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회. 고성 장신초등학교
-진부령 골 밑 공비가 출몰하던 학교-
인제에서 진부령으로 넘어가는 길은 참 아름답다. 설악산의 비경을 마주하면서 골골이 계절의 풍취를 자랑하는 계곡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돌고 돌아 또 돌고 돌아 진부령은 그렇게 넘어가야 한다. 아리랑 고개를 넘듯 고성과 인제를 연결하는 고개이다. 그 옛날 고성의 선비들이 한양에 과거를 보러 넘던 길이며, 고성의 산물을 인제로 지고 가고, 인제의 산물을 고성으로 지고 넘던 고개이다. 우리 조상들의 애환이 진부령 굽이만큼이나 켜켜이 쌓여 있는 고개이다.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의 종지부를 찍었던 연화동이 이 고개로 이어지고 있다. 고개에 오르면 고성에서 운영하는 미술관이 있고, 찬바람이 사철 훑고 지나가며 황태를 생산하는 고개이기도 하다.
고개에 얽힌 사연은 진부령 밑에 있는 소똥령마을의 장신초등학교까지 이어진다. 장신초등학교는 진부령 굽이를 거의 내려갔다고 생각할 때 쯤 있는 마을 뒤쪽에 숨어 있다. 몇 번을 물어서 찾아 간 장신초등학교는 한 마디로 황량했다. 늦가을 추위에 떨며 떨어지는 낙엽만큼이나 을씨년스럽게 학교는 다가왔다. 멀리서 손님이 왔음을 알고 커다란 개 몇 마리가 짖어댔다. 차에서 내리기가 무서울 정도로 개 짖는 소리는 압도적이었다. 차에서 내려 설렁설렁 발길을 몇 발자국 옮기자 어디선가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가 나타났다. 학교에 대해서 묻자 돌판에 새겨진 글을 가리켰다. 그리고 이미 오래되어 학교에서는 볼 것이 없다는 말을 했다. 다만, 아이들이 학교 옆 숲을 조성했고, 운동장 옆으로 흐르는 물길을 돌렸다는 이야기를 했다. 정말 그 관리인만 없다면 공비가 나와 총을 들고 위협을 할 것 같은 분위기가 개 짖는 소리와 어울려 주변을 으스스하게 하였다. 돌비에는 학교의 연혁을 이렇게 썼다.
1968년에 개교 153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장신초등학교(長新國民學校)는 교력 겨우 15년의 불운한 기록을 남겼다. 농촌학교의 교육여건이 교육수준의 제고를 염원하는 여망에 밀려 학교는 문을 닫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 짧은 역사속에 교육의 참된 이념을 구현하기 위하여 헌신한 많은 분들의 애정을 잊을 길이 없다. 이에 학교의 종말을 고함에 있어 그 연기를 밝혀 길이 기념하고자 이 비를 세운다. 1982년 3월 2일. 고성교육장 김유진.
학교의 내력과 없어진 데 대한 아쉬움이 담겼다. 옛 알림판 안에 비석이 있어서 비교적 온전하게 보전되어 있었다. 낡은 학교 건물과 풀이 무성한 운동장, 그리고 학교 연혁비가 이곳이 옛 초등학교였음을 강하게 말하고 있었다. 연못에는 연꽃 사이로 물고기가 가득했다. 그 옛날 아이들이 도시락에 뭍은 밥풀을 떼어 물고기 먹이로 주었던 장면들이 떠오를 것 같았다.
학교를 나와서 길가에 있는 어떤 중년의 아저씨에게 장신초등학교에 대해 물었다. 본인이 장신초등학교 1회 졸업생이라 했다. 그러나 손님이 온다면서 부지런히 트럭을 몰고 나가서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이 동네에 사는 유일한 장신초등학교 출신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최 옹(92세)과 그의 부인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그날의 행운이었다. 학교의 개교부터 폐교까지 관여했던 장본이었다. 6남매 자식들을 반 이상 이 학교에 보내 교육을 시켰다. 자식들이 결혼을 하면서 남기고 간 사진과 상장 등이 앨범 속에 잘 보관되어 있었다. 최 옹은 학교에 대해서 일사천리로 이야기를 펼쳤다.
1968년 장신초등학교가 세워진 원인은 이곳에 군인가족들이 대거 이주하면서이다. 당시 군인가족이 많이 이주한 것은 무장공비침투가 잦았던 이유에서이다. 특히 1968년은 울진삼척지구 무장공비사건이 일어난 시기이다. 지금은 마을 전체가 50여 가구에 불과하지만 그 당시 마을에는 280여 가구가 살았다. 집집이 아이들이 평균 4,5명이었던 시절이다. 옆 마을 광산리에 초등학교가 있어서 멀지만 통학을 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마을에서 회관에 1개 반을 모아 교육을 했다. 그랬더니 인근 마을에서 아이들을 보내 학생 수가 많아졌다. 이듬해에는 1,2학년을 한 반씩 2개 반이 만들어졌다. 광산초등학교에서는 반대가 심했다. 그러나 학생들이 광산초등학교에 등교를 거부했다. 그래서 3년 째 되던 해에 학교를 지었다. 그 옛날 아이들이 학교가 멀다고 등교를 거부했다니, 그 행동이 참 깜찍하기도 하고 새롭게 느껴졌다.
학교가 있는 곳은 외딴 곳이다. 마을과 100여m이상 떨어져 있다. 그 골짜기에는 민가가 한 채도 없다. 저녁이면 선생님들이 무서워했다. 간첩이 출몰하여 생명에 위협을 느끼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기숙사를 지었지만, 한동안 밤이 되면 선생님들이 최 옹의 집에 내려와서 잠을 자기도 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휴전선 전방은 안정되어 갔다. 그래서 군인들은 떠나고 아이들 숫자도 줄어들었다.
1회 졸업생을 낸 후에 학생들 숫자가 줄기 시작했다. 학생들 숫자가 줄자 교장으로 있던 사람이 다른 곳으로 갔다. 이후 1,2달 있다가 학교폐지 운동을 해서 주민과 갈등을 겪었다. 결국 학교는 개교한 지 15년 만에 폐교가 되었다. 153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소풍은 학교 옆 골짜기인 터박골로 가든가, 향교가 있는 교동으로 갔다. 터박골은 강물이 흐르고 꽤 넓은 자갈과 백사장이 있다. 숨겨진 보물이라고나 할까. 지금은 그 위에 군부대가 있어 그 옛날의 풍광은 만끽할 수 없어 아쉽기도 하다.
학교운동회를 할 때는 마을사람이 같이 했다. 달리기, 오잼이 등을 했단다. 제보를 해 주신 최 옹은 얼굴에 당시의 모습을 회상하며 환하게 웃었다. 하기야, 얼마 전 초등학교 교사로 있던 염 선생이라는 분이 제보자를 찾아 와 인사를 했다니 학교에 대한 정이 남달랐을 게다.
학교는 폐교하고 나서 2년간 방치를 했단다. 그래서 공매입찰을 했는데, 이곳에 여장교로 있던 사람이 낙찰을 받아 아들을 데리고 동물을 키웠다. 분뇨 냄새가 심해서 동네에서 반대를 하자 이사를 갔다. 그 다음 토지를 매입한 사람은 개신교 목사였다. 상당히 넓은 토지를 점령하고 교회 사람들이 와서 캠프를 하였다. 이제는 목사도 떠나고, 그 땅을 관리하던 사람이 경작을 하면서 지낸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