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화성군 남양만 9백60만평 간척지. 바다를 막아 얻어진 황량한 벌판엔 잡스런 해초만 가득했다. 저 벌판에서 농사가 될지 안될지 알 길이 없었다.
봄이 되어 씨를 뿌릴 날만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데 농수산부에서 청천벽력같은 통보가 날아왔다. 소금기가 너무 많아 농사가 되지 않으니 씨를 뿌리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당시 우리가 세운 마을이 15마을이었는데 마을에서 대표 두 명씩을 뽑아 의논했다. 결론은 『그래도 해보자』였다. 뒤져볼 쓰레기통마저 없는 그곳에선 들판에 대한 도전 외에 다른 선택이 없었다. 흙 속에 속속들이 스며져 있는 소금기를 씻겨내기 위해 들판에 물을 대고 또 빼고 했다. 모두 손이 부르트고 손톱이 제껴지는 등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전 가구가 힘을 합쳐 모를 심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새빨갛게 타죽어 버렸다. 그렇게 세 번 심어 세 번 다 모가 타들어가자 『일찌감치 서울가서 쓰레기통이나 뒤져야겠다』며 짐을 싸려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마지막 한 번만 더 힘을 내기로 했다. 『여러분 망하는 것이 급합니까?』. 속은 타는데 마을마다 다니며 억지웃음을 띤 채 열심히 설득했더니 나중엔 근육이 굳어지는 듯했다.
충남, 충북에서까지 모를 얻어와 네 번째 모심기를 마쳤다. 착잡한 심정 때문에 한마디 대화조차 나눌 수 없었다. 약속이나 한 듯 논바닥을 떠나지 못하고 논둑에 앉아 기도했다. 비가 내려 소금기가 씻겨나가기를 소원했다. 국민학교 아이들까지 고사리 손을 모으고 『예수님, 비를 주세요』하고 합창했다. 우는 모습을 보여줄 수 없었기에 나는 바닥덩쿨 밑에 숨어 흐느꼈다.
그렇게 밤새 기도를 하고 새벽 동이 틀 무렵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온다!』하고 소리 지르면서 애들이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서로 부둥켜안았다. 고함지르고 울고 또 울면서 미친듯이 논바닥을 뒹굴었다.
활빈교회역사 극화로 방영
십여 년 전 TV에 나연숙 극본의 일일연속극 「고향」이 방영된 적 있다. 활빈교회 역사를 극화한 것인데 마지막회가 바로 그 장면이었다. 마을 주민들 모두 모여 옛날을 회상하며 감회에 젖어 보고 있는데 극이 진행되자 『무슨 연기를 저래 하노? 아이구, 저게 내 역인데』하며 발을 굴렀다. 그 울부짖음, 피가 끓듯 외치던 절규, 그 감동과 감격을 체험한 당사자들에겐 성에 안찼던 것이다.
열흘 후 비가 그친 뒤 들에 나가보니 모가 살아서 퍼렇게 올라오고 있었다. 얼마나 감사했던지 논둑을 지나며 벼포기마다 입을 맞췄다.
그해 가을 온 동네 주민들이 모여 햅쌀로 밥을 짓고 물고기를 건져다 매운탕을 끓이며 추수감사절을 치렀다. 음식을 앞에 놓고 차마 먹지 못한 채 모두 감격스러워 울기만 했다.
나중에 농수산부 직원 2명이 우리마을에 출장을 왔다. 간척지는 원래 5∼6년이 지나야 농사를 짓는데 첫해에 풍년이 들었으니 그 비결을 알고 싶다는 것이었다. 교회 집사님 두분이 신나서 말했다. 『예, 우리가 개발한 농법은 기도농법이올시다』. 녹음기까지 켜놓고 잔뜩 기대하던 직원들은 농담하지 말라고 했다.
내 나이 서른 일곱이 되던 78년, 그리고 그 다음해는 큰 시련의 해였다. 벼농사만 지어 살기가 빠듯하다는 생각에 축산에 손을 댄 것이 화근이었다. 78년 호주교회의 협조로 종돈 92마리를 사왔다. 전 가구에 골고루 분배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돼지고기 파동이 왔다. 사람들은 나를 원망했고 돼지새끼를 갔다 교회당 앞에 풀어버렸다.
그 다음해 오랜 준비 끝에 남양만 옆에 두레마을을 세웠다. 감옥에서 체험했던 공동체를 실제로 실현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호주에서 젖소를 들여오다 사고가 생기는 바람에 졸지에 사기꾼 목사가 되었다. 돈은 받고 소를 내놓지 않으니 사기꾼 취급을 받는 것이 당연했다.
교인들이 교회로 몰려와 내게 달려들더니 몰매를 때렸다. 나는 눈을 감고 맞았다. 교인들이 나를 때리는 것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몰매가 끝났을 때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서로 얼굴을 보면 멋쩍고 미안할 테니 제가 눈뜨기 전에 나가 주십시오』. 한참있다 눈을 뜬 뒤 『나를 때린 사람은 모두 밖으로 나갔구나』 말하며 그들을 달랬다. 사실 때린 사람들은 거기 그대로 있었다. 입술이 터지고 몸은 쑤시는데 그들을 차마 마주볼 수가 없어서 밖으로 나갔다.
사기꾼으로 몰려 몰매 맞기도
남양만의 직경이 17㎞. 입술에서 흐르는 피를 빨아먹으며 왕복 34㎞를 걸었다. 시편 37편 23-24절을 묵상했다.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새벽 3시경 교회로 돌아와 피아노 앞에 앉아 찬송가를 불렀다. 가슴이 뜨거워졌고 울음이 복받쳤다. 1억 4천만원의 빚을 졌고 교회문까지 닫을 정도로 극한 상황이었지만 나는 좌절할지언정 엎드러지지는 않겠다고 다짐했다.
7년 후 간증집 「새벽을 깨우리로다」라는 책을 펴내 거둔 인세와 여기저기 강연해서 번 돈, 농사일로 빚을 다 갚고 다시 2차 두레마을을 세웠다. 86년에 문을 열었으니 이제 10년째다. 나와 뜻을 같이 하는 사람, 갈 곳 없는 행려병자 150명. 모두 할 수 있는 만큼 일하고 필요한 만큼 가져다 쓰는 마을이다. 농사를 짓고 그것을 가공해 유통하는 일까지를 전부 손수 해낸다. 그렇게 번 돈뿐 아니라 내가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강연한 돈, 글을 써서 번 원고료와 인세까지 모든 것이 마을의 공동재산으로 모인다.
여러 사람이 내것 네것 없이 사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힘들다. 가끔 충돌도 있고 말썽도 생긴다. 지금까지 삶과 가치관을 완전히 뜯어고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비록 작은 마을이지만 나는 이 속에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는 하나의 대안이 있으리란 확신을 가지고 있다. 어떤 이들은 『그런 공동체마을은 투자하는 노력에 비해 결과가 보잘 것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대답한다. 그럼에도 성직자는 투자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이 시대 성직자가 할 일이란 무엇인가. 강대상 위에 서서 예배당 지어야 하니 헌금 많이 하라고 강요하고, 연말에 헌금 봉투 큰 소리로 읽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한반도 오천 년의 한과 눈물을 씻어내기 위해 밑바닥에서, 민초들 속에서 몸으로 살아가는 것. 바로 그 속에서 나는 그렇게 찾아헤매던 진리와 인생의 본질을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