 걸어 조그마한 산언덕을 넘으면 모옥(茅屋) 6, 7가가 산 밑에 그림같이 점철(點綴)하고, 그중에 단청(丹靑)이 퇴락한 기와집이 있으니 그 집이 기공사다.
-유광렬의 「행주성 전적(戰跡)」에서
1936년 9월 26일
아침에는 예정대로 기제의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를 찾으려고 아홉 시쯤 되어서 애급의 수도 ‘카이로 시’ 애급박물관 근방에 있는 여관 ‘호텔 비에노이즈’를 떠났다.
‘샤리아 쿠브리’ 네거리에서 전차를 타고 한참 교외로 나간다. 다음에 나일강의 지류를 따라 강변으로 전차가 달아나는데 거기는 집채만큼 한 이름 모를 아프리카대륙의 고목들이 가지에서 그 이상한 뿌리를 내려서 땅에 기둥이 되고 그 속은 작은 방 안같이 되어 보인다. 양 떼는 그 가에 몰려 있고 또 가난한 애급여인들이 남루(檻樓)를 입은 양으로 그늘에 앉아 있는데 대개 맨발이 많다.
맨발 이야기가 났으니 말이지 이곳 일꾼들같이 맨발의 가죽이 튼튼한 사람들은 드물 것 같다. 뜨거웁게 태양볕이 쪼이는 포도(鋪道) 위로 몇십리 몇백리를 그대로 혹은 구루마를 끄을고 혹은 말과 낙타를 몰고 간다.
여인들은 먼 길 갈 때는 대략 구루마 위에 그 검은 옷과 수건에 싸여서 실려 간다. 마침 그때 작은 나귀가 5, 6여인과 아이들을 싣고 가는 것을 보니 그놈도 꽤 고역일 것 같다. 조선 같으면 곁을 지나가는 나를 보니 정씨(鄭氏)라고, 놀림을 할 친구도 있을 만도 한데 이곳은 한자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물론, 그들의 옛 상형문자도 쓰지 않고 오직 국수를 이리저리 휘저어 놓은 듯한 ‘아라비아’ 문자를 쓰는 곳이라 나는 조금도 내 성(姓) 때문에 놀림을 받을 염려는 없다. 이렇게 생각은 해보았으나 역시 듣던 관습이 추상되어 그놈 당나귀들의 고역이 퍽도 가련해 보이고 또 호을로 속으로 웃어보기도 했다.
이러한 생각에 잠기고 있는 동안에 화살같이 달아나던 전차는 한참 가서 대 나일강을 건너게 된다. 그 가에 초목도 상당히 무성하고 돛단배도 여러 개 떠 있다. 강변에 야자수를 흘겨보며 누른 물결 위로 범선을 멀리 굽어보는 풍경,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도시의 회회교(回回敎) 대사원의 첨탑을 수평선으로 쳐다보는 흥취란 여기가 아니면 도저히 볼 수 없는 것이다.
두 번이나 전차를 바꾸어 타니 일등 신작로가 버젓이 깔려 있고 좌우 길가에는 이름 모를 가로수가 끝없이 연해 있다. 그 잎사귀는 마치 아카시아 잎사귀같이 보이는데 그보다는 훨씬 영롱하다. 물론 침도 없이 아담스럽고 깨끗해 보이는데 진홍빛 꽃이 그 사이에 피어 있다. 얼마나 귀여운 병목(竝木)들이냐! 그리고 차도와 보도 사이에는 화초재배를 시작한 모양이다. 나는 전차에서 뛰어내려서 낙타에 짐 싣고 가는 토인들과 발을 맞추어 그 길 위로 걸어보고 싶기도 했다.
십수 분을 지나니 눈앞에 사막의 산이 보인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카이로’로 오기까지는 산 하나 없고 또 ‘카이로’에서 여기 오기까지도 산하나 없었다. 그 광활한 대(大)나일평야는 비옥해서 초목과 경작들이 많았건마는 여기부터는 그야말로 사막의 황지로 변한다.
