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수리 5형제
한국 남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술 한 잔 마시면 지구를 지킨다.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국내의 모든 문제는 아주 쉽게 해결될 것처럼 목에 핏대를 세운다.
주가를 비롯한 경제문제,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해 그 어느 전문가보다 확실한 진단과 대안을 내놓는다. 어디 국내 문제뿐인가.
독도 문제나 이라크 파병과 같은 외교 문제, 심지어는 미국 대통령선거나 지구온난화 문제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지구방위대가 되어 온갖 우주의 침략자와 싸우는 데 그렇게 용감할 수가 없다.
일상에서 끊임없이 확인돼야 할 재미와 놀이를 통한 정서공유, 의사소통을 통한 존재확인의 과정이 생략된 이들에게는 오직 지구를 지키는 일만 남았기 때문이다. 이를 나는 "독수리5형제 증후군"이라 정의한다. 지구를 지키는 독수리 5형제. 그런데 문제는 이 용감한 지구방위대가 정작 자신의 행복을 챙기라고 하면 하염없이 비겁해진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보자. "나는 일주일 동안 정말 열심히 일했다.
주말에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다. 갑자기 맛있는 스테이크가 먹고 싶다." 이런 생각이 들 때 우아한 레스토랑을 찾아 들어가 스테이크와 레드와인을 시켜 혼자서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용기가 있는가? 혼자서! 그런데 어렵다. 허름한 순대국밥 집에 혼자 들어가 배를 채우는 일은 할 수 있어도 우아한 레스토랑에서 혼자 즐기는 일은 대부분 힘들어한다. 왜 그럴까. 남이 나를 사회부적응자로 볼까 두려운 까닭이다.
음악회는 혼자 갈 수 있는가. 그것 역시 쉽지 않다.
정말 좋은 음악은 혼자 들어야 한다. 혼자 들어야만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혼자 음악회에 앉아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컴컴한 영화관에 혼자 앉아 있는 것조차 쑥스러운 사람이 대부분이다. 왜일까. 이 또한 남 눈이 두려운 까닭이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자.
내가 혼자 와서 음악 듣는 것, 혼자 스테이크 먹는 것에 대해 그 어떤 이도 관심 갖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 존재하지도 않는 눈길이 두려워 혼자 맛있는 스테이크를 즐기는 일, 음악회에 가는 일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그리고 술집에 앉아 혼신을 다해 지구를 지킨다. 이게 정상인가. 절대 아니다.
그래서 독수리5형제 "증후군"인 것이다.
사는 게 재미없는 이들은 세상이 뒤집히길 원한다. 2002년 월드컵처럼 온 국민이 나와 빨간 옷 입고 세상이 뒤집히는 축제만 재미있다고 느낀다. 엄청난 재미에 대한 환상이다. 그러나 세상이 자주 뒤집히는가. 월드컵 4강 신화만 해도 그렇다. 우리 생애에 월드컵 4강을 또다시 볼 수 있을 것 같은가. 솔직해지자. 월드컵 4강은 우리나라에서 경기했으니 가능했던 일이다. 아닌가? 외국에서 경기를 치른다면 16강에 들기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런 엄청난 재미만 진짜 재미인 것처럼 착각한다.
세상이 뒤집혀야만 재미있는데 세상이 그리 쉽게 뒤집히질 않으니, 우리의 독수리5형제는 폭탄주를
마시고 자기 위장을 뒤집는다. 세상이 뒤집히질 않으니 자기 스스로 뒤집히는 것이다.
우리의 독수리 5형제는 뉴스도 열심히 본다.
어쩌다 집에 일찍 들어오면 8시 뉴스부터 보기 시작한다. 8시 뉴스가 끝나면 바로 9시 뉴스. 9시 뉴스가 끝나면 잠시 기다렸다가 11시 뉴스. 그 사이를 견디기 어려운 이들은 아내와 아이들의 엄청난 저항을 무릅쓰고 24시간 뉴스채널인 YTN으로 잠시 채널을 돌린다. 11시 뉴스가 끝나면 다시 마감 뉴스.
그런데 도대체 왜 이렇게들 열심히 뉴스를 보는 것일까. 세상이 뒤집히길 원하기 때문이다.
그저 밋밋한 뉴스만 나오면 재미없다.
갑자기 세상이 뒤집히는 엄청난 뉴스가 나오길 끊임없이 기다리며 리모컨을 만지작거린다.
참, 여담이지만 아직까지 전혀 밝혀지지 않은 정말 중요한 비밀이 있다.
독수리 5형제가 정작 "형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가. 다섯 명 중 한 명이 여자다.
그러니까 형제가 아니라 남매다. 더 중요한 비밀이 있다. 이 비밀은 대한민국 국가정보원에서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이 다섯 명 중 독수리는 단 한 명뿐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정말 엄청난 비밀이다. 맨 앞의 한 녀석만 독수리이고, 나머지는 콘도르, 백조, 제비, 부엉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독수리5형제가 전부 독수리인 줄 알고 있다. 이 녀석들은 사실 "조류 5남매"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독수리 5형제라고 사기치고 다닌다. 이 땅의 사내들도 마찬가지다. 자신들이 독수리5형제인 줄 알고 지구를 지키겠다며 큰소리를 치지만, 술 깨면 조류5남매에 불과한 것을 깨닫게 된다. 슬픈 이야기다.
- 명지대 김정운 여가경영학 교수의 "재미 학" 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