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2.0한국테니스의 자존심 이형택
11월 마지막 주는 겨울의 관문이다. 11월 26일 오후 텅 빈 올림픽공원 센터 코트에는 매서운 바람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냉기가 흐르는 하드코트가 더욱 싸늘하게 느껴졌다.
얼마 뒤 테니스 라켓을 든 한 남자가 코트에 들어서자 바람이 멈췄다. 남자는 테니스가 자신의 인생을 바꿔놓았다고 했다. 정상에 서기 위해 오랜 시간 고독한 싸움을 했고 윔블던과 US오픈에서는 전세계를 상대로 포효하기도 했다.
어느새 서른한 살이 됐지만 테니스는 여전히 남자의 모든 것이다. 한국테니스는 남자와 만나며 희망을 보았다. 그 남자의 이름은 이형택(31,삼성증권)이다.
이형택
생년월일│1976년 1월 3일
출생지│강원도 횡성
신체조건│180cm/81kg
약력│횡성 우천초-원주중-춘천 봉의고-건국대-삼성증권
주요경력
1993년 단식 42연승, 전국대회 6관왕
1994년 국가대표
1998년 방콕아시아경기대회 단체전 금메달, 복식 은메달
1998년 삼성증권 입단
1999년 제20회 팔마(스페인) 유니버시아드대회 단식 우승
요코하마 챌린저 단식 우승
2000년 US오픈 16강
2003년 ATP(남자프로테니스)투어 아디다스 인터내셔널 단식 우승
2005년 삼성증권배 국제 챌린저 단식 우승
2006년 ATP챌린저 로마노컵 복식 우승, 부산오픈 단식 우승
피프스서드뱅크 클래식 우승
도하아시아경기대회 단체전 금메달, 단식 은메달
2007년 윔블던 32강, US오픈 16강
이형택은 라켓을 부러뜨렸다.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나를 이길 수 있는 상대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1993년 춘천 봉의고 3학년이던 이형택은 그해 전국대회 6관왕을 포함해 단식 42연승을 달리고 있었다.
장호배 전국주니어테니스대회에서 우승하면 그해 전승이었다. 그러나 패배였다. 결승전에는 고교 동기생인 정성환이 기다리고 있었다. 경기 시작부터 라켓을 잡은 손의 감각이 이상했다. 공이 자꾸 라인을 벗어났다.
정성환에게는 지고 싶지 않았다. 이런 기억은 예전에도 있었다. 이형택은 초등학교 때도 이기고 싶은 상대를 만나면 혈관이 꿈틀거렸다.
관중석에서는 정성환과 이형택의 어머니가 같이 경기를 보고 있었다. 세트스코어 1-1까지 끌고 갔지만 3세트를 내줬다. 연승신화는 그렇게 끝났다.
승부 근성
졌다는 게 분했다.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이형택은 경기에 사용한 라켓만 박살낸 게 아니었다. 가방 속에 있는 모든 라켓과 테니스 장비를 만신창이로 만들어 버렸다.
고교생이 할 행동이 아니었지만 봉의고 김종관 코치는 이날만은 이형택을 잠자코 바라봤다.
이형택은 지난날을 떠올렸다. 그의 고향은 고급 스포츠라는 테니스가 어울리지 않는 시골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감자밭뿐이었다. 이반 랜들(전 세계랭킹 1위,체코)이란 이름은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다.
그래도 라켓을 잡은 이상 열심히 했다. 중학교 때는 물을 뺀 수영장에 네트를 쳐놓고 연습하기도 했다. 하다 보면 될 줄 알았다. 어떤 목표가 보이는 것 같았다.
그때는 희미했다. 14년이 지난 현재는 많은 것이 변했다. 쓰라린 패배를 안겼던 친구 정성환과는 요즘도 자주 연락한다. “야, 그때 그랬지. 방송 해설할 때 이야기 좀 할까.”
이형택은 친구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그날의 패배로 가슴에 ‘승부 근성’이라는 단어를 깊게 새겼기 때문이다.
<소속팀 주원홍(51,삼성증권) 감독과 같은 아파트에 산다면서요.>
바로 앞동이에요. 시골에서 음식을 가져오면 감독님께 드릴 수 있어 좋습니다.
<11월 20일 피트 샘프라스(미국)-로저 페더러(스위스)전에서 방송 해설가로 데뷔했는데 어땠나요.>
말을 잘 못하는 편이라 긴장을 많이 했죠. 생방송이라 힘들었어요. 잠시 멍하게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아나운서가 질문을 했어요. 동문서답을 하고 말았죠(웃음).
경기를 바깥에서 보니 경기하면서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조금 더 넓게 보였어요. 페더러와 샘프라스 경기는 정말 보기 어려운데 국내에서 열려 기분이 좋았습니다.
<이형택 선수 홈페이지에 가보니 딸 송은(2)이 자랑이 눈에 띄었습니다. 아들 창현(1)이보다 좋은가요.>
네, 아들보다 딸이 좋습니다. 우리 집안 쪽이 딸이 없어 그런 것 같습니다. 첫째인 송은이가 더 예쁜 것 같아요. 운동 끝나고 집에 오면 장난을 치느라고 여기저기 숨어요. 정말 귀엽습니다.
<강원도 사랑이 남다릅니다.>
태어난 곳이라 애착이 가요. 김진선 도지사님이나 동네 면장님이 관심을 꾸준히 가져주셨습니다. 고등학교를 나온 춘천도 마찬가지입니다.
<횡성 우천초교 4학년 때 테니스를 시작했습니다.>
운동을 좋아했어요. 시골이다 보니 운동부가 없었죠. 동네 축구만 했는데 어느 날 테니스장이 학교에 들어서서 신기했어요. 재미있게 보다가 이종훈 선생님이 “테니스를 해 보겠냐”고 권유하셨고 몇 가지 테스트를 받은 뒤 시작하게 됐죠. 테니스부가 그때 처음 생겼습니다.
<유년기는 어땠나요.>
평범하고 단순한 학생이었어어요. 노는 것 좋아하고 사고뭉치고. 툭하면 아이들하고 싸웠어요.
<싸움은 잘했나요.>
잘 못했어요(웃음). 테니스를 하면서 참을성이 생겼고 싸우는 일이 없어졌죠. 한 번 크게 싸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중3 때였는데 김태희라는 친구와 연습경기를 하다가 수세에 몰렸어요.
그 친구에게 많이 져서 무척 이기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솔직히 내가 봐도 아웃이었는데 라인 안에 들어왔다고 박박 우겼죠. 그러자 녀석도 공 자국을 보면서 아웃이라고 소리 지르더군요.
결국 주먹을 주고받으며 싸웠죠. 내가 때렸는데 친구가 머리를 숙이는 바람에 오른손이 부러져 한 달 동안 깁스를 하고 경기에 못나갔죠.
<어린 시절 테니스 우상은 누구였나요.>
중학교 때까지 TV를 보지 못해 테니스선수를 잘 몰랐어요. 국가대표가 누군지도 몰랐죠. 고교 때 테니스 잡지를 보면서 조금씩 눈길이 갔습니다. 스테판 에드베리(스웨덴)나 랜들을 좋아했어요.
