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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12.29 03:30
천상열차분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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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m가 훌쩍 넘는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刻石). 지상에서 관측된 별과 별자리가 정교하게 새겨져 있죠. /위키피디아
서울 경복궁 안, 광화문 서쪽에 있는 국립고궁박물관이 최근 조선시대 과학 유물을 전시하는 '과학문화실'을 개편했다고 해요. 국보 3건, 보물 6건 등 모두 45건의 과학문화 유산을 전시하는데요. 여기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전시물이 국보인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 각석(刻石)'입니다. 예전엔 시커먼 돌덩이인 이 유물을 관람객들이 무심히 지나쳤다고 하지만, 새로 개편된 전시실에선 각석 반대편에 비추는 대형 영상을 통해 이 돌에 새겨진 조선의 하늘과 계절의 변화를 보여준다고 하네요. 과연 무슨 유물일까요?
조선 태조를 놀라게 한 '고구려 천문도'
"고구려라고! 세상에, 그게 정말이냐?"
태조(재위 1392~1398) 이성계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소식을 가져온 신하에게 되물었어요. 갓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새로운 왕조의 권위를 어떻게 세워야 할지 고심했습니다. 500년 가깝게 고려 사람으로 살았던 백성이 막 생겨난 나라를 따르기란 쉽지 않은 데다, 한양 도성과 경복궁을 새로 짓는 일에 동원돼야 했기 때문에 민심은 그다지 좋지 않았어요. 군사적인 힘으로 왕위에 올라 새 나라를 세웠다고 해서 권위가 저절로 따라오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무렵 희소식이 들려왔어요. 서기 668년 고구려가 멸망할 때 고구려의 천문도(天文圖·천체의 위치와 운행을 나타낸 그림)가 대동강 물에 빠져 사라졌는데, 누군가 그것이 없어지기 전에 베낀 지도를 갖고 있다며 나라에 바쳤던 것입니다. 새 나라가 들어서자마자 출현한 옛 하늘 그림이라니! 조선이 '하늘의 명(命)을 받아 세워진 나라'라는 것을 과시할 수 있게 됐던 것이죠.
태조는 천문 관측 기관인 서운관에 명해 그 그림에 그려진 별자리의 오차를 수정하도록 했고, 마침내 1395년(태조 4년) 권근·유방택·권중화 등 학자에게 그 그림을 돌에 새기게 했습니다. 이 귀중한 유물이 바로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입니다. 열차(列車)가 다니는 길을 나타낸 지도(地圖)가 아니라 하늘의 형상(천상·天象)을 순서(차·次)와 분야(分野)에 따라 나열(열·列)한 것의 그림(도·圖)을 새긴 돌(각석·刻石)이란 뜻입니다.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별을 총망라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은 사람의 키를 훌쩍 넘어선 높이 211㎝, 가로 122.5㎝, 두께 12㎝ 대형 유물입니다. 여기엔 지상에서 관측된 1467개의 별과 295개의 별자리가 정교하게 새겨져 있어요. 스케일이 대단히 큰 데다 정확성이 높기로도 이름난 문화재입니다.
이 각석은 현재 세계에 남아 있는 돌에 새긴 별자리 그림 중 둘째로 오래된 것입니다. 가장 오래된 것은 중국 남송의 '순우천문도'(1247년)지만, 상당수 학자는 '천상열차분야지도'의 원본이 4~6세기 고구려 것이라고 생각되는 만큼 '순우천문도'보다 훨씬 앞선 천문도라 보고 있습니다. 고구려 때 이미 상당한 수준의 천문과학이 발달했던 증거죠. 물론 특정 별의 표기를 근거로 고구려가 아니라 고려시대의 천문도가 원형일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박스 기사 참조〉.
