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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출생 |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가 다윗에게 낳은 넷째 아들, 그 이름의 뜻은 ‘평화스럽다’임.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사 선지자 나단을 통해 ‘여디디아’(‘하나님께 사랑을 입은 자’라는 뜻)라는 이름을 더해주셨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일찍부터 그를 다윗의 뒤를 이를 왕위계승자로 미리 예정해 두셨음을 추측케 함). | 삼하12:24~25 대상3:5 왕상1:28~30 |
2 | 다윗의 뒤를 이어 왕으로 즉위하다. | 선지자 나단의 지도하에서 신앙교육 받음. 이복 형 아도니야의 모반 행위에도 불구하고 선지자 나단과 제사장 사독, 군대장관 브나야 등의 도움으로 20세에 통일왕국 제3대 왕에 즉위, 예루살렘에서 40년간을 치리함. | 왕상1:32~1:53 |
3 | 국적 4인을 처벌하다 | 다윗 왕의 유언에 따라 왕위찬탈을 꾀했던 아도니야, 아도니야와 공모한 제사장 아비아달, 군대장관 요압, 다윗 왕을 모독한 시므이 등 국적 4인을 처벌함으로써 왕권을 더욱 견고히 함(이중 목숨을 건진 자는 아비아달 뿐). | 왕상2:1~2:46 |
4 |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다 | 즉위 원년 애굽 왕 바로의 딸과의 결혼. 즉위 초 기브온 놋제단 앞으로(당시 기브온 산당에는 모세가 지은 성막과 놋제단이 있었음) 나아가 일천번제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듣는 마음’(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 넓은 마음)을 구해 그 응답을 받음. 이후 예루살렘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번제와 감사제물을 드림. 신하들을 위해 잔치에서 두 창기 여인의 문제를 심리하여 슬기롭게 판결함) | 왕상3:1~28 대하1:3~12 |
5 | 성전 및 왕궁 건축(20년 동안) | 숙원사업이었던 성전(즉위 제4년, 출애굽사건으로부터 480년 후)과 왕궁(즉위 제11년) 건축을 거행함으로써 종교적, 행정적 기반을 닦음(완공까지는 성전 7년, 왕궁 13년이 소요). 한편, 솔로몬은 성전을 건축하는데 있어 두로(페니키아) 왕 히람(후람)에게 큰 도움을 받았음(건축자재인 백향목과 잣나무, 놋쇠 대장장이 등을 지원받음). 성전지대는 예루살렘 모리아산, 여부스 사람 오르난(아라우나)의 타작마당임. 이스라엘 거주 이방인들이 성전건축에 동원됨(짐꾼, 벌목꾼, 감독 등 15만 3천 6백 명). 성전완공 후 언약궤과 회막이 각각 다윗성과 기브온 산당으로부터 예루살렘 성전으로 이동되었으며, 회막과 회막 안의 기타 성구들은 새 것으로 모두 대치되었기 때문에 성전의 골방들에 모두 넣어둠. | 왕상5:1~9:9 대하2:1~7:22 |
6 | 영토확장 및 각종 제도 정비 | 하맛소바를 비롯한 각종 성읍 점령과 무역사업 진행, 3대 절기 준수, 제사장‧레위 반열 및 노동제도 정비 등 최고의 부귀영화를 누림. | 왕상10:14~25 대하8:1~18 |
7 | 문화적 업적 | 잠언 삼천 가지(구약 잠언 총 919절 중 솔로몬의 것은 대략 773절, 약 1/4정도만 남아 있는 셈)와 노래 1005편(아가, 시 72편, 127편 등만이 전해지고 있음) 등 활발한 문화적 업적을 남김. 당대의 현인 ‘에단’, ‘헤만’, ‘갈골’, ‘다르다’보다도 훨씬 지혜로웠을 뿐만 아니라 스바 여왕 등 각국 왕들의 예방을 받았음. 동식물학에 관하여 논할 정도로 박학다식했음. | 왕상4:29~34 왕상10:1~13 (대하9:1~12) |
8 | 솔로몬의 타락 (우상숭배, 폭정) | 노년에 이르러 무리한 결혼정책(후궁 700명과 첩 300명)으로 인한 각종 우상숭배 및 폭정을 자행, 결국 왕국분열의 위기를 초래함. 한편, 에돔 사람 하닷, 수리아 왕 르손, 에브라임 족속 여로보암 등이 그의 평생 대적이 되어 그를 괴롭힘. 생애의 말기, 회개 후 ‘전도서’를 저술함. | 왕상11:1~40 |
9 | 임종 | 40년간의 통치 끝에 60세의 나이로 임종함. 다윗의 성읍에 장사됨. | 왕상11:41~43 대하9:30,31 |
*‘평강의 사람’ 솔로몬(대상22:9)
“보라 한 아들이 네게서 나리니 그는 온순한 사람(평강의 사람)이라 내가 그로 주변 모든 대적에게서 평온을 얻게 하리라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그의 생전에 평안과 안일함을 이스라엘에게 줄 것임이니라.”(대상22:9)
솔로몬의 출생 전부터 하나님은 그를 '평강의 사람'(개정개역/‘온순한 사람’)이라 부르셨습니다.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은 그를 ‘평화스럽다’의 뜻을 지닌 '솔로몬'이라 이름 지어 부르셨던 것입니다. 사실 역대상 22장 9절은 솔로몬의 일생을 관통하고 있는 소명과도 같은 말씀으로 본문을 중심으로 그의 생애와 소명에 대해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솔로몬'의 이름은 '평화롭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고 하신 것일까요? 사실 성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름'은 단순한 '성명' 이상을 의미를 넘어 종종 하나님이 그 사람을 통해 나타내실 일이 암시되곤 했습니다. “ .....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9:3하)
어떤 계획이 숨어 있었던 것일까요? 어떤 소명이 주어졌던 것일까요? '솔로몬'의 소명(비전)을 생각하기에 앞서 그의 아버지 '다윗'의 생을 조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윗은 통일왕국 두 번째 왕으로 용맹무쌍하게 정복사업을 추진, '약속의 지경 대부분을' 온전히 회복했습니다. 아마도 여기까지가 다윗의 사명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을 이어 왕위에 오른 솔로몬의 사명은 또 어디까지였을까요? 분명 그의 사명은 ‘다윗에 의해 회복된 땅을 지혜롭게 다스려 안과 밖으로 평강을 끼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윗이 숱한 전쟁들로 인해 피를 많이 흘린 사람이었다면, 솔로몬은 그의 부친 다윗이 이룩해 놓은 토대 위에 평화와 안정을 구현해나가는 평강의 사람이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솔로몬을 '평강의 사람'으로 부르신 것은 결코 솔로몬 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평화와 안정'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다만 그를 도구로 사용했을 뿐입니다. 솔로몬이 똑똑해서가 아닙니다. 잘나서도 아닙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그의 생전에 평안과 안일함을 이스라엘에게 줄 것임이니라.”(대상22:9하)
- 대상 9:22로 본 솔로몬의 기도(왕상 3장)
솔로몬의 소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평안과 안정을 지켜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아버지 다윗의 기도에서 엿볼 수 있듯 '지혜'였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네게 지혜와 총명을 주사 네게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게 하시기를 더욱 원하노라.”(대상22:12) 그래서인지 솔로몬은 즉위하자마자 기브온 성막에 가서 기도하되, 오직 지혜와 총명 주시기만을 그토록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왕상3:9)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네 앞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네 뒤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왕상3:12)
- 대상 9:22로 본 솔로몬의 성전건축(왕상 5장)
솔로몬은 성전건축을 준비하면서 두로 왕 히람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당신도 알거니와 내 아버지 다윗이 사방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고 여호와께서 그의 원수들을 그의 발바닥 밑에 두시기를 기다렸나이다 이제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게 사방의 태평을 주시매 원수도 없고 재앙도 없도다 여호와께서 내 아버지 다윗에게 하신 말씀에 내 너를 이어 네 자리에 오르게 할 네 아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리라 하신 대로 내가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려 하오니.”(왕상5:3~5)
솔로몬은 왜 자신과 온 나라가 주변 모든 적들로부터 평화로울 수 있었는지, 왜 자신의 생전에 전대미문의 평화와 안정이 주어졌는지 분명히 깨달았던 것입니다. '평화와 안정'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 중 한 가지는 무엇입니까? '성전 건축'입니다.
- 대상 9:22로 본 솔로몬의 타락
솔로몬은 말년에 왕비들로 인해 우상숭배에 빠졌고, 혹독한 공사장에 백성들을 강제로 동원하는 등 독재자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물론 나중에 회개하고 돌아왔지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평강의 사람'으로의 소명 망각했기 때문이며, 왜 자신의 생전에 그토록 전대미문의 평화와 안정을 주셨는지를 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모든 것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 내게 주어진 부요, 건강, 지혜, 특별한 재능과 은사, 환경, 기회들 중 이유 없는게 무엇입니까?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스바 여왕(왕상10장/대하9장)
“심판 때에 남방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마12:42)
- '남방 여왕'이란 누구일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남방 여왕'은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과 관계를 가지고 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녀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먼 곳에서' 왔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솔로몬 때의 기록을 살펴보면, '남방 여왕'이 누구인지, 어떤 여인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같이 한 번 살펴볼까요?
참고로 마태복음12:38~45는 예수님에 대한 고의적 불신앙을 고집하던 바리새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답변이라는 점을 우리는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충분한 '이적'을 행하셨지만, 바리새인들은 고의적으로 믿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을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힘입어 하는 것이라고 왜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의 무능력을 찾아내고자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심판의 때'가 분명 올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가 되면 요나 선지자의 전도에 의해 회개하였던 니느웨 사람들이, 솔로몬의 지혜를 듣고자 찾아왔던 남방 여왕이 증인이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들은 교만과 허영에 찬 유대인들이 심판받게 될 때 그 증인이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니느웨 사람들과 남방여왕.... 어떤 공통점을 가지고 있을까요? 둘 다 요나 선지자, 솔로몬에 의해서 진리의 도를 듣고 회개 또는 개종했다는 것을 문맥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심판의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마12:41,42)
- '스바'라는 나라는 어떤 나라였을까요?
