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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대청호오백리길 9구간(지용향수 길)
여행일 : ‘22. 12. 3(토)
소재지 : 충북 옥천군 군북면·옥천읍 일원
여행코스 : 진걸선착장→청풍정→국원리→마성산(실제는 성왕로 우회)→교동저수지→죽향초교→정지용생가→육영수생가→향교(거리/시간 : 15km, 실제는 12.09km를 3시간 3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1980년 대청댐이 완공되면서 조성된 대청호(大淸湖)는 ‘전국 3대 호수’ 중 하나로 2개 광역(대전·충북)과 5개 기초(대전 대덕구·동구, 청주시·보은군·옥천군) 자치단체에 걸쳐 있으며, 둘레만도 무려 ‘500리’나 된다. 이 호수 위로 해발고도 200-300m의 야산과 수목이 펼쳐지는데, 그 야산과 호숫가·자연부락·소하천·옛길 등을 둘레길로 이은 다음 ‘대청호 오백리길(220km을 21개 구간으로 나누었다)’이란 이름으로 포장해 세상에 내놓았다. 오늘은 아홉 번째 구간인 ‘지용향수길(15km)’을 걷는다. 이 구간은 대청호의 본류인 금강의 아름다운 풍광을 눈에 담는다는 것이 장점이다. 마성산 정상에서의 조망도 빼놓을 수 없는 자랑거리다. 하나 더, 옥천읍내에서 만나는 육영수와 정지용의 생가는 마성산을 넘어온 이들에 대한 보상이라 하겠다.
▼ 들머리는 ‘진걸선착장’(옥천군 군북면 석호리)
경부고속도로 옥천 TG를 빠져나와 ‘지용로’와 ‘매동로’, ‘성왕로’를 연이어 타고 대청호 방면으로 6km쯤 올라오다, 국원리삼거리에서 ‘석호길’로 옮겨 2.5km쯤 더 들어오면 ‘진걸 선착장’에 이르게 된다.
▼ 대청호의 상류인 금강의 풍광을 실컷 눈에 담을 수 있는 구간이다. ‘마성산’에서의 조망도 볼거리이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정규 탐방로인 마성산 구간을 생략한 채, ‘국원마을’에서부터는 옛 국도를 따라 옥천읍내로 들어갔다. 이미 올라본 마성산을 다시 오르기보다는 볼거리가 많은 옥천읍내에서 조금이라도 더 많은 것을 둘러보기 위해서이다.
▼ 석호리에는 현재 진걸, 그리고 8구간 때 만난 ‘석결’ 마을만이 수몰을 면한 채 남아 있다. 길 위에서 바라본 ‘진걸’마을은 빨강과 파랑의 원색 지붕을 얹은 고만고만한 가옥이 10여 채 늘어서 있다. 마을 앞 호숫가에 어선이 정박해 있다는 건 대청호에서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꾸려가는 어촌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 건너편은 ‘막지리(이곳과 같은 군북면이다)’일 것이다. 바깥나들이를 하려면 산길을 차로 1시간 넘게 돌아 나가야 한다는 곳. 옥천 5일장이라도 서는 날이면 동네사람들 전원이 배를 타고 나오는 호수 속 오지마을이다.
▼ 버스를 타고 들어왔던 임도를 되돌아 올라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어느 여행자는 이 마을에 머물며 아침 산책길에 밤과 호두를 한 주머니씩이나 주웠다고 했다. 하지만 내 눈에 비친 풍경은 확연히 다르다. 그렇게나 많다던 밤나무와 호두나무는 다 어디가고 대나무만 한가득이란 말인가.
▼ ‘진걸마을’은 산에 막히고 물에 갇힌 마을이다. 때문에 마을로 들어가는 게 만만치가 않다. 구절양장의 임도를 굽이굽이 돌아야만 들고 날 수 있다. 더 큰 악재는 경사까지도 가파르다는 점이다. 군내버스까지도 손을 놓아버린 이유가 아닐까 싶다.