그러나 이상하게 보리스 베커(독일)는 싫었어요. 지금 보면 멋있는데 그때는 끌리지 않았습니다. 안드레 애거시(미국)도 대단한 선수였다고 생각합니다.
<전미라(MBC ESPN 해설위원)와 인연도 각별합니다. >
주니어 상비군이었던 1992년 고교 2학년 때 처음 만났는데 중학교 3학년이었던 (전)미라가 그땐 저보다 더 유명했죠. 완전 선머슴이었죠. 머리도 짧고 얼굴도 시커멨는데 지금 용 됐죠(웃음). 미라는 내가 누군지 처음에는 몰랐을 거예요.
<전미라는 그때 이형택이 장난을 많이 쳤다고 했습니다.>
많이 쳤죠. 장난하다 다친 적도 여러 차례였습니다. 초등학교 때 계단에서 뛰어 놀다 발목이 돌아가기도 했고. 선생님들에게 주의를 많이 받았죠. 장난은 단순했어요. 뒤에서 확 밀어 넘어뜨리곤 했는데 대학교 때까지 그랬어요.
주원홍 감독은 고3때 처음 본 이형택이 뛰어난 선수는 아니었지만 영국에서 러닝을 지시했을 때 뛰어난 탄력이 눈에 들어왔다고 했습니다.
당시 주니어 상비군끼리 리그전을 해 4명을 뽑아 협회 비용으로 유럽전지훈련을 보냈어요. 그때 감독님이 (박)성희(전 국가대표) 누나를 영국에 데리고 왔는데 그때 처음 뵈었죠.
원래는 살살 뛰려고 했는데 뛰다 보니 지기 싫어서 계속 1등으로 들어왔어요. 그 장면이 인상적이셨나 봐요. 사실 순발력은 어릴 때부터 좋았어요. 다른 것은 뒤져도 외국선수들에게 달리는 것만큼은 밀린다고 생각 안 했죠.
<건국대 1학년 때인 1994년 처음 국가대표가 됐습니다. 여러 선배들이 있었을 텐데요.>
국가대표가 될 실력에는 모자랐죠. 장의종, 김치완, 윤용일 선배가 당시 대표선수였습니다. 나는 유망주 발탁 케이스로 전영대 감독님이 추천해 들어간 건데 여기저기서 “이형택이 무슨 국가대표냐”고 말들이 많았죠. 보여준 게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그해 홍콩에서 열린 아시아챔피언십 대회에서 준우승을 하고 선배들이 졌던 인도네시아의 수안디 같은 선수를 이기면서 인정을 받기 시작했죠.
<대표팀에서 승부 근성은 어떠했나요.>
선배들은 내겐 하늘이었죠. 고교를 갓 졸업하고 상비군 훈련에 참가해 형들 신발을 많이 얻어 신었죠. 형편이 어려워 “신발 한 켤레만 주세요”라고 조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신발이나 티셔츠 같은 것을 얻으면 기분이 좋았습니다.
형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운동을 하는 게 제겐 영광이었습니다. 나이 차가 워낙 많이 나다 보니 잘 챙겨줬습니다.
처음에는 선배들을 이겨야겠다는 마음보다는 긴장감이 컸죠.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경기를 같이 하면서 ‘조금만 더 하면 이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올라가려면 선배들을 넘어서야 했고. 안 이기려면 운동선수 할 필요 없죠.
<목표는 어떻게 잡았나요.>
고교 때는 국가대표가 꿈이었어요. 그 이상은 뭐가 있는지 몰랐습니다. 대학에 와서 (윤)용일이 형이나 성희 누나가 외국대회에 나가 성적을 내는 걸 보면서 조금씩 눈을 떴습니다.
그런데 퓨처스 대회에서 내가 이긴 선수들이 챌린저에 나가고 100위 안에 드는 것을 보고 “아, 저 선수 내가 잡았던 선수인데. 나도 할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죠.
1998년 삼성증권에 입단했습니다. 실업팀에서 만난 주원홍 감독의 인상은 어땠나요.
굉장히 어려우면서도 편했어요. 어른들을 보면 원래 눈도 잘 마주치지 못하고 그랬죠. 감독님은 그때 지금과 같은 백발은 아니었습니다(웃음).
본격적으로 외국에 가기 전에 목표를 세계 150위로 잡았습니다. 그냥 막연히 생각한 것이었어요. 감독님이나 나나 모두 안 될 거라 생각했어요.
<라이벌이었던 윤용일(삼성증권) 코치와 관계가 남다릅니다.>
1994년 아시아선수권대회 복식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용일이 형과 호흡이 잘 맞았습니다. 작년부터 선수와 코치로 같이 보내는 시간이 늘었습니다. 용일이 형은 말수는 적지만 감독님처럼 사람을 편하게 합니다. 배운 점이 많죠.
<주감독은 어떤 내용을 주문했나요.>
승패에 연연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져도 좋다. 공격적으로 해라. 네 스타일대로 공을 치고 앞으로 나가라”가 핵심이었죠. 지금도 그렇게 이야기 하십니다.
감독님은 선수들 의견을 많이 들어주십니다. 대화로 문제를 풀어나가면서 점점 자신감을 키우게 됐죠. 아, 또 하나 있습니다. “코트 위에서 절대 고개 숙이지 마라.”
그러나 테니스는 고개를 숙이면 안 된다. 일단 경기가 시작되면 끝날 때까지 작전타임 없이 1대1 싸움이다. 누구도 고통을 대신 해줄 수 없는 스포츠가 테니스다.
시간이 흐를수록 네트 건너편에 있는 상대의 지친 얼굴이 보인다. 힘든 얼굴을 드러내는 건 약점을 노출하는 것이다. 그래서 테니스선수들은 힘든데도 “후, 후” 심호흡을 하며 힘들지 않은 척 한다. 긴 랠리가 이어질수록 더욱 그렇다.
이형택은 이때 “밝은 표정을 짓고 좋은 기분을 유지해야 한다”고 했다. 때로는 힘들지 않은데도 힘든 척하는 선수도 있다. 세계적인 선수가 되려면 이런 속임수 얼굴까지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마지막 한 포인트까지 포기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형택은 2000년대 이후 홀로 세계무대에 섰다. 무너질 수 없었다. 이기면 다음을, 또 이기면 그 다음을 생각하며 버텼다.
이형택은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 봤다. 거울이 이형택에게 말했다. “한국의 이형택, 세계의 이형택.”
<1998년 방콕아시아경기대회 테니스 남자 단체전 금메달로 병역을 면제 받았습니다. SPORTS2.0과의 인터뷰(67호)에서 이것이 선수생활에 중요한 계기가 됐다고 했습니다.>
사실 그때 금메달을 따지 못하면 IMF 위기 때문에 삼성증권 테니스단이 해체될 뻔했습니다. 금메달로 팀이 유지됐고 많은 변화가 왔죠. 금메달로 군대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면 아직도 세계무대에 도전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며 예전처럼 국가대표가 꿈이고 100위 언저리를 맴돌았을 겁니다.
