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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4일은 '적선, 사랑의 힘은 후대까지 이어진다'를 주제로
엮어 봤습니다. 지금 한창 '사랑의 모금운동'도 펼쳐지고 있는데
전년도 정도는 못 되는 분위기더군요. 하긴 이런 말을 하는
글쓴이도 얼마나 적선을 했는가 공개할 자신 있는가?
그런데 보기에 따라, 적선이 꼭 돈 가치로만 환산되는 건 아니라
나름 이런 저런 일들로 위안도 삼아 봅니다만, 어쨋거나
지금 우리 사회가 봉착한 싸늘한 분위기 때문에 기부에 대해
지난 해 보다 냉담한 거 아닌가 싶구요. 그렇다고 '아무렴 그렇지
그렇고 말고' 하고만 있을 수 없다 해서 적선과 사랑의 힘이
후대에까지 흐른다는 걸 주제로 돌아봤습니다.
♣ 고전코너 ‘신 명심보감 ---사랑의 힘이 후대에 까지 가나니 ’
모듬쇠 이 시간은 마음을 밝혀줄 보배로운 거울같은 ‘명심보감’을
새롭게 풀어보는 ‘신 명심보감’ 자리입니다.
초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일깨움은 되새겨 보고
이 시대에 적절한 처세와 마음가짐을 풍자와 함께 모색해
보는 ‘신 명심보감!’ 오늘은 고전 속에 어떤 구절인가요?
모듬쇠 어제도 적선과 기부에 얽힌 고사를 돌아봤는데요.
오늘도 옛 사람들이 말한 사람 살리는 사랑의 힘과
살아 있는 전설이 된 적선 이야기를 돌아볼까 합니다.
초란 어제는 태산이 높다하되 하면서 산 정상으로 올라갈
생각만 하는데, 그 산꼭대기 서는 거 보다.
한줌 한줌 흙을 쌓듯이 적선을 쌓다 보면
어느새 산이 돼 있을 것이고. 강이 돼 있을 것이란 거였죠.
모듬쇠 그런데 오늘은 적선과 그 사랑의 힘은 어디까지 가는지
잠시 돌아볼까 합니다. 모두 다 어려운 때인데
이런 적선 기부 이야기 자주 하는 속 뻔히 보인다 하시겠죠.
초란 그래도 우리 주변에 남이 알까 이름석자 숨기면서
적선과 기부를 하는 분들, 그 아름다운 사랑을 잠시
잊지 말자는 뜻으로 돌아볼까 하는거잖아요.
모듬쇠 명심보감 성심편에 이런 구절이 있지요.
(한문성독톤)_♬적선 존인이면 필요 영화후예니라
(積善存仁, 必有榮華後裔)
초란 사람 많이 구하고 선을 쌓아 사랑을 전한 사람 집안에는
반드시 후대 자손에게 영화가 있을 것이다.
모듬쇠 내가 베풀면서 내 생전에 돌려 받을 생각 없노라.
그래도 후손들에게 그 은혜 갚음이 돌아가더란 거죠.
자, 우리 시대 살아있는 적선지가의 전설하면
경주 최부잣집 생각 나시죠?
초란 여러 학자들에 의하면, 대한민국의 첫 고액기부자는
'경주 최부자' 집안의 마지막 최부자로 기록된 최준 선생이다.
모듬쇠 그럼요. 조선 시대 최고 부자로 불렸던 경주 최부잣집은
3백년동안 만석꾼 부자로 지내면서도 어려운 이웃을 돕고
독립운동을 후원해서 큰 존경을 받았잖아요.
초란 우리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사방 100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그 한마디만 들어도 가슴이 훈훈한
전설과 같은 전통을 이어왔던 경주 최부잣집.
모듬쇠 그러니 어찌 옛 말씀이 틀리다 하겠습니까?
'사람 사람 살리며 적선하고 사랑을 간직하면
그 후대에도 두고 두고 영화가 함께 하리라‘
초란 광복 후에 최준 선생은 그때까지 남은 전 재산을 처분해
대구대학교를 설립했으니, 교육계에 뿌린 그 사랑이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는 셈이구요.
모듬쇠 ‘과거를 보되 진사이상 벼슬을 말거라’ ‘만석 이상을
모으러 말거라‘ ’흉년에 땅을 사지 말고, 파장에 물건을
사지 말거라. 과객은 귀천을 가리지 말고 후하게 대접하라‘
초란 그리고 ‘시집온 며느리는 삼년동안 무명옷을 입게하라’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하라.’