▼ 이곳에서도 대청호의 수질을 살리려는 부단한 노력을 엿볼 수 있었다. 호숫가로 내려가는 길마다 차단봉을 설치해 차량의 무단진입을 막고 있었다.
▼ 임도의 자랑거리는 ‘S-Line’이 만들어내는 곡선미이다. 하지만 은행나무 가로수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가지치기 된 지금이야 정제된 멋으로 끝나지만, 가을철 잎이 노랗게 물들라치면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하지 않을까 싶다.
▼ 앗! 산악회버스가 옴짝달싹을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우리를 내려주고 되돌아가다 턱진 곳에 걸쳐버린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빠져나오기는 했지만 생각만 해도 아찔한 상황이었다. 하긴 오죽했으면 옥천군에서 ‘다람쥐택시’라는 기발한 운송방법까지 생각해냈겠는가. 다람쥐택시란 버스노선이 닿지 않는 오지마을 주민들이 버스와 비슷한 요금을 내고 택시를 이용할 수 있는 행정서비스라고 한다.
▼ 고개를 넘자 발아래 저만큼에 청풍정이 놓여있다.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지름길도 나있다. 하지만 사유지이니 들어오지 말란다. 지름길을 이용하지 못할 경우 한참이 돌아가야 하는데도 말이다. 이때 김삿갓의 ‘네절인심 고약타’를 떠올렸다면 나 혼자만의 오해였을까? 후렴으로 ‘지옥가기 딱조타’까지 생각해 냈는데...
▼ 사유지라는 텃세 덕분에 300m 가량이나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27분. 모퉁이를 돌아서자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나지막한 언덕에 걸터앉은 청풍정(淸風亭)이 드넓은 호수와 어우러지며 진경산수화 하나를 그려놓는 것이다. 옛날 음풍명월로 유유자적하던 선비들이 딱 좋아했을 법한 풍경이겠다. 하지만 저 정자는 새로 지은 것이다. 대청댐이 준공되면서 1996년 이곳으로 이전했다. 참고로 수몰 이전의 청풍정은 금강이 굽이쳐 흐르다 절벽에 부딪쳐 소를 이루고, 휘늘어진 버드나무가 10여리를 곧게 뻗어 가슴과 마음을 훤하게 뚫어주는 천하절경이었다고 한다.
▼ 홑처마 팔작지붕인 정자는 정면 3칸에 측면이 1칸이다. 평면은 한 칸의 온돌방과 두 칸의 우물마루로 구성됐다. 하지만 언제쯤 지어졌는지는 모른단다. 조선 후기 참봉을 지낸 김종경이라는 사람이 지었다고만 알려진다. 참봉(參奉)이라면 종9품의 최 말단직. 벼슬에 환멸을 느낀 그가 후학 양성을 위해 지었을지도 모르겠다. 온돌방을 끼고 있다는 게 그 증거이고...
▼ 청풍(淸風)이면 응당 명월(明月)이 뒤따라야지 않겠는가. 그 명월은 조선 말 개화 사상가였던 김옥균(金玉鈞, 1851-1894)이 장식한다. 정자를 왼편에 끼고 돌면 ‘월명암’이라고 적힌 깎아지른 바위절벽이 나타나는데, 이 바위의 주인공이 김옥균과 애틋한 사랑을 나누다 죽음으로 진심을 전한 명월이기 때문이다.
▼ 김옥균은 자신이 주도했던 갑신정변(1884)이 3일천하로 막을 내리자 옥천으로 내려와 이곳 청풍정에서 명월이란 기생과 함께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명월의 마음은 편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나라의 큰일을 할 장부가 자신 때문에 외진 곳에서 허송세월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강물에 몸을 던졌다니 말이다. 저 바위에 새겨진 ‘명월암(明月岩)’이란 글자는 김옥균이 명월의 그런 애정을 잊지 못해 적어놓은 것이란다.
