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행], 히가시노 게이고, 2000.

추리소설은 왜 읽는가? 답은 간단명료하다. 재미있어서.
추리소설을 통해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를 통해 느꼈던 여러 인간군상들의 모습과 당시의 시대상을 느낀다는 건 불가능하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에서 느꼈던 것을 추리소설에서 느낄 수는 없다. 시오노 나나미 여사의 [로마인이야기]를 통해 건진 인문학적 소양이 추리소설을 통해 쌓아지느냐? 그것도 아니다. 추리소설은 재미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소설들도 재미있어서 읽는다.
인터넷 검색을 하다보니 어떤 독자는 벌써 29편이나 되는 그의 작품을 읽었다고 한다. 대단하다. 광팬이다. 나 역시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통해 히가시노 게이고의 매력에 빠진 후 [한여름밤의 방정식]과 [방황하는 칼날]에 이어 전 3권으로 이루어진 [백야행]까지 읽게 되었다.
[용의자 X의 헌신]과 [방황하는 칼날]은 영화로까지 보았으니 더 본 셈인가?
이번에 읽은 [백야행] 역시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독자가 단숨에 읽게 하는 힘이 있었다. 도서관에서 토요일에 대출을 받아 월요일에 마무리 했으니, 권 당 300여 페이지되는 분량의 책 3권을 빨리 읽은 편이리라.
소설 [백야행]은 이미 일본에서 2006년에 드라마로 방영 되었고, 한국에서도 2009년 한석규, 손예진, 고수 등이 출연한 영화로 제작되었다.


이미 유명세를 꽤 탄 작품이지만 작품을 읽는 내내 느낀 스릴과 재미, 궁금증은 전혀 반감되지 않았다.
남자주인공 료지와 여자주인공 유키호 사이의 비밀.
이미 19년 전에 일어난 살인사건은 공소시효를 다 했지만, 그때의 담당형사 사사가키는 19년 전 사건을 실마리 삼아 이들 주변에 일어난 여러 사건들의 연관관계를 계속 추적한다. 그러는 사이 19년 전 겨우 11살이었던 이들은 서른 살이 되어버렸고, 형사도 정년퇴직을 하게 되었다.
19년 전에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전당포를 운영하던 료지의 아버지가 공사가 중단된 빌딩 안에서 살해된다. 시체를 발견한 건 동네 아이들. 날카로운 칼(?)과 같은 흉기에 찔려 사망한 시체 주변에서는 이렇다 할 단서가 발견되지 않는다. 범인으로 지목된 남자도 얼마 후 졸음운전으로 판명되어진 채 교통사고로 죽자, 사건에 대한 수사는 답보 상태에 이르러 또 하나의 미제 사건으로 남는다.
그 무렵 유키호의 엄마도 사고사로 죽는다. 사인은 가스중독이다.
가스레인지에 음식물을 올려놓고 그대로 잠이 든 것이다. 결국 음식물이 넘쳐 가스불은 꺼지고, 가스는 계속 누출되어...
물론 독자들은 료지와 유키호가 범인일 것이라는 추측을 한다. 아니, 작가가 그렇게 추측하게끔 한다.
에이, 설마 11살 짜리 초등학교 애들이. 그렇게 잔혹하게, 치밀하게 할 수 있겠어?
20여 년이 흐른 후 퇴직형사 사사가키에 의해 추리되지만 자세한 정황은 알 수 없다. 다만 범행의 동기가 그럴 듯 하게 밝혀지고, 어린 아이들이라고 수사대상에서 제외한 것이 잘못이었다는 회한과 료지와 유키호의 명석함이 드러날 뿐이다.
추리소설 구성의 특성 상 모든 사건의 해결은 작품의 말미에 있다.
사사가키의 추리에 의하면 료지와 유키호는 아주 친한 사이다. 늘 도서관에서 만난다. 많은 양의 독서를 통해 명석한 두뇌를 가질 수 있었기에, 유키호도 철저히 연기로 일관된 삶을 살 수 있었고, 료지 역시 유키호의 주변에서 둘 사이의 관계에 장애가 될 요소가 생길 때마다 협박과 살인을 일삼을 수 있었을 것이다.
죽은 료지의 아빠는 유아성애자로서 유키호를 탐했고, 그도 모자라 아예 소유하려 하다가 료지에 의해 살해 당한 것이고, 유키호의 엄마는 그런 유키호를 팔아넘기려다 살해 당한 것이다.
20년 후 유키호의 성장과 성공 배후에는 항상 료지가 있었고, 마침내 료지의 죽음으로 작품은 끝이 난다.
료지의 죽음을 목격하고도 유유히 에스컬레이터를 올라가는 유키호의 뒷모습을 통해 여기까지의 추리도 사사가키의 상상일 뿐 끝내 진실은 밝혀지지 않을 것이라고 암시한다.
문득 2012년 발간된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 [화차]가 떠올랐다. [백야행]이 먼저 출간되었으니 [화차]의 내용이 [백야행]을 모방했을 것이다. 적어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 만큼은.
많은 재미를 선사한 작품이지만 아쉬움도 크다.
중간중간 힌트를 내어준 작가의 배려가 있긴 했지만, 마지막에 이르러 가쁜 숨을 내쉬 듯이 여러 사건의 인과관계를 보여준 건 아무래도 독자의 입장에서는 성에 차지 않는다. 조금 더 긴 호흡으로 결말에 다가갔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아쉬워서였을 테지만.
또한 유키호의 주변에는 항상 료지가 머문다는 것을 사사가키를 통해 알게 되었지만, 사사가키의 예측대로 유키호의 가게 오픈식에 등장하게 한다는 건 뭐랄까, 너무 시시하지 않았나 싶다. 반전의 매력이 없었다고나 할까.
아울러 료지를 죽음으로 내몰지 말고, 차라리 도망가는 것으로 처리했으면 어땠을까?
만약 그랬다면 독자의 상상력은 더없이 확장되었을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