구구절절 가슴을 울리는 금쪽 같은 적선과 사랑의 처세요
아름다운 가문의 전통 아닌가 싶습니다.
모듬쇠 오늘 ‘신 명심보감’에 대한 최부잣집 자료는, 인터넷
‘다음 카페’ ‘우사모’로 들어가셔서 참고해 보시구요.
초란 좋은 자료나 담론은 ‘우사모’ 카페에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한푼의 적선을 할 때 대단한 재벌님들은 자산 중에
껌값도 안되는 기부금으로 체면치레 하는데 그도 대~단하고
거~~룩한 일인지라 테레비에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나오고
참 살맛나겠다 싶은데, 그런 분들이 경주 최부자를 어찌 볼까 궁금하다.
사회에 환원한다면서 문화재단이니 무슨 미술관이니 박물관도 세워서
끝까지 이끗을 밝히는 상술 앞에 하긴 어떻게 번 돈인데? 이해도 가지만
얼마전 장터에서 젓갈장수 해서 평생 모은 돈, 가지고 있던 땅 죄다
기부했던 할머니가 올해는 학생들에게 사전류 같은 책들이며
공부할 기자재등 현물로 기부했다는 말을 듣고, 저리도 주고 또 주는
마음을 느끼고 싶은데, 그런 부러움까지 들었다.
여기, 익히 알려진 경주 최부자집 이야기 시간되는대로 돌아볼까 한다.
아래 인용된 글들은 그동안 퍽이나 알려진 남의 글들인데
여기 저기 모아서 올려본다.
경주 최부잣집의 특별한 가훈
몸을 닦는 육연(六然)과 집안을 다스리는 육훈(六訓)으로
1. 自處超然 스스로는 초연하고
2. 對人柔然 남에게는 온유하며
3. 無事澄然 일이 없으면 고요히 머물고
4. 有事敢然 일이 있을 때면 과감히 대처하며
5. 得意淡然 뜻을 얻었을 때는 담담하고
6. 失意泰然 뜻을 잃었을 때는 태연하라
요즘은 이렇게 몸과 마음을 닦아 인품을 기르는 덕목이 사라져 버린 세상이 되고 있으니,
그러한 수신 제가(修身齊家)가 치국 평천하(治國平天下)의 기본인 줄을 어떻게 알겠는가.
우리 교육이 단순히 생존의 수단방법을 배워가기만 하고 온화한 가슴을 길러내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저 많이 배워 많이 알고 많이 모아 많이 가지는 것을 교육의 전부로
인생의 목표로 정신없이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돼지처럼 살아가는 실리만 챙길 줄 알고
학처럼 여유로운 품격을 누려 가지는 못하는 것이다. 한 끼니 밥을 먹고 적어도 네다섯
시간쯤 비워두는 동안 소화흡수되어 피가 되고 살이 되고 에너지화 되어 건강할 수 있듯이,
배운 지식이 감성화 되고 지혜화 될 시간적인 여유를 두어야 인간적인 성숙이 이뤄지게
되는 법이고, 또한 자아 완성의 경지로 이어질 수가 있는 것이다. 곧 악인에서 선인으로,
어리석음에서 지혜로움으로, 현인으로 성인으로 성장해 가야 한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리하여 그 성숙의 단계만큼 인간적인 불행과 속박에서 벗어나게도 되는 법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정 사람을 살리는 길이 되겠지만 만약 그러하지 못하다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하루하루를 죽음을 향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분명 삶의 저 끝은 죽음일 테니까.
인간을 살려내지 못하는 지식경제 성장과 과학문명의 발달은 어디에다 써먹을 것이며, 결국
누굴 위해 종을 울리는 거란 말인가. 반드시 인간을 살려내야 하고, 다시 그 본래인간의
자리로 되돌리는 데 이와 같은 육연과 육훈의 정신이 삶의 기본바탕이 되어야 할 것이다.
1,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말라 1대 최진립
최부잣집은 12대 중, 9대의 만석에다 9대의 진사가 나온 셈이다.
진사는 초시의 합격 관문인데, 이를테면 양반의 신분만 얻고
벼슬길로는 오르지 않는다는 것이 집안의 철칙으로 내려온 셈이다.