▼ 대청호는 수위에 따라 잠겼다가 드러나기를 반복한다. 때문에 검은 색 암벽에 선명하게 물무늬 자국이 남아 있다.
▼ 정자 앞에 서면 대청호가 한가득 차오른다. 대청호에 물을 담으면서 금강 강줄기는 더욱 선명해졌다. 대신 물줄기가 등치를 부풀린 만큼 산줄기는 가늘어졌다. 그리고 음각과 양각처럼 한 몸이 된 새로운 지형을 수면 위에 펼쳐놓는다.
▼ 청풍정을 빠져나와 트레킹을 이어간다. 길은 산길과 호숫가를 굽이굽이 돌고 돌아 외길을 따라간다. 군내버스도 포기해버린 좁디좁은 임도다. 그걸 무시한 채 운전솜씨를 자랑하던 청마산악회 황사장님은 조금 전과 같은 봉변을 당했고...
▼ 청풍정에서 8분 거리. 이번에는 ‘석호정’이란 정자가 길손을 맞는다. 대청호가 한눈에 쏙 들어오는 멋진 정자지만, 둘레길 나그네인 나로서는 타고 온 대형버스가 회차(回車) 할 수 있는 마지막 지점이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 임도는 아직도 1차선이다. 하지만 굽이가 많이 누그러졌을 뿐만 아니라 폭도 아까보다는 꽤 넓어졌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석결마을에서 넘어온 길(석호1길)과 진결마을에서 시작된 석호길이 하나로 합쳐지는 삼거리에 이른다. 지난 8구간 때 날머리로 삼았던 ‘돌거리고개’이다.
▼ 마을을 소개하는 안내판에는 사진 한 장이 삽입돼 있었다. 굽이도는 강줄기 안쪽으로 은빛 모래사장이 펼쳐지고, 그 가장자리에는 미루나무도 두어 그루 보인다. 마을 앞을 흐르던 금강(錦江)의 본래 모습이지 싶다. 물비늘 반짝이는 맑은 강물, 눈부시게 고운 모래가 어우러진 저런 풍경이 바로 ‘비단강’이 아니겠는가.
▼ 돌거리고개 못미처에서 다시 한 번 대청호를 만났다. 하지만 아까 사진에서 보던 모래사장은 없었다. 맞다. 대청댐이 완공된 뒤 옥천 땅의 금강에서 모래사장을 찾는 건 언감생심이 되어버렸다. 재잘거리던 강물은 호수로 변했고, 은빛 금빛 모래사장은 물속으로 가라앉아버렸다.
▼ ‘SEOKHORI 178’, 호기심을 자극하는 조형물이 눈에 띄기에 카메라에 잡아봤다. 대청호 뷰가 좋다고 입소문을 탄 감성펜션이라고 한다. 겸하고 있는 카페는 인근 대전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한번쯤 꼭 들러봐야 할 핫플레이스로 꼽힌다나?
▼ 잠시 후 도착한 석호리(石湖里)와 국원리(菊園里)의 경계. 마을 표지석이 나그네와의 헤어짐을 아쉬워한다. 마을 유래비와 함께...
▼ 석호리 경계를 벗어나다 만나는 대청호에게 마지막 이별을 고한다. 9구간에서의 대청호 조망은 이곳을 끝으로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10분. 국원리에 이르니 커다란 느티나무가 반긴다. 국원리는 3개의 자연마을(안말·주막말·늘티)을 두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곳은 본동이자 가장 큰 부락이라는 ‘안말’이지 싶다. 이 마을에는 눈앞의 부귀영화에 눈이 먼 농부의 얘기가 전해진다. 점심 공양을 받은 스님이 그에 대한 보답으로 명당 두 곳을 추천하더란다. ‘만대영화’자리와 ‘당대발복’자리인데, 당장 먹고살기가 힘들었던 농부는 당대발복을 원했다나? 이는 부를 누리는 대신 문중의 손이 끊겨버리는 결과를 초래했고.