<2000년 9월 US오픈 본선 진출은 ‘러키 루저(Lucky Loser)’를 통해 올라갈 만큼 극적이었습니다.>
어떤 선수가 본선에 못 뛰게 돼 예선에서 진 선수 가운데 랭킹이 가장 높았던 내가 출전 자격을 얻는 행운을 안았습니다. 상위 라운드로 올라갈수록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그러나 공이 잘 맞았고 체력적으로도 자신이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이 정도 했으면 잘한 것이다’라는 마음으로 편하게 경기했습니다. 16강전에서 당시 4번 시드였던 샘프라스가 아닌 다른 선수와 만났다면 더 좋은 경기를 했을 거예요.
<당시 주원홍 감독은 외신기자들에게 이형택이 샘프라스에게 이긴다고 호언했습니다. 공이 무거웠다는 것을 이유로 꼽았는데요.>
스윙이 자신 있게 나갔습니다. 위축되면 팔을 완전히 뻗지 못하는데 치는 공마다 다 들어갈 것 같았어요. 외국선수들은 나를 보고 “처음 보는 녀석인데 누구야”라며 수군거렸습니다. 나에 대한 정보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니까요.
샘프라스와 16강전을 앞두고 “평소 내가 샘프라스와 싸우면 몇 게임이나 따낼 수 있을까 상상했다”고 말했습니다. 전날 밤 긴장돼 잠을 못 잤습니다. 속된 말로 “아, 이거 빵(6-0)나는 거 아니야”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전세계 테니스팬들이 보는 가운데 망신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습니다. 1세트 첫 게임을 잡고 “일단 영패는 면했다”는 안도감이 생겼죠. 그런데 경기하다가 “이거 해볼 만하다”는 생각에 부담 없이 라켓을 휘둘렀습니다.
0-3으로 졌어도 게임 스코어(6-7<4-7> 2-6 4-6>는 비슷했다고 말들 했지만 사실 버거웠죠.
<2000년 11월 세계랭킹 99위에 올랐습니다.>
100위 안에 들어간 뒤 더 올라갈 수 있다고 봤어요. 그러나 그때부터 상대선수들이 나의 단점을 연구해서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2000년 삼성오픈대회 16강전에서는 고란 이바니세비치(크로아티아)가 신경질을 내며 라켓을 부러뜨렸는데.>
실내코트였는데 이바니세비치가 짜증을 많이 냈죠. 나를 처음에 우습게 보고 깔봤는데 자기가 생각하기에 쉽게 경기가 풀리지 않자 라켓을 부러뜨리고 경기 못하겠다며 경기장을 나가버렸죠. 결국 기권승을 거뒀습니다.
<2001년부터 앤디 로딕(미국)과 경기를 많이 했습니다.>
가장 많이 했죠. 한 번 이겼을 거예요. 10번 지고. 경기할 때는 붙어볼 만한데 결국에는 집니다. 좋은 선수죠. 스트로크에서는 내가 더 많은 포인트를 따는데 서브가 워낙 강해 힘들었어요.
일반적으로 서브가 센 선수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이바니세비치의 서브는 로딕보다 강하지 않았습니다. 왼손잡이니까 각이 까다롭죠. 묵직하기로는 샘프라스의 서브가 최고입니다.
<2001년 사이베이스오픈에서는 애거시에 1-2로 석패했습니다.>
‘아, 이러다가 이기는 거 아니야?’ 이런 마음에 오히려 내가 더 불안했습니다(웃음). 애거시는 스트로크가 굉장히 좋은 선수였어요. 빠르지는 않은데 시야가 넓었죠. 리턴도 대단했습니다. 두뇌 회전도 최고 수준이었습니다.
<마이클 창(미국), 파라돈 스리차판(태국)과도 경기를 했습니다. 순위를 매긴다면.>
내가 제일 부족하죠. 그래도 많이 따라가지 않았나 싶어요. 2001년 애틀랜타 투어에서 마이클 창과 대결해 2-0(6-4 7-6)으로 이겼는데 창이 내게 다가와 “당신은 뛰는 것은 톱10 안에 들어갈 선수”라고 말하더군요.
스리차판은 처음에는 이기다 나중에는 내가 밀렸죠. 2승3패입니다. 스리차판은 훌륭한 선수에요. 체격이 좋아 서양 선수와 경기해도 전혀 밀리지 않죠. 아시아 선수로 스리차판 같은 선수가 나오기는 힘들 것 같아요.
<2002년 부산아시아경기대회 때 국가대표팀 처우 문제 등을 놓고 갈등이 있었습니다.>
당시 대표팀 감독의 폭행 사건이 있었습니다. 선수와 감독 사이 불화가 계속 됐죠. 아기가 있고 가장인 선수를 구둣발로 차고 그랬는데 인간적으로 감독과 같이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감독으로서 신뢰감을 주지 못했습니다.
<2003년 아디다스 인터내셔널 테니스대회에서 우승하면서 한국테니스 사상 첫 ATP투어급 대회를 거머쥐었습니다.>
예전에 졌던 선수들을 다 이기면서 올라갔어요. 결승전에서 만난 후안 카를로스 페레로(스페인)는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만나 아쉽게 진 적이 있어 싸워볼 만했어요. 그렇게 편한 상태로 경기한 적은 처음이었어요.
지금도 집에 가면 당시의 우승 사진과 대진표가 있는데 다시 보면 ‘아, 내가 어떻게 우승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의욕을 잃었거나 부진했을 때 그때를 많이 떠올리고 용기를 얻습니다.
<투어 우승의 의미가 과소평가되고 있습니다. >
일반 팬들은 잘 모르는 게 아쉽죠. 테니스 세계랭커는 1천 명이 넘습니다. 랭킹에 들지 못하는 선수는 셀 수도 없죠. 축구로 따져보면 박지성 선수가 세계랭킹 몇 위의 축구선수일까요.
테니스 세계랭킹 30위대는 다른 스포츠와 쉽게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테니스선수들은 100위 안에 들면 일단 실력을 인정합니다.
<2003년 US오픈과 지난해 윔블던에서 만난 레이튼 휴이트와의 경기를 기억하는 테니스팬들이 많습니다.>
3시간 17분 동안 경기한 윔블던이 아쉬웠죠. 내 승부정신이 부족했던 것 같아요. 경험에서도 밀렸던 것 같고. 휴이트는 체격은 나와 비슷한데 근성과 눈빛이 엄청납니다. 그걸로 세계랭킹 1위까지 간 거죠. 많은 것을 배운 경기였어요.
<2005년 제6회 삼성증권배 챌린저대회 니콜라스 톰먼(프랑스)전에서는 타이브레이크 0-6에서 기적 같은 역전승을 거뒀습니다.>
이길 것이라 생각 못했죠. 0-6이 되는 순간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습니다. ‘여기서 뒤집는 선수가 있을까. 역전하면 정말 웃기겠다’하는 생각에 코트 뒤쪽을 바라보면서 웃었죠.