말 타면 종 부리고 싶다는 속담이 있듯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돈이 있으면 권력도 잡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이 집안에서는, 벼슬이 높아질수록 당쟁에 휘말릴 확률도 높고
감옥이 가깝다는 사실을 통찰하고서, 경제력 하나만으로 수신제가하여
국가사회에 이바지하는 것으로 사람의 도리를 다하겠다는 포부인 듯하다.
2. 재산은 만석 이상을 모으지 말라 4대 최의기
두번째 철학은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신념이 철저했다.
돈이라는 것은 가속성을 지니고 있어서 어느 시점을 지나면 돈이 돈을 벌게 된다.
멈추기가 매우 어려우나 최부잣집은 만석에서 과감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던 거다.
그 환원은 소작료 할인으로부터 시작하여 이웃으로 국가로 확산되어 나갔던 것이다.
대체로 당시의 소작료가 수확량의 70% 정도였는데, 최부잣집은 50% 이하로 끌어내렸다.
소작료가 저렴하니까 소작인들이 앞을 다투어 최부잣집 농사를 지으려고 줄을 섰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팠지만 최부자가 논을 사는 데는 박수를 쳤던 것이다.
최부자가 논을 사면 자기들도 상생의 이치로 먹고 살기가 나아졌기 때문이다.
3, 과객은 귀천을 구분하지 말고 후하게 대접하라 4대 최의기
과객들이 묵고 가는 사랑채에는 독특한 쌀뒤주가 있었다.
두손이 겨우 들어가도록 입구를 좁게 만든 뒤주였는데,
누구든지 두 손을 넣어서 쌀을 가져갈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다음 목적지까지 갈 때 소요되는 여행경비로 사용하라는 뜻이었다.
입구를 좁게 한 이유는 지나치게 많은 양은 가져가지 말라는 표시였다.
정보매체가 없던 그때는과객들이 정보 전달자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과객들을 통해 최부잣집의 높은 덕망이 전국으로 퍼져 나갔던 것이다.
4, 흉년에는 땅을 사지 말고 파장 때는 물건을 사지 말라 3대 최국선
흉년이 드는 해면 수 천명씩 굶어 죽어가는 때였다.
흉년은 없는 이들에게는 지옥이었지만 있는 이에게는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작용됐다.
가난한 사람들이 당장 굶어죽지 않기 위해
헐값으로 내놓은 전답을 매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죽빼미논’까지 등장하기도 했는데,
죽 한 그릇을 얻어먹고 논 한 마지기를 내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부잣집은 이런 짓이라곤 꿈에도 하지 않았다.
이것은 실로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한 대개의 다른 부자들은 파장 때 떠리미 물건을 사들였는데,
최부잣집은 절대 그러지 않았다. 언제나 일찍 제값을 주고 샀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제일 좋은 물건을 먼저 최부잣집으로 가져 왔다.
최부잣집과 이웃들 사이에는 그만큼 신뢰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5, 가문에 시집온 며느리들은 3년동안 무명옷을 입도록 하라 6대 최종률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동안 무명옷을 입어야 한다는 원칙을 지켜왔다.
조선시대는 창고 열쇠를 안방마님이 가지고 있었던 시대였다.
집안 살림을 맡은 부녀들의 근검절약이 매우 중요했을 것이다.
보릿고개 때 새댁들은 쌀밥을 먹지 못하고, 은수저도 사용하지 못했다.
백동 숟가락의 태극 무늬 부분에만 은을 박아 썼던 것이다.
그녀들은 만석꾼 부잣집 며누리이자 양반집의 규수들이었지만,
참으로 검소하게 옷을 누덕누덕 기워 입기도 했었다.
로마 천년의 역사를 지켜온 비결이 '노블레스 오블리주'였다면,
신라 천년에서의 12대 만석꾼 최부자네의 지켜져 온 비결 역시
'가진 자로서 사회에 대한 떳떳한 도덕적 책무'를 이행했던 거다.
그러고 보면 동·서양의 1000년 문화를 지탱해 온 비결이
결코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이 확인된 셈이다.
6,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3대 최국선
최부잣집의 사랑채는 한꺼번에 백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
그래도 방사가 모자랄 때면 주위의 소작인들 집으로 식량과 반찬을 보내어
숙식을 제공해 주도록 하고, 대신 소작료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것이 마치 우애로운 한 집안 같아서 참 훈훈하게 느껴진다.