▼ 큰 마을답게 ‘보건진료소’까지 들어서 있었다. 얘기를 조금 더 해보자. 같은 마을에 살던 경주이씨가 귀띔으로 얘기를 전해 들었던 모양이다. 그는 만대영화자리라고 알려준 곳(늘티마을 근처 야산인데 이따가 지나게 된다)에다 묘를 썼고, 3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많은 자손을 두고 잘 살고 있다나?
▼ 보건소를 스치듯 지난 ‘석호길’은 ‘성왕로(옛 국도)’를 만난다. 오백리길 이정표(마성산 3.8㎞/ 청풍정 2.9㎞)는 삼거리인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가란다. 도로표지판이 가리키는 옥천 방향이다.
▼ 주인장의 신심이 얼마나 깊었으면 뜨락에 성모상까지 모셨을까? 남이 볼 때는 성호 긋는 것조차 망설이는 나로서는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 200m쯤 더 걸으면 ‘새말(주막말)’로 여겨지는 또 다른 동네. 과거 주막거리라 불리던 곳이다. 옥천장을 다녀오는 소정리·석호리·막지리·용호리 주민들의 사랑방 노릇을 톡톡히 하던 곳이란다. 하지만 대청호에 물이 차면서 발길이 끊겼고, 주막거리라는 애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 새말 근처의 ‘국원교차로’는 성왕로(옛 국도)를 새로운 국도(37호선)로 연결시키는 지점이다. 그러니 왼쪽으로 갈려나가는 길쯤은 무시하고 곧장 직진하면 된다.
▼ 곧이어 37번 국도의 아래를 지난다.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교각을 지나자마자 오백리길이 도로로부터 갈려나가기 때문이다.
▼ 갈림길 초입에 이름표(‘신촌’이라는데 새말의 한자어이지 싶다)까지 단 이정표(마성산 3.1㎞/ 청풍정 3.3㎞)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생략을 한 마성산의 사진(해설 포함)은 2014년 답사 때의 것을 올려본다. 정상은 두 개의 단(段)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랫단은 헬기장, ‘장룡산악회’에서 세운 정상표지석과 삼각점은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윗단에 설치되어 있다.
▼ 정상은 사방이 확 트이기 때문에 조망(眺望)이 일품이다. 팔음지맥(八音枝脈)의 산줄기와 도덕봉과 장령산, 서대산이 차례대로 눈에 들어온다.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조망은 근거리에 있는 환산과 구(舊)옥천 시가지라 할 수 있다. 물론 동쪽에는 조금 전에 지나온 이슬봉이 바라다 보인다.
▼ 참! 우회했던 이 구간은 자건거길을 따른다는 걸 깜빡 잊을 뻔 했다. 도로 가장자리에 하늘색 선을 그어 차도와 구분했다. ‘대청호 도선코스(길이 44.4km)’라는 명품 자전거길인데, 아까 트레킹을 시작했던 ‘진걸선착장’에서 건너편 ‘막지리’까지는 배를 타야만 한다며 이름에 ‘도선’이란 특징을 덧댔다.
▼ 잠시 후 도착한 늘티마을(국원리). ‘향수을 전통주교육원(원장 김기엽)’이 갈길 바쁜 나그네의 발길을 붙든다. 전통누룩과 찹쌀만으로 빚었다는 막걸리가 술꾼인 내 침샘을 자극시킨 것이다. 특히 ‘대한민국 궁중술빚기 대회’에서 3년 연속 수상한 이가 술을 빚는다니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 안으로 들어가 시음부터 하고 본다. 막걸리는 물론이고 과하주·세빚주·송손주·당귀주·석탄주(삼키기조차 아깝다는 뜻) 등 종류도 참 다양하다. 다음은 김양희 실장(안주인이지 싶다)으로부터 막걸리의 종류와 빚는 방법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덕분에 막걸리와 청주·탁주를 구분할 수 있게 됐다). 불콰해진 얼굴로 교육원을 나설 때, 내 손에는 세 종류의 막걸리가 들려있었음은 물론이다.
