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무엘하 강해(51) 2023. 12. 13
바르실래의 겸손
사무엘하 19:31-39
<다윗의 귀환을 두려워한 두 사람>
다윗 왕이 마하나임의 임시 왕궁을 떠나 예루살렘 성읍으로 귀환할 때, 크게 당황한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바로 ‘시므이’입니다.
그는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 바후림 마을을 지나갈 때, 저주를 퍼붓고, 돌을 던진 사람입니다.
그는 ‘베냐민 사람 천 명’(17절)을 모아서, 다윗 왕에게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나옵니다. 그리고 잘 보이기 위해 요단을 건널 배를 준비해 왔습니다. 그리고는 다윗 왕 앞에 엎드려 “내게 죄를 돌리지 마옵소서”하고 용서를 구합니다.
듣고 있던 아비새가 분노하지만, 다윗은 자신이 다시 이스라엘의 왕이 된 이상 이스라엘 사람들을 죽일 수 없다고 하며 시므이를 용서해 주었습니다.
또, 한 사람은 바로 ‘시바’입니다. 그 역시 다윗을 속였기에, 다윗의 귀환이 두려운 사람입니다.
‘시바’는 본래 사울 왕가의 신하로, 다윗이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찾는 데 도움을 준 인물입니다. 다윗은 사울의 재산을 므비보셋에게 주고 시바와 그의 가족이 므비보셋을 섬길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그런 그가 뜻밖에, 피난길에 오늘 다윗 일행에게, 나귀 두 마리에 피난민에게 꼭 필요한 음식(떡과 여름 과일, 포도주 등)을 가득 싣고 나타난 것입니다. 다윗의 입장에서는, 뜻밖이었지만 가뭄에 단비같이 좋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바는 다윗을 위해 이런 일을 벌인 것이 아닙니다. 다윗의 마음을 열게 하고, 그를 속여 므비보셋의 재산을 가로채려는 흑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므비보셋의 안부를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예루살렘에 있는데 그가 말하기를 이스라엘 족속이 오늘 내 아버지의 나라를 내게 돌리리라 하나이다 하는지라”(삼하16:3b). 므비보셋은 여전히 예루살렘에 있는데, 그 이유는 이스라엘 족속이 자기 아버지의 나라(사울 왕)를 자신에게 돌릴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위증, 곧 거짓 증언입니다. 이에 화가 난 다윗은 므비보셋의 모든 재산을 빼앗아 시바에게 줍니다. 그는 다윗이 돌아와 므비보셋을 만나면, 자신의 음흉한 모략이 들통날 것이 두려워 용서를 구하기 위해 달려온 것입니다.
마침 그 자리에 ‘므비보셋’이 다윗을 영접하기 위해 나타납니다. 므비보셋은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합니다. 자신이 시바에게 모함을 당하였다고 고하며, 지금까지 “발을 맵시 내지 아니하며 그의 수염을 깎지 아니하며 옷을 빨지 아니하였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진실이 드러났지만, 다윗은 시바에게 큰 벌을 내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윗 왕은 므비보셋의 재산 중 절반만을 그에게 다시 환수시켜 줍니다. 다윗이 이렇게 한 이유는 이미 아들로부터 반역을 경험한 터라, 어떻게든 므비보셋의 세력을 키우는 일은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또, 하나는 비록 시바가 자신을 속인 것은 괘씸한 일이기는 해도, 어쨌든 피난 시절에 시바의 도움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16:1-4). 그 시절 시바의 도움이 없었다면 정말 큰 위기를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반가운 사람 바르실래>
이때 또 한 사람이 다윗을 찾아옵니다.
31~32절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가 왕이 요단을 건너가게 하려고 로글림에서 내려와 함께 요단에 이르니/ 32 바르실래는 매우 늙어 나이가 팔십 세라 그는 큰 부자이므로 왕이 마하나임에 머물 때에 그가 왕을 공궤하였더라.”
삼하17장에 보면,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 요단강을 건너 마하나임이란 곳에 도착했을 때, 세 사람이 다윗을 위로하기 위하여 찾아옵니다(삼하17:27~29 “다윗이 마하나임에 이르렀을 때에 암몬 족속에게 속한 랍바 사람 나하스의 아들 소비와 로데발 사람 암미엘의 아들 마길과 로글림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가/ 28 침상과 대야와 질그릇과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콩과 팥과 볶은 녹두와/ 29 꿀과 버터와 양과 치즈를 가져다가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에게 먹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 생각에 백성이 들에서 시장하고 곤하고 목마르겠다 함이더라.”).