그런데 포인트 하나하나를 잡아가니까 상대가 당황했어요. 관중들이 소리를 지르며 많이 응원했습니다. 타이브레이크에서 0-6이면 사실 끝난 건데 앞으로도 그런 경기는 다시 못할 것 같습니다.
<페더러(2패)와 라파엘 나달(2패)과도 경기했습니다.>
상대하기 쉽지 않은 선수들이죠. 올해 페더러와 경기했을 때는 2003년 처음 만났을 때처럼 긴장되지는 않았습니다. 페더러는 굉장히 빨라요.
내가 어떤 공을 치면 상대가 어려워하기도 하는데 페더러는 전혀 그런 것이 없습니다. 경기를 하다 발견할 수 있는 단점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답답하죠.
지난해 두 차례 경기한 나달은 정신력이 좋고 모든 샷을 끝까지 따라갑니다. 어린 나이에 집중력도 대단하고 배울 점이 많습니다. 가끔 21살의 나달을 보면 ‘나는 저 나이 때 무얼 했나’라는 생각이 들죠(웃음). 세계랭킹 1,2위는 그냥 만들어진게 아니죠. 역시 뭔가 다릅니다.
<지난해 30살이 됐습니다. 그리고 10월 마침내 50위권 안인 48위가 됐습니다.>
50위 안에 들면서 더 이상 목표에 욕심을 내지 않았습니다. 예전에는 전성기를 28,29살이라고 생각했는데 30살이 되자 노련미가 생기면서 오히려 현재가 진짜 전성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더 좋아진 것 같습니다.
잊지 못할 2007년
“그 몸으로는 안 된다. 기권하고 나와라.”(주원홍 감독) “…”(이형택)
8월 27일(현지시간) US오픈 1회전이 열리고 있는 뉴욕 플러싱 메도 빌리 진 킹 내셔널테니스센터. 이형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문득 관중석을 바라봤다.
이형택은 경기 때는 집중하지만 경기가 진행되지 않을 때는 주변을 자주 본다. 관중석에 누가 왔는지를 자세히 알 정도다. 그러나 이날은 관중석이 하얗게 보였다.
이형택은 상대인 도미니크 에르바티(슬로바키아)와 5세트 3-3으로 맞선 7번째 게임에서 허벅지에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1세트부터 참고 뛴 것이 화근이 됐다.
양쪽 허벅지에 동시에 근육통이 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정상적으로 코트에 서있을 수 없었다. 다리를 절뚝거리며 해볼까도 생각했는데 보는 사람들이 짜증을 낼 것 같아 기권하려고 했다.
그런데 차근차근 경기를 되짚어보니 서브게임을 계속 잡고 있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래, 끝까지 가보자’ 이후 과감하게 달려들었다.
세컨드 서브도 첫 서브처럼 넣었다. 아웃을 의식하지 않고 강력하게 스트로크를 보냈다. “공이 왔다 싶으면 그냥 때렸다.”
테니스공은 이형택의 말을 알아들었다. 공은 기가 막히게 모두 라인 안쪽으로 떨어졌다. 에르바티는 이형택의 부상을 더 악화하려고 코트 양쪽으로 공을 보냈다.
허벅지뿐만 아니라 종아리까지 톱으로 도려내는 듯한 아픔이 왔지만 이형택은 이를 악물었다. 눈물까지 났다.
평소 중요하게 생각하는 3가지를 가슴 속에 그렸다. ‘상대보다 코트에서 더 많이 뛴다’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테니스를 즐기자’이런 마음을 가지면 행운은 미소를 보낸다.
숨죽이며 경기를 보던 관중들은 기립박수를 보냈다. 세트스코어 3-2(6-7〈4-7> 6-4 7-5 6-7〈6-8〉 6-4). 승자는 이형택이었다. “그 경기를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올해 윔블던 첫 32강 진출을 비롯해 8월부터 3개 투어대회 연속 8강에 오르며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습니다.>
10년 넘게 써온 라켓(프리스티지660)이 단종돼 새 것(래디컬 프로)으로 바꾸면서 힘들었는데 점차 적응하면서 성적을 냈습니다. 라켓 줄도 반대로 매면서 공에 파워가 생겼고 이전과는 다른 자신감이 생겼죠.
상대방이 내 공을 어려워하는 게 보였어요. 윔블던 때는 클레이코트를 좋아하는 선수들과 붙는 대진운도 따라줬죠.
<주원홍 감독은 US오픈 1회전에서 이형택이 눈물까지 흘리면서 저렇게 물고 늘어지는 것은 처음 봤다고 했습니다.>
눈물은 주위에서 더 많이 흘렸다고 하더군요. 부상을 안고 치른 1회전 에르바티전은 처음 겪는 경험이었어요. 자신감이라는 게 정말 무서워요. 나도 그렇게까지 공이 좋아질 줄은 몰랐습니다.
2회전 상대 기예르모 카나스(아르헨티나)는 US오픈 전에 하드코트에서 2주 연속 페더러를 이겼고 매우 까다로운 선수인데 백핸드 다운더라인이 잘 들어가면서 승리 할 수 있었습니다.
3회전 상대 앤디 머레이(영국)는 최선만 다하자는 생각이었어요. 첫 세트를 잡고 나서 내 페이스가 됐습니다. 적극적으로 네트 플레이를 펼쳤는데 머레이가 위축되면서 범실을 저질렀죠.
16강전 상대 니콜라이 다비덴코(러시아)는 스트로크가 기계처럼 정확해요. 경기가 시작되고 라켓 텐션이 다른 것을 느낄 수 있었는데 내 라켓 줄을 매는 일본 사람이 계약이 끝나서 돌아갔다고 하더군요. 텐션만 맞았다면 조금 더 좋은 경기를 할 수 있었는데.
<7년 만에 US오픈 16강에 올랐습니다. 그때와 올해는 무엇이 달라졌나요.>
올해의 의미가 더 큰 것 같습니다. 2000년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경기에 나갔는데 올해는 두 아이의 아빠가 됐고 경험도 많이 쌓았습니다.
올해는 랭킹이 높은 선수들을 이기면서 16강에 나간 것이고 나이도 16강 선수 가운데 가장 많았죠. 외국 선수들도 잘했다고 많이 축하했습니다. 7년 전보다 더 실력을 인정받는 것같은 느낌이었습니다.
<20년 만에 한국을 데이비스컵 월드그룹에 올려 놓았습니다.>
솔직히 슬로바키아를 꺾고 월드그룹에 나갈 거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만약 에르바티가 나왔다면 힘든 경기를 했을 텐데 운이 따랐습니다. 내년 2월 독일과의 1회전은 쉽지 않을 거예요.
한국이 가장 약한 팀이고 독일은 나보다 랭킹이 높은 선수도 많고 들이대는 스타일이라. 그러나 스포츠라는 것이 결과가 정해진 건 아니니까 이변도 나올 수 있다고 봅니다.