“스바 여왕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솔로몬의 명예를 듣고 와서 어려운 문제로 저를 시험코자 하여 예루살렘에 이르니 수원이 심히 많고 향품과 심히 많은 금과 보석을 약대에 실었더라 저가 솔로몬에게 나아와 자기 마음에 있는 것을 다 말하매.”(왕상10:1~2)
'스바'(Sheba)는 '남자'라는 뜻을 지녔습니다. 남부 아라비아의 백성이 살던 지역과 홍해를 건너 아비시니아(에티오피아)에 이주한 백성들이 살던 광범위한 지역을 이르는 명칭이었습니다. 남서아라비아에 위치한 이 나라는 대상업국으로서 그곳 대상들은 토산품인 황금, 보석, 향료를 비롯해서 인도, 아프리카의 특산물로 베니게 등지와 활발하게 무역을 했습니다. 또 고대의 아라비아인들(스바, 에돔, 데만 등)은 지혜로 유명한 족속이었으며, 동방 전설에 의하면 솔로몬과 스바는 지혜의 사람으로 이름나 있었다고 합니다. 스바는 예루살렘으로부터 2,000km나 떨어져 있는 먼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 진리의 도를 찾아서....
“천하 열왕이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마음에 주신 지혜를 들으며 그 얼굴을 보기 원하여 각기 예물을 가지고 왔으니....”(대하9:23,24상)
왜 스바 여왕은 솔로몬 왕을 찾아 왔을까요? 소문으로만 듣는 솔로몬의 명예와 지혜가 실제로 어느 정도인지 알아보고자 했던 것일까요? 아니면 상업적인 통상관계를 맺기 위해서였을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지혜를 사모하고 의를 구하기 위해서 방문했을까요?
물론 스바 여왕은 천하의 열왕들처럼 솔로몬의 명예와 지혜를 확인하고자 했을지도 모릅니다. 또 스바가 금, 향품, 보석 등을 많이 수출하는 나라였으므로, 남 아라비아에까지 확장된 솔로몬의 무역권을 상업적으로 이용하고, 이른바 "급부상하고 있는 뜨는 나라" 이스라엘과 통상을 맺고자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그녀가 '하나님의 지혜와 의를 들으려고 왔었다고 믿어집니다. 마태복음 12:42와 누가복음 11:31이 각각 그 문맥 안에서 차지하고 있는 의미들처럼 말입니다. 분명히 스바 여왕(남방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그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온 것입니다. '지혜로운 말'이란 '하나님의 지혜와 의'를 가리킨다고 봄이 타당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회개하지 않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이런 어투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남방 여왕은 솔로몬에게 하나님의 지혜와 의를 들으려고 그 먼 길을 자발적으로 찾아왔다. 그러나 너희는 솔로몬보다 더 풍성한 하나님의 지혜를 가진 나의 말씀을 왜 거부하는 것이냐?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증인으로 출석하리라.’
또 성경은 “스바 여왕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솔로몬의 명예를 듣고 와서”(왕상 10:1)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솔로몬의 모든 부귀와 명예의 원천이 여호와 하나님께 있음을 간파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솔로몬의 명예”... 그렇다면 이러한 명예(히, 쉐마, '평판', '소문')를 들은 그녀가 준비해 가지고 온 문제들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요? 어쩌면 그녀는 솔로몬과 종교적인 문제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었을 것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그녀가 회심하여 '여호와 신앙'으로 개종했다는 확실한 언급이 없지만, 본문과 신약성경의 문맥 등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그녀 또한 하나님의 백성 반열에 끼게 된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스바 여왕은 지혜로 유명한 족속인 '스바'의 일인자였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예멘 지역에 위치한 대상업국가의 최고 원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곤고했습니다. 그토록 많은 지혜를 깨닫고, 많은 부를 손에 넣으면 넣을수록, 그녀의 갈급함, 공허함은 깊어만 갔습니다. 자신이 이 땅 위에서 살아가는 목적, 자신의 국가의 소명 등이 궁금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이 나라를 어떻게 통치해가야 하는지, 어떤 통치자가 되어야 하는지 궁금했을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인생의 난해한 문제들 앞에서 너무도 무기력한 자신을 보면서 괴로워했을 그녀는 '종교적인 신앙상담'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그녀 자신에게 너무도 '어려운 문제들' 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 어려운 문제로 저를 시험코자 하여.... 자기 마음에 있는 것을 다 말하매...”(왕상 10:1,2)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명예를 듣고 와서 어려운 문제로 솔로몬을 시험코자 하여 예루살렘에 이르니....저가 솔로몬에게 나아와 자기 마음에 있는 것을 다 말하매....”(대하 9:1)
인생의 이 어려운 문제들 앞에서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을 그 때에, 한 소문을 듣게 된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그녀에게 한 줄기의 서광과도 같은 것이었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솔로몬의 소문(명예)”이었습니다. 솔로몬은 즉위 과정이나 통치 방법, 대외정책 등 모든 면에서 여호와의 도우심을 경험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대외적으로나 대내적으로나 큰 영예를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소문이 먼 나라 '스바'에까지 들려온 것입니다. 처음에 그녀는 그 소문을 반신반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면 갈수록 그 소문들은 확실해졌고 분명해졌습니다. 단순히 뜬소문만이 아님을 직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가서 직접 솔로몬 왕을 만나 '진리의 도'를 듣고 싶었습니다. 인생의 어려운 문제들을 속 시원하게 말해줄 그 누군가가 있다고 생각하니 두근거렸습니다.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직접 대규모의 수행단을 이끌고 장장 2,000km가 넘는 멀고 험난한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험한 길과 여러 가지 장애물들은 그녀의 희망 앞에서 아무런 거침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참된 진리의 도를 찾아 나선 구도자, 거룩한 순례자.... 스바 여왕....
- 진리의 도와 접하다
“솔로몬이 그 묻는 말을 다 대답하였으니 왕이 은미하여 대답지 못한 것이 없었더라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모든 지혜와 그 건축한 궁과 그 상의 식물과 그 신복들의 좌석과 그 신하들의 시립한 것과 그들의 공복과 술 관원들과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는 층계를 보고 정신이 현황하여.....”
스바 여왕은 원방 각처에 퍼진 솔로몬에 관한 소문이 하도 엄청나서 믿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직접 목격한 결과 그녀는 오히려 소문이 실제보다 미약하였음을 깨달았습니다(왕상10:6,7).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행복했습니다. 인생의 난제들, 도저히 풀릴 것 같지 않은 어려운 문제들이 한꺼번에 '뻥'하고 뚫려버렸기 때문입니다. 기나긴 어둠 속 터널을 지나 빛 가운데로 나아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정신이 현황하였겠습니까?' 인생의 난제들을 '잠언의 저자'인 솔로몬에게 직접 듣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흥분되고 설레는 시간이었겠습니다.
그녀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솔로몬의 명예(소문)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녀는 소문으로만 들었던 솔로몬의 지혜를 확인하고 그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열망에 사로잡혀 이 먼 길을 왔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스스럼없이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이것이 진리의 말씀을 접한 영혼들의 자연스러운 표현일 것입니다. 말씀이 깨달아질 때 누가 시키지 않아도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찬양이 터져 나올 것입니다. 기쁨이 솟구쳐 나올 것입니다. 평안이 뿜어져 나올 것입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 여호와께서 당신을 기뻐하사 이스라엘 위에 올리셨고 여호와께서 영영히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므로 당신을 세워 왕을 삼아 공과 의를 행하게 하셨도다.”(왕상10:9)
그녀는 솔로몬 곁에서 늘 지혜를 들었으면 하는 아쉬움으로 가득 찼습니다(왕상10:8).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다시 스바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가서 '스바'를 하나님의 나라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솔로몬으로 하여금 이스라엘 왕으로 삼아 공과 의를 행하게 하셨던 것처럼, 가서 그녀로 하여금 스바의 왕으로써 하나님의 공과 의를 행하게 하시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녀의 소명은 스바를 '참된 진리의 도로'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그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와서 솔로몬으로부터 진리의 말씀을 들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은혜 받은 그 자리에 안주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교회 안에만 머물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당하게 세상 속으로 파고 들어가서 세상을 변화시키고 바꿔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뜻입니다.
- 솔로몬보다 더 크신 분
예수님은 솔로몬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월등한 지혜를 소유하신 분입니다. “...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마13:41,42)
솔로몬에 비하면 달과 태양 이상으로 차이가 나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으십시오. 인생의 어떠한 어려운 문제가 있다 할지라도,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지 못한 것이 하나도 없으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있는 것을 다 고해 보십시오. 준비해 가지고 온 여러 가지 난제들을 말씀드려 보십시오. 대답치 못할 것도 하나도 없습니다. 인생의 어렵고 복잡한 문제들이 시원하게 뻥 뚫리게 되는 경험을 하시게 될 것입니다.