종점에 내리니 눈앞에 태산같이 솟은 것이 있다. 그것이 곧 ‘피라미드’이다. 어릴 적부터 사진에서 보던 그대로의 모모(模貌)이나, 색은 내 상상과는 판이 다르다. 나는 ‘파라미드’라면 때까지 검푸른 것이거니 생각했더랬는데 와서 보니 그러하지 않고 검은색이란 하나도 없이 전체로 황백색이다. 적도에 가까워지는 열대지방인 만큼 태양광선의 직사로 약간의 연한 적갈색의 기미가 보이는 것 같으나 정작 곁에 와 보니 그야말로 백색의 바위와 그 사이에 섞인 흰모래와 흙뿐이다.
-정인섭의 「애급의 여행」에서
모두 이분들의 노정이 눈에 선하다. 독자가 따라다니는 것 같다. 노정이 나타나는 것은 우선 독자에게 친절해 좋다. 그렇게 친절한 필자면 좋은 구경거리를 결코 빼놓지 않고 보여줄 것같이 믿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 노정에 관한 친절이 지나쳐서 여행안내소, 여관조합 같은 데서 주는 안내기나 설명문처럼 되면 안 된다.
(3) 객창감(客窓感)과 지방색이 나와야 한다
향기로운 MJB의 미각을 잊어버린 지도 20여 일이나 됩니다. 이곳에는 신문도 잘 아니 오고 체전부(遞傳夫夫)는 이따금 ‘하도롱’ 빛 소식을 가져옵니다. 거기는 누에고치와 옥수수의 사연이 적혀 있습니다. 마을사람들은 멀리 떨어져 사는 일가 때문에 수심이 생겼나 봅니다. 나도 도회에 남기고 온 일이 걱정이 됩니다.
건너편 팔봉산에는 노루와 묏도야지가 있답니다. 그리고 기우제 지내던 개골창까지 내려와 가재를 잡아먹는 ‘곰’을 본 사람도 있습니다. 동물원에서밖에 볼 수 없는 짐승들을 사로잡아다가 동물원에 갖다 가둔 것이 아니라, 동물원에 있는 짐승들을 이런 산에다 내어놓아준 것만 같은 착각을 자꾸만 느낍니다. 밤이 되면, 달도 없는 그믐 칠야(徹夜)에 팔봉산도 사람이 침소로 들어가듯이 어둠 속으로 아주 없어져버립니다.
그러나 공기는 수정처럼 맑아서 별빛만으로라도 넉넉히 좋아하는 ‘누가’복음도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참 별이 도회에서보다 갑절이나 더 많이 나옵니다. 하도 조용한 것이 처음으로 별들의 운행하는 기척이 들리는 것도 같습니다.
객줏집 방에는 석유등잔을 켜놓습니다. 그 도회지의 석간(夕刊)과 같은 그윽한 내음새가 소년시대의 꿈을 부릅니다. 정형! 그런 석유등잔 밑에서 밤이 이슥하도록 ‘호까’ - 연초갑지(煙草匣紙). - 붙이던 생각이 납니다. 베짱이가 한 마리 등잔에 올라앉아서 슬퍼하는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도회의 여차장이 차표 찍는 소리 같은 그 성악을 가만히 듣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또 이발소 가위소리와도 같아집니다. 나는 눈까지 감고 가만히 또 자세히 들어봅니다.
그리고 비망록을 꺼내어 머룻빛 잉크로 산촌의 시정(詩情)을 기초(起草)합니다.
그저께 신문을 찢어버린
때묻은 흰나비
봉선화는 아름다운 애인의 귀처럼 생기고
귀에 보이는 지난날의 기사(記事)
얼마 있으면 목이 마릅니다. 자릿물-심해처럼 가라앉은 냉수를 마십니다. 석영질 광석 내음새가 나면서 폐부에 한난계(寒暖計)같은 길을 느낍니다. 나는 백지 위에 그 싸늘한 곡선을 그리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청석(靑石) 얹은 지붕에 별빛이 내려쪼이면 한겨울에 장독 터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납니다. 벌레소리가 요란합니다. 가을이 이런 시간에 엽서 한 장에 적을 만큼씩 오는 까닭입니다. 이런 때 참 무슨 재주로 광음을 헤아리겠습니까? 맥박소리가 이 방 안을 방째 시계를 만들어버리고 장침과 단침의 나사못이 돌아가느라고 양쪽 눈이 번갈아 간질간질합니다. 코로 기계기름 내음새가 드나듭니다. 석유등잔 밑에서 졸음이 오는 기분입니다.