<올해 강조했던 ‘즐기는 테니스’는 어떤 의미인가요.>
예전에는 테니스만 생각했어요. 마음의 여유가 없었죠. 외국 대회에 나가면 초조하고 불안하고 그랬죠. 그러나 올해부터는 조금 더 편하게 라켓을 잡았어요.
잘못 받아들이면 장난친다고 오해할 수 있는데 그런 게 아니라 경기는 지더라도 내가 테니스 코트에서 열심히 뛰어 건강이라도 좋아지면 좋다는 기분이죠.
뛰는 것 자체를 즐기고 싶어요. 그러나 아직도 완벽히 즐기지는 못해요.
<4개 그랜드슬램 대회를 다 뛰어봤습니다.>
윔블던은 전통과 권위가 최고죠. 모든 선수들이 그 대회에 뛰는 것만으로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잔디를 1년 동안 키워서 대회가 있을 때만 쓰고 스폰서도 슬레진저 하나밖에 없습니다.
호주오픈은 약간 분위기가 떨어져요. US오픈은 대회 규모가 크죠. 하드 코트를 좋아하는 데다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둔 대회라 큰 기대를 안고 참가합니다. 교민 여러분의 응원이 큰 힘이 됩니다.
프랑스오픈은 롤랑 가로스의 앙투카 코트가 다른 곳과는 다르게 관리가 잘 돼 있어요. 도시도 멋있고 관중들의 수준도 높습니다. US오픈은 반바지에 슬리퍼를 신고 오는데 프랑스오픈 관중은 대부분 정장을 입고 있습니다.
<여자선수 가운데 좋아하는 선수는 누구인가요.>
아나 이바노비치(세르비아)입니다. 요즘 잘 쳐요. 마리아 샤라포바(러시아)는 별로예요. 선수들 사이에서도 평이 좋지 않아요. 운동할 때 태도는 좋은데 코트 밖에 나오면 행동이 그다지 좋은 것 같지 않습니다.
<20대부터 기술훈련과 몸 관리를 50:50으로 했습니다.>
외국대회에 나가면 경쟁자들보다 빨리 지치고 쉽게 다쳐 웨이트트레이닝 쪽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죠. 전에는 술도 많이 마셨습니다. 일주일에 4,5차례는 마셨죠.
<한 번에 어느 정도나.>
뭐, 한 번 시작하면 밤새도록 마시고(웃음). 술을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투어를 다니면서 외국 선수들을 유심히 보니 ‘다 잘 치는 이유가 있구나’ 싶었어요. 내 실력을 100% 발휘하지 않으면 이길 수 없다고 봤습니다.
그 이후 술을 마시고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주위에서는 “네가 운동 평생할 것 아니다”라고 했지만 내가 운동 평생하는 것 아니니까 운동하는 동안만큼은 오히려 지키고 싶었어요.
그리고 그런 식으로 술을 권하는 사람들은 진정 나를 위해서 그러는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를 위했다면 자제하도록 해야 했는데. 진심으로 권하는 것이 아니었죠. 몸 관리를 하면서 성적이 좋아지자 점점 자신이 붙었습니다.
유진선은 “형택이가 은퇴 이후 나처럼 암투와 시기에 빠지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시기와 질투를 받아본 적 있습니까.
시기와 질투라. (한참 생각하다)받아본 적 있죠. 있는데 크게 신경은 안 쓰려고 해요.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고 해요. 독불장군이 없듯이 혼자 잘난 맛에 살아갈 수는 없다고 봅니다.
은퇴를 하면 선수 때의 나는 잊어야죠. 코치가 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이형택의 스트로크는 세계적이라는 말을 합니다. 백핸드도 좋습니다.>
포핸드는 좋았는데 백핸드는 들쭉날쭉 했죠. 대학 때 의식적으로 백핸드 연습량을 늘렸습니다. 투어에 나가서 나는 몰랐는데 상대방이 내 약점이 백핸드 높은 쪽이라고 판단했는지 그쪽으로 공을 집중적으로 보냈습니다.
이걸 극복하려고 고무줄을 당기는 연습을 많이 했습니다. 힘이 보강되니까 나중에 공이 백핸드로 높이 와도 대처가 가능해 졌습니다.
<상대적으로 서브와 발리는 약합니다.>
그렇죠. 고교 2학년 때 오른쪽 어깨를 다쳐 서브 연습을 많이 못했어요. 1998년 삼성증권에 입단해서도 첫해는 경기를 많이 못 뛰었어요. 재활훈련을 하면서 좋아졌는데 아직도 100%는 아닙니다.
무리하면 통증을 느끼죠. 서브가 나 정도 되는 선수들도 많아요. 휴이트도 그렇고. 지금 서브파워를 올리는 것보다는 세컨드 서브를 강하게 넣고 코스에 신경을 쓰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발리를 하려고 네트 앞으로 많이 들어갔는데 요즘은 스트로크가 좋아져서 서브앤드발리 선수가 거의 없어졌어요. 발리는 스트로크를 치다 공이 짧으면 들어가는 정도에요.
<라켓, 운동화, 유니폼은 경기에 어떤 영향을 주나요.>
일단 라켓이 가장 크게 피부에 와 닿죠. 테니스는 감각 운동입니다. 라켓의 밸런스, 스윙 스피드감에 따라 경기 내용이 달라지죠.
라켓을 자주 바꾸는 선수도 있는데 대부분은 쓰던 라켓을 고수합니다. 애거시도 그랬고 샘프라스도 예전 라켓에 색깔만 바꿔서 치고 있습니다.
운동화도 라켓처럼 선수들이 잘 바꾸지 못합니다. 발의 움직임에서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유니폼은 크게 못 느끼는 요소지만 경기하다 땀이 많이 나면 여러 벌 갈아입습니다.
<혹시 헤어밴드는 안 하나요.>
헤어밴드는 뭔가 어색할 것 같아서(웃음). 모자도 원래 안 썼는데 한 번 쓰기 시작하니까 계속 쓰게 되더군요.
<심판 판정에 항의하는 장면이 드뭅니다.>
경기를 하다 보면 아쉬운 점이 많습니다. 사람이 하는 일이다 보니. 항의하면 마이너스예요. 차라리 다음 포인트를 준비하는 게 낫습니다.
<2년 전 은퇴를 하려고 했습니다. 어떤 문제가 있었나요.>
코치와 잘 안 맞았어요. 오래 같이 생활했는데 성격 등 여러 가지가 나랑 달라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고 운동하느니 차라리 은퇴하자’라고 마음먹고 테니스를 잊고 쉬려고 했어요.
그런데 쉬다 보니 내가 이런 식으로 테니스를 끝낼 수는 없다는 생각에 주감독님께 (윤)용일이 형과 같이 다니고 싶다고 건의했죠. 은퇴는 아직 생각하지 않고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은퇴할 수도 있습니다.
<“한국테니스는 이형택뿐이다”라는 압박감도 느낄 것 같습니다.>
많이 느끼죠. 데이비스컵에 나가도 단, 복식을 다 이겨야 하고 아시아경기대회 등에서도 다 책임을 져야 합니다. 테니스에서 31살이면 슬슬 밀려야 하는데 후배들이 못 올라오니까 부담이 되죠.