첫째는 암몬 족속에 속한 랍바 사람 나하스의 아들 ‘소비’입니다.
다윗은 암몬 왕 나하스와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하스가 죽었습니다. 이에 다윗이 조문 사절단을 보냈는데, 나하스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그의 아들 하눈이 조문사절단을 모욕하여(수염을 절반 밀고, 의복의 중동볼기까지 자름) 돌려보냈습니다. 결국, 훗날 다윗은 랍바 성을 함락하였습니다(삼하12:26~31). 소비는 바로 그 하눈의 동생입니다. 하눈 대신에 왕위에 올랐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그는 자기의 형 하눈과는 달리 자기 아버지 나하스와 다윗 왕 간의 친분을 기억하고 다윗과의 교제를 유지하려고 한 듯합니다.
둘째는 로데발 사람 암미엘의 아들 ‘마길’입니다.
암미엘은 사울 왕의 집안이 몰락하는 와중에서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몰래 숨겨준 사람입니다(삼하9:4, 5, 17:27). 일반적인 상식으로 판단할 때, 그것은 매우 위험한 행동입니다. 걸리면 온 가문이 몰살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달랐습니다. 성경에는 기록이 없지만 므비보셋을 생명을 걸고 보살펴 준 것에 대한 보상을 해 주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는 다윗의 인격에 감명을 받은 한 사람으로서, 이제 위기에 빠진 다윗을 생각하고 도왔던 것입니다.
세 번째로 다윗을 찾아온 사람은 바로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입니다.
길르앗은 요단 동편 지역입니다. 다윗의 요단을 건너 자신의 지역으로 왔다는 소식을 들은 바르실래는 생활필수품인 “침상과 대야와 질그릇과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콩과 팥과 볶은 녹두와 꿀과 뻐더와 양과 치스를 가져다가” 다윗과 그 함께 한 백성으로 먹게 하였습니다. 피난길에 지치고 굶주린 다윗과 그 일행에게 씻을 수 있게 해 주었고, 쉴 곳과 음식을 제공했습니다. 그들의 대접은 매우 극진했고, 풍성했습니다.
그럼 왜 이들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다윗 일행을 극진히 대접하였을까요? 그 답을 본문 29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는 그들 생각에 백성이 들에서 시장하고 곤하고 목마르겠다 함이더라.”
그들이 다윗 일행을 도운 동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평소 심성이 어떠한지를 엿볼 수 있는 말입니다.
그들은 ‘긍휼의 마음’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평생토록 살아왔던 그 모습대로 다윗 일행을 대했습니다.
특히 바르실래는 나이가 80이나 되는 노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제하러 직접 나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긍휼의 마음’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가져야 할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이나 사천 명을 먹이신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신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기적을 일으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굶주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기”(막8:2) 때문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은 이 ‘긍휼의 마음’을 천국 가는 조건으로 가르치시기도 하셨습니다. 마25: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라고 말씀하시면서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임을 강조하셨습니다. 바르실래는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의 정신을 실천한 사람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은 왜 우리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소유해야 하는지를 그 이유를 분명히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만 달란트 탕감받은 사람의 비유(마18:23~35)를 하셨습니다(33절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특히 주목할 것은 그들의 행위는 위험 부담을 안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도망하는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승승장구하는 사람을 돕기는 쉽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 많은 사람이 잘 보이기 위해 서로 도우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쫓기는 다윗, 패주하는 왕을 돕는 일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더군다나 그들은 눈에 띄는 인물이었습니다. 잘 알려진 인물이거나 ‘부자’였습니다.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당시의 권력의 눈에 띄는 사람들이었기에 매우 조심스러웠을 것입니다.
전에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니던 다윗을 도운 일로 아히멜렉을 비롯한 놉 땅의 제사장 85명이 몰살당한 일이 있었습니다(삼상22장).
위험 부담을 안고서도, 소비, 마길, 바르실래는 그러한 위험을 알면서도 최선을 다해 다윗을 도왔습니다.
다윗의 입장에서는 어려울 때 자신을 도운 이 세 사람을 결코 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더 주목해 볼 것이 있습니다.