‘파라마운트’ 회사 상표처럼 생긴 도회 소녀가 나오는 꿈을 조금 꿉니다. 그러다가 어느 사이에 도회에 남겨두고 온 가난한 식구들을 꿈에 봅니다. 그들은 포로들의 사진처럼 나란히 늘어섭니다. 그리고 내게 걱정을 시킵니다. 그러면 그만 잠이 깨어버립니다.
죽어버릴까 그런 생각을 하여봅니다. 벽 못에 걸린 다 해어진 내 저고리를 쳐다봅니다. 서도천리(西道千里)를 나를 따라 여기 와 있습니다그려!
-이상의 「산촌여정」에서
기행문은 나그네의 글이다. 글의 배경은 모두 산 설고 물 선 객지다. 공연히 여수(旅愁)만을 하소연할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객지에 나와 며칠이 지나면, 더구나 일행이 없이 혼자라면, 길손으로서의 애수가 없을 수 없다. 이 애수란 기행문만이 가질 수 있는 미(美)의 하나다. 그리고 타관다운, 눈에 선 풍정이 전폭으로 풍겨야 한다. 그러자면 기이한 것을 어느 점으로는 묘사해야 한다. ‘하도롱빛 편지’며 ‘팔봉산’이며 ‘공기는 수정처럼 맑아서’며 '석유등잔’이며 모두 지방색, 지방정조의 점철들이다.
(4) 그림이나 노래를 넣어도 좋다
우리는 점심을 먹고 이럭저럭 한 시간이나 넘어 기다렸으나 이내 운무(雲霧)가 걷지를 아니합니다. 나는 새로 두시가 되면 운무가 걷으리라고 단언하고 그러나 운무 중의 비로봉(毘盧峯)도 또한 일경(一景)이리라 하여 다시 올라가기를 시작했습니다. 동으로 산령을 밟아 줄 타는 광대 모양으로 수십 보를 올라가면 산이 뚝 끊어져 발아래 천인절벽(千仞絶壁)이 있고 거기서 북으로 꺾여 성루(城壘壘) 같은 길로 몸을 서편으로 기울이고 다시 수십 보를 가면 뭉투룩한 봉두(峯頭)에 이르니 이것이 금강 만이천봉의 최고봉인 비로봉두외다. 역시 운무가 사색(四塞)하여 봉두의 바윗돌밖에 아무것도 보이지 아니합니다. 그 바윗돌 중에 중앙에 있는 큰 바위는 배바위라는데 배바위라 함은 그 모양이 배(船)와 같다는 말이 아니라, 동해에 다니는 배들이 그 바위를 표준으로 방향을 찾는다는 뜻이라고 안내자가 설명을 합니다. 이 바위 때문에 해마다 여러 천 명의 생명이 살아난다고 그러므로 선인(船人)들은 멀리서 이 바위를 향하고 제(祭)를 지낸다고 합니다.
이 안내자의 말이 참이라 하면 과연 이 바위는 거룩한 바위외다.
바위는 아주 평범하게 생겼습니다. 이 기교한 산령에 어떻게 평범한 바위가 있나 하리만큼 평범한 둥그러운 바위외다. 평범 말이 났으니 말이지 비로봉두 자신이 극히 평범합니다. 밑에서 생각하기에는 비로봉이라 하면 설백색의 검극 같은 바위가 하늘을 찌르고 섰을 것같이 생각되더니 올라와 본즉 아주 평평하고 흙 있고 풀 있는 일편(一片)의 평지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거기 놓인 바위도 그 모양으로 아무 기교(奇巧)함이 없이 평범한 바위외다. 그러나 평범한 이 봉이야말로 만이천 중에 최고봉이요 평범한 이 바위야말로 해마다 수천의 생명을 살리는 위대한 덕을 가진 바위다. 위대는 평범이외다. 나는 이에서 평범의 덕을 배웁니다. 평범한 저 바위가 평범한 봉두에 앉아 개벽 이래 몇 천 만 년에 말없이 있건마는 만인이 우러러보고 생명의 구주(救主)로 아는 것을 생각하면 절세의 위인을 대하는 듯합니다. 더구나 그 이름이 문인 시객(文人詩客)이 지은 공상적·유희적 이름이 아니요 순박한 선인(船人)들이 정성으로 지은 ‘배바위’인 것이 더욱 좋습니다. 아마 이 바위는 문인 시객의 흥미를 끌만하지 못하리라마는 여러 십리 밖 만경창파로 떠다니는 선인의 진로의 표적이 됩니다.
