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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진 자유기고가
입력 2009.10.05 22:19
호수 20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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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세 한의사 윤성혁 원장: “나의 전성기는 70~80대”
⊙ 米壽의 식초 전도사 박승복 회장: “55세에 경영인으로 새 출발”
⊙ 85세 현역 지익표 변호사: “아직도 밥벌이는 하고 있다”
⊙ 八旬의 공부귀신 강영희 교수: “아직도 매일 서재로 출근”
나의 壽命(수명)은 얼마나 될까?
사람들이 가장 궁금하게 여기는 것 중 하나다. 그래서 역술가나 무속인을 찾는 사람들의 공통된 질문 중 하나가 “제가 얼마나 오래 살까요?”라고 한다. 이런 질문에 占術家(점술가)들은 여러 가지 根據(근거)를 들어 그 궁금증에 답해준다.
하지만 이런 답변은 믿거나 말거나이다. 인간사에는 수많은 변수가 도사리고 있는 만큼 그런 예측이 위안은 될지언정 실상은 무용지물이다.
그럼에도 인생의 길이가 궁금하다면 기대수명을 참고하면 될 듯하다. 기대수명이란 질병·사고 등을 감안하여 출생 시 예상되는 평균 수명을 말한다. 최근 OECD(경제협력개발기구)가 펴낸 ‘2009 세계의료현황-한국편’에 따르면 2007년 기준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79.4세로 나타났다. 2009년 기준으로 하면 기대수명은 80세가 넘을 것이다. 현재를 사는 우리는 적어도 80세의 기대수명을 보장받은 것이다.
그러나 오래 산다는 것이 꼭 행복한 일만은 아니다. 병든 몸으로 일상과 사투를 벌이는 삶이 행복할 수는 없다. 건강은 어지간히 받쳐주지만 경제활동을 할 수 없거나, 일하는 재미를 누리지 못하는 무기력한 삶도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
필자는 먼저 長壽(장수)하면서도 행복한 現役(현역)으로 살았거나 살고 있는 인물 몇을 떠올려 보았다. 83세로 崩御(붕어)한 조선 최장수 왕 英祖(영조·21대)는 제위 기간도 51년7개월로 이 부문에서도 단연 拔群(발군)이다. 조선시대 왕들의 평균 수명이 47세였고, 短命(단명)한 왕이 많았던 점을 고려하면 영조의 장수기록은 특별나다고 할 수 있다.
더욱 매력적인 것은 영조는 말년 일부를 제외하고는 政事(정사)를 직접 챙기며 實權(실권)을 놓지 않았고, 건강한 삶을 살았다는 점이다.
올드 보이들의 즐거운 인생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미국 명배우 앤서니 퀸도 행복한 노년을 보낸 인물이다. <노틀담의 꼽추>, <길>, <그리스인 조르바> 등 150편의 영화에서 보여준 그의 神技(신기)에 가까운 연기는 세월을 넘어서도 추앙받았고, 말년에는 회화와 조각에 몰두하며 예술가로도 인정받았다. 80세에 47년 연하의 비서와 결혼하는 등 정력적인 삶을 살았던 ‘영원한 현역’ 앤서니 퀸은 분명 부러움의 대상이다.
마지막으로 매주 전국을 돌며 83세의 나이에도 ‘젊은 오빠’ 소리를 듣는 ‘KBS 노래자랑’의 명 사회자 송해 선생도 행복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 지난해 늦여름 어느 지방의 ‘전국노래자랑’ 현장에서 필자는 직접 송해 선생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땡볕 아래서 몇 시간씩 진행되는 공개녹화에도 지칠 줄 몰랐다. 젊은 사람들도 진을 빼는 고된 작업이건만, 短軀(단구)의 노인은 클로징 멘트를 하는 순간까지 목소리는 낭랑했고 자세는 꼿꼿했다. 80세 현역 중 송해 선생보다 정력적인 활동을 하는 분을 찾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이들 세 인물 못지않게 뜨거운 황혼을 보내고 있는 80세 이상 현역이 의외로 많다. 그들 중 靑春(청춘)은 갔지만 마음은 아직 청춘을 보내지 못한, 80세부터 100세까지의 晩春(만춘)의 現役(현역) 4인을 만났다.
그들의 삶에 퇴적된 인생의 깊이는 어떤 인생 철학자와 견줘도 손색이 없었다. 비록 熱血男兒(열혈남아)의 기상은 무뎌졌지만, 溫血男翁(온혈남옹)의 따뜻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학교 3학년 교과서에 실렸던 민태원의 ‘靑春禮讚(청춘예찬)’이라는 수필에는 ‘청춘은 인생의 황금시대’라는 구절이 있다. 우리는 당연히 청춘이 빛나는 시절이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올드 보이(Old boy)들의 기준은 조금 다른 듯하다.
尹聖赫 한의사(서울 강남구 대치동 창생당한의원 원장)
“건강이 허락하는 한 진료실 지킬 터”
⊙ 출생: 1910년 황해도 장연군.
⊙ 가족관계: 부인과 1남 1녀.
⊙ 경력: 1954년 서울 성북구 삼선동에 창생당한의원 개원, 2005년 강남구 대치동으로 한의원 이전.