최부잣집의 한 해 식량의 소비량이 대략 3000석이었는데,
1000석은 식구들 양식으로, 1000석은 과객들의 접대로,
나머지 천석은 100리 안 이웃들을 돌봐줄 몫이었다.
사방 100리를 잡아보면, 동으로는 경주 동해안 일대로부터
서쪽으로 영천까지고, 남쪽은 울산에서 북으로 포항까지 이르게 된다.
'최부잣집' 하면 온 나라 안에 소문이 나 있었기 때문에
항시 과과객들이 잔칫집처럼 모여 들었다고 한다.
*12대 최부잣집의 계보*
1대. 최진립(1568~1636) 경주최씨 시조인 최치원의 17세손.
임진왜란때 의병을 모아 크게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다시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대왕은 남한산성에 피신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공주영장이었던 최진립은 충청감사 정세규의 만류에도 출정을 서두른다. "대왕께서 포위당하고 계신데 늙은 신하가 살기를 도모하겠는가" 예순 아홉의 최진립은 임금이 계신 남한산성을 향해 군사를 몰아갔다. 모든 장수들이 퇴각했지만 최진립은 끝까지 항전을 결심한다. 그리하여 1636년 12월 27일, 정무공 최진립은 장렬히 순국했다. 2대. 최동량(1588~1664) 새로운 농법을 개발하고 식산을 장려하여 크게 부의 터전을 일구었다.
3대. 최국선(1616~1657) 비로소 만석꾼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또한 왕실의 제례주를 사가에서 처음 빚었으니 오늘날의 경주법주가 되었다. 크게 재산을 늘려 만석의 토대를 일구었으나, 명화적이란 거대한 도적떼로부터 충격적인 위협을 당하고 나서 최부잣집의 노선은 대전환의 계기를 마련한다. 부의 축적은 비록 합법적인 방법일지라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가진 자와 못가진 자가 서로 힘을 모아 함께 살아가는 길을 택하기로 한다. 마침 삼남지방에 흉년이 들어 무수한 사람들이 굶어죽어 가고 있었다. 최국선은 과감히 곳간을 풀어헤친다.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다짐한다. 굶주린 이에게는 밥과 식량을, 헐벗은 이에게는 옷과 옷감을 건네주며......그러면서 그때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훈을 세우게 된다.
4대. 최의기(1653~1722) 드디어 만석의 재산을 이뤄냈다.
5대, 최승렬
6대. 최종률
7대. 최언경
8대. 최기영(1768~1834) 지금까지의 내남면 이조리에 머물렀던 최부자의 종가를 당시의 교촌(지금 경주시 교동의 요석궁터)으로 이주한다.
9대. 최세린
10대. 최만희
11대. 최현식
12대. 최 준(1884~1970) 느닷없는 한일합방(1910년)으로 나라를 잃게 된다. 최현식은 당시 20대인 최준에게 살림을 넘긴 후, 출입을 끊고 매일 아침 북쪽을 향해 곡을 했다. 최준 또한 망국의 한을 삼키고만 있기는 혈기왕성한 나이였다. '조선국권회복단'에 경주군 대표로 활동하며 자금을 대다가 투옥되기도 한다. 다시 백산 안희제를 만나 백산상회를 통해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해 오다가, 드디어 1945년, 꿈에도 그러던 광복을 맞이했다. 400년을 이어온 부를 이제 영원히 보존할 길을 찾아 고심하던 끝에 육영사업에 전 재산을 내놓기로 결심한다. 그리하여 최준은 만석지기 토지와 살고 있던 집까지 모조리 학교재단으로 희사한다. 당시는 대구대학이었으나 숱한 우여곡절을 거쳐 지금의 영남대학교로 성장한 것이다.
해방이 되었으니 일경의 감시도 없고 전 재산을 희사했으니 도둑 들 일도 없어서 이제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살겠다는 말을 남긴 채 최준은 1970년 10월, 마지막 최부자의 막을 내리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희사--댓가를 바라지 않고 기꺼히 내놓는다는 뜻인데, 나라와 겨레의 장래를 위해 전 재산은 물론 살림집까지 내놓은 그 고귀한 뜻이랑, 만석꾼보다 독립유공자 자손으로 받는 25만원의 연금이 더 자랑스럽다는 후손들..... 이제 최부잣집은 우리들 기억 속에 고이 간직되었다가 다시 제2, 제3의 최부자로 나와 서로서로 이익을 도와 우리 함께 복을 누리는 그런 세상이 오기를 학수고대 기다려 보아야겠다.