배바위야 네 덕이 크다
만장봉두(萬丈峯頭)에 말없이 앉아 있어
창해(滄海)에 가는 배의
표적이 되다 하니
아마도 성인(聖人)의 공이
이러한가 하노라
만이천봉이
기(奇)로써 다툴 적에
비로야 네가 홀로
범(凡)으로 높단말가
배바위 이고 앉았으니
더욱 기뻐하노라
이윽고 두시가 되니 문득 바람의 방향이 변하며 운무가 걷기 시작하여 동에 번쩍 일월출봉(日月出峯)이 나서고 서에 번쩍 영랑봉(永郞峰)의 웅흔한 모양이 나오며 다시 구룡연(九龍淵) 골짜기의 봉두들이 백운(白雲) 골짜기의 위에 드러나더니 문득 멀리 동쪽에 심벽(深碧)한 동해의 파편이 번뜻번뜻 보입니다. 그러다가 영랑봉 머리로 고고(杲杲)한 7월의 태양이 번쩍 보이자 운무의 스러짐이 더욱 속(速)하여 그러기 시작한 지 불과 4, 5분 후에 천지는 그 물로 씻은 듯한 적나라한 모양을 드러내었습니다. 아아 그 장쾌함이야 무엇에 비기겠습니까. 마치 홍몽(鴻濛) 중에서 새로 천지를 지어내는 것 같습니다.
‘나는 천지창조를 목격하였다.’ 또는
‘나는 신천지의 제막식을 보았다.’
하고 외쳤습니다. 이 맘은 오직 지내본 사람이야 알 것이외다. 흑암(黑暗)한 홍몽 중에 난데없는 일조광선(一條光線)이 비치어 거기 새로운 봉두가 드러날 때 우리가 가지는 감정이 창조의 기쁨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나는 창조의 기쁨에 참여하였다.
하고 싶습니다.
홍몽(鴻濛)이 부판(剖判)하니
하늘이요 땅이로다
창해와 만이천봉
신생의 빛 마시올 제
사람이 소리를 높여
창세송(創世頌)을 부르더라
천지를 창조하신 지
천만 년가 만만 년가
부유(蜉蝣) 같은 인생으로
못뵈옴이 한일러니
이제나 지척에 뫼서
옛 모양을 뵈오니라
진실로 대자연이
장엄도 하구나
만장봉 섰는 밑에
만경파(萬頃波)를 놓단말가
풍운의 불측한 변환(變幻)이야
일러 무삼하리오
참말 비로봉두에 서서 사면을 돌아보면 대자연의 웅대·숭엄한 모양에 탄복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봉의 고(高)는 겨우 6천 9척에 불과하니 내가 5척 6촌에서 이마 두 치를 감하면 내 눈이 해발 6천 14척 4촌에 불과하지마는 첫째는 이 봉이 만이천봉 중에 최고봉인 것과, 둘째, 이 봉이 바로 동해 가에 선 것 두 가지 이유로 심히 높은 감각을 줄뿐더러 그리도 아아(峨峨)하던 내금강의 제(諸) 봉이 저 아래 2천 척 내지 3, 4천 척 밑에 모형지도 모양으로 보이고, 동으로는 창해가 거리는 4십 리는 넘겠지마는 뛰면 빠질 듯이 바로 발아래 들어와 보이는 것만 해도 그 광경의 웅장함을 보려든 하물며 사방에 이 봉 높이를 당한 자 없으므로 안계(眼界)가 무한히 넓어 직경 수백 리의 일원을 일모(一眸)에 부감(俯瞰)하니 그 웅대하고 장쾌하고 숭고한 맛은 실로 비길 데가 없습니다.