⊙ 좌우명: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
⊙ 600字 人生
6·25전쟁이 벌어진 1950년, 부모형제와 아들을 두고 死線(사선)을 넘어 越南(월남)한 윤 원장은 우리 나이 마흔다섯에 한의원을 열었다. 서당 훈장과 한약방을 하던 외할아버지의 영향 덕분에 이북에서 獸醫師(수의사)를 하면서도 한의학 서적을 탐독했고, 약초에 대한 지식도 익혔다.
그는 함께 월남한 동료 수의사로부터 “이제 人醫(인의)가 되자”는 제안에 본격적으로 한의학을 공부하기 시작, 1954년 한의사 검정시험에 합격해 대한민국 1세대 한의사가 되었다.
이후 한의원을 열고 한의사가 되었지만, 그의 의학적 정진은 오히려 그때부터였다. 일본에서 펴낸 중국 후한시대의 의학서인 <傷寒論(상한론)>과 당시로서는 구하기 힘들었던 청나라 名醫(명의) 張錫純(장석순)이 동서양 의학을 절충해 펴낸 <衷中參西錄(충중참서록)>을 공책에 筆寫(필사)해 공부했다.
손때가 묻어 가장자리가 다 해진 이 책들은 <東醫寶鑑(동의보감)>과 함께 윤 원장의 진료실 서가에 꽂혀 있는데, 요즘도 그 책들을 펴놓고 공부를 한다. 변변한 사회활동 한 번 하지 않았고, 富(부)를 쌓아 빌딩을 지은 적도 없는 老(노) 한의사는 평생을 진료실을 지키며 손끝의 감각만으로 세상과 소통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건강이 허락하는 순간까지 쉼표 없는 인생을 살아갈 예정이다.
“나의 전성기는 70~80대였습니다.”
100세 한의사 尹聖赫(윤성혁·창생당 한의원) 원장이 기억하는 인생의 황금기다. 건강하게 100년이라는 세월을 살지 않고는 감히 입에 올릴 수 없는 얘기다. 100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게 정정한 모습으로 진료실에서 환자를 맞는 윤 원장을 본다면, 20~30년 전의 건재함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노인 취급을 받기는 매일반이었지만, 70대와 80대 무렵에 가장 많은 환자를 진료했다고 한다. 끊임없이 공부해야 하는 한의사에게 30~40년 관록이 붙은 그 시기는 낙후나 퇴보가 아니라, 빛나는 청춘처럼 반짝이고,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날카로웠으며, 물동이의 찰랑거리는 물처럼 재기 넘치던 때였다. 난치병인 간암이나 위암을 치료해 명성을 얻은 것도 그 시기였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진료실을 지키겠다”는 최고령 한의사인 윤 원장은 1954년 서울 삼선동에 창생당한의원을 열고 진료를 시작한 지 56년째 쉬지 않고 달려왔다.
그의 청년기는 삼팔선을 넘던 1950년에 고향에 두고 왔지만, 그는 한의사가 되어 진료를 하는 내내 황금시대를 보냈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는 비좁은 진료실을 벗어날 마음이 없다.
매일 아침 9시면 어김없이 출근해 진료를 시작하는 윤 원장은 지금도 하루 10여 명의 환자를 맞는다. 양방병원과 달리 진맥과 침술 시술 등을 하자면 환자당 족히 1시간씩 걸리는 일이라 대단한 정력이 소모됨에도 그의 진료에는 대충이 없다.
하지만 윤 원장은 “무릎이 약해져서 오래 서 있으면 아프다. 요즘은 사실 힘에 부친다”며 진료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몸이 많이 불편한 것은 아니어서 앞으로도 한 10년쯤은 더 진료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80세가 넘어서도 현역으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건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현대의학이 아무리 수고를 해도 애초에 건강하지 않은 신체를 가지고 있다면 장수를 누리기는 힘들다. 4인의 80세 현역들은 이구동성으로 “부모로부터 건강한 신체를 물려받았다”고 말했다.
물론 장수하는 이들답게 나름의 건강법은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네 사람 모두 공통적으로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체의 건강은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진리를 몸소 터득한 것이리라.
건강의 제1 덕목은 편안한 마음
최고령 100세 한의사인 윤성혁 원장은 아직도 하루 10여 명의 환자를 볼 정도로 정정하다.
특이한 것은 사회지도층 인사들이었음에도 골프를 즐기는 이가 없다는 것이다. 다들 “바쁘게 사느라 운동할 짬을 내기 어려웠다”며 건강관리로 맨손체조나 걷기 같은 가벼운 운동을 한다는 비교적 평범한 대답이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그런 평범함조차 비범해 보였다. 술은 대부분 즐기는 편이었지만, 담배는 아예 입에 대지 않거나, 일찍이 禁煙(금연) 대열에 합류했다.
100세에도 안경의 도움을 받지 않는 윤 원장은 한의사답게 건강의 제1 덕목을 ‘편안한 마음’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한국 연예계를 풍미한 ‘후라이 보이’ 곽규석 목사와 나눈 대화 한 토막을 들려주었다.
