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군 벽진면 해평면 소재 벽진이씨 종당(宗堂)
경수당(敬收堂) 앞의 벽진장군 유허비
벽진장군, 백성을 위해 중도(中道)를 선택하다
처용이 등장하는 헌강왕 대(875-886)는 이미 신라 후기였다. 왕이 궁궐의 한 누각인 월상루(月上樓)에 올라 서울을 내려다보니 집집마다 금으로 기와를 둘렀고, 밥을 짓느라고 올라오는 연기는 그냥 장작이 아니라 숯을 쓸 때 생기는 것이었다. 태평성대였다. 그러나 그것은 소수 상류층을 지칭하는 말일 뿐, 하류 백성들은 굶어죽고 맞아죽는 것이 당대의 풍속도였다. 길을 나서면 도적 떼를 만나기 일쑤여서 괭이를 들고 들판에 나갈 때에도 혼자서 다니는 것은 금물이었다. 오죽하면 사람들은 팔현(八縣, 칠곡)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무시고개라 불렀을까. 3명 이상 무리를 짓지 않고 그냥 들어섰다가는 도적에게 반드시 해를 입는 ‘무시무시한 고개’라는 뜻이었다.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이제는 군도(群盜)들이 그냥 좀도둑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아예 관아로 쳐들어오기도 하였다. 관아는 으레 곡식을 저장하고 있고, 왕에게 바칠 비싼 진상품들을 철따라 수집하는 것이 관례라는 점을 노린 공격이었다. 그 중에는 제법 세력을 떨쳐 장차 나라의 역사[國史]에까지 이름을 남긴 무리가 있었으니 원종(元宗), 애노(哀奴), 원회(元會), 신훤(申煊) 등이 그 대표적 도적이었고, 더욱 드높은 기세를 휘날린 초적(草賊)으로는 헌강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진성여왕 3년(889년) 중앙정부의 세금 독촉이 높아지자 들고일어나 전국적 위세를 떨친 죽주(죽산)의 기훤(箕萱), 북원(원주)의 양길(良吉) 등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들에 이어 후고구려와 후백제를 국호로 내세우며 왕을 칭한 자들이 나타났으니 그것이 곧 후삼국의 시작이었다.
그렇게 도적들이 날뛰던 시절 벽진군을 지킨 장수는 벅진장군 이총언이었다. 이총언은 고려왕 왕건으로부터 장군(將軍) 칭호를 받은 양문(良文)과 도두(都頭) 관직을 받은 색상(索湘) 이후 벽진군 지역을 다스렸다. 그는 색상이 후백제군과 싸우다가 죽은 후 고려와 후백제 사이에서 중립을 지켰다. 양문과 색상은 줄곧 친왕건 정책을 펼쳤지만 공산 전투에서 대패한데다 군사력도 후백제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고려를 계속 지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벽진은 후백제와 경계선을 마주하고 있고 고려는 멀리 떨어져 있어 후백제를 적대시하다가는 언제 공략을 당하게 될지 알 수 없는 처지였다. 고려왕 왕건이 볼 때 벽진은 오히려 후백제 편인 듯 여겨졌다.
한쪽에 치우치면 반드시 다른 한쪽으로부터 화를 입는 것이 세상의 이치라는 것을 벽진장군은 익히 꿰뚫고 있었다. ‘나 벽진장군 이총언을 기회주의자로 보지 말라. 나는 다만 고려와 후백제 중에서 어느 세력이 이 땅에 정의와 평화를 구축하여 만백성들을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할 수 있는지 단언할 수 없다고 생각할 따름이라. 옳고 옳지 않음이 분명하지 않은데 공연히 한쪽에 밀착하였다가 나의 선량한 백성들을 무고하게 죽일 수는 없는 일이다.’ 늘 벽진장군은 부하 장수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갈파하면서 언행에 신중을 다할 것을 거듭거듭 당부하곤 했다.
고려왕 왕건은 벽진장군의 지지가 특별히 화급하다고 믿고 있었다. 본래 왕건은 스스로 나라를 일으킨 세력이 아니라 궁예 아래에 있다가 그의 폭정에 지친 신료와 부하장수들이 정변을 일으키면서 추대한 인물이었다. 당연히 전국의 자수성가한 호족들은 그를 얕잡아 보았고, 특히 공산 전투 대패 이후 왕건은 더욱 곤경에 처했다. 왕건이 벽진장군 이총언에게 유난히 공을 들인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벽진군이 고려와 후백제, 신라의 사이에 위치한 요충지여서 이 곳의 향배가 심리적으로 천하의 호족들에게 미칠 영향은 막심하였던 것이다. 게다가 이총언은 성을 굳건히 쌓아 도적들의 발호로부터 백성들을 잘 보호하였으므로 민심의 지지가 각별히 높았다. 그가 고려를 지지한다면 다른 호족들과 일반 백성들이 후백제를 떠나 고려로 마음을 모아줄 개연성이 높았다. 왕건은 이총언에게 여러 번 서한을 보내 손을 잡고 세상을 밝히자고 제안하였다. 마침 고창(古昌)전투에서 왕건은 공산 전투의 참패를 상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제 동(東)쪽 방면에 안(安)정이 찾아왔다고 판단한 왕건은 이곳의 지명을 안동으로 고쳤다. 그만큼 고창의 승리는 고려를 재기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