소문으로만 먼발치에서 듣고만 있지 마십시오. 달려와서 주님으로부터 참된 진리의 도를 들으십시오. 진리의 도에 흠뻑 빠지십시오. 참된 진리의 도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토록 목이 터져라 외치셨던 복음입니다. 아무리 험난한 길도 마다하지 않고 달려와서 주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하나님의 지혜를 확인하고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거룩한 열망에 사로잡히십시오. 듣기만 하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직접 그 분과 일대일로 만나십시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기43:5)
<남 유다의 역대 왕들>
1 | 르호보암 (B.C.931~913) | 암몬 여인 나아마의 소생 41세에 즉위, 17년 간 치리 북쪽지파들의 배반으로 왕국분열. 분열 직후 18만 대군을 일으켜 통일을 모색하려 했으나 선지자 스마야를 통한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고서 중단함. 통치초기 3년간 소위 정통성 수호를 외치는 다수 백성들의 뜻에 부응하여 경건한 모습으로 살았으나, 이후 원래의 완악했던 상태로 되돌아갔으며 결국 이로 인해 즉위 5년 때 애굽 왕 시삭의 침공을 받았음. 북이스라엘 왕 여로보암과 일평생 전쟁. | 왕상12:1~24 왕상14:21~31 대하10:1~12:16 |
2 | 아비얌/아비야 (B.C.913~911) | 제2대 유다 왕, 3년간 치리. 아비살롬의 딸 마아가(미가야)의 아들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않았음. 북이스라엘 80만 대군에 맞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나아가 적군 50만을 섬멸하고 많은 성읍을 빼앗았으며 여로보암을 더 이상 재기불능의 상태로 만드는 등 극적 승리를 거둠. | 왕상15:1~8 대하13:1~14:1 |
3 | 아사 (B.C.911~870) | 제3대 유다 왕, 41년간 치리 분단 이후 최초로 거국적인 종교개혁 단행. 구스 사람 세라와 그의 백만 대군을 물리침. 선지자 오뎃의 아들 아사랴의 촉구에 힘입어 (우상숭배 등의 이유로) 조모 마아가를 태후의 위에서 폐하는 등 지속적인 종교개혁에 더욱 박차를 가함. 이러한 아사의 개혁운동에 호응하여 북왕국의 에브라임, 므낫세, 시므온 지파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아사에게로 돌아왔음. 그러나 집권 후기, 그는 북이스라엘 바아사의 침공을 막기 위해 성전의 보물을 꺼내 아람 왕 벤하닷에게 주어 그와 동맹 체결함(하나님이 아닌 사람의 팔을 의지). 이를 책망하는 선견자 하나니 등을 투옥시키는 등 연이은 실정 끝에 중병에 걸렸으나 끝끝내 하나님을 찾지 않다가 생을 마침. | 왕상15:9~24 대하14:1~16:6 |
4 | 여호사밧 (B.C.873~848) | 제 4대 왕, 35세에 즉위하여 25년간 치리 실히의 딸 아수바의 소생. 유다의 3대 현왕 중 한 사람. 다윗의 처음 길로 행함. 산당과 아세라 목상을 제거하는 것은 물론 방백, 레위인, 제사장들을 각처로 파견하여 율법책을 가르치게 함. 부왕 아사가 탈취한 에브라임 도시들에 수비대를 주둔하고 각처에 요새와 국고성을 건축하였음. 군대양성에 힘써 최대 116만 대군을 양병함. 북이스라엘 아합 왕과 인척관계를 맺음(이는 유다 왕국에 우상숭배와 정쟁 등을 초래하는 비극적인 결과를 낳게 됨). 아합의 요청으로 함께 길르앗 라못에서 아람 왕 벤하닷과 싸우다가 목숨을 잃을 뻔함. 그러나 여호사밧은 아람과의 전쟁 직후 곧바로 제2차 종교개혁을 단행함으로써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정치, 경제적 위기를 일시적으로나마 넘길 수 있었음. 모압과 암몬 연합군의 침략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극적인 승리를 거둠. 북이스라엘 왕 아하시야와 함께 에시온게벨에서 선박을 건조했으나 엘리에셀 선지자의 예언대로 실패로 끝남. 북이스라엘 왕 여호람과 모압 원정에 나서 물이 없어 곤경에 처했으나 선지자 엘리사의 도움으로 큰 승리를 거둠. | 왕상22:41~50 대하17:1~20:37 |
5 | 여호람 (B.C.848~841) | 제 5대 왕, 32세에 즉위하여 8년간 치리 아합의 딸 아달랴와 결혼, 그녀의 충동으로 이스라엘 왕들의 길을 걸음. 그의 모든 아우들과 일부 방백들을 모두 숙청함(이 방백들은 여호사밧 치세 당시 율법을 가르쳤던 사람들로서 여호람이 아합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는 것을 반대했을 것임). 유다 전역에 산당을 세워 백성들에게 우상숭배를 강요함. 속국 에돔과 립나가 유다의 손에서 벗어남 선지자 엘리야의 예언대로 블레셋 사람들과 아라비아 사람들의 침략을 받아 그의 모든 재물과 아내들과 아들들을 탈취 당함(막내 아들 여호아하스/아하시야는 제외). 이 일 후 중병에 걸려 2년 만에 생을 마감. 열왕의 묘실에 장사되지 못한 첫 번째 왕. | 왕하8:16~24 대하21:1~20 |
6 | 아하시야/ 여호아하스 (B.C.841) | 제6대 왕, 22세에 즉위하여 1년간 치리 (역대하 42세는 필사자의 오기 인 듯) 모친 아달랴의 충동으로 역시 아합의 길로 행함. 이스라엘 왕 요람과 군사적인 협력관계를 맺고 아합 가문의 악습을 답습하는 등의 실정을 거듭 행하다가 이스르엘에서 예후에게 죽임을 당함. | 왕하8:25~9:29 대하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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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아달랴 (B.C.841~835) (왕위 찬탈) | 제7대 왕, 6년간 치리 아합의 딸, 유다 왕 여호람의 아내 아들 아하시야가 예후에게 죽임을 당하자 다윗의 씨, 즉 자신의 친손자들을 진멸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름(그러나 선한 여인 ‘여호사브앗/여호세바’가 그의 남편 제사장 여호야다와 함께 왕자 요아스를 구출, 6년간 보호하였음). 6년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우상숭배를 장려하고 온갖 폭정을 자행하였음.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혁명에 의해 축출되고 요아스가 왕위에 즉위함으로써 다윗의 왕통이 보전됨. |
왕하11:1~21 대하22:10~23:15 |
8 | 요아스 (B.C.835~796) | 제8대 왕, 7세에 즉위하여 40년간 치리 브엘세바 사람 시비아의 소생 그의 유일한 업적은 아달랴의 아들들(바알의 추종자들)에 의해 크게 손상된 성전을 수리했던 점임(이때 대제사장 여호야다가 요아스왕의 명을 받들어 헌금궤를 만듦/역사상 최초의 헌금궤).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생전에는 선정을 했으나 여호야다의 사후 각종 우상숭배를 허용하고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와 그의 형제들을 죽이는 등의 악정을 행하다가 결국 신하들에 의해 피살을 당함. 열왕의 묘실에 장사되어야 할 요아스는 그곳에 장사되지 못한 반면 제사장 여호야다는 그곳에 장사되는 영광을 얻었음. | 왕하12:1~21 대하24:1~16 |
9 | 아마샤 (B.C.796~767) | 제9대 왕, 25세에 즉위하여 29년간 치리 예루살렘 사람 여호앗단의 소생.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했으나 다윗 같지 않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에돔과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에돔 자손의 신을 가져와 분향하는 등 우둔함 행동을 서슴지 않음. 이후 교만해져 북이스라엘 왕 요아스에 선전포고를 하고 그와 싸우다가 대패, 북이스라엘의 포로가 되고 맘. 이 전쟁으로 인해 예루살렘 성벽 중 일부가 파괴되고 많은 사람들이 성전의 보물들과 함께 사마리아로 끌려감. 아마샤 왕은 말년에 모반에 의해 죽임을 당함. | 왕하14:1~22 대하25:1~24 |
10 |
웃시야/아사랴 (B.C.790~739) | 제10대 왕, 16세에 즉위하여 52년간 치리 예루살렘 사람 여골리야의 소생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의 생전에는 하나님을 찾고 선정을 베풀었지만, 스가랴의 사후 교만하여 왕직과 제사장직을 겸하려다가 나병에 걸려 격리생활을 함. 아들 요담의 섭정으로 이어짐. 블레셋, 아라비아, 마온, 암몬 사람들을 쳐서 복종케 하고(정복사업),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광야에도 망대를 세워 아라비아의 상업도로를 통제했으며, 육축에게 물을 공급하기 위해 많은 물웅덩이들을 팠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산과 밭에 농사를 짓게 했으며(중농정책), 일종의 투석기 등을 개발, 성곽과 망대 위에 두는 등 신무기 개발에도 박차를 가하는 한편, 양병에도 힘을 써 결국 30만 대군을 얻게 되는 등 다방면에서 괄목할 만한 업적들을 세움. 그가 죽던 해에 선지자 이사야가 부름을 받음(사6:1). | 왕하15:1~7 대하26:1~23 |
11 | 요담 (B.C. ~742) | 제11대 왕, 섭정을 마치고 25세에 즉위하여 16년간 치리. 사독의 딸 여루사의 소생. 성전의 윗 문을 건축하고 몇몇 성읍을 증축 또는 신축, 망대들을 세움으로써 외세의 침입에 대비하는 한편, 암몬 정벌에 성공, 3년간 그들로부터 조공을 받았음. 대체로 선한 통치를 했으나 ‘산당’을 제하지 못함(신앙적인 면에서 백성들은 강력하게 이끌지 못했음). | 왕하15:32~38 대하27:1~9 |