“하루는 곽 목사가 어느 미국 목사와 대화를 나누는 도중 그 목사에게 전화가 걸려왔는데 한참동안 통화를 하고 난 후 그 미국 목사가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더라는 겁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무남독녀 외동딸이 교통사고를 당해 다리 하나를 절단하게 됐다는 비보를 들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대성통곡을 할 일인데, 목숨도 살려주시고, 다리 하나도 남겨주셔서 감사하다고 기도를 하는 목사를 보면서 큰 감명을 얻었다고 합니다. 저도 그 이야기를 듣고 인생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180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새기고 있습니다.”
윤 원장의 또 다른 건강유지법은 小食(소식)이다. 윤 원장은 “불교에서는 사람은 자기 평생 먹는 양은 타고난다고 한다. 그래서 빨리 먹으면 일찍 가고 천천히 먹으면 오랜 산다”며 “영양가 있는 음식으로 적당량을 먹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한때는 하루 2식에 도전해 보기도 했지만, 그 경지까지는 어려워 점심을 간단하게 먹는다고 한다. 고구마 하나와 사과 반쪽을 먹거나, 떡 한두 쪽과 과일 반쪽을 먹는 정도로 요기를 한다고.
雜技(잡기) 하나 없이 일평생 책 들여다보는 것이 취미였던 윤 원장은 “내가 낸 처방이 옳은지 그른지 늘 노심초사해 온 인생이었다”며 “그러면서도 그는 세상과 세월에 순응하는 법을 환자들을 만나면서 체득했다”고 말했다.
“세상 일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역경에 처하는 일도 많죠. 발에 걸려 넘어지는 돌부리는 장애물이 아니라 디딤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화가 복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긍정적인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행복한 인생을 사는 법입니다.”
그가 품고 있을 인생에 대한 철학은 이렇게 간단히 요약될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 필요한 지혜 하나를 청했다.
“모든 문제를 대화로 풀어라. 마주 앉아서 토론하고, 관용하고, 나를 해친 사람도 용서하라. 덕이 없으면 사람이 따르지 않는다. 덕 중에서도 가장 큰 덕은 남의 허물을 감싸는 것이다.”
윤성혁 원장의 말이다.
“내가 오십을 앞두고 있을 때, 어떤 어른이 50대는 늙지도 젊지도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인생의 황금기라고 했는데, 지금은 너무 까마득하게 오래전 일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도 나쁘지 않다. 일할 만큼 건강이 허락되니 말이다. 일하는 것이 오히려 건강을 지키는 비결이다.”
朴承復 샘표식품 회장
“오늘이나 33년 전이나 다를 게 없다”
매일 아침 9시면 본사 집무실로 출근하는 박승복 회장은 요즘도 하루에 2~3개의 약속을 소화한다.
⊙ 출생: 1922년 함남 함흥.
⊙ 가족관계: 부인(작고)과 2남 3녀.
⊙ 경력: 함흥상고 졸업, 산업은행(24년 근무), 국무총리 행정조정실장(1973년), 전경련 상임이사, 한국중견기업연합회장 역임, 국민훈장 모란장, 現(현) 샘표식품 회장, 상장사협의회 회장, 한국식품공업협회장.
⊙ 좌우명: 인화, 봉사, 신용.
⊙ 600字 人生:
박승복 회장은 열아홉 살에 한국식산은행(산업은행의 전신)에 入行(입행)했다. 입사 후 25년을 같은 은행에서 근무했고, 1965년 부장을 끝으로 재무부 기획관리실장에 임명되면서 관료생활을 시작했다.
1년 후에는 丁一權(정일권) 총리에게 발탁돼 국무총리실 정무비서관으로 자리를 옮겼고, 1973년에는 국무총리실 초대 행정조정실장에 올랐다. 총리실에 근무한 만 10년 동안 9대 丁一權(정일권), 10대 白斗鎭(백두진), 11대 金鍾泌(김종필) 총리를 보좌했다. 김종필 총리 보좌를 끝으로 관료생활을 마친 후, 1976년 부친인 박규회 회장이 창업한 샘표식품 사장으로 취임했다.
은행원, 관료, 경영인으로 인생의 획을 긋는 세 번의 변신을 보여준 그의 인생행로는 모두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경영에 뛰어든 초기에는 어려움도 겪었다. 박정희 정권 말과 신군부가 집권하던 8년 동안 요시찰 대상으로 감시를 받았기 때문이다. 1년6개월이면 끝날 공장 신축도 3년을 끌어야 할 정도로 어려움이 컸다. 그러나 그 위기를 원리원칙으로 넘겼다. “정직하고 원리원칙을 지키면 모든 것이 통한다. 그렇게 살아온 아버지가 있어 나도 따라 배웠다”며 성공한 인생을 살 수 있었던 비밀을 털어놓았다.
올해 米壽(미수)를 맞은 朴承復(박승복) 회장은 매일 아침 9시면 서울 중구 충무로에 있는 샘표식품 본사(前 매일경제빌딩) 10층 집무실로 출근한다.
1976년, 초대 국무총리 행정조정실장(당시 차관급)을 끝으로 공직을 떠난 박 회장은 父親(부친)이 창업한 샘표식품 사장에 취임했다. 55세에 경영인이라는 새로운 인생에 뛰어든 박 회장은 샘표식품을 우리나라 장류 업체를 대표하는 기업으로 성장시킨 후 몇 년 전 회사를 장남인 朴進善(박진선) 사장에게 맡겼다.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박 회장은 한 달에 한 번 전체 중역회의에 참석하는 것이 회사의 공식 일정 전부다. 일주일에 한 번씩 업무보고를 받고 있지만, 특별히 지시를 내리거나 업무를 챙기는 것은 아니다. 다만 건강발효 식초인 흑초(제품명: 백년동안)의 신제품 개발 아이디어를 내고 홍보 전략을 세우는 일은 예외다.