다시 지도 내용으로 돌아가 볼까요? 별자리 그림의 중심에는 북극(북극성)을 두고 태양이 지나가는 길인 황도를 그렸으며, 남극과 북극 가운데로 적도를 나타냈습니다. 황도 부근의 하늘을 12등분해 1467개의 별을 점으로 표시했죠. 사람의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별을 총망라했던 것입니다. 이 그림으로 해와 달, 5행성(수성·금성·토성·화성·목성)의 움직임을 알 수 있고 위치에 따라 절기를 구분할 수도 있습니다. 굵은 먹 흔적 같은 표시로 은하수를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밝기에 따라 별의 크기를 다르게 그린 것 등은 중국 천문도보다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중국 천문도에 없는 '종대부'라는 별자리도 있는데, 이것은 17세기 일본의 천문도에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농경 국가의 필수 임무 '관상수시'
그런데 이렇게 먼 하늘의 별자리를 관측하고 기록하는 일이 옛날에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요? '관상수시(觀象授時)'라는 말이 있습니다. 국립고궁박물관이 개편한 과학문화실의 주제이기도 한데요. '관상'이란 천체의 모습과 움직임을 본다는 말이고 '수시'는 농경 생활에 필요한 절기·날짜·시간을 백성에게 알린다는 뜻이죠. 이것은 옛 농경 국가의 군주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천상열차분야지도'에 대해 한 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옛 하늘과 오늘의 하늘을 연결하는 비밀 통로입니다. 그 통로를 따라가면 옛 하늘에 이릅니다. 거기서 옛사람들의 별자리에 관한 지식도 알 수 있고, 하늘과 세계에 얽힌 설화도 들을 수 있죠."
이 귀중한 유물인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도 살아남았으나, 6·25 전쟁을 거치며 한동안 잊혔다가 1960년대에 창경궁에서 다시 발견됐다고 합니다. 당시 창경궁은 '창경원'이란 유원지였는데, 소풍 온 사람들이 땅에 쓰러져 있는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을 밟고 다니거나 그 위에서 돗자리 깔고 도시락을 먹기도 했다는 얘기가 전해집니다.
한편 조선 후기인 1687년(숙종 13년), 이 각석이 닳아 잘 보이지 않게 되자 다시 새겨 만든 '복각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이 있는데요. 이 유물은 보물로 지정돼 지금은 국보인 원래 각석과 함께 국립고궁박물관에 있습니다. '천상열차분야지도'에 나오는 별자리는 현재 우리가 쓰는 1만원권 지폐 뒷면에 천체 측정기인 혼천의와 함께 그려져 있고, 2018년 평창올림픽 개막식에선 '천상열차분야지도'의 별자리가 공중에 뜨는 모습이 연출되기도 했습니다.
['건성'의 수수께끼]
혹시 '피휘(避諱)'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나요? 이것은 '휘를 피한다'는 말인데, 여기서 '휘'란 임금이나 성인의 이름을 말합니다. 감히 높은 분의 이름을 쓰기 민망하다는 뜻에서 그 글자를 써야 할 부분에서 다른 글자로 바꿔 썼죠. 조선시대의 왕들은 '그러면 백성이 불편을 겪을 것'이라는 우려에 대부분 이름을 한 글자로 지었고, 그것도 거의 사용할 일 없는 아주 어려운 글자를 썼습니다.
그런데 '천상열차분야지도'는 다른 곳에 건성(建星)으로 적힌 한 별의 이름을 입성(立星)이라고 썼고, 이게 혹시 '피휘'일 수 있다는 분석이 나왔습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고려 태조의 이름은 왕건(王建)이죠. 그런데 피휘를 위해 세울 건(建)자를 뜻이 비슷한 설 입(立)자로 바꿨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①이 천문도의 원본이 고구려가 아니라 고려 때 만든 것이거나 ②고구려 천문도를 고려 때 보정한 그림이란 얘기가 되죠. 또 하나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③원래 지도엔 '건성'이라 돼 있었지만 조선 초 서운관의 관리들이 피휘해 각석에 '입성'으로 새겼을 수 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그들은 겉으론 새 왕조인 조선에서 벼슬을 하고 있으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끝까지 고려의 신하로 남았으리라는 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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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고궁박물관은 지난 26일 조선시대 과학문화유산을 전시한 ‘과학문화실’을 공개했어요. 사진은 한 여성이 이 전시실에서 천상열차분야지도가 잘 보이게 만든 전시물을 가리키는 모습. /국립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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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에서 천상열차분야지도를 증강현실 기술로 경기장 한가운데 띄운 모습. /문화재청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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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석재 기자 기획·구성=안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