12 | 아하스 (B.C.742~728) | 제12대 왕, 22세에 즉위하여 16년간 치리 유다 왕들 중에서는 드물게 악했던 왕. 바알의 우상을 만들고, 흰놈의 아들 골짜기, 산당과 자연물 아래서 분향, 심지어 몰렉에게 자신의 자녀를 인신 제물로 바치기까지 함. 결국 아람 왕 르신과 이스라엘 왕 베가, 에돔 사람들, 블레셋 사람들의 연이은 침입으로 국토 전역이 유린당함. 그는 이사야의 예언(사7:3~9)에도 불구하고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 3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가 도움은커녕 도리어 앗수르의 포위공격을 당함(물론 앗수르는 유다의 요청을 받아 아람을 정복하고 르신 왕을 죽였음). 곤고할 때 더욱 여호와께 범죄함(다메섹 방문 이후 자신도 다메섹의 신들게 분향하겠다고 하면서 성전의 문을 닫고 그 기구들을 부수며 유다 전역에 산당 건립하는 등 하나님을 더욱 진노케 했음). 열왕의 묘실에 묻히지 못한 세 번째 왕. | 왕하16:1~20 대하28:1~27 |
13 | 히스기야 (B.C.728~697) | 제13대 왕, 25세에 즉위하여 29년간 치리. 스가리야의 딸 아비의 소생. 유다의 3대 현군 중 한 사람.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강하게 하심” 어릴 때부터 선지자 이사야로부터 좋은 영향을 많이 받았음. 즉위와 동시에 폐쇄되었던 성전의 문을 열고 개축함으로써 성전의 일이 갖추어지게 함. 거국적인 유월절 준수(분열왕국이래로 거의 중지되었던 유월절을 재개, 남유다뿐만 아닌 북이스라엘까지도 포함한 민족적 축제로 개최). 유다와 베냐민뿐만 아니라 에브라임과 므낫세 온 땅에서 산당들과 제단들을 제거, 왕국분열 이후로 거의 시행되지 않고 있던 제사장 및 레위인의 반열 정비, 각각의 반열대로 직임케 함. 십일조의 공정한 관리 및 분배 등 종교개혁운동 단행. 앗수르 왕 산헤립의 18만 대군의 침입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모두 전멸시킴. 죽을 병에 들었으나 기도의 응답으로 15년 더 생명의 연장을 허락받음(해 그림자가 십도 뒤로 물러감/3년 뒤 므낫세 출생). 그러나 그는 이후 바벨론 사신들의 방문 때 자신을 치유해주신 하나님을 겸손히 증거 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교만하여) 왕국과 나라 안에 있는 모든 보물을 보여주며 자랑하기에 급급하다가 선지자 이사야로부터 예루살렘 왕궁의 파괴되는 것은 물론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갈 것이라는 예언을 듣게 됨. 왕실의 묘실 중 가장 높은 곳에 장사됨. 그의 치세 때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완전히 멸망함(B.C.722년). | 왕하18:1~20:21 대하29:1~32:33 |
14 | 므낫세 (B.C.696~642) | 제14대 왕, 12세에 즉위하여 55년간 치리 헵시바의 소생. 부친과는 달리 바알의 단 건축, 일월성신 숭배, 사술과 요술 신봉, 인신제사 등 극심하게 우상숭배 하는 등 악행을 일삼다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유다 멸망에 관한 선언을 들음. B.C.650년 앗수르의 유다 침공 때 바벨론으로 끌려갔음. 그러나 이 포로생활은 우상숭배로 일관하던 그가 부분적으로나마 회개 하게 되는 등 그의 인생에 있어서 전환점 같은 역할을 함. 석방 직후부터 우상의 제단을 헐고 나름대로 종교개혁을 시도했으나 (불완전한 개혁추진과 백성들의 패역함 등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함. | 왕하21:1~18 대하33:1~20 |
15 | 아몬 (B.C.642~640) | 제15대 왕, 22세에 즉위하여 2년간 치리 욧바 하루스의 딸 므술레멧의 소생.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일삼다가 신복들의 모반으로 죽임을 당함. | 왕하21:19~26 대하33:21~25 |
16 | 요시야 (B.C.640~608) | 제16대 왕, 8세에 즉위하여 31년간 치리. 보스갓 아다야의 딸 여디다의 소생. 유다의 마지막 종교개혁자요 선한 왕. 유다의 3대 현군 중 한 사람. 16세 때 비로소 하나님을 찾았고, 20세 때 (므낫세, 에브라임, 시므온, 납달리 등을 포함한) 거국적인 종교개혁을 단행(이와 같은 연유로 종종 ‘젊은 개혁자’로 일컬어짐). 26세 때 성전을 수리하던 중 율법책을 발견, 율법을 반포하고 거국적인 유월절을 준수했으며, 철저하게 우상과 산당을 제거하는 등 역사 이래 가장 완벽한 종교개혁을 시도함. 그러나 그의 선정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므낫세의 죄 등으로 인해) 유다 멸망에 관한 뜻을 돌이키지 않으심.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고 므깃도 골짜기에서 애굽 왕 느고와 싸우다가 전사했으며, 유다 역시 애굽의 속국으로 전락하고 맘. 선지자 예레미야가 그를 위해 애가를 지음. | 왕하22:1~23:30 대하34:1~35:27 |
17 |
여호아하스/살룸 (B.C.608년) | 제17대 왕, 23세에 즉위하여 3개월간 치리. 립나 예레미야의 딸 하무달의 소생. 요시야 왕의 넷째 아들, 다른 이름은 ‘살룸’ 여호와 보시기에 악함. (그의 반애굽적 성향 때문에) 애굽 왕 느고에 의해 폐위 당함. 애굽으로 잡혀가 그곳에서 생을 마감함. |
왕하23:30~35 대하36:1~4 렘22:10~12 |
18 | 여호야김 /엘리야김 (B.C.608~597) | 제18대 왕, 25세에 즉위하여 11년간 치리 루마 브다야의 딸 스비다의 소생. 요시야 왕의 둘째 아들. 애굽 왕 느고에 의해 옹립됨. 본명은 ‘엘리아김’이었으나 느고에 의해 ‘여호야김’으로 개명됨. 여호와 보시기에 악함. 하나님의 선지자 우리야를 죽이고, 예언서(하나님의 말씀)를 칼로 베고 불에 태웠음.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의 제1차 침공을 받음. 바벨론의 공세 중에서도 악정으로 일관함. 결국 그는 선지자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함(이때 여호와의 전 기구 일부와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을 포함한 상류층 인사들이 많이 볼모로 끌려감). | 왕하23:36~24:7 대하36:5~8 렘22:13~19 렘36:1~32 단1:1~6 |
19 | 여호야긴/여고냐 /고니야 (B.C.597년) | 제19대 왕, 18세에 즉위하여 석달 열흘간 치리. 여호야김의 아들. 예루살렘 엘라단의 딸 느후스다의 소생. 여호와 보시기에 악함. 바벨론의 제2차 침공을 받아 유다의 대부분의 관리들과 함께 총 1만여 명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감(이 중에는 여호야긴 왕, 에스겔 선지자, 모르드개 등도 포함). 포로생활 37년 만에 석방, 환대를 받음(70년 만에 귀환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예레미야의 예언이 성취되기 시작함). 1차 포로귀환의 주역 스룹바벨이 바로 그의 손자였음(대상3:17~21). | 왕하24:8~17 대하36:9~10 렘22:24~23 겔1:1~3 에2:5~6 |
20 | 시드기야 /맛다니야 (B.C.597~586) | 제20대 왕, 21세에 즉위하여 11년간 치리. 립나인 예레미야의 딸 하무달의 소생 요아스의 셋째 아들이자 여호야긴의 숙부 본명은 ‘맛다니야’이나 바벨론 왕에 의해 ‘시드기야’로 개명됨. 여호와 보시기에 악함. 선지자 예레미야가 그에게 애굽을 의지하지 말고 바벨론에 항복할 것을 촉구했으나 끝내 이를 묵살함으로써 멸망을 자초했음. 그가 애굽에 사자를 보내서 군사적인 지원을 요청하고 바벨론을 배반하자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은 제3차 침공을 감행, 포위 끝에 성전과 예루살렘 성을 철저히 파괴했음(성전의 기구들은 모두 바벨론으로 옮겨감). 시드기야은 두 눈이 뽑힌 채 포로로 잡혀감. 그달리야(그다랴)로 하여금 유다 총독을 삼아 남은 백성들을 통치하게 하였으나 왕족 이스마엘에 의해 피살되고 (선지자 예레미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끝내 백성들은 애굽으로 도망가고 만다. | 왕하24:18~20 왕하25:1~21 대하36:11이하 렘52:1~11 |
<북 이스라엘의 역대 왕들>
1 | 여로보암왕조 | 여로보암 1세 (B.C.931~910) | 제1대 왕, 22년간 치리. 에브라임 족속 스레다 사람 느밧의 아들 솔로몬 당시 큰 용사로 요셉족속의 일을 감독하던 중 선지자 아히야으로부터 10지파의 왕이 될 것을 예언 받음. 솔로몬의 사후, 북쪽 10지파의 왕이 됨. 세겜과 부느엘을 요새화 함.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벧엘과 단에 두는 등 극악한 종교정책을 단행(무명의 선지자에 의해 벧엘의 이 단이 훗날 유다의 왕 요시아에 의해 무너질 것임이 예언됨). 유일하게 하나님을 향해 선한 뜻을 품었던 아들 아비야를 잃음. | 왕상12:1~14:20 대하10:1~19 대하13:1~22 |
2 | 나답 (B.C.910~909) | 제2대 왕, 2년간 치리 여로보암 1세의 아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함. 바아사의 모반으로 그와 그의 가문 전체가 절문지화를 입음(선지자 아히야의 예언이 성취됨). | 왕상15:25~32 | |
3 | 바아사왕조 | 바아사 (B.C.909~886) | 제3대 왕, 디르사에서 24년간 치리 잇사갈 족속 아히야의 아들 여로보암의 길로 행함. 선지자 예후에 의해 그와 그의 온 집을 향한 심판의 말씀이 선포됨. 유다 왕 아사와 일생동안 전쟁. | 왕상15:33~16:7 대하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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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엘라 (B.C.886~885) | 제4대 왕, 디르사에서 2년간 치리. 바아사의 아들. 여호와 보시기에 악함. 그의 신하 시므리에 의해 그와 그의 가문 전체가 멸문지화를 당함(선지자 예후의 예언이 성취됨). | 왕상16:8~14 | |
5 |