박 회장은 “흑초 관련 신제품 출시 일정과 제품 완성도를 꼼꼼히 체크하고 있다”며 “회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영역인 것 같다”고 말했다.
경영에서 물러났다고 박 회장의 스케줄이 한가하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하루 조찬, 오찬, 만찬 중 최소 두 번은 약속이 잡혀 있고, 그 사이사이에도 이런저런 모임과 약속으로 분주하다. 인터뷰가 있던 날에도 오찬 모임과 한국로터리 총재취임식 및 만찬이 잡혀 있었다. 회사 내 방문객을 맞거나 언론 인터뷰도 그의 일정 중의 하나였다.
박 회장은 “한때 싱글을 치던 골프 실력이지만 경영에 뛰어들면서 너무 바빠 아예 접었다”고 했다.
박 회장은 여러 모임의 좌장을 맡고 있다. 1980년 함흥상고 동창회장이 된 후 30년째 ‘장기집권’ 중인 것을 비롯해, 상장사협의회장은 15년째, 한국식품공업협회장은 10년째 맡고 있다. 매번 2선 후퇴를 위해 회장직 추대를 고사하고 있지만,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고 한다.
이밖에도 마약퇴치운동본부 이사, 이산가족추진위원회 고문, 경영인포럼 의장, 아시아투데이 상임고문 등 쓰고 있는 감투만도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국무총리실 있을 때가 나의 전성기였습니다. 그때는 밤낮없이 일했어요. 없는 일도 만들어서 할 정도로 일벌레였습니다. 총리는 물론 박정희 대통령의 칭찬도 자주 들었습니다.”
박 회장은 지난날을 돌아보며 아련한 향수에 젖었지만, 그의 전성기는 어느 한순간이 아니라 그의 인생 전반을 관통하고 있었다.
박승복 회장은 “29년째 병원에 간 적이 없다”고 자랑했다. 앉은 자리에서 소주 두 병은 거뜬히 마실 만큼 주량도 넉넉하단다. 세월의 훈장인 주름이 얼굴에 표지를 남겼지만, 검버섯 하나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맑은 피부를 유지하고 있다. 박 회장이 이토록 건강하게 생활하는 것은 29년째 식초를 장복한 덕이라고 한다.
식초 전도사
“1980년에 일본에 사는 상업학교(함흥상고) 동기를 만났는데, 식초가 몸에 좋다고 먹으라는 겁니다. 그래서 ‘너나 먹어’라고 했는데, 마침 일본에 가보니 식초건강법이 붐을 이루었습니다. 서점에서는 수십 종류의 식초 관련서적이 판매되고 있었어요. 당시 술을 많이 먹어 위궤양이 있었는데, 한 3개월 먹었더니 씻은 듯이 나았어요. 처음에는 속도 거북하고 먹기가 고약했지만 시간이 지나니 적응이 되더군요. 그렇게 식후 세 번 29년 동안 마셨더니, 이렇게 쌩쌩합니다.”
박 회장이 주로 마신 식초는 사과식초. 최근에는 샘표식품에서 흑초제품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흑초는 35%가 식초로 구성되어 있는데 소주잔 한 잔 분량으로 하루 세 번 마시되 공복은 피해야 한단다. 다른 식초의 경우는 소주잔 3분의 1 분량에 3분의 2 분량의 물이나 토마토 주스를 섞어 마시면 된다고 한다.
박 회장은 나이에 비해 흰머리가 거의 없고 윤기가 흘렀다. 그 이유 역시 머리를 감은 후 식초 탄 물로 헹구어 준 덕분이라고.
박 회장의 또 다른 건강비결은 가리는 것 없이 잘 먹는 식습관이다. “다 좋은데 너무 잘 먹어서 배가 나온단 말이야. 이건 어떻게 안되네”라며 웃을 정도로 식성이 좋다. 식초 덕에 과식이나 과음을 해도 속이 편안해서 좀처럼 식성이 자제가 되지 않는다고. 보약 대신 29년간 식초를 챙겨 먹으면서 건강을 지킨 박 회장은 지인들에게 식초를 권하는 전파자가 되었다.
박승복 회장은 “원리원칙은 통한다. 정직하게 살면 뜻을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박 회장은 지금도 달력 뒷면을 메모지로 사용한다. 원리원칙을 강조하는 삶의 자세도 절약하는 습관도 부친을 보고 익힌 것이다.
박 회장의 이런 생활 자세는 대물림되고 있다. 회사 경영을 맡은 장남인 박진선 사장도 몇 년 전까지만 해도 10년이 넘은 자동차를 타고 다녔다. 차를 바꿀 때 그 자동차가 달린 거리는 40만km를 넘었다고 한다. 박 회장은 다음과 같은 일화를 들려주었다.