요즘 선수들은 정신력이 약합니다. 목표는 내가 뛸 때보다 높아요. 눈높이를 랭킹 20위에 맞추고 컴퓨터 게임만 하고 힘든 것을 안 하려고 합니다. 정상까지 가기 위해서는 열심히 노력해야 하는데.
<“이형택은 장가를 잘 갔다”고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10년 동안 연애를 했는데. >
그런 얘기 많이 듣죠(웃음). 대학교 1학년 때 친구와 놀러 갔다가 처음 만났어요. 한 번 보고 잠깐 헤어졌다가 다시 연락해서 만났습니다. 집사람이 건국대에 무용 레슨을 받으러 다녔습니다.
사귀면서도 오랫동안 잘 못 봤어요. 1년에 30번 만났나. 그래서 오랫동안 만난 것 같습니다(웃음). 합숙소와 외국생활이 길어지자 여러 차례 싸우기도 했는데 나중에 다 이해했습니다. 내가 눈치가 없는 편인데 집사람이 많이 챙겨줍니다.
<이형택은 어떤 선수로 기억되고 싶습니까.>
테니스는 내 인생을 바꿔 놓았습니다. 테니스를 안 했다면 아마 나는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을 겁니다. 테니스는 이형택의 모든 것이죠. 나중에 “테니스 하면 아, 이형택”이라고 바로 나올 수 있는 선수로 오랫동안 기억되고 싶어요.
그리고 나에 대해 “이형택은 몇 위까지 갔었다.” “백핸드를 잘 쳤다.” 등 뭔가 하나라도 기억하는 이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들 창현이가 20년 뒤 윔블던 결승전에 나갔습니다. 매치포인트를 잡은 상황과 몰린 상황으로 나눠 어떤 조언을 할 건지.
(크게 웃다 한참 생각한 뒤)잡았을 때나 몰렸을 때나 똑같을 것 같습니다. 경기 전에 많은 이야기를 했겠죠. 3가지를 말해주고 싶습니다. “집중하라. 편하게 하라. 자신 있게 하라.” 아들을 믿어야죠.
유진선과 이형택의 가상대결
20XX년 X월 X일 잠실체육관 특설코트. 현대과학은 시간을 되돌려 인간이 갖고 있는 과거 특정 시점의 능력을 찾을 수 있을 정도로 발달했다. 이날 한국테니스를 대표하는 선수 2명이 맞대결을 펼쳤다.
코트 오른쪽에는 1986년 제10회 서울아시아경기대회 4관왕인 24살의 ‘1986 유진선’, 코트 왼쪽에는 완숙한 기량으로 제2의 전성기를 연 31살의 ‘2007 이형택’이 들어섰다.
1세트는 유진선의 페이스였다. 유진선은 이형택보다 5cm가 큰 185cm의 키를 활용한 강력한 서브를 이형택의 발 앞에 떨어뜨렸다. 유진선은 1세트 5번째 게임까지 8개의 서브 에이스를 기록했다.
이형택의 리턴이 짧으면 유진선은 적극적으로 네트 플레이를 펼치며 발리로 포인트를 땄다. 유진선은 부드러운 몸놀림으로 이형택의 스트로크를 받아넘기며 여러 차례 묘기샷을 선보였다.
그러나 2세트 중반 유진선이 어이없는 스매싱 범실을 한 뒤 경기의 흐름이 바뀌었다. 영리한 이형택은 그때부터 유진선의 움직임을 읽고 절묘한 패싱샷과 폭발적인 백핸드 스트로크를 꽂아 넣었다.
또 긴 포핸드 스트로크로 유진선의 네트 접근을 막았다. 물고 물리는 접전이 이어졌다. 누군가가 승부처에서 포핸드 스트로크를 날렸고 공은 네트 위에 맞고 2,3바퀴 회전하더니 어딘가로 떨어졌다.
유진선(45)
재미있는 한 판이 될 것이다. 형택이의 스트로크가 좋아 부담스럽다. 그러나 내가 원래 스트로크 잘 치는 선수들을 잘 잡았다. 형택이의 빠른 발을 묶으면서 집중력을 흐트러뜨릴 것이다.
서브를 최대한 활용하겠다. 시속 200km가 넘는 강한 서브와 휘어지는 서브 두 가지를 구사하겠다. 형택이가 키가 작으니까 약점인 백핸드 높은 쪽으로 공을 주면서 물고 늘어지겠다. 경기는 5세트까지 갈 것이다.
이형택(31)
진선이 형의 플레이는 많이 보지 못했지만 폼이 좋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진선이 형이 서브로 공략하겠다고 했지만 테니스는 서브만 갖고 하는 것은 아니다.
휘어져 들어오는 서브뿐만 아니라 다양한 구질의 서브에 대처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스트로크다. 백핸드 높은 쪽이 내 약점이긴 하지만 이를 이겨내고 여기까지 왔다. 세트스코어 3-0으로 이긴다.
이형택의 앞주머니 사건
전미라의 증언
(이)형택 오빠와 관련해서는 잊을 수 없는 에피소드죠. 오빠는 꼼꼼하기도 하고 욕심도 많아요. 돈에 대한 애착도 강하고요. 그래서 통장이나 현찰을 앞주머니에 넣어 차고 다녔어요(웃음). 그 모습이 정말 재미있었어요.
어느 날 선수들과 어울려 놀러 나갔는데 오빠가 그만 앞주머니를 잃어버렸어요. 주머니 안에 넣어 두었던 상금이 많았던 걸로 기억해요.
이형택의 해명
(전)미라 그 녀석은 왜 그런 걸 얘기하고 그러지(웃음). 해설 하더니 말도 늘었네. 짠돌이로 불리긴 했죠. 예전에 친구들이 뭐 좀 사 먹자고 하면 안 사주고 해서 그랬나 봐요.
어렸을 때부터 돈이 모여 있는 통장을 보거나 현찰을 만지면 마음이 편했어요. 그러나 미라 말대로 앞주머니를 찬 건 아니었고 돈을 넣은 작은 주머니를 테니스 가방에 넣고 다녔어요.
동료들과 놀러 나간 날 돈 쓸 일이 있어 주머니를 갖고 나왔는데 아마 택시에 놓고 내렸을 거예요. 모으고 모았던 돈이었는데.
포인트별 이형택의 전략
테니스는 4개의 포인트를 얻으면 1게임을 이긴다. 0,15,30,40 등 4개의 포인트가 어떻게 배열되느냐에 따라 이형택의 전략은 달라진다. 단계별로 상위 포인트를 생각하면서 플레이 하는 것이 기본이다.
0-0에서는 주도권 싸움이 펼쳐진다. 서브를 넣는 선수(서버)는 첫 포인트를 잡아야 편하게 서브 게임을 끌고 갈 수 있다. 리시브를 하는 선수(리시버)는 첫 포인트를 따야 브레이크 게임을 노릴 수 있다.