비로봉 올라서니
세상만사 우스워라
산해만리(山海萬里)를
일모에 넣었니
그따위 만국도성(萬國都城)이
의질(蟻垤)에나 비하리오
금강산 만이천 봉
발아래로 굽어보고
창해의 푸른 물에
하늘 닿은 곳 찾노라니
청풍이 백운을 몰아
귓가로 지나더라
-이광수의 「금강산 기행」에서
흥취와 경이가 돌발적으로 나오는 글이 기행문이다. 이미 안 지 오랜 고적도 만나고 보면 감회가 새삼스럽고, 여태껏 기어오르던 산이라도 한 걸음 더 올라 보면 전혀 다른 광경이 펼쳐지는 수가 있다. 그런 돌발적으로 격해지는 감회, 흥취, 경이를 산문으로만 서술하기엔 너무나 늘어질 뿐 아니라 감격 그대로를 전할 수가 없으니 뜻보다 정(情)의 표현인 운문을 이용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방위를 위해서나 실경을 위해서나 그림을 그려 글 속에 끼워넣는 것도 일취(一趣)가 있는 솜씨다.
그러나 노래나 그림에 상당한 실력이 없어 본문에 손색이 될 만한 정도면 차라리 단념하는 것이 현명하다.
(5) 고증을 일삼지 말 것
일청전(日淸戰)의 명소로서 오인(吾人)의 인상이 얕지 아니한 성환(成歡)역의 부근에서는 벌써 눈록(嫩綠)을 바라보는 수주(數株)의 수양(數楊)을 보았다. 속요(俗謠)에 나오는 천안삼거리 능수버들을 생각하게 한다. 부강(芙江)에 오니 황량한 촌락에 행화(杏花)가 만발하였고 신이화(莘荑花)는 더욱 한창이다.
신이화락행화개(莘荑花落杏花開)라는 한시가 있거니와 두 가지 꽃이 일시에 만개한 것은 재미있다. 신이화를 속명(俗名)에 ’개나리‘라고 하니 ’나리‘는 백합의 속명이요 ’개나리‘는 가백합(假百合)의 속어이라. 이로써 구어 ’캐나리‘의 귀화어(歸化語)로 생각하는 이가 있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백합과 신이가 일(一)은 구근(球根)식물이요 일은 관목(灌木)이지마는 꽃이 동과에 속한 고로 이러한 명칭을 지은 것이다. 그러나 ’개나리‘를 신이로 쓰는 것은 잘못이니 연교화(連翹花)가 그 참인 것이다.
-안재홍의 「춘풍천리」에서
일찍이 강원도는 산천이 무무하여 그 산하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사람들은 둔탁(純濁)한 양으로 들었다. 춘향전 비두 팔도산천 타령에도 이러한 의미로 씌어진 듯 기억된다. 그러나 나는 이번에 이 산하를 대하고 그 그른 관찰임을 알았다. 옛날엔 교통이 불편하던 산협(山峽)지대라 아무리 산하의 영기(靈氣) 종집(鍾集)하더라도 문화의 중심지인 서울과 출입이 잦지 못하였음에 민지(民智)의 발달이 다른 곳에 비하여 떨어졌던 것이요 결코 산천의 죄는 아닌 것이다. 땅은 넓고 사람은 희소하니 대문만 나서면 산이요 밭이다. 평야가 없으니 화곡(禾穀)을 심을 생의도 안한다. 쌀밥을 아니 먹으니 반찬도 그리 필요하지 않다. 감자를 심고 콩을 거두어 감자밥에 산채를 씹으니 소금 한 가지면 그만이다. 가끔 가다 노루를 잡고 사슴을 쏘니 고기에도 그리 주리지 않는다. 일출이경(日出而耕)하고 착정이음(鑿井而飮)하니 제력(帝力)이 하유어아재(何有於我哉)다. 이것이 옛날 그들의 순후관대(淳厚寬大)한 장자풍(長者風)의 생활이다. 물론 지금이야 어디 이것을 꿈에나 생각하랴. 기차가 달리고 경편차(輕便車)가 구르고 자동차가 쫓으니 쓰고 신 어지러운 세상물결이 도리어 이 천민(天民)의 자손들을 괴롭힐 것이다.