▼ 몇 걸음 더 걷자 석장승 한 쌍이 ‘늘티소류지’를 배경삼아 서있다. 최근 세웠다는데 장승의 앞에 제단까지 만들어두었다. 참! 마을을 떠나기 전 유래나 살펴보자. 그동안 써오던 이름은 구건리(九巾里),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부터 불리어왔다. 그러다가 1995년 안말의 서당 벽면에서 ‘국원추전(菊園秋典)’이라는 본래 지명을 발견했고, 주민투표와 군의회 의결을 거쳐 ‘아름다운 국화동산’이라는 옛 이름(국원리)을 되찾았다.
▼ 옥천읍 관내로 들어서자 ‘관성도예전시장’이 눈에 띈다. 눈요기라도 해보려고 다가가 봤지만 문이 닫혀있어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마음에 드는 소품이라도 눈에 띄면 하나 사올까 했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참고로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돌아다니는 나는 마음에 드는 소품이 눈에 띄면 망설이지 않고 사는 편이다.
▼ ‘옥천 사람들은 집 놓아두고 외박만 하나?’ 줄을 잇는 ‘무인 텔’에 집사람이 놀란 눈초리다. 대전 사람들을 노린 시설일 거라며 둘러댔지만 내가 보기에도 많다. 그건 그렇고, 여기서 궁금증 하나. 국원리는 관광도로변의 관광영농에 눈뜬 곳이라고 했다. 마을에서 제배한 참외와 메론 등을 옥천-보은간 국도에서 판매해 수익을 올린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곳까지 오는 동안 특산물판매장이 한 곳도 눈에 띄지 않는 건 왜일까?
▼ 옛 국도의 특징은 ‘벚나무 가로수’라 하겠다. 수령이 30년은 족히 넘는 듯 굵직한 몸통을 자랑한다. 길은 우아하게 기지개를 켜고 있는 가지 아래로 나있다. 사람들은 이 구간을 ‘금강 향수 100리길‘이라 부른다고 했다. 교동저수지에서 소정리까지 옛 37번 국도를 따라 이어지는 8km가량의 코스인데, 봄이 무르익을 때면 흩날리는 벚꽃 비를 맞아가며 걷는 재미가 톡톡하다나?
▼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길은 교동저수지를 가운데 두고 둘로 나뉜다. 그렇다고 고민할 필요까지는 없다. 둘 모두 구읍으로 이어지니 마음에 드는 쪽으로 진행하면 된다. 나는 저수지 오른편으로 난 나무데크길(‘구읍 벚꽃길’이라고 했다)을 따랐지만...
▼ 교동저수지는 1960년대 초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지금까지 한 번도 바닥을 드러낸 적이 없다고 한다. 제 임무를 충실히 수행해왔다고나 할까? 그게 최근 아름다운 변신을 했다. 다른 저수지와 다르게 옥천이 낳은 정지용 시인의 시와 그에 걸맞은 조형물들을 수면 위에 펼쳐놓았다.
▼ 교동저수지 둑을 타자 그 끄트머리에서 ‘지용문학공원’과 이어졌다. 저수지 가장자리에는 정지용 시에 나오는 얼룩소, 얼굴, 홍시와 같은 조형물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참고로 정지용은 1902년 옥천읍 하계리에서 태어났다. 1918년 휘문고보에 입학했고, 1926년부터 문단 활동을 시작한 이래 120여 편의 시를 발표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한국전쟁의 여파는 시인을 월북 작가로 묶었고 그의 시들은 공개적 언급이 금지됐다. 그러다 1988년 해금과 함께 그의 시는 우리에게 돌아왔고, 그를 기리는 이런 공간은 물론이고 문학축제까지 생겼다.