바로 바르실래는 다윗이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를 돕고자 노구를 이끌고 요단까지 나왔다는 것입니다. 즉 바르실래는 다윗에 대하여 단지 일회적인 관심을 보였던 것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관심과 사랑을 잃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일회적인 사랑을 베푸는 것도 소중한 것이지만, 참된 사랑은 마지막 순간까지 지속되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누가 내 이웃인지’를 묻는 율법사에게,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눅10:30~37)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한 제사장도 그냥 지나가고, 레위인도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그때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참된 사랑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사랑은 예수님의 모습에게 온전히 드러납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을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요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이것은 단순히 제자들을 향한 사랑만을 표현한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그 순간까지’ 예수님의 사랑은 변치 않으셨습니다. 심지어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향한 용서의 기도까지 올리셨습니다.
<은혜를 갚고자 하는 다윗>
자신을 찾아온 바르실래를 만난 다윗은 참 반가웠을 것입니다. 다윗은 그에게 은혜를 갚고자 합니다.
33절 “왕이 바르실래에게 이르되 너는 나와 함께 건너가자 예루살렘에서 내가 너를 공궤하리라.”
어떤 이들은 이 요청을 다윗의 정치적인 계산이 깔린 요청으로 보는 자들도 있습니다. 바르실래는 부자고 요르단 동편 지역의 유지로서 그를 예루살렘에서 요직에 앉힌다면 그 지역의 지지와 협조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요청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것이 순수한 보은의 차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바르실래가 마하나임에서 그에게 베풀어 주었던 은혜와 충성에 대해 보답해 주고자 순수한 제안을 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누군가로부터 은혜를 입고도 이를 잊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서양 격언 중에 “모든 것을 당연하게 생각할 때부터 우정은 깨어지기 시작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특별히 가까운 사람일수록 은혜를 당연하게 여길 때가 있습니다. 즉 친구니까, 아내니까, 남편이니까, 가족이니까라고 생각하며 그들이 베푼 은혜를 당연하게 여길 때 관계가 깨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예의를 지키고, 그들이 내게 베푼 사랑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나발 같은 사람(삼상25:38)이 되면 안 되겠습니다.
<바르실래의 겸손>
다윗의 요청에 바르실래는 몇 가지 이유를 대로 정중하게 거절합니다.
34~35절 “바르실래가 왕께 아뢰되 내 생명의 날이 얼마나 있사옵겠기에 어찌 왕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리이까/ 35 내 나이가 이제 팔십 세라 어떻게 좋고 흉한 것을 분간할 수 있사오며 음식의 맛을 알 수 있사오리이까 이 종이 어떻게 다시 노래하는 남자나 여인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사오리이까 어찌하여 종이 내 주 왕께 아직도 누를 끼치리이까.”
바르실래는 다윗의 요청을 정중히 거절합니다. 그는 먼저 “내 생명의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내 나이 이제 팔십 세라”고 스스로 답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바르실래가 겸손한 것입니다. 물론 팔십 세가 상당한 나이인 것은 맞습니다(당시로써는 더욱). 그러나 권력과 명예를 얻는 일에 나이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미국 대선이 내년에 있습니다. 민주당 후보로는 현 조 바이든 대통령이 재선에 도전합니다. 공화당 후보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유력한 후보입니다. 두 분의 나이가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바이든 대통령은 1942년 11월 20일생이고(만 81세), 트럼프 전 대통령은 1946년 6월 14일(만 77세)입니다.
나이는 핑계일 뿐이고, 사실은 바르실래가 겸손한 사람, 대가를 바라지 않고 순수하게 덕을 베푼 것입니다.
두 번째 거절의 이유는 “어떻게 좋고 흉한 것을 분간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합니다(판단력의 혼미).
그리고 세 번째 거절의 이유는 “음식의 맛을 알 수 있사오리이까?”라고 말합니다. 아무리 산해진미를 먹는다고 해도 그의 미각도 둔해 있음을 토로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떻게 다시 노래하는 남자나 여인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사오리이까?”라고 말합니다. 그의 청각도 이러한 것을 즐길 만큼 좋지 않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다윗과 함께 간들 다윗에게 도움이 되질 못 하고 오히려 누만 끼칠 것이라며 정중히 거절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온 목적을 분명히 설명합니다.