복계(福溪)서 점심을 먹는 동안 기차는 저 유명한 검불랑(劒拂浪)을 향하여간다. 푹 푹푸, 푸푸푸 차는 죽을힘을 다하여 올라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걸음만도 못한 것이었다. 대자연과 문명, 자연 앞에 준동(蠢動)하고 있는 조그마한 사람의 힘, 그것은 마치 어린애의 장난과 같다. 푸푸푸 헛김 빠진 소리만 저절로 터져나온다. 만일 이것이 동물이라면 전신엔 함빡 땀으로 물초를 하였을 것이다. 칠전팔도(七顚八倒) 그 기어올라가는 꼴이 마음에 마치 지각을 가진 동물을 타고 가는 양 안타까운 착각을 가끔가끔 느끼며 홀로 가만한 고소를 날려버렸다.
검불랑, 칼을 씻어 물결에 후려친다. 삼방고전장(三防古戰場)과 그럴듯 무슨 인연이 있는 것 같은 이름이다.
차가 가지 아니하니 ’정마부전인불어(征馬不前人不語)!' 환상은 별안간 이 글귀를 불러일으켰다. 삼방유협(三防幽峽)으로 쫓긴 선종(善宗)이 주름 잡힌 이맛살과 추해진 애꾸눈을 부릅뜨며 어이없는 기막힘을 직면하여 여성일갈(厲聲一喝) 반신(叛臣) 왕건(王建)을 목통이 터져라 하고 호령하다가 나는 독시(毒矢)에 외눈을 마저 맞고 마상에서 떨어져 차타(蹉跎)하는 꼴이 보인다.
십만 대병이 물결에 휩싸인 듯, 아비규환, 갈 길을 잃고 삼방유협에 생지옥을 벌인 모양이 눈앞에 보인다. ‘분수령 육백삼 미돌(分水嶺六百三米突)’ 허연 나무에 묵흔(墨痕)이 지르르 흐르게 이렇게 씌어 있다. 기차는 지금 조선의 척량(脊梁)을 넘고 있는 것이다.
세포역(洗浦驛)을 지나니 이곳은 목장지대, 면양을 기르고 말을 치기에 적합한 곳이다. 어지러이 핀 야화(野花), 싱싱하게 푸른 잡초, 공기는 깨끗하고 물은 맑다. 이 가운데 말은 살지고 양은 기름지다. 그림 같은 방목의 정경이 또한 진세(塵世)의 것이 아닌 것 같다. 이왕직(李王職)의 말을 치는 목장과 난곡농장(蘭谷農場)의 방목들이 있다는 데다.
다시 차는 산협을 끼고 돈다. 일찍이 보지 못하던 천하의 절경이다. 한산을 지나면 한 물이 흐르고 한 물이 굽이치면 한 굴이 나온다. 캄캄한 굴속이 지루한가 하면 어느덧 명랑한 푸른 산이 선녀의 치마폭인 듯 주름잡아 감돌아들고 물이 인제 다했는가 하면 천길이나 되는 다리 아래엔 살진 여울이 용솟음치니 돌은 뛰어 솟고 물은 부서져 눈(雪)을 뿜는 양 백룡이 어우러 싸우는 듯, 끊어진 언덕을 휩쓸어 어마어마한 큰 소리를 지르고 내를 이루어 달아난다.
아이들은 박장(拍掌)하고, 나는 청홍(淸興)에 취하였다. 반복무상(反覆無常). 이렇게 삼방유협에 닿으니 산이 감돌기 스무 번, 물여울이 포효하기 열아홉 번, 터널의 어둠이 열네 번, 천하의 기승(奇勝)을 한곳에 몰아놓았다. 만일 십오야 월광을 타고 이곳을 지난다면 달이 부서지고 금(金)이 용솟음치는 위관기경(偉觀奇景)을 한 가지 더 볼 수 있을 것이다.
