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어른들이 모두 자리를 비운 안방
나는 아무도 모르게 발길을 옮겨
안방문을 열었다
뿌연 방 안에는
짙은 향 내음과
그대로 눈이 시린 푸른 병풍
열두살 나는
사방을 구석구석 둘러본 후
하룻내 놀란 눈을 더욱 크게 뜨고는
병풍 뒤로 사알금 발걸음을 옮겼다
병풍 뒤에는
머리를 곱게 빗어 넘긴 단정한 아버지가
고요히 눈을 감고 편안하게 주무시고 계셨다
입에는 무언가 하얀 것을 붙이고 계셨는데
쿵쾅거리는 앰뷸런스를 타고
비포장 도로 산골짝 구장리까지
엄마의 설운 울음소리를 들으며
동행한 의사가 병균이 샐지도 모른다고
불어터진 입을 봉하는 것을 보았다
열두살 나는
그토록 편안히 주무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아버지가 존재하는 내 기억 속에서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절규 어린 기침 소리도
피 섞인 누런 가래도
어떠한 고통도 그 무엇도 없는
안정된 모습
나는 푸른빛을 띠는 아버지의 주름진 이마에
하얀 손을 가만히 갖다 댔다
아, 새벽 겨울 바람보다
더욱 손이 시렸던 아버지의 이마
싸늘히 감은 눈 위로 말끔히 빗겨진 머리를 한
그 모습이, 사람들이 일컫는 시체라는 무서운
단어인 것도 모른 채
열두살 나는 병풍 뒤에서 이제 막 숨을 거둔
아버지의 흐린 머릿결을
오랫동안 오랫동안 빗어 넘기고 있었다
멩이 감상 : 한겨레 신문을 보는데, 글쓰기 교실에 이 시가 인용되어 있었다. 정신이 번뜩 들었다. 표현도 표현이지만, 그 진솔함이 생생하게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런가보다. 고통도 충격도 시간이 지나면 이렇게 아름다운 그림이 되는구나. 고3이 벌써 이만하게 지난 시간을, 그 시간 속의 순간을 훈훈하게 복원할 수 있다니, 대단한 솜씨다. 문재라고 할 수밖에 없다. 죽은 아버지의 서늘한 머리를 빗기는 나어린 소녀의 모습이 참 긴 여운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