▼ 정지용 하면 우선 떠오르는 게 ‘향수’가 아니겠는가. 그러니 저 얼룩소나 빨래하는 아낙들은 고향의 옛 풍경을 나타내고 있을 것이다.
▼ 저건 ‘호수 1’을 형상화 한 작품일 것이다.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 보고픈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밖에>. 그 오른편은 오빠 오실 때 맛보이려고 남겨뒀다는 ‘홍시’일 것이고...
▼ ‘지용문학공원’의 중심은 구읍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이다. ‘시비문학공원’이었던 것을 2020년 현재의 이름으로 바꿨단다. 정지용의 시비가 주축을 이룬다는 게 그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동갑내기인 김소월이나 윤동주·박용철·도종환·박목월 같은 시인들의 시비도 다수 있었다.
▼ 시비는 단순히 시만 적혀있는 게 아니다. 종합예술을 지향하려는 듯 조각품(적힌 시에 어울리는지는 몰라도)에 새겨 넣었다. 시너지효과를 노렸다고나 할까?
▼ 시비광장 위쪽에 있는 ‘시인의 가벽’에는 그의 일대기가 10편으로 나뉘어 새겨져 있다. 1902년 옥천면 하계리 탄생, 1918년 휘문고보 입학, 1926년 문단 활동 시작, 1950년 북한에 의해 서대문형무소 구금, 이후 월북 작가로 묶였다가, 1988년 민주화의 진전과 함께 시인의 문학도 해금됐다.
▼ 정지용의 약력이 적힌 빗돌(도종화 시인이 썼단다)을 마지막으로 공원을 벗어난다. 그리고는 구읍 시가지를 횡단해 ‘지용유적 제2호’인 ‘죽향초등학교’로 간다. 도중에 ‘향수를 닮은 집’처럼 오래된 한옥들을 여럿 만나기도 한다. 하긴 고려 충선왕 때부터 20세기 초까지 옥천의 중심지였다니 어련하겠는가.
▼ 오래된 마을에서는 찻집까지도 한옥인가 보다. 아니 내력이 있는 건물이니 그 흔한 찻집 정도로 치부해버리는 우는 범하지 말자. 저 집은 1910년 조선 10대 갑부로 불리던 김기태가 지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옥천여중 교사(1944-1965년)로 사용되었고, 2001년 김선기 서예가가 매입 식사대접 장소로 활용하다 지금은 ‘그냥’이란 찻집으로 전환했단다.
▼ 정지용의 모교인 ‘죽향초등학교’는 1909년 사립 ‘창명학교(彰明學校)’로 설립됐다. 이듬해 옥천공립보통학교, 1938년 옥천공립심상소학교, 1941년 옥천죽향공립국민학교를 거쳐 오늘에 이른다. 100년 하고도 23년이나 더 되는 역사만큼이나 이름도 바뀌어 온 셈이다. 안내판은 시인이 1910년 입학, 1914년 졸업한 사실을 적고 있었다.
▼ 시인이 공부하던 학교 건물은 1926년에 지은 근대 건축물(국가등록문화재 제57호)이다. 외벽은 긴 목재를 비늘처럼 수평으로 포개 올려 비가 스며들지 않도록 했고, 지붕은 함석을 삼각형으로 단순하게 올렸다. 이는 목조교사의 일반적 형태였으나 1980년대 들어 대부분 사라졌다. 다행이 이곳은 2003년까지 교실로 사용되면서 헐리지 않고 남아 시인의 어린 시절을 전해준다.
▼ 교육을 통해 민족을 일깨우려한 선각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범재 김규흥(凡齊 金奎興, 1872-1936)’의 기념물도 눈에 띈다. 선생이 이 학교의 전신인 사립 창명학교를 설립하고 목화밭을 기증해 학교 터로 사용하게 해 해방 후 학교에서 은수저 선물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적혀있다.