| 시므리 (B.C.885년) | 제5대 왕, 디르사에서 7일 동안 치리. 전군의 절반을 통솔하는 군대 장관이었으나 그 지위를 악용, 왕위를 찬탈 하는 데는 성공, 그러나 오므리의 군대에 포위, 전황이 좋지 못함을 보고 궁에 불을 질러 스스로 목숨을 끊음. 여로보암의 길로 행함. | 왕상16:15~20 |
6 | 오므리왕조 | 오므리 (B.C.885~874) | 제6대 왕 디르사와 사마리아에서 각각 6년씩 총 12년간 치리함. 사마리아 산을 매입, 이 위에 새로운 왕궁과 수도를 건설했음. 여로보암의 길로 행함. | 왕상16:21~28 |
7 | 아합 (B.C.874~853) | 제7대 왕, 사마리아에서 22년간 치리 오므리의 아들. 이전의 모든 왕들보다 더욱 악을 행함. 시돈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과 결혼, 북이스라엘에 바알숭배를 적극 도입.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빼앗음. 선지자 엘리야로부터 그와 그의 가문 전체가 멸문지화를 입게 될 것임을 들음. 모두 세 차례의 걸쳐 아람과 전쟁함(마지막 전투에서 전사함). 유다 왕 여호사밧과 사돈 관계를 맺음. 아람과의 마지막 전투 땐 여호사밧과 함께 전투에 나섬. | 왕상16:29~22:40 대하18:1~34 | |
8 | 아하시야 (B.C.853~852) | 제8대 왕, 사마리아에서 2년 동안 치리 아합의 아들. 부친 아합의 길로 행함. 그의 치세 때 모압이 배반함. 낙상, (선지자 엘리야의 선포대로) 끝내 회복되지 못한 채 죽음. | 왕상22:51~53 왕하1:1~18 | |
9 | 여호람/요람 (B.C.852~841) | 제9대 왕, 사마리아에서 12년간 치리 아합의 아들이자 아하시야의 아우 금송아지 우상을 제거하지는 않았으나 바알 주상을 제함. 유다 왕 여호사밧과 군사동맹, 함께 모압 정벌을 다녀오기도 함. 아람의 1,2차 침입을 받았으나 모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극적인 승리를 거둠. 아람 왕 하사엘과의 길르앗 전투에서 부상을 당해 치료를 위해 이스르엘로 돌아와 있다가 예후에 의해 그와 모친 이세벨, 가문 전체가 몰살을 당함. | 왕하1:17~18 왕하3:1~27 왕하6:8~8:6 왕하9:1~26 왕하9:30~10:27 | |
10 | 예후왕조 | 예후 (B.C.841~814) | 제10대 왕, 사마리아에서 28년간 치리 님시의 손자 여호사밧의 아들 엘리사의 선지생도 중 한 명에게 북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음.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이스라엘 왕 요람과 왕후 이세벨, 유다 왕 아하시야과 그의 형제들 등 아합과 관련된 자 전부를 몰살시킴.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과 함께 바알숭배자들을 척결하는 등 종교개혁을 단행했으나 지속적이지 못했음. 그러나 금송아지 숭배의 죄에서는 벗어나지 못했음. 아합가문 멸절과 바알숭배 척결 등의 이유 등으로 그의 왕조가 사대에 걸쳐 이어질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음. 그의 치세 때부터 이스라엘의 영토들이 줄어들기 시작함(아람에게 요단 동쪽 길르앗 온 땅을 빼앗김). | 왕하9:1~10:36 |
11 | 여호아하스 (B.C.814~798) | 제11대 왕, 사마리아에서 17년간 치리 예후의 아들, 여로보암의 길로 행함. 아람의 침입에 잠시 겸비하긴 했으나, 다시 죄악과 짝함으로써 아람에 의해 거의 전멸되다시피 하게 됨. | 왕하13:1~9 | |
12 | 요아스 (B.C.798~782) | 제12대 왕, 사마리아에서 16년간 치리. 여호아하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길로 행함. 선지자 엘리사의 마지막 예언대로 세 번에 걸쳐 아람을 쳐서 무찌르고 성읍들을 회복함. 유다 왕 아마샤과의 전쟁에서 아마샤를 사로잡고 예루살렘 성벽 중 182m가량 허물었음. | 왕하13:10~25 왕하14:8~16 | |
13 | 여로보암 2세 (B.C.782~753) | 제13대 왕, 사마리아에서 41년간 치리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음. 북이스라엘 왕들 중 오므리와 아합 다음으로 가장 강력한 국력을 과시했음(이는 선지자 요나를 통해 하신 예언의 성취) | 왕하14:23~29 | |
14 | 스가랴 (B.C.753~752) | 제14대 왕, 사마리아에서 6개월간 치리 여로보암 2세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음. 살룸의 모반에 의해 죽임을 당함. 하나님의 예언대로 예후왕조가 5대 약 80년 만에 끝나고 맘. | 왕하15:8~1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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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룸 (B.C.752년) | 제15대 왕, 사마리아에서 1개월간 치리 야베스의 아들 므나헴의 모반에 의해 죽임을 당함. | 왕하15:13~16 |
16 | 므나헴왕조 | 므나헴 (B.C.752~742) | 제16대 왕, 사마리아에서 10년간 치리 가디의 아들. 여로보암의 길로 행함. 딥사와 그 사방을 치고 아이 밴 부녀의 배를 가르는 등 잔인무도했음. 앗수르 왕 불이 쳐들어오자 부자들로부터 은 천달란트를 강탈하여 불에게 줌. | 왕하15:17~22 |
17 | 브가히야 (B.C.742~740) | 제17대 왕, 사마리아에서 2년간 치리 므나헴의 아들, 여로보암의 길로 행함. 장관 베가의 모반으로 인해 죽임을 당함. | 왕하15:23~26 | |
18 |
| 베가 (B.C.740~731) | 제18대 왕, 사마리아에서 20년간 치리 르말랴의 아들, 여로보암의 길로 행함.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셋이 쳐들어와 이스라엘 대부분의 도시를 정복하고 많은 백성들을 포로로 끌고 갔음. 호세아의 반역으로 죽임을 당함. | 왕하15:27~31 |
19 |
| 호세아 (B.C.731~721) | 제19대 왕, 북이스라엘의 최후의 왕 사마리아에서 9년간 치리 엘라의 아들, 여호와 보시기에 악했으나 다만 그 전 왕들과 같지는 않음. 앗수르 왕 살만에셀 3세의 침공, 3년에 걸친 사마리아 포위 공격 끝에 완전히 멸망함. 이스라엘 백성 다수는 포로로 잡혀갔고 그나마 남아 있던 백성들조차 앗수르에 의해 유입된 이방인들과 혼혈되기 시작했음(남유다는 북이스라엘 멸망이후 무려 140년 동안이나 더 지탱함). | 왕하17:1~41 |
* 갈멜산에서의 대결(선지자 엘리야/왕상17:1~18:46)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 큰 비의 소리가 있나이다.”(왕상18:41)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약5:17-18)
- 3년 6개월간의 가뭄
우상숭배의 기운이 극도로 창궐하였던 북 이스라엘, 그 속에서 굴하지 않고 사역을 했던 선지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엘리야라는 이름을 가진 사내였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인 ‘가뭄’을 선포한 엘리야. 사실 가나안 종교에 의하면 땅에 비를 내리는 축복은 주로 ‘바알’로부터 말미암았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가뭄’을 선포하신 것은 이 같은 ‘바알’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과 축복이 누구로 말미암아 오는지 밝히 그러내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도가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3년 6개월 동안이나 이스라엘은 물론 이웃나라 시돈에까지(사실상 바알 숭배의 원산지)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3년 6개월 후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거짓 선지자 850명과 대결하였고 또 승리했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보고 있는 그 앞에서 바알의 허구성과 거짓됨을 여실히 폭로했고,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심을 증거 했던 것입니다. 이제 뭐면 남았습니까? 비가 내리는 일만 남았습니다.
- 왜 하필 갈멜산에서 대결을 펼쳤을까요?
“...그가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하되 야곱의 아들들의 수효를 따라 엘리야가 돌 열두 개를 취하니...”(18:30)
여기서 ‘수축하되’는 ‘고치다’의 뜻으로 전혀 새롭게 세우는 것이 아니라 부서진 것을 고쳐 세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엘리야 선지자가 대결장소로 갈멜산을 택했던 이유 중 하나는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보여주고자 함이었을 것입니다. 무너진 제단, 무너져 버린 예배가 그 원인이라는 사실을 지적해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회복 또한 이곳 갈멜산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확신했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갈멜산의 경우처럼 완전히 무너져 있고 황폐해 있는 것은 아닙니까? 문제의 원인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합은 문제의 원인을 ‘엘리야 선지자’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잡고자 방방곡곡에 군사들을 보내었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분명히 말합니다. 문제의 원인은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무너진 제단, 무너진 예배라고 말입니다.
