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 市日을 이용하여 전 시장원이 독립만세를 고창하다가 倭 헌병에게 130명이 체포되어 구타, 치상 당하였습니다.
문 피의자는 그 때 무슨 일을 하였는가?
답 그 당시 주모자가 본인의 처제 從되는 천종구[千鍾九]였었는데, 그 사람은 본인의 상점 점원이었습니다. 오후 1시에 독립만세를 부르기 시작하여 즉시 체포되어 천종구는 일시 절명까지 하였으므로 본인 외 4인이 협력하여 천종구 외 130명의 식사를 제공하고, 군수를 중간에 넣어 헌병대에 哀願하여 석방운동을 하였었습니다. 헌병대에서는 본인 등이 절대 잘못이라는 것을 悔悟하고, 이후 更且 如斯한 행동을 않겠다는 서약서를 제출하면 용서한다 하였으나 전부가 거부하였습니다. 본인은 그 때 체포는 면한 몸이었으므로 事樣을 보니 무수히 고문을 당할 것으로 보였으므로 前記 4인과 상의하여 역시 군수를 介하고, 헌병대에 대하여 130명에 대하여는 5인이 全 책임을 지겠다는 서약서를 제출하고, 夜半 1시에 전부 석방을 받았습니다.
문 그러면 피의자는 당시 倭憲에게서 상당한 신임이 있었던 증거가 아닌가?
답 별로 신임 받을 만한 일도 없었습니다마는 당시 청년회의 중요 간부였고, 또 체포당한 130명의 과반수가 상인이었던 관계로 상업계를 대표할 만한 5인이라는 것을 倭憲들도 알았었겠지요.
답조치원에 本據를 두고, 全鮮 각지에 지점을 두었던 관계로 格別生疎하지도 않고, 단지 가족만 청주로 옮겨놓으면 그만이었으므로 주택 1채만 신축했을 따름입니다.
문 지점은 어디어디 두었으며, 무슨 물건을 취급하였던가?
답安城, 平澤, 天安, 全義, 芙江, 청주 6개소였었고, 그 외에 溫陽, 禮山, 廣川, 鎭川, 淸安, 忠州, 公州 등 출장소가 7개소 있었는데, 전부 해산물을 취급하였고, 지방 지방의 상권을 잡았고, 대항하던 日人은 전부 실패시켰고, 곡물을 취급한 것은 조치원과 청주뿐이었습니다.
답 당시(敵政 대정 12년[1923])에 저의 집이 바로 塋町普通學校 越便에 있었는데, 입학時機가 되면 불과 100여 명 수용에 지원자는 1,000여 명 되어 보기에 안타까움을 禁치 못하였으므로 지사 박중양[朴重陽]을 방문하고 학령아동으로 미취학자를 救濟키 위하여 사립학교를 설립할 것을 간원하였더니 기본금 조성할 것을 묻기에 시설 일체를 본인이 부담할 것을 告하고, 爲先 校洞에 있는 천도교회당(약 12평)을 후에 양옥으로 축조해 준다는 조건부로 빌려 신입생 150명을 수용하여 2부 수업을 실시하며 一方 건축을 시작하여 이듬해 200평 校舍를 翌年까지 완성시켜 정식 인가를 받았습니다.
문 總工費는 어떻게 지출하였으며, 경상비는 무슨 방식으로 지출하였는가?
답 공사감독을 실지로 매일하며 경비는 필요있는 대로 지출하고, 경상비도 필요에 따라 수시 辦出하였으므로 工費 등 세밀한 數字는 모르고, 그 후 다시 煉瓦製로 개축하여 아동 500명을 수용하고, 24년간 계속하였습니다.
문 다른 방면에서 경비보조는 없었던가?
답 일반 학부형께서는 1錢의 부담도 시킨 일이 없고, 수업료도 안받았으며, 개교한 지 16년 만에 道費 보조라고 년 100원 式 줍디다. 4년 후부터는 200원 式 받아 약 3년간 계속하였을 뿐입니다.
문 학교 경영상 중요목적을 학교장에게 지시한 일이 있는가?
답 있습니다. 당시 공립학교에 다니는 학생은 부유층 자녀요, 일반 사회에서 사립학교는 대단 경시하는 경향이 농후할 뿐더러 一點 동정조차 엿볼 수 없었으므로 일반 사회인에 대한 극도의 반감으로 절대로 극빈자의 자녀만 수용할 것을 목표로 할 것과 운동회, 遠足會 등 時에는 공립학교에 손색없을 상황을 반드시 준비하였습니다. 그 후 졸업생이 중학교에 응시하여도 역시 차별이 심하므로 각 중등학교를 예방하여 애걸도 하고, 혹은 공갈도 하여 매년 약 20명 式은 중등학교에 입학시켜 사회에 진출케 하였고, 졸업생 都合이 모두 약 2,000명 됩니다. 교육내용에 들어서는 학교 당국자에 전부 일임하였었습니다. 右 본인에게 讀聞시킨 바 相違가 無하다 하고 서명 捺印함. 공술자 김원근 단기 4282년[1949] 4월 23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조사관 정헌승[鄭憲丞] 입회인 서기 김영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