“신군부가 들어서면서 공직에서 물러나 경영자가 되었습니다. 그때 나를 감시하는 담당형사가 있었는데, 저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어요. 하루는 그 담당형사가 인사차 찾아와서는 ‘그동안 회장님을 감시했는데 다른 곳으로 발령 받아 간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회장님을 2년간 감시했는데 정말 털어도 먼지 하나 나올 것이 없었습니다’라고 하더군요.”
박승복 회장은 이런 말을 남겼다.
“일일이 가르치기보다는 말없이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샘표 집안의 교육 비결이다. 교육은 어릴 적부터 체험을 통해 다양한 가치관을 형성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열심히 즐겁게 일했다. 그래서 아랫사람에게 일을 강요한 적이 없다. 그렇게 해오다 보니 함께 일하던 사람들도 알아서 따랐다.”
池益杓 변호사(서울 화해·조정·중재변호사단 대표변호사)
“이 나이에도 밥벌이는 합니다”⊙ 출생: 1925년 전남 완도.
⊙ 가족관계: 부인과 5녀 1남(작고).
⊙ 경력: 9회 고등고시 합격. 판사, 법무법인 正平 대표변호사, 辯協 부회장, 사할린동포 법률구조회장, 대일민간 법률구조회장 역임, 現 서울 화해·조정·중재변호사단 대표변호사. 국민훈장 모란장, 국민훈장 무궁화장. ‘기독교개조론’저술.
⊙ 좌우명: 항상 기뻐하고, 만사에 감사하라.
⊙ 600字 人生:
지익표 변호사는 1세대 인권 변호사로 활동했다. 1989년부터 사할린 동포들의 일본 정부에 대한 소송을 무료로 맡아 1989년 소송취소를 대가로 위자료 320억원을 받아낸 사건으로 유명해졌다. 1992년부터는 ‘정신대’를 포함해 군속과 노무, 침략, 분단책임비용 등을 청구하는 對日(대일) 민족소송을 벌여 2003년에 종결될 때까지 自費(자비)를 들여 소송을 진행했다.
또 하나 지 변호사를 유명하게 하는 수식어는 국내 최고령 경비행기 자격증 소지자라는 것. 그는 여든이 다된 나이에 경비행기 조종을 시작해 80세에 자격증을 땄고, 81세엔 화성~고흥 왕복 700km의 장거리 비행에 성공했다. 현재는 건강문제 때문에 더 이상 조종간을 잡을 수 없지만, 여전히 그는 창공의 푸른 꿈을 안고 산다.
그에게 인생은 끊임없는 도전이다. 그는 지금도 ‘다락방 운동’이라는 또 다른 도전을 하고 있다. 이 운동은 “독선과 배타, 선민의식으로 가득 찬 기독교의 잘못된 사상을 고치는 데 남은 생의 에너지를 쏟겠다는 것”이라고 한다. 그는 ‘大義(대의)를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 생의 목표라고 말했다.
서울변호사회에 등록된 80세 이상 변호사는 약 90명이다. 그러나 소송을 맡거나 현역으로 뛰는 이들은 한 손에 꼽을 정도다. 85세의 池益杓(지익표) 변호사도 법정에 서는 소송은 거의 없다. 다만 제소 前(전) 화해(소송을 제기하기 전 판사 앞에서 화해하여 화해조서가 작성되면 확정판결과 동일한 효력이 발생한다) 사건들을 맡아 법적대리인으로 중재를 하고 있다.
지 변호사는 6명으로 구성된 ‘서울 화해·조정·중재변호사단’의 대표변호사를 맡아 의뢰된 사건들을 각 변호사에게 배분하고 직접 판사 앞에서 화해조서를 작성하기도 한다. 6명의 변호사단은 평균 연령 75세로 지익표 변호사가 가장 연장자다. 그는 “나처럼 나이 든 사람에게 누가 사건을 맡기겠느냐”며 “지금은 제소 전 화해 사건들과 법률자문만 하고 있다”고 말했다.
“비용도 저렴하게 받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많이 벌었으니, 이제 봉사하는 마음으로 수임료를 낮게 책정했어요. 그래도 먹고사는 데 지장 없습니다.”
인권 1세대 변호사인 그는 유신시절 무료소송을 많이 맡았다. 일제의 유산인 사할린동포나 정신대 문제 등 ‘민족소송’ 등은 自費(자비)를 들여 진행했다.
지 변호사에게 가장 화려한 시절은 60~70대 시절이다.
“그 시기에 가장 많은 활동을 했고, 민족소송으로 혈기왕성하게 법정을 누볐습니다. 법무법인 정평의 대표변호사로 재직했는데, 79세에 법무법인을 떠나면서 인생이 조금 싱거워지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행복한 나날입니다.”
지익표 변호사는 잠을 충분히 자는 편이다. 요즘은 6시 정도에 일어나지만 밤이 긴 겨울에는 7시까지 잠을 청한다. 일어나면 맨 먼저 하나님께 경배를 한다. 불교식으로 7배를 올리는데 그 시간이 짧을 때는 10분 길면 40분 정도 걸린다. 경배를 올리는 동안 명상을 하기 때문이다.
그 시간은 자신이 품은 세상의 욕망과 욕심을 털어내고, 조상, 부모, 형제, 자녀, 이웃 그리고 인류공동체로 사랑의 주파수를 넓혀나가는 시간이다. 그렇게 명상 7배가 끝나면 맨손체조를 하는데, 명상을 포함해 대략 40~60분이 걸린다.