▼ 교정에는 고려 후기 문화재(충북 문화재자료 제51호)인 ‘죽향리사지 삼층석탑’도 보존되고 있었다. 탑선골 절터에 있던 것을 일제강점기 때 이곳으로 옮겨놓았다고 한다. 참! 육영수여사의 휘호탑도 세워져 있다는 걸 깜빡 잊을 뻔했다. 그녀도 이 학교를 졸업(27회)했단다.
▼ 다음은 시인의 생가를 찾았다. 나지막한 흙담 안에 아담한 초가(본채와 사랑채)가 들어서 있다. 하지만 지붕 이엉 교체공사로 인해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상황은 다른 이의 글로 대신한다. <본채 안방에는 둥근 테 안경을 쓴 정지용의 초상화와 그의 시 ‘할아버지’가 걸려 있고, 부엌 옆에는 ‘지용유적 제1호’. 명시 ‘향수’의 시인 정지용이 1902년 5월15일(음력) 실개천가의 이 자리에서 태어났다. 원래 생가는 1974년에 허물어지고 새집이 들어섰다’는 동판이 붙어 있다.>
▼ 생가 바로 옆에는 ‘정지용문학관’이 들어섰다. 그가 지은 시를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정지용은 193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일본 동지사대학 영문과를 나온 후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다. 하지만 한국전쟁 때 서대문형무소에 수용된 뒤로는 흔적이 끊겨버린다. 전쟁 후 정지용은 월북 작가로 묶였고 그의 시들은 공개적 언급이 금지돼 있었다. 그러다 김동리·박두진 등 48명의 문인과 각계인사들이 회복운동을 시작했고, 1988년 해금과 함께 그의 시는 우리에게 돌아왔다.
▼ 안으로 들어서면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검은 구두를 신고, 둥근 안경을 낀 시인이 나무 의자에 앉아 있다. 밀랍으로 제작된 인형인데 긴가민가할 정도로 생생한 모습이 방문객들을 흠칫 놀라게 만든다. 그렇다고 최고의 포토죤인 시인의 옆자리를 포기할 수야 없지 않겠는가.
▼ 전시실에는 시인의 모든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는 다양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정지용이 살았던 시대적 상황과 그의 문학을 시대별, 연도별로 정리해 놓아 한국 현대 시문학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의미와 비중을 상세히 살펴볼 수 있게 했다.
▼ 부속시설인 문학교실에서는 ‘정지용 시어쓰기’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시인의 시를 캘리그라피(Calligraphy) 기법으로 직접 써보는 자리인데, 행사에 참여한 둘레길 도반은 자신의 작품을 치켜들며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만큼 유익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 문학관 앞 골목길도 시인의 흔적들로 채워졌다. 옥천 여행자들에게 가장 핫한 포토죤이기도 하다. 많은 집 담벼락이 ‘향수’의 내용이 담긴 아기자기하고 예쁜 그림과 글로 완성되어 발길을 멈추게 만든다. 그뿐 아니다. 종달새, 호수, 홍시 등 정지용의 다른 시들도 그림으로 만날 수 있었다.
▼ 실개천 난간에는 그의 시들이 걸렸다. 정지용시집(1948)과 백록담(1950)에 실린 시들이라고 한다. 이렇듯 ‘향수’를 비롯한 정지용의 작품들을 옥천 어디서나 만날 수 있다. 생가의 사립문 앞에, 골목길 담벼락에, 실개천이 휘어 나가는 곳에…
▼ 방송사의 ‘이슈 픽’을 연상시키는 조형물도 눈에 띈다. 호수, 고향, 유리창, 향수 등 여러 문구가 적혀있는데, 그중에서도 첫 번째 픽은 단연 ‘향수’가 아닐까 싶다. 한가로운 고향의 따뜻하고 소박한 모습을 한 폭의 풍경화처럼 생생하게 그려낸 걸작으로, 일본 유학시절(1927년) ‘조선지광’에 발표됐다.