- 다시 내린 비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 큰 비의 소리가 있나이다”(18:41)
엘리야는 북 이스라엘 왕 아합에게 위와 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습니다. 하루 종일 대결의 긴장감 속에서 음식을 하나도 입에 대지 못했을 아합 왕에게 말입니다. 더구나 백성들의 분노와 바알 선지자들의 죽음으로 잔뜩 겁에 질려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아합에게 엘리야는 ‘이제 아무 걱정하지 말고 가서 먹고 마시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큰 비의 소리가 있나이다.”였습니다. 즉, “벌써부터 큰 비가 몰려오는 소리가 들립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갈멜산에서 바라본 지중해(대해)는 그저 잠잠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바다 쪽에는 먹구름은커녕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그가 올라가 바라보고 말하되 아무것도 없나이다...”(왕상18:43)
엘리야는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요? 비가 조금도 내리는 것도 아니고 큰 비가 온다는 말을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먹구름은커녕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바다....3년 반 동안이나 ‘비’를 구경할 수도 없었던 그런 상황 속에서 우리의 선지자 엘리야는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했던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에게만 ‘큰 비의 소리’를 들려주셨던 것은 아닐까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전에 엘리야 선지자에게 비를 이 땅에 내리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날이 지나고 제 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왕상18:1)
엘리야는 그 말씀을 확신하고 사르밧을 떠나 북이스라엘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그것도 죽기를 각오하면서 말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곧 ‘큰 비를 이 땅에 내리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 말씀을 근거로 아합에게 당당하게 나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하늘은 구름 한 점 없고 대지는 바짝 바짝 타들어가고 있지만 말입니다.
지금 우리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길고 긴 가뭄으로 다 시커멓게 타들어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고 먹구름은커녕 구름 한 점 떠 있지 않는 상황이지 않습니까? 우리의 신앙이 메마르다 못해서 아예 짝짝 금이 가 있지 않습니까? 은혜의 단비에 촉촉이 적셔본지가 아득하지 않습니까? 큰 비는커녕 가랑비조차도 보지 못한 것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조용히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나아오시길 바랍니다. 이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 또 무엇을 요구하고 계시는지 들으시기 바랍니다. 언젠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가 큰 비를 내리게 해주셨다.” “내가 은혜의 단비를 쏟아 주겠다.”
‘큰 비가 몰려오고 있는 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비록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라 할지라도 머지않아 ‘큰 비’가 내릴 것입니다. 지금 엘리야 선지자와 함께 그 소리를 듣기 원합니다. 오랫동안 황폐하였던 이 땅에 성령의 단비가 흡족히 내리길 원합니다.
- 엘리야 우리와 똑같은 사람입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약5:17상)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들을 우리와는 전적으로 다른 존재들로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런 생각이야말로 성경을 오해케 하고 우리의 마음을 닫아버리게 만드는 주범입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엘리야나 다윗 같은 사람들은 우리와 다를 것이 없는 똑같은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우리와 성경이 같은 사람입니다. 똑같이 실망하고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똑같이 우울해하며 똑같이 연약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과 우리는 다른 결과를 갖게 될까요?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매었느니라.”(약5:17하~18)
그들은 간절히 기도했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결과를 맛볼 수가 있었습니다. ‘믿음의 기도’, ‘의인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많습니다. 믿는 자들의 기도는 구체적으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믿음으로 간절히 간구하는 그것을 통해 변화를 일으키신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아합이 먹고 마시러 올라 가니라 엘리야가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그 사환에게 이르되 올라가 바다 쪽을 바라보라 그가 올라가 바라보고 말하되 아무것도 없나이다 이르되 일곱 번까지 다시 가라.”(왕상18:42-43)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믿음의 기도를 간절히, 끈질기게 하였던 것입니다. 한번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기도했던 것 입니다. 엘리야는 어떻게 그렇게 간절히 기도할 수 있었을까요? ‘큰 비의 소리’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믿음으로 ‘큰 비가 몰려오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비록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이었지만 말입니다. 간절히 기도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수백 번 기도만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시고 ‘큰 비의 소리’를 들려주실 때에라야 가능합니다. 기도하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해야 합니다. 또 기도하되 성령의 인도하심에 귀를 열어둔 채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엘리야는 그렇게 기도하고 또 기도할 때 언젠가 ‘손 만한 작은 구름’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곧 큰 비가 몰려올 징조였습니다.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하여지며 큰 비가 내리는지라...”(왕상18:45상)
* 당신만이 이룰 수 있습니다(오바댜/왕상18:1~5).
“아합이 왕궁 맡은 자 오바댜를 불렀으니 이 오바댜는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라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오바댜가 선지자 백 명을 가지고 오십 명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더라.”(왕상18:3,4)
- 아합의 왕궁 맡은 자 오바댜
본문 속에 등장하는 오바댜는 아합의 왕궁 맡은 자, 즉 궁내대신으로 자신의 신분을 십분 활용, 하나님의 선지자 100인을 이세벨의 핍박으로부터 무사히 보호할 수 있었습니다. 아합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열왕기상 16장 30절 이하에서 볼 수 있듯 그 이전 모든 왕들보다 더욱 악했던 왕입니다.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신전 안에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또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니 그는 그 이전의 이스라엘의 모든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왕상16:30~33)
그런 아합의 최측근이 왕과 왕비 몰래 여호와 하나님의 선지자 100인을 빼돌려 숨겨주었다니 납득이 되십니까? ‘아합의 궁내대신’과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가 잘 어울릴 수 있다고 생각되십니까? 제가 보기엔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의 이런 생각을 한방에 날려버린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바로 오늘 우리가 살펴보게 될 오바댜라는 인물입니다.
- 어려서부터 여호와를 경외했던 오바댜
“...당신의 종은 어려서부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왕상18:12하)
오바댜는 (자신의 고백처럼) 어려서부터 여호와 하나님만을 경외해 온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악한 왕과 왕비 밑에서 몰래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으니 그 고충이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오바댜라고 해서 선지자 엘리야처럼 당장 궁궐을 박차고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었던 적이 어찌 없었겠습니까? 차라리 떳떳하게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 놓고 순교를 당하는 게 더 낫지 않겠느냐는 생각도 많이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바댜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 입니까? 무슨 이유에서입니까? 용기가 없어서입니까? 기회가 없어서였겠습니까? 아닙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실행에 옮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무엇 때문입니까? 다른 이유라도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네 맞습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망명을 하거나 혹 체포되어 순교의 제물로 드려지는 것 역시 주님 앞에 숭고한 일일이겠으나, 적어도 그 당시만큼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기에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죽는 것이 두려워서가 아닌 자신에게 맡겨주신 그 사명이 수포로 돌아갈까 봐가 더 두려웠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엄청난 일들을 하길 원하셨습니다. 오바댜가 아니면 아무도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그런 일들 말입니다.
물론 그 일들이 무엇인지 처음부터 알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그는 분명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 무언가 중요한 일들을 행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을 한 채 궁에 남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그는 우상숭배의 소굴 중심부에 남아서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찾기를 시작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면서 말입니다.
-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오바댜가 선지자 백 명을 가지고 오십 명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더라.”(왕상18:4)
오래지 않아 북 이스라엘 전체에 왕후 이세벨의 대대적인 종교말살정책이 시작되었고, 그 결과 수많은 여호와의 선지자들과 성도들이 체포, 구금, 사형되기 시작했습니다. 상황이 이쯤 되다 보니 오바댜 역시 바빠지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이유에서입니까? 왜 자신이 여태껏 궁에 남아야 했는지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으며, 또 어째서 자신이 ‘왕궁 맡은 자’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충분히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에스더의 경우처럼 말입니다.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에4:14하)
그 소임이란 무엇이었습니까? 궁에 남아 비밀리에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빼내어 구출하는 것이었습니다.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비록 그가 궁중의 모든 일을 관장하는 높은 지위에 있었다 하더라도, 극한 가뭄 속에서 백 명이나 되는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숨기고 떡과 물을 제공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궁중이 온통 왕후 이세벨의 사람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고, 이들은 모두나라 안팎에서 여호와를 섬기는 이들을 색출해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던 터라) 들통이라도 나는 날에는 자신의 가족은 물론 (자신이 보호하고 있던) 선지자 일백 인의 목숨까지도 무사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에스더처럼 ‘죽으면 죽으리라’(에4:16)는 각오로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과 재력을 최대한 활용, 위기에 처한 선지자들을 도왔습니다. 이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확신했기에 그와 같은 일들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 오직 당신만이 이룰 수 있는 그 비전.
하나님은 오직 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그 독특한 사명에로 그 사람을 부르십니다. 만일 오바댜가 엘리아처럼 되겠다고 궁궐을 뛰쳐나갔다면, 오늘 본문과 같은 큰일들을 이룰 수 있었겠습니까? 그럴 순 없습니다. 왜냐하면 엘리야 선지자가 해야 할 일이 따로 있고, 궁내대신 오바댜가 해야 할 일이 따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엘리야처럼 살 수는 없다 할지라도 최소한 우리는 각자가 속한 크고 작은 일터 내에서 오바댜처럼 살 수는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네 사회에는 저마다의 오바댜들을 절실히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등 각 분야에서 충성스럽게 일할 그런 오바댜들 말입니다.
오바댜가 왕궁 맡은 자라는 자신의 신분과 직임을 십분 활용함으로써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보호할 수 있었듯이, 우리 역시 각자의 위치와 재능, 역량 등을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십분 활용해나가야 합니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습니다. 하물며 우리이겠습니까?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고전12:22)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너나할 것 없이 하나님 나라에 있어서 모두 다 아주 요긴한 사람들입니다. 명심하십시오.