“내가 어디에서 왔는가를 생각하면 인간도 하나님의 한 부분이고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을 매일 아침 스스로에게 각인시킵니다. 그리고 세상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으면 마음속에 자유와 평화가 찾아옵니다. 정신이 맑아지면 신체까지 건강해집니다. 그 외에는 좋은 사람들 만나서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제 건강의 비결이지요.”
여행광이기도 한 지익표 변호사는 아내와 함께 세계 곳곳을 누비기도 했다.
동요 부르기가 취미
지 변호사가 말하는 ‘좋은 사람들’이란 10년째 만나는 토요모임 회원들이다. 홀트봉사회에서 만난 이들은 신앙동지들로 대부분 70대 이상이며, 85세의 지 변호사가 가장 연장자다. 모두 12명이 멤버인데, 과천 국립미술관 지하에서 만나 산책을 하고 함께 예배를 본다.
찬송도 하지만 이들이 주로 부르는 노래는 동요다. “여러분 몇 살?”하고 진행자가 질문하면 “열두 살” “열 살” “여덟 살 등” 각자 다양한 대답을 하고 동요를 부른다. 지 변호사는 “동요는 부를수록 사람을 젊고 순수하게 해준다”며 “동요를 부르고 나면 젊어진 기분이 들고 마음도 편안해지고 기분이 좋아진다”고 말했다.
식사량은 젊은 시절과 비교해 크게 줄지 않았고 음식도 가리지 않는다. 다만 9년 전부터는 아침 식단을 바꾸어 쑥떡 두어 쪽과 검은깨나 호두 등 견과류를 갈아 넣은 수프를 먹는다. 점심은 사무실 주변의 식당에서 먹고, 저녁은 대부분 집에서 아내 이기봉(76세)씨가 준비한 밥을 먹는 편이다.
지익표 변호사는 “나이를 먹으면서 많은 경험을 하다 보니까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예전보다 쉽다”며 “마음도 넉넉해지고 주변에 감사하는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 젊은 시절 불 같은 성격을 가졌던 지 변호사는 “그래도 여전히 마음을 못 다스리는 면이 있다”며 “며칠 전에도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큰소리를 내고 말았다”고 말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치 않고 오히려 화를 내는 이에게 호통을 쳤다는 것이다. “마음은 죽을 때까지 다스려도 다 누르지 못한다”며 멋쩍게 웃었다.
그가 한 말 중 가슴에 남는 몇 마디를 적어 본다.
“保守(보수)란 전통을 지키고 가치를 지키고 헌법을 지키는 것이다. 지키는 것을 ‘꼴통보수’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나의 장례식장에서는 내가 인사말을 할 생각이다. 미리 녹음해 둔 육성으로 ‘나는 죽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 앞에서 사라지는 것뿐입니다’라고. 헤어지는 것은 아쉽지만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았고 고마운 마음이 가득한 삶이었다.”
康榮憙 생물학자(<생명과학대사전> 저자)
“지금도 매일 아침 서재로 출근”⊙ 출생: 1930년 서울.
⊙ 가족관계: 부인과 1남(작고) 2녀.
⊙ 경력: 연세대 생물학과 졸업. 연세대 부총장, 한국식물학회장, 한국생물과학협회 부회장 등을 역임. 생물학 관련 저서 60여 권 저술.
⊙ 좌우명: 시간은 황금이다.
⊙ 600字 人生:
연세대 부총장을 역임한 강영희 교수는 1995년 정년퇴임했다. 1998년부터는 외부 강의도 중단했지만, 학자의 소명까지 은퇴한 것은 아니었다. 강 교수는 생물학자로서 이루고 싶었던 평생의 꿈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학생도 강의실도 없는 세 평짜리 書齋(서재)에서 홀로 악전고투를 시작했다.
그의 오랜 꿈은 1965년 정부 1호 일본 초빙교수로 가면서 만난 평생의 스승 후지와라 아키오 교수를 통해 잉태됐다. 후지와라 교수는 어느 제자보다 일찍 연구실에 나오고 늦게 퇴근하는 강 교수를 보며 일본 학생들에게 본받으라는 꾸중을 할 정도로 그를 아꼈다. 학위를 받고 돌아온 뒤에도 강 교수는 스승과 연을 이어갔다.
1980년대 후반 여러 제자와의 모임에서 스승 후지와라 교수는 “너라면 할 수 있을 것이다”라며 “일본의 생물학사전을 뛰어넘는 사전을 만들어보라”고 권했고, 강 교수도 얼떨결에 대답한 것이 그의 꿈이 되었다.
강 교수에게 <생명과학대사전>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같은 집념의 소산이다. 10년간 하루 17시간씩 매달려 편찬한 2300쪽의 대사전은 한국 생명과학의 중요한 자산으로 남았다. 강단에 서는 동안 수십 권의 저서를 집필하고, 많은 後學(후학)을 길렀지만, 정작 학자로서 더 큰 업적을 이룬 것은 이처럼 강단을 떠난 뒤였다. 그의 인생은 이 저작물로 수렴될 수 있을 것이다.