36~37a절 “당신의 종은 왕을 모시고 요단을 건너려는 것뿐이거늘 왕께서 어찌하여 이같은 상으로 내게 갚으려 하시나이까/ 37a 청하건대 당신의 종을 돌려보내옵소서 내가 내 고향 부모의 묘 곁에서 죽으려 하나이다...”
바르실래가 여기까지 온 것은 ‘왕을 모시고 요단을 건너려는 것뿐’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요약하면, 바르실래의 대답은 아주 간단한 겁니다. 왕이시여, 이제는 제가 살 날이 며칠이나 남았다고 그 어떤 영화와 어떤 낙을 누리겠다고 예루살렘에 가겠습니까? 저는 그냥 부모님의 묘 곁에서 여기서 살다가, 여기서 마지막 생을 보내는 것이 자신의 소망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여기 나온 이유는 무슨 보상을 기대해서라기보다는, 내가 너무나도 좋아하고 지지하는 우리 다윗 왕이 예루살렘 성읍으로 복귀하는 그 모습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그리고 그 가는 길에 내가 배웅해주고 싶어서 나온 것이라는 것입니다.
<바르실래의 요청>
그러면서 바르실래는 다윗에게 한 가지의 요청을 합니다.
37절b “... 그러나 왕의 종 김함이 여기 있사오니 청하건대 그가 내 주 왕과 함께 건너가게 하시옵고 왕의 처분대로 그에게 베푸소서 하니라.”
‘김함’이 누구인지 분명한 기록은 없지만, 바르실래의 아들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참고: 왕상 2:7, “마땅히 길르앗 바르실래의 아들들에게 은총을 베풀어 저희로 네 상에서 먹는 자 중에 참예하게 하라 내가 네 형 압살롬의 낯을 피하여 도망할 때에 저희가 내게 나아왔었느니라”).
바르실래는 다윗을 향해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는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선을 행하였지만, 결과적으로 그 모든 행위를 통해 자신의 아들에게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훌륭한 유산을 남겨줄 수 있게 된 셈입니다.
이처럼 부모가 행한 선의 열매는 자녀들에게도 유전되고 물려지는 법입니다. 그 반대로 부모의 악행으로 인해 그들의 자녀가 많은 고통을 겪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산을 축적하여 자식들에게 물질만 남겨주면 만사가 O.K라는 식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악인의 자손은 끊어질 것이며(시37:28), 그 재산조차도 결국 수고하지 아니한 자에게 돌아갈 뿐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전2:21). 그러니 악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아 자손들에게 남긴들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의 유산을 불려주는 것이 최고의 유산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다윗의 동의>
그리하여 다윗은 바르실래의 아들 김함을 데리고 갑니다.
38~39절 “왕이 대답하되 김함이 나와 함께 건너가리니 나는 네가 좋아하는 대로 그에게 베풀겠고 또 네가 내게 구하는 것은 다 너를 위하여 시행하리라 하니라/ 39 백성이 다 요단을 건너매 왕도 건너가서 왕이 바르실래에게 입을 맞추고 그에게 복을 비니 그가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
다윗 왕은 왕자들에게 하듯이 ‘김함’(그의 형제들)에게 베들레헴 근처의 땅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곳 이름을 ‘게롯김함’(김함의 숙소, 렘41:17)이라 하였고, 훗날 이 숙소는 요셉과 마리아가 잠시 머물렀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윗은 죽을 때까지 바르실래의 은혜를 잊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솔로몬에게 바르실래의 아들들을 솔로몬의 상에서 먹는 자 중에 참여하게 하라(왕상 2:7)는 유언을 남깁니다.
바르실래에 대한 존경은 대대로 이어졌습니다. 훗날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올 때에, 바르실래의 자손들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 재건을 돕겠다며 귀환길에 함께 했습니다(스2:61, 느7:63-64).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소망 중에 사는 성도는 다음 세대를 위하여 자신을 헌신합니다.
아버지 요나단의 선행은 아들 므비보셋에게 은혜를 입도록 영향을 미쳤습니다.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의 준비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바울의 믿음의 아들 디모데는 그의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의 믿음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초대교회 믿음의 거장이었던 ‘어거스틴’은 그의 어머니 모니카의 눈물의 기도가 있었기에 변화되었습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우리 자신을 위해서뿐 아니라, 우리의 다음 세대를 위해서라도 믿음과 선행에 있어 본이 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