-박종화의 「경원선 기행」에서
전자엔 신이화에 대한 학술적 견해가 있고, 후자엔 삼방고전장에 관한 역사적 회고가 있다. 독자에게 가르침과 일깨워짐이 있다. 그러나 모두 취미 범위 내에서기 때문에 좋다. 기행문에 나오는 학문이나 역사는 취미와 회고 정도에서 의미가 있지 무슨 강의를 하듯 고증과 주장을 일삼아서는 기행문이 아니라 학문이다. 기행문에서는 흥취를 내세울 뿐, 지식을 자랑할 것은 아니다.
이 외에 더욱 주의할 것은 감각이다. 감각이 날카로워야 평범한데서도 맛있게, 인상적이게 느낄 수 있다. 이상의 「성천 기행」의 일절은 평범한 사실을 얼마나 아름답게 썼는가? 그리고 노정과 일정이 길고 먼 데서는 형식을 일기풍으로 취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또 당일로 다녀오는 조그만 소풍기 같은 데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에 주의하는 것이 요령을 잃지 않는 방법일 것이다.
① 날씨
② 가는 모양
③ 가는 곳과 나
④ 상상하던 것과 실제
⑤ 새로 보고 들은 것
⑥ 가장 인상 깊었던 것
⑦ 거기서 솟은 추억과 희망
⑧ 이날 전체의 느낌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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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붕(大鵬) 하루에 구만 리(里)를 날아간다는, 매우 큰 상상의 새,
북명(北溟) 북쪽의 큰 바다.
단공(知節) 짧은 지팡이
진구(塵區) 티끌세상. 즉 속세.
안막(眼膜) 눈알의 앞쪽에 약간 볼록하게 나와 있는 투명한 막. 각막,
장풍(長風) 멀리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
수시(垂示) 가르침을 주거나 받음.
활연(豁然) 환하게 터져 시원한 모양.
삼척안두(三尺案頭) 세 자 폭의 책상머리,
향촌(鄕村) 시골 마을,
양장(羊腸) 양의 창자같이 굽이굽이 험한 모습.
야로(野路) 들길.
기공사(紀功祠) 공훈을 기리는 사당.
모옥(茅屋) 띠나 이엉 따위로 지붕을 인 초라한 집,
점철(點綴) 흐트러진 여러 점이 서로 이어짐.
전적(戰跡) 전쟁을 한 흔적.
애급(埃及) '이집트'의 음역어,
남루(檻樓)낡아 해진 옷.
포도(鋪道) 포장도로,
구루마 수레, 달구지.
회회교(回回敎) 이슬람교,
병목(竝木) 가로수,
토인(土人) 어떤 지방에 대대로 붙박이로 사는 사람.
모모(模貌) 모양.
객창감(客窓感) 나그네가 여행지에서 느끼는 감정.
MJB 커피의 일종.
체전부(遞傳夫) 우편집배원.
하도롱지(hatoron紙) 화학 펄프를 사용한 다갈색의 질긴 종이 포장지나 봉투를 만드는 데에 씀.
개골창 개울.
칠야(徹夜) 아주 캄캄한 밤.
연초갑지(煙草匣紙) 담뱃갑을 싼 종이.
기초(起草) 글의 초안을 잡음.
자릿물 밤에 자다가 마시기 위해 머리맡에 준비해두는 물. 자리끼.
한난계(寒暖計) 온도계,
청석(靑石) 푸른 빛깔을 띤 응회암, 실내 장식이나 건물의 외부 장식에 씀.
여수(旅愁) 객지에서 느끼는 쓸쓸함이나 시름.
타관(他官) 자기 고향이 아닌 고장. 타향.
천인절벽(千仞絶壁) 천길 낭떠러지,
성루(城壘) 성 둘레에 쌓은 담,
사색(四塞) 사방을 막음.
선인(船人) 뱃사람,
설백색(雪白色) 눈의 빛깔처럼 흰색,
검극 칼과 창
창해(滄海) 넓고 큰 바다.