80세로 이번 인터뷰 대상자 중 막내(?)인 康榮憙(강영희) 연세대 명예교수는 사무실도, 학교 연구실도 아닌 자신의 집 서재로 매일 새벽 4시에 어김없이 출근해 하루 8시간 이상 자료정리와 집필에 매달리고 있다. 그나마도 많이 ‘게을러진’ 것이라고 한다.
2008년 2월 출간한 <생명과학대사전> (아카데미서적)을 집필하던 때는 하루 17시간을 자료정리와 집필에 매달렸다. 그 기간이 무려 9년4개월이었다. 학교를 떠난 직후부터 시작된 이 지루하고 힘겨운 싸움을 끈덕지게 물고 늘어져 승자가 된 것이다.
<생명과학대사전>은 2300쪽, 2만8700개의 용어를 정리한 방대한 저술이다. 생물학과 교수가 곤충학, 농생물학, 면역학, 미생물학, 영양학, 약리학 등 모든 생명과학분야의 용어를 정리한 것도 의외지만, 양과 질적인 면에서 비교할 기존 저술을 찾아보기 어렵다.
기존 생물학 사전이 700쪽에 불과할 정도이고, 일본의 생명과학대사전도 1만1000여 용어를 해설해 놓은 것이 고작이다. 하지만 강 교수의 생명과학대사전은 용어도 이들 기존 사전을 능가할 뿐 아니라, 설명도 훨씬 치밀하고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책 무게만도 5kg이나 되는 대사전을 만들겠다며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작업을 칠순의 나이에 뛰어든 것은 무모해 보이는 일이었다. 정부나 관련학회의 지원이 전무한 상태에서 사명감만으로 작업을 진행하다 보니 집필진 구성도 어려웠다. 처음엔 20~30명 정도의 원로학자들이 참여를 약속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한두 사람씩 손을 들더니 마침내는 강 교수 홀로 남았다.
그러나 강 교수는 직계 제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끝내 <생명과학대사전>을 세상에 내놓았다. 안타까운 것은 경제성이 맞지 않아 출판기념회는 고사하고 한 푼의 집필료도 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강 교수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책을 출간해 준 출판사 걱정을 먼저 한다.
“교수는 죽을 때까지 일할 수 있는 직업입니다. 집필이라는 좋은 통로가 있기 때문이죠. 전공 분야든 교수 시절 특별히 관심을 가졌던 주제든 쓸 것이 많습니다. 나는 대사전을 택했지만, 발간으로 작업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도 계속 보완하고 추가할 내용들을 정리하는 데 남은 생을 다 바칠 생각입니다. 생명과학이 진보하는 이상 나의 할 일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새벽 4시면 자동으로 눈이 떠져
정년퇴직 후 10년 이상 집필해 만든 역작 은 어느 나라에도 없는 훌륭한 기초과학의 寶庫다.
강영희 교수는 잠이 없는 체질이다. 그는 평생 하루에 5시간 이상 잠을 자지 않았다고 했다. 요즘도 밤 11~12시에 잠자리에 들어 새벽 4시면 어김없이 눈을 뜬다. 눈을 뜨면 컴퓨터를 켜서 이메일을 확인하고 뉴스를 읽고, 새벽 예배를 드리러 교회로 향한다.
6시면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헬스장에서 30분가량 헬스를 하거나 아내와 함께 집 근처 우면산(서울 서초동 소재)에 오른다. 골프채는 잡아본 적이 없다. 그래서인지 제자들조차 골프를 치는 이들이 없다고 한다.
“허리둘레가 32인치이고, 병원신세 진 적이 없어요. 저는 이것을 규칙적인 생활이 선물한 건강이라고 봅니다. 주변인들은 잘 모르지만 누구보다 酒量(주량)도 센 편입니다. 요즈음은 함께 마실 사람도 없고 술 마실 시간도 없지만, 술을 많이 마신 다음날도 새벽 4시면 눈이 떠져요.
나는 건강도 정신력이라 봅니다. 자기를 이겨야 무엇이든 할 수 있고, 건강도 따라옵니다. 스트레스가 만병의 원인이라 하는데, 스트레스조차 정신력으로 이겨내는 편입니다.”
시력은 1.0으로 젊은이들 못지않다. 하지만 오랫동안 책을 보고 깨알 같은 자료들을 읽다 보니 충혈은 피할 수가 없다. 지난해 책 집필을 끝내고 난 후 안과 검진에서 백내장 초기 판정을 받았지만 약물로 치료했다. 가까운 동료들이 “독종이라 아플 틈도 없다”고 놀리기도 한다니, 강 교수의 강골 체질은 익히 알 만하다.
강영희 교수는 “외출해서도 ‘빨리 돌아가 빨리 작업해야지’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내 인생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정직하고 부지런한 삶’이었다”고 말했다. 골방 샌님 같은 인생이었지만 그는 자신이 썩 괜찮은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강 교수는 틈만 나면 제자와 자녀들에게 “시간은 황금이니 최대한 활용하라”고 조언한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는 24시간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시간의 가치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교수는 관련학문 저술을 해야 한다. 학문도 이루지 못하고 회고록을 쓰는 것은 난센스다.”