▼ 옥천은 온통 ‘향수’로 도배됐다. 향수100리길·향수마을아파트·향수주유소·향수요양원·향수식당·향수식품 등등. 심지어는 포장마차까지도 ‘향수’를 내걸었다. 점심 때 안주 삼을 어묵을 샀던 곳이다.
▼ 걷는 도중 ‘옥천전통문화체험관’도 만날 수 있었다. 한옥 숙박은 물론이고 다양한 체험을 만날 수 있는 공간으로, 옥천을 전통문화와 놀이가 공존하는 체류형 관광단지로 육성하기 위해 조성했단다.
▼ 모처럼 찾아온 옥천인데 어찌 육영수여사의 생가를 거를 수 있겠는가. 1925년 이 집에서 태어난 육영수 여사는 어린 시절을 쭉 이곳에서 보냈다고 한다. 1974년 이후 방치되어오다가 철거되어 터만 남았던 것을 2002년 생가지(生家址)가 충청북도 기념물 123호로 지정되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됐다.
▼ 1894년경에 지어진 집은 ‘교동집(校洞宅)’이라 불리던 옥천지역의 명가로 1600년대부터 김·송·민 삼정승이 살던 곳이라고 했다. 1918년 육영수 여사의 부친인 육종관씨가 매입하고 기단을 높여 개축했다고 전해진다. 99칸 집이었다는 이야기처럼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건너채·안채·뒤채·행랑·별당·후원·정자·연못 등이 모습을 드러낸다.
▼ 사랑채에는 육영수여사의 초상화가 걸려있었다. 그녀는 우리 역사상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최고의 영부인으로 많은 국민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단다.
▼ 생가 앞 광장에서는 ‘청춘마이크’란 야외공연을 하고 있었다. ‘청춘, 빛나는 무대로 나오다’라는 주제로 각종 연주와 마술 퍼포먼스가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펼쳐지고 있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받으며...
▼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옥천향교(충북 유형문화제 제97호)’. 대성전과 명륜당, 동·서재, 내삼문(명륜당이 외삼문을 겸한다), 홍도당(용도는 모르겠다)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대성전에는 5성(五聖)·10철(十哲)·송조6현(宋朝六賢)의 위패가, 동무·서무에는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단다.
▼ 향교 입구에는 16기의 비석이 모여 있었다. 조선시대 옥천군을 다스리던 군수나 관찰사의 선정을 기리는 비석인데, 그중 1958년에 세운 공적비(주인공인 ‘한치봉’은 옥천여중의 초기 교사(한옥)를 사서 기증한 분이다)가 눈길을 끌었다.
▼ 날머리는 향교 앞 느티나무(옥천군 옥천읍 교동리)
비석군 맞은편, 느티나무 한 그루가 우람한 등치를 자랑한다. 수령이 410년이나 된다니 1398년(태조 7)에 지어진 향교와 함께 옥천을 지켜온 셈이다. 이 느티나무 아래서 오백리길 9구간 걷기를 마감했다. 오늘은 12.09km를 3시간 30분에 걸었다. 코스 전체가 평지였던 점을 감안하면 더디게 걸은 셈이다. 옥천의 명소들을 구경하느라 발걸음이 더뎌졌던 모양이다.
▼ 김규흥 선생의 생가를 찾다가 놓쳐버린 ‘사마소’의 사진은 둘레길 도반인 몽중루님의 것을 빌렸다. 사마소란 조선시대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지방 고을의 생원과 진사들이 모여 유학을 가르치고 정치를 논하던 곳이다. 효종 5년(1654)에 세워진 ‘옥주 사마소(충북 유형문화재 제157호)’는 전국의 3곳 남은 사마소 중 유일하게 본래 자리에 남아 있다고 한다.
첫댓글 수고하셨습니다
사진 하나 하나 설명을 잘 해서 저는 역사 공부를 가을하늘님 덕분에 배우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건행 ~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큰행님!!
다음에도 저와 함께 걸어 보실까요 . ㅎㅎ
@가을하늘 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