마지막 최부자 최준(오른쪽)과 그의 동생 최윤
마지막 최부자 최준은 어느 노스님의 금언을 일평생 지니고 실천하신 분이셨다.
재물은 마치 똥오줌(糞尿)과 같아서
한곳에 모아두면 악취가 나 견딜 수가 없지만
골고루 사방에 흩뿌리면 만백성이 풍요를 누리게 되리니.....
조선일보 기사중 [대한민국 제1호] 해방 후 고액기부 첫 사례
여러 학자들에 의하면, 대한민국의 첫 고액기부자는 '경주(慶州) 최부자' 집안의 마지막 최부자로 기록된 최준(崔浚·1884~ 1970) 선생으로 기억되고 있다.
조선시대 최고의 부자로 불렸던 경주 최부잣집은 300년간 만석꾼을 지내면서 어려운 이웃을 돕고 독립운동을 후원해 큰 존경을 받았다. '사방 100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문의 지침과, 어려운 사람들이 손을 집어넣어 잡히는 만큼 쌀을 가져가도록 구멍을 뚫어 놓은 '구멍 뒤주'는 최부잣집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고위층의 사회적 책임)' 정신을 대표하는 일화이다.
▲ 광복 후 최준 선생은 그때까지 남은 전 재산을 처분해 대구대학교를 설립했다.광복 후 최준 선생은 그때까지 남은 전 재산을 처분해 대구대학교와 계림학숙을 세웠고(1947년), 이 두 학교가 합쳐져 현재의 영남대학교가 됐다.
예종석 한양대 교수는 "최준 선생과 더불어 1970년대엔 유일한(柳一韓) 선생이 사회고위층의 책임의식을 보여준 모범 사례로 귀감이 됐다"며 "그러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기부자도 여럿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고 했다.
유한양행을 설립한 유일한(1895~1971) 선생은 1970년 개인주식 8만3000여주(현 시가로 311억원 상당)를 사회에 환원했는데, 이는 손녀딸의 유학자금 일부 등을 제외한 전 재산을 내놓은 것이었다. 이 기금으로 유한재단이 설립됐고, 현재까지 교육 장학사업 등을 이끌어 오고 있다. 아버지의 정신을 이어 1991년 선생의 외동딸 유재라 여사도 전 재산(시가 200억원 상당)을 유한재단에 기증했다.
▲ 유한양행을 설립한 유일한(1895~1971· 오른쪽 사진 왼쪽에서 두번째) 선생.
강철희 연세대 교수(사회복지학)는 기업에 속한 재단이 아니라 자산으로 운영되는 '독립재단 1호'로 중부재단(이사장 이혜원)을 꼽았다. 그는 "중부재단이 현대적 의미의 기부를 제대로 실천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이사장의 남편인 김항덕 중부도시가스 회장이 자산 30억원을 출연해 어려운 이웃과 사회복지기관을 지원하는 중부재단을 세웠고, 부부는 매년 회사 수익금 등 10억원 상당을 재단에 내놓고 있다. 강 교수는 "꾸준히 자기 자산에서 얼마간을 떼어내 기부해온 중부재단은 '중간 부자들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모범 사례"라고 말했다.
최근엔 사회복지공동모금회 등 민간 기부기관이 속속 등장하고, 기업체에서 사회적 공헌을 중시하면서 연간 수백억대의 기부를 하는 기업도 많아졌다. 이런 '초고액 기부'의 시발점을 사회복지공동모금회는 삼성으로 기억한다. 김효진 공동모금회 홍보실장은 "1999년 12월 삼성그룹에서 100억원을 기부했는데, 당시엔 공동모금회의 연간 모금액 목표가 213억 정도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행정안전부 민간협력과 윤희성 사무관은 "최근엔 기부자들의 선행이 잘 알려지고 있지만, 해방 이후 1980년대까지 여러 독지가의 기부는 개인적으로 이뤄져 역사 속으로 묻힌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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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슬대로 퍼갔습니다. 선생님...
하우님! 명석 하십니다. 이렇게 멋진!! 좋은 아이디어 제공 하였으니 참고로 잘 읽겠습니다.