“요즘 사람 만나러 다니는 일이 서글프다. 사람 만나면 책 파는 장사꾼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기초과학에 필요한 책을 만들어 놓으면 많은 과학도들이 사볼 줄 알았는데, 출판사에 폐만 끼쳤다. 이것이 현실이구나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강 교수는 한국 기초과학의 쾌거라는 <생명과학대사전>을 펴냈지만 출판사가 적자를 보는 현실이 미안해 책 한 권이라도 더 팔려고 동분서주하고 있다.
■ 老, 그 쓸쓸함과 아쉬움에 대하여 ■
오래 산다는 것은 축복받은 일이다. 그러나 그만큼의 悲哀(비애)도 비례한다. 가장 아쉬운 것은 막역했던 벗이 가고 없다는 것이다. 지금 현재를 열심히 살아가고 있지만 이 시간들을 함께 나눌 이들이 먼저 가버린 것이 두고두고 아쉬운 일이다.
“점심 함께 먹을 친구들이 거의 사라졌다”며 “홀로 점심을 먹는 일은 참 쓸쓸하다”는 지익표 변호사, “술 먹으며 막말을 할 친구들이 다 가버렸어”라는 박승복 회장, “삼총사가 있었는데, 한 친구가 몇 년 전 떠나고, 이제 한 친구 남았는데 역시 병원에 있다”는 강영희 교수, “이제 누가 있나? 갈 사람은 다 가버렸다”는 100세의 윤 원장에게 가장 쓸쓸한 일은 가까운 知人(지인)들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벗을 보낸 일보다 더 가슴에 사무치는 일은 血肉(혈육)을 보내야 했던 아픔일 것이다. 더욱이 가슴에 묻는다는 자식을 보내는 일은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이다. 강영희 교수는 2005년 장남이자 외아들을 잃었다. IT회사를 경영하던 아들이 등반 도중 추락사한 것이다.
“컴퓨터를 아들에게서 배웠습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져요. 생명과학대사전 집필을 하던 때인데, 일주일간 손을 놓고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집필이 아니었다면 그 슬픔을 이겨내는 것이 어려웠을 것입니다.”
지익표 변호사 역시 강 교수와 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다. 지 변호사는 매년 뉴욕의 롱아일랜드의 한 공원묘지를 찾는다. 미국 유학 중 1988년 혈액암으로 세상을 떠난 외아들을 그곳에 묻었기 때문이다. “애들 죽었다는 뉴스만 봐도 가슴이 아프다”며 “날이 갈수록 어머니가 그립고, 아들 생각이 간절하다”는 지 변호사는 요즘 들어 눈물 흘리는 일이 잦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그만큼의 지혜를 얻지만 슬픔도 그만큼 누적되는 일일 것이다. 그중 가장 큰 스트레스가 나를 아는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면서 그만큼 자신도 잊혀 간다는 것이다. 어쩌면 삶은 자신을 알리고 또한 자신을 지워가는 과정일 것이다. 윤성혁 원장은 “살아가는 것이 자연의 섭리이니 순응해서 살아갈 뿐이다”며 나이 많음의 쓸쓸함을 당연한 것이라 여긴다.
80세 현역들은 여전히 왕성한 활동과 건강을 무기로 자식들과도 한집안에 살지 않는다. 부모봉양이라는 짐을 자식들에게 지우기엔 노신사들의 사고가 너무 신식인 탓이다. 십여 년 전 喪妻(상처)한 박승복 회장은 “혼자 사는 것이 얼마나 편한데, 왜 자식들하고 살면서 서로 불편하게 살아”라며 홀로 사는 것의 단출함과 가벼움을 즐긴다. 부부가 해로하는 다른 세 사람의 생각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 마지막 이야기 ■
윤성혁 원장은 한방차를 내놓았고, 박승복 회장은 마시는 식초음료를 두 잔이나 권했다. 강영희 교수 집에서는 생과일 주스를 마셨고, 지익표 변호사 사무실에서는 냉커피를 마셨다. 한방차는 지친 심신을 풀어줄 만큼 안온했고, 식초음료는 새콤하게 입안을 자극했다. 생과일주스는 신선했으며, 냉커피는 더운 여름날의 열기를 식혀주었다.
음료의 맛과 느낌이 다르듯 네 사람이 살아온 인생도 제 각각의 풍미를 가지고 있었다. 세상의 수많은 갈래의 뜻이 하나로 모이는 萬流歸宗(만류귀종)처럼 그들의 인생은 아름답고 행복해 보였다. 인생 갈피갈피마다 희로애락의 고비를 넘겼을 그들을 보면서 늙는 일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를 깨닫는 취재였다.
우리 사회는 오래된 것을 폐기처분하는 데 능숙하지만 지금이라도 고령화 사회를 대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2005년 통계청이 조사한 인구총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80세 이상 인구는 66만5547명이었다. 현재는 더 많아졌을 것이다. ‘인생은 60부터라는 구호’도 이제는 시대착오적이어서 ‘인생은 80부터’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평균 수명도 늘어났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노인대책은 노령인구의 증가 속도를 따르지 못하고 있다. 정책뿐 아니라 일반인의 의식도 노령인구를 대하는 태도가 뒷방 늙은이 취급에서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닐까.⊙
장세진 자유기고가
sec1984@hanmail.net
출처 : 월간조선(https://monthly.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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