-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
“...이 오바댜는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라.”(왕상18:3하)
많은 이들이 (자신이 속한) 사회나 단체들이 부패하고 타락한 길로 치닫고 있을 때, 물러나 꼭꼭 숨어버립니다. 반드시 그것만이 참다운 용기와 믿음은 아닌데도 말입니다. 오바댜의 경우를 보십시오. 자신의 신앙이 허용되는 범위 내에서 계속 그 공동체에 남아 끝까지 자신의 소임을 묵묵히 다해내지 않습니까?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열왕기상의 기자 역시 그런 그를 향해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개역성경/크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아합이 왕궁 맡은 자 오바댜를 불렀으니 이 오바댜는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라.”(왕상18:3)
성경 전체를 살펴보아도 이와 같은 평가 그렇게 많지가 않은 것 같습니다. 이 점을 감안한다면, 오바댜에 대한 이와 같은 하나님의 평가는 그저 놀라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 일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와 같은 사람들도 귀하게 여기시지만, 동시에 오바댜 같은 사람들도 귀중히 여기신다는 점입니다. 엘리야의 사명 못지않게 오바댜의 사명 또한 중요하게 생각하는 균형 잡힌 시각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각자가 맡은 사명은 획일적이지 않고 다양합니다.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고전12:17-20)
다 눈이 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다 입이 되려고 하면 곤란합니다. 손과 발이 되어 주십시오. 여러분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여러분 각자가 할 수 있는 그 소명으로 부르심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각자의 분야에서 뛰어난 장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달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하여 세상을 향해 ‘따라올 테면 따라와 봐!’ 라고 당당하게 말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 당신에게 어떤 일로 부르시고 계십니까?
* 바람, 지진, 불 그리고 세미한 소리(왕상19:9~1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왕상19:11~13)
- 바람, 지진, 불
바람, 지진, 불은 모두 하나님의 임재나 성령을 상징하는 현상들이며 하나님의 위엄하신 능력의 표현들입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3:8) /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행2:2)
바람(헬, 프로에스)은 ‘폭풍처럼 강하게 휘몰아 부는 바람’을 뜻하는 것으로 형체는 보이지 않으면서도 강하고 분명한 역사를 일으키는 것이 하나님의 임재나 성령의 속성과 비슷하기 때문에 종종 하나님의 임재의 표현이나 성령의 역사 등에 비유되곤 했습니다(요3:8).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 가마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출19:18) /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4:31)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권능을 피부(온 몸)로 느끼고 체험할 수 있다는 면에서 ‘지진’(진동) 역시 종종 하나님이나 성령의 임재의 상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산 위의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 ‘맹렬한 불 같이’ 보였고.”(출24:17)
불 역시 죄악 되고 더러운 것을 태워 없앤다는 점과 정결케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출3:2~5;13:21;24:17;40:38).
그런데 오늘 본문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불, 지진, 바람이 한꺼번에 등장합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인과의 갈멜 산 대결에서 화려한 승리를 이뤄냈지만(왕상 18장), 왕비 이세벨로부터 뜻밖의 살해위협을 받자 곧 낙담과 좌절에 빠졌고 그 길로 광야로 도주,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율법을 받은 호렙산(시내산) 그 굴속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고 물으셨고 그 앞에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는 ‘크고 강한 바람’, 온 산을 뒤흔들어놓는 ‘지진’, 온 산을 다 집어삼킬 것 같은 맹렬한 ‘불’ 등을 지나게 하셨습니다. 왜 그러신 것일까요? 무엇을 가르치고자 하신 것일까요?
- 그 속에는 하나님께서 계시지 아니하셨습니다.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왕상19:11,12)
불과 지진, 바람을 그의 앞에 등장시킨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마도 이 말씀을 하고 싶어서가 아닐까요? ‘제 아무리 바람이 산을 가를 것 같고 거대한 바위를 산산조각 낼 것 같아도 그 속에 내가 있지 않으며, 제 아무리 지진이 온 땅을 요동케 하고 뒤집어엎어 놓을 것 같아도 그 속에 내가 있지 않으며, 제 아무리 불꽃이 온 산을 다 삼켜 버릴 것 같아도 그 가운데 내가 있지 않단다.’
네, 그렇습니다. 크고 강한 바람 가운데에도, 지진 가운데에도, 불 가운데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럼 무엇으로 임하셨나요?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엘리야가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가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왕상19:12하~13)
오히려 작고 세미한 음성으로 엘리야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의아하지 않습니까? 짧은 우리 생각으로는, 크고 강한 바람 같이 역사, 온 땅을 뒤집어 엎어놓는 것과 같은 기적, 맹렬히 타는 불과 같은 현장 속에 분명 하나님이 계실 것만 같은데 말입니다(물론 이 같은 일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부인할 수 없지만 말입니다).
- 세미한 음성으로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만나세요.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왕상19:12~13상)
이제까지 엘리야의 삶은 이적과 충격으로 가득한 극적이고도 드라마틱한 삶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일 순 없으며, 또 전부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을 통해 날마다 신앙의 깊은 데로 나아가야 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뒤집어 생각해보면, 우리가 제 아무리 크고 강한 바람처럼, 강력한 지진처럼, 맹렬한 불꽃과 같은 역사들을 이룬다 해도, 매일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교통하심이 지속되고 있지 않다면, 로뎀나무 아래의 엘리야처럼 언제든지 무너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 복 주실 이유를 찾으시는 주님(여호사밧 왕과 엘리사 선지자/왕하3:4~14).
“엘리사가 이르되 내가 섬기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만일 유다의 왕 여호사밧의 얼굴을 봄이 아니면 그 앞에서 당신을 향하지도 아니하고 보지도 아니하였으리라.”(왕하3:14)
- 뜻하지 않는 문제 앞에 서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 왕과 유다 왕과 에돔 왕이 가더니 길을 둘러 간지 칠 일에 군사와 따라가는 가축을 먹일 물이 없는지라.”(왕하3:9)
이스라엘 왕 아합의 사후 '양 치는 자 출신'인 모압 왕 메사가 이스라엘을 배반하자 그의 아들 여호람은 유다 왕 여호사밧, 에돔 왕과 함께 연합군을 결성, 에돔 광야 길을 통해 친히 정벌을 떠났습니다. 원정 7일째, 연합군은 뜻하지 않은 문제 앞에 직면하고 맙니다. 무엇이었습니까? “...길을 둘러 간지 칠 일에 군사와 따라가는 가축을 먹일 물이 없는지라.”(왕하3:9하) 에돔 광야 길로 진군하고 있었던 터라(8절) 마실 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어쩌다가 이 지경에까지 오게 된 것일까요? 어쩌다가 이 지경에까지 처하게 된 것일까요?
아마도 ‘와디’(Wady, 건천)를 좇아갔던 것 같습니다. ‘와디’가 무엇입니까? 광야에 있는 시내입니다. 광야에도 시내가 있다 구요? 네 있습니다. 단, 비가 올 때만 흐르는 시내, 즉 ‘건천’입니다. (욥의 표현에서도 볼 수 있듯) 비가 오면 갑자기 물이 불어 범람하다가도 비가 그치면 얼마가지 않아 깡마른 바닥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내 형제들은 개울과 같이 변덕스럽고 그들은 개울의 물살 같이 지나가누나 얼음이 녹으면 물이 검어지며 눈이 그 속에 감추어질지라도 따뜻하면 마르고 더우면 그 자리에서 아주 없어지나니 대상들은 그들의 길을 벗어나서 삭막한 들에 들어가 멸망하느니라 데마의 떼들이 그것을 바라보고 스바의 행인들도 그것을 사모하다가 거기 와서는 바라던 것을 부끄러워하고 낙심하느니라.”(욥6:15~20)
(광야를 행단 하던) 대상들이 왜 그들의 길을 벗어나서 삭막한 들에 들어가 멸망합니까? 시냇가로 다니다가 돌이켜 광야로 가서 죽습니까?(18절) 또 데마의 떼들과 스바의 행인들이 왜 그렇게 물이 먹고 싶어 애를 태우나 결국 찾아도 물 한 모금 구할 수 없어 낙심케 됩니까? 물이 흐르던 시내를 부지런히 좇아가보지만 결국 허탕만 친 채 낙심할 수밖에 없게 됩니까?(19,20절) 와디를 좇아 나섰기 때문입니다. 물이 흘렀던 흔적은 있으나 정작 물은 없는 와디를 따라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사막의 신기루와도 같은 와디를 좇아다니다가 결국 광야 한 복판에서 멸망케 될 처지에 놓여 있지는 않습니까? 본문에 나오는 세 왕과 그의 군사들처럼 말입니다. 모양은 있으되 내용이 없고, 모양은 있으되 능력이 없는 세상의 헛된 길들로 나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생수의 강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좇아갑시다. 생수를 주시되 흘러넘치도록 부어주실 주님만 따라갑시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7:37~39 여기서 '생수'는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의미) 오직 주님에게만 생명이 있고 쉼이 있으며 참된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 늘 우리 생각만 하시는 주님
엘리사가 왜 군사들을 따라 모압의 경계 지역까지 오게 되었는지, 성경은 그 이유에 대해서 철저히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14절을 미루어 보건데 이는 분명 유다 왕 여호사밧에 대한 그의 염려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즉 엘리사는 이미 여호사밧의 선정에 대해 들어 알고 있었으므로 그가 곤경에 빠질 것을 대비해서 따라 왔던 것입니다.