서버는 15-0을 거쳐 30-0을 만들면 자기 페이스대로 경기를 할 수 있다. 40-0까지 몰아붙였다면 리시버에게 틈을 주지 않고 러브 게임으로 끝내는 게 좋다. 테니스는 어떤 포인트에서 변화가 일어날지 모르는 경기이기 때문이다.
서버는 15-15에서 반드시 30-15로 앞서가야 한다. 게임에서 분수령은 30-30이다. 누가 먼저 40에 올라가느냐에 따라 게임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서버가 0-40, 15-40, 30-40 등으로 몰렸다면 공격적으로 경기를 해야 한다. 발리를 시도하거나 세컨드 서브를 강하게 넣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리시버라면 15-40이나 0-40에서 무리하게 포인트를 얻으려 하지 말고 편하게 경기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자신의 다음 서브 게임에 집중하는 게 좋다. 듀스에서는 상대가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플레이에 초점을 맞춘다. 상대가 백핸드나 패싱샷이 잘 맞지 않을 경우 이 약점을 파고들어 어드밴티지를 만든다.
이형택을 말한다
장의종 (전 국가대표)
발이 빠르고 정신력이 좋다. 이기려고 하는 마음이 상대보다 몇 수 위다. 서브가 약하고 발리의 리듬이 가끔 맞지 않지만 스트로크 각도가 좋다. 윤용일을 제치고 국내 1위가 된 것이 자신감을 갖는 계기가 됐다.
2000년 US오픈에서 자신의 테니스 색깔을 찾았다. 국가대표팀에서 같이 운동할 때 보니 배우려는 의지가 강했다.
전영대 (대한테니스협회 전무이사)
말이 없고 성실하다. 특별한 기교는 없는데 힘이 좋다. 대학 때 실력이 많이 늘었다. 꼼꼼하고 목표의식이 강하다. 올해 데이비스컵에서는 무조건 형택이를 믿었다.
김성배 (전 대우중공업 감독, KBS 해설위원)
한국에서 이형택 같은 선수가 나왔다는 사실이 대단하다. 자신보다 강한 상대들을 차례차례 꺾으며 여기까지 왔다. 그동안 온몸이 찢어지는 고통을 이겨냈을 것이다. 30살이 넘어서도 자기 관리를 철저하게 했다.
전현중 (테니스세계닷컴 운영자)
절대로 3년 안에 은퇴하면 안 된다. 이형택이 은퇴하면 뒤를 받쳐줄 선수가 없기 때문에 한국테니스는 다시 몇십 년을 후퇴할 것이다. 10년 전에 이형택을 보고 크게 성장할 것이라고 믿었다. 국내에 이형택만큼 백핸드 스트로크를 잘 치는 선수는 없었다.
전미라(전 국가대표, MBC ESPN 해설위원)
1998년 현대해상에서 은퇴해 쉬고 있을 때 오빠가 다시 선수생활을 하라고 권유했다. 다시 운동을 할 수 있게 해준 오빠가 고마웠다. 오빠는 어렸을 때부터 친오빠같이 편했다. 그러나 이상형은 아니었다. 심리적 압박감에서 쉽게 벗어나는 장점이 있다. 불필요한 스텝이 없고 공을 보는 눈이 뛰어나다.
박원식 (테니스 코리아 편집장)
이형택의 경기를 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 몸과 마음이 그에게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는다. 최고의 정신력을 발휘해 경기에 집중한다. 한국을 대표하는 선수로 민간 외교관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다.
주원홍 (삼성증권 감독)
그동안 기대 이상으로 잘해 앞으로 더 잘하라고 말 못할 것 같다. 자신의 역량을 세계무대에 떨쳤다. 운동 때문에 다른 데 신경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미래에 대한 설계도 잘하기 바란다. 최근에 방송 해설을 같이 했다. 처음에는 많이 걱정했는데 말도 잘한다. 심현석 기자
한국일보페더러, 뉴스메이커도 '황제'
ATP 10대 뉴스 '2연속 4대 메이저 결승진출' 톱 선정
테니스 황제’의 압도적인 활약이 2007년 남자테니스 최고의 뉴스로 뽑혔다.
남자프로테니스(ATP)가 12일(한국시간) 홈페이지를 통해 발표한 올해 10대 뉴스에 따르면 세계랭킹 1위 로저 페더러(26ㆍ스위스)가 2년 연속 4대 메이저대회 결승전에 오른 것을 톱뉴스로 선정했다.
페더러는 2005년 윔블던오픈부터 10회 연속 메이저대회 결승전에 올라 8번 우승했다. ATP역사상 한 선수가 2년 연속 모든 메이저대회 결승에 오른 건 페더러가 처음이다. 페더러는 최근 2년간 클레이코트에서 열리는 프랑스오픈을 제외하고 모두 우승을 차지했다.
ATP선정 10대 뉴스 중 2위는 다비드 날반디안(9위ㆍ아르헨티나)이 한 시즌 두 차례나 세계랭킹 1,2위를 꺾은 것이 올랐다. 날반디안은 10월 마드리드와 파리에서 열린 마스터스 시리즈에서 페더러와 세계랭킹 2위 라파엘 나달(스페인)을 연이어 물리쳤다.
3위는 ‘테니스 골리앗’ 존 이스너(106위ㆍ미국) 열풍이 차지했다. 이스너는 205㎝의 큰 키에서 뿜어 나오는 타점 높은 서브로 US오픈에서 커다란 화제를 모았다. 4위에는 클레이코트에서 유난히 강한 나달의 프랑스오픈 3연패가 올랐다.
이밖에 노박 조코비치(3위ㆍ세르비아)가 94년 보리스 베커 이후 13년 만에 한 대회에서 세계랭킹 1위~3위를 모두 꺾었던 파란, ‘광서버’ 앤디 로딕(6위ㆍ미국)이 각종 대회에서 타이브레이크 18연승을 내달린 것 등이 10대 뉴스를 장식했다. 김기범 기자
부산일보프로선수들 2007년 수입 "극과 극이네"
프로 스포츠는 성적으로 모든 것을 말한다. 연봉과 상금은 물론 명예도 오직 성적으로 결정된다. 이 때문에 수백만달러 이상을 버는 선수가 있는가 하면 겨우 몇백달러 벌이조차 못하는 선수도 있다.
'1천만달러(약 92억원)와 90달러(8만3천원).'
이는 '테니스 황제' 로저 페더러(스위스)와 마크 실바(미국)가 올 한해 각종 테니스 대회에 출전해 각각 받은 상금 액수다.
세계랭킹 1위인 페더러는 올해 8개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남자 테니스선수로서는 사상 처음 연간 상금 1천만달러를 돌파했다. 반면 실바는 올해 각종 대회에서 딱 1번 이기는 데 그쳐 참가비 90달러를 받았다.
올해 세계프로테니스(ATP) 투어 각종 대회에 출전한 선수는 4천여명이다. 이 중에서 100만달러(약 9억2천만원) 이상을 번 선수는 13명이다. 반면 1년 동안 1만달러(약 1천200만원)도 못 번 선수는 3천400명에 이른다. 총 수입이 1천달러(약 120만원)에 못 미치는 선수도 자그마치 2천400명이다. 실바처럼 90달러를 버는데 그친 선수만 200여명이나 된다.