기(奇)로써 기묘한 모양으로,
심벽(深碧) 매우 짙게 푸름.
고고(杲杲) 밝은 모양. 속(速)하다 빠르다.
홍몽(鴻濛) 하늘과 땅이 아직 갈리지 않은 혼돈상태,
일조광선(一條光線) 한 줄기 빛,
부판(剖判) 둘로 갈려 나누어짐.
부유(蜉蝣) 하루살이.
아아(峨峨) 산이나 큰 바위 같은 것이 뾰족뾰족 치솟은 모양.
안계(限界)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범위.
일모(-眸) 한눈에 바라봄. 또는 한 번 봄,
부감(俯瞰) 높은 곳에서 내려다봄.
의질(蟻垤) 개밋둑.
오인(吾人) 나.
눈록(嫩緣) 새로 돋아나는 어린잎의 빛깔과 같이 연한 녹색,
수주(數株) 몇 그루,
수양(數楊) 수양버들.
행화(杏花) 살구꽃,
신이(莘荑) ’개나리‘를 잘못 일컫는 말.
신이화락행화개(莘荑花落杏花開) ’개나리꽃이 지고 살구꽃이 피었네.‘
구어(歐語) 유럽의 언어,
구근(球根) 알뿌리,
관목(灌木) 키가 작고 원줄기와 가지의 구별이 분명하지 않으며 밑동에서 가지를 많이 치는 나무.
연교화(連翹花) 개나리,
무무(貿貿) 어둡고 흐림,
비두(飛頭) 편지나 문서 따위의 첫머리,
산협(山峽) 산속의 골짜기.
종집(鍾集) 모임.
민지(民智) 백성의 슬기나 지혜.
화곡(禾穀) 벼에 딸린 곡식을 통틀어 이르는 말.
생의(生意) 어떤 일을 하려고 마음먹음.
일출이경(日出而耕)하고 착정이음(鑿而)하니 제력(帝力力)이 하유어아재(何有於我哉) ‘해가 뜨면 밭을 갈고 우물을 파 마시니 제왕의 힘이 어찌 내게 미치리오.’ 태평성대를 이르는 말.
순후관대(淳厚寬大) 순박하고 인정이 두터우며 너그러움.
장자풍(長者風) 덕망이 높고 많은 경험으로 세상일에 익숙한 사람의 풍채.
경편차(輕便車) 철길 너비가 좁고 규모가 간단한 경편 철도에 이용하는 열차,
준동(蠢動)벌레 따위가 꿈적거린다는 뜻으로, 불순한 세력이나 보잘것없는 무리가 법석을 부림을 이르는 말.
물초 온통 물에 젖음.
칠전팔도(七顚八倒) 일곱 번 구르고 여덟 번 거꾸러짐.
고소(苦笑) 쓴웃음.
정마부전인불어(征馬不前人不語) 말은 나아가지 못하고 사람도 말이 없음.
삼방유협(三防幽峽) 함경남도 안변군 신고산면에 있는 협곡. 경원선 검불랑역 부근에서 시작해 북동쪽으로 뻗어 있음.
선종(善宗) 궁예가 초목에 묻혀 승(僧)으로 있을 때의 이름,
여성일갈(厲聲一喝) 성이 나서 큰 소리를 한 번 지름.
반신(叛臣) 임금을 반역하거나 모반을 꾀한 신하,
독시(毒矢) 독화살,
차타(蹉跎) 미끄러져 넘어짐.
미돌(米突) '미터(meter)'의 음역어,
묵흔(墨痕) ①먹물이 묻은 흔적. ②글씨를 쓴 붓의 자국.
척량(脊梁) 등마루의 거죽 쪽.
야화(野花) 들꽃,
진세(塵世) 티끌세상, 정신에 고통을 주는 복잡하고 어수선한 세상.
박장(拍掌) 두 손바닥을 마주 침.
청흥(淸興) 맑은 홍과 운치.
기승(奇勝) 기묘하고 뛰어난 경치,
위관기경(偉觀奇景) 훌륭하고 장엄한 광경과 기묘한 경치.
-이태준 『문장강화』 중에서
2025. 4. 4
맹태영 옮겨 적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