이게 하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본심입니다. (물가에 어린아이를 내놓은 부모의 심정처럼) 혹여나 우리가 잘못될까봐서, 곤경에 빠지기라도 할까봐 늘 노심초사하는 모습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걱정되셔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곁에 와 있는 분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실 성경은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고 말하고 있으나 사회생활 하다보면 그게 어디 말처럼 쉽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택하신 방법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속 엘리사처럼 우리를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말없이 우리와 동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향해 무수한 오해들을 품은 채 원망을 늘어놓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런 아버지를 향해서 입술로 수없는 범죄를 저지르곤 합니다. 지금은 그 원망을 멈출 때입니다. 지금은 그 불평을 멈출 때입니다. 지금은 그 오해들을 내려놓을 때입니다. 왜 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잠잠히 사랑하셔서 결국 우리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는 분이며, 우리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 뛰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상상이 되십니까?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3:17)
- 징벌보다는 늘 복 주실 이유를 찾으시는 하나님
“엘리사가 이르되 내가 섬기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만일 유다의 왕 여호사밧의 얼굴을 봄이 아니면 그 앞에서 당신을 향하지도 아니하고 보지도 아니하였으리이다.”(왕하3:14)
이 말은 참으로 매정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이 말 속에서도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볼 수 있는 듯합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항상 복 주실 이유를 찾으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으며 결국 그분의 인자하심 앞에 다시 한 번 숙연해지는 듯합니다. 이스라엘 왕을 봐서는 결코 어떤 식의 도움도 주고 싶지 않겠지만 ‘유다의 왕 여호사밧의 얼굴을 봐서라도’ 도와주겠다는 엘리사의 말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징벌할 이유를 찾기에 앞서 늘 복 주실 이유를 먼저 찾으시는 분이라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만일 유다의 왕 여호사밧의 얼굴을 봄이 아니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징벌할 이유를 찾기에 앞서 늘 복 주실 이유부터 찾으십니다. 할렐루야. 이와 같은 은혜가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 같은 은총이 또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여호사밧보다는 아합의 아들 여호람에 더 가까울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 속에서 기여이 '여호사밧'을 찾아내셔서 복 주고야 마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늘 문제가 터져야만 하나님 앞에 나아와 엎드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 속에서 ‘여호사밧’을 찾아내 복 주고자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매주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매일 비슷한 문제들 앞에서 허망하게 무너지기 십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성도들’ 찾아 복 주고자 하시는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오해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다루시되 공의대로 징벌만 하시는 분이라고 말입니다. 만약에 그분이 공의대로만 하셨다면 우리는 벌써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다 죄인이며 다 죄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롬3:10~15)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공의의 하나님이시자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분은 물론 우리를 공의대로 대하시지만 동시에 더욱 넘치는 사랑과 인자로 그리하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시103:10,11)
* 나를 먼저 아신 주님(왕하5:1~14/아람장군 나아만).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었느니라.”(눅4:27)
- 나아만을 먼저 아신 주님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의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왕하5:1) 단언컨대, 나아만은 엘리사 선지자를 만나기 전까지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는 아람 나라의 군대 장관이자 열렬한 우상숭배자로서 수도 없이 이스라엘 민족을 괴롭히고 약탈하는 데 앞장섰던 사람 중 하나일 것입니다. 이른바 '하나님 없이도' 크게 성공한 사람 말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왕하 5:1은 “여호와께서”라는 구절을 과감하게 집어넣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았던 자'에게 말입니다. 언뜻 봐서는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도 나아만이 전혀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그 상황에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본문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나아만이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있던 상황 중에서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에 깊숙이 개입하고 계셨음을 말씀하시는 것은 아닐까요?
‘그가 아직 연약할 때에’(롬5:6), ‘그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롬5:8), ‘곧 그가 원수 되었을 때에’(롬5:10) ... 그런 때에라도 여호와께서는 나아만과 함께 하셨고, 그의 삶 깊숙이 개입, 관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서서히 나아만 앞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실 때를 기다리시면서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고 있다고 해서, 아직 교회에 나오지 않고 있다고 해서, 주님께서 그들을 방치해두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들의 삶 속에 하나님이 전혀 계시지 않다고 섣불리 단정 짓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나아만의 경우처럼) 그들의 삶 깊숙이 들어와 매일같이 보이지 않는 손길로 섭리 중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개인적으로 알기 전, 그 때를 곰곰이 되돌아보십시오. 우리가 아직 교회에 나아오지 않고 있던 그 상황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때에 주님이 내 삶에 안계셨다고 어느 누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없을 것입니다.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말입니다.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되었나이다.”(시139:13~16)
- 혼자의 힘으로 이 자리에까지 왔다고 말하지 마세요.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의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그는 큰 용사이나....”(왕하5:1)
우리가 먼저 주님을 알았을까요? 아니면 주님이 우리를 먼저 아셨을까요?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하는 식의 질문 같지만, 분명한 것은 주님이 먼저 우리를 아시고 찾아 오셨다는 점입니다. 그것도 우리가 아직 연약해 있을 때에,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 혼자만의 힘으로 어떤 지위에 올라왔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 혼자만의 힘으로 어떤 공을 세웠다고 자랑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나 혼자만의 힘으로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다고 믿지 마십시오. 나 혼자만의 힘으로 이만큼 쌓아 왔다고 섣불리 결론짓지도 마십시오. 오히려 내 인생 가운데 그림자처럼 묵묵히 동행해 오신 주님의 발자취를 찾아보십시오. 아주 오래전부터 내 옆에서 나를 위해서 일해오신 그분의 숨결을 잠잠히 느껴보십시오. 주님께서는 지난날 우리를 통해 무엇을 하셨습니까? 주님께서는 전에 우리로 하여금 어떤 일들을 하게 하셨던 것입니까?
- 하나님 앞으로의 초대
“... 저는 큰 용사나 나병환자더라.”(왕하5:1)
소위 ‘하나님이 없이도’ 잘 나가던 나아만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 생겼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나병을 앓게 된 것입니다. 그동안 그가 쌓아왔던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듯 했습니다. 한없이 핑크빛일 것만 같았던 그의 인생이 끝없는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 했습니다. 어찌된 영문일까요? 무슨 까닭에서일까요? 단순한 우연이라고 단정 짓기엔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지 않습니까?
네 맞습니다. 전에 나아만으로 하여금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던 그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번에도 (나병을 통해서) 개입하고 계심을 직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과연 이번 나병 사건을 통해 나아만에게 어떤 일을 행하시기 원하셨을까요? 어떤 계획들로 인도해 가시는 중이었을까요?
나아만의 일생에 보이지 않는 후원자였던 하나님은 “때가 차 매” 나아만 앞에 자신을 드러내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바로 ‘나병’이라는 불치병을 통해서, 절대 절명의 위기를 통해서 말입니다.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지금 우리는 어떤 사건들을 겪고 있습니까? 지금 우리 앞에는 어떤 선택 앞에 덩그러니 놓이어 있습니까?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또한 지금 우리는 어떤 일들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그동안 보이지 않게 나아만을, 우리를 떠밀고 계셨던 그 손, 보이지 않게 우리를 이끌어 주셨던 그 손을 붙잡아야 할 시간입니다. 때가 무르익은 것입니다. 나아만의 경우처럼 말입니다.
나아만은 전에 아람이 크나큰 전쟁의 위기 속에 처해 있을 때, 아람이 전쟁으로 인해 풍전등화의 처지에 놓여 있을 때, 일개 장수로 그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 당시 나아만과 그의 군대는 전쟁의 위기 앞에서 너무도 초라하고 보잘 것 없었습니다. 그는 결코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아람을 전쟁의 화마 속에서 구원해낼 수 있으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숱한 전쟁 속에서 잔뼈가 굵은 그였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그 때 기적 같은 일들이 그의 눈앞에서 펼쳐졌습니다. 도저히 믿기지 않은 일들이 그 전쟁터 한 복판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는 마치 어떤 보이지 않는 손길이, 알 수 없는 존재가 자신과 자신의 군대를 돕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아무튼 이로 인해 풍전등화와 같던 아람과 그의 군대는 극적인 승리를 거두게 되었고, 나아만 역시 조국을 큰 위기로 부터 구해낸 개선장군과 일등공신의 반열로 올라서게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나아만은 이후로도 몇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와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극적으로 승리했는데 그때마다 그를 붙들고 있는 보이지 않는 손을 경험하곤 했습니다. 이제 그는 ‘불치병 사건을 계기로’ 자신의 배후에서 여태껏 자신을 도와오신 그분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찾아나서야 할 때가 된 것입니다.
- 나아만의 신앙고백
“나아만이 모든 군대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의 앞에 서서 이르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왕하5:15상)
나병에 걸린 나아만은 이스라엘에서 잡혀온 작은 소녀의 말대로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이스라엘로 찾아와 결국 선지자 엘리사를 통해 그 병을 고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여태껏 자신을 숱한 위기와 고비들 속에서 건져주셨던 그 보이지 않는 후원자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즉 오랫동안 자신을 지켜주시고 동행해 주셨던 그 하나님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운 장면입니까?
나아만은 이번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음”(왕하5:8)과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음”(왕하5:15)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는데 이는 그 당시 이스라엘 민족 사회에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왜 입니까? 엘리야와 엘리사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조차도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배척하던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을 그토록 괴롭히던 아람의 군대장관이 여호와 하나님을 찾아와 그 앞에 무릎을 꿇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백성들에게 소외되어 있던 하나님의 사람을 이방인 중에서도 군대장관이라는 높은 직위에 있는 자가 찾아온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스라엘에 선지자가 있음을 온전히 깨닫지 못했습니다. 또 그들은 이스라엘 외에 온 천하에 신이 없음을 고백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방의 장수가 와서 그들의 신앙을 부끄럽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러한 그의 신앙이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과는 대조적이었기에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 때를 가리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들이 있었지만, 고침을 받은 사람은 오직 ‘나아만’ 뿐이었다고 말입니다.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었느니라.”(눅4:27)
- 나아만의 소명
하나님은 이스라엘 중에 하나님의 선지자가 있음을 알게 하시려고, 하나님만이 참 신임을 알게 하시려고, 자기 백성들에게 소외되어 있던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람을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높이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괴롭혀왔던 아람 나라에도 '이스라엘에 선지자가 있음과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알게 하시려고 아람장군 나아만을 불러 오셨습니다. 즉 이방인을 통하여 자기 백성을 부끄럽게 하시고자 했으며, 나아만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회복을 독려코자 했던 것입니다.
“...먼저는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롬10:19)
한 개인의 부르심은 이렇듯 한 개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의 부르심과 생을 통하여 많은 일을 행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를 통해서 어떤 일들을 행하길 원하십니까? 조용히 그 분의 뜻을 구하십시오. 잠잠히 하나님의 계획을 찾아가십시오. 나아만과 함께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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