출전 선수 제한이 있는 미프로골프(PGA)의 경우 상금 랭킹에 이름을 올린 선수는 모두 256명. 테니스보다는 조금 낫지만 여기에도 극심한 소득차는 존재한다. 올해 7승을 거둬 상금랭킹 1위에 오른 타이거 우즈는 1천86만달러(약 100억원)를 벌었다. 우즈는 한타에 평균 242만원을 번 꼴이다.
그러나 상금랭킹 최하위인 가이 보로스(미국)은 올 한해 동안 7천269달러(670만원)을 버는 데 그쳤다. 우즈가 1홀만 쳐도 보로스의 연수입을 챙긴 셈이다. 비행기값, 식사비, 호텔비 등을 제하고 나면 남는 게 없을 것 같은 5만달러(약 4천500만원) 이하 수입을 올리는 데 그친 선수도 30여명이나 된다.
한편 골프의 최경주로 458만달러(약 42억원)를 벌어 PGA 상금랭킹 5위에 올랐다. LPGA에서는 김미현(127만달러), 이선화(111만달러), 장정(103만달러)이 100만달러 대열에 합류했다. ATP의 이형택은 38만6천달러를 벌어 상금랭킹 66위를 기록했다. 남태우기자
스포츠서울[스포츠신문협회 대선후보 4인 인터뷰1] 프라이빗 라이프
●좋아하는 스포츠스타는?
대선후보들이 좋아하는 스포츠 스타들은 ‘불굴의 투지’로 각자의 분야를 개척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박지성·박태환·김미현·이승엽·김연아가 유력후보들이 좋아한다고 꼽은 스포츠 스타들. 이명박후보는 “박지성.박태환 선수를 좋아한다. 두 사람 모두 어려운 환경을 불굴의 투지로 극복하면서 최고가 됐다는 점에서 그들의 노력을 높이 산다”고 밝혔다. 이회창 후보도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스타로 박지성선수를 꼽았다. 정동영후보는 단신을 극복하고. 외국의 낯선 환경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책찍질하며 최고의 여성 골퍼 반열에 올라선 김미현 선수와 일본 프로야구의 스타로 떠오른 이승엽 선수를 좋아한다고 답했다. 문국현후보는 “척박한 국내 피겨스케이트 환경에서도 자신의 꿈을 이뤄낸 김연아 선수야말로 멋진 선수”라며 “나이의 많고 적음을 떠나 운동에 대한 열정과 노력에 크게 감동했다”고 말했다.
●좋아하는 스포츠 혹은 레포츠는?
소문난 테니스 마니아인 이명박후보외에 이회창후보도 테니스를 가장 좋아한다고 답했다. 두 사람 모두 테니스 경기를 직접 즐길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빅게임을 케이블TV로 시청할 정도로 테니스 애호가다.정동영. 문국현 후보는 나란히 ‘등산’을 가장 좋아하는 레포츠 활동으로 꼽았다. 특히 정동영후보는 “스트레스 해소법으로도 등산이 최고”라고 강력 추천했으며 문국현후보는 과거 유한킴벌리 CEO재직시절 펼쳤던 숲가꾸기를 통해 ‘산책’의 즐거움을 알게됐다며 숲길 산책을 두번째로 좋아하는 레포츠로 꼽았다.
한편 직접 하는 레포츠와 별개로 정동영.이회창후보는 가장 즐겨 시청하는 게임으로는 단연 ‘축구’가 최고라고 밝혔다. 이명박 후보는 특히 다이내믹하게 진행되는 농구나 배구 경기를 즐겨 본다고 답했다.
●좋아하는 문화생활및 여가생활은?
이명박후보는 바쁜 와중에도 한달에 한 두번은 시간을 내 음악회도 가고 영화나 공연을 보는 문화마니아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특히 최근에 본 영화 ‘브라보 마이 라이프’는 샐러리맨의 애환이 담긴 영화로 개인적으로 몹시 공감했다고 감상을 밝혔다.
정동영후보 역시 한 달에 한 번은 문화생활을 하려고 노력한다고 답했다. 지금까지 본 영화중 가장 감명깊게 본 영화는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시네마 천국’이며 가장 최근에 본 영화는 김지훈 감독의 ‘화려한 휴가’였다고 말했다.
영화 ‘화려한 휴가’는 영화를 자주 못본다는 문국현후보가 가장 최근에 본 영화이기도 한데 문후보는 임권택 감독의 ‘천년학’과 함께 우리의 역사와 인생을 감동적으로 그려낸 두 영화를 통해 두 명장의 힘에 놀랐으며 큰 감동을 받았다고 밝혔다.
이회창후보는 문화생활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여건이 주어지지 못해 자주 못간다고 솔직하게 고백했다. 가끔 뮤지컬이나 영화를 보러 가는 정도이고 영화관람은 보통 아내와 함께 한다고 전했다.
●좋아하는 배우나 가수는?
모든 후보들이 마치 약속이나 한듯이 남자배우로는 ‘국민배우’ 안성기를 꼽았다. 특히 이명박후보는 “작품마다 최선을 다하는 연기에 빠져든다”며.
문국현후보는 “다양한 장르와 역할을 넘나들면서 실감나는 연기를 보여준다”는 평으로 배우 안성기를 극찬했다. 안성기 외에도 이명박 후보는 송강호와 장동건도 좋아하는 배우라고 밝혔다. 배용준과 이영애.
개인적으로 연말 콘서트를 보러 갈 정도로 좋아하는 가수 ‘비’에 대해서는 ‘한류스타’로 한국을 세계에 알린 노력과 공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정동영후보는 개성공단의 모델활동으로 정감이 간다며 손예진을 가장 좋아하는 여배우로 꼽았으며 문국현후보는 연극배우 윤석화와 배우 장미희를 좋아한다고 밝혔다.
●좋아하는 여행지는?
전세계로 출장은 많이 다녔지만 여행으로 가본 곳은 별로 없다는 이명박후보는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지.좋아하는 여행지로 제주도를 꼽았다.
제주도는 신혼여행지이기도 했고 가족과 함께한 첫 여행지이기도하다고 이후보는 그 이유를 들었다. 동해안 일대도 언제 가도 익숙하고 편한 여행지로 꼽았다.
정동영후보는 기억에 남는 여행지로 설악산을 꼽았다. 특히 정후보는 결혼허락을 받기 위해 회사에 사표를 내고 아내와 설악산으로 도망치는 소동을 벌였던 에피소드를 소개하며 잊지못할 여행지라고 전했다.
등산을 좋아하는 정후보가 꼽은 또다른 여행지는 바로 지리산과 청송 주왕산의 주산지 등. 숲을 좋아하는 문국현후보는 귀화한 외국인이 조성했다는 천리포 수목원을 여행지로 추천했다.
민간 수목원인데도 불구하고 만종 가까이 되는 나무와 꽃들이 있는 아름다운 곳으로 외국의 그 어떤 수목원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수목원이라고 평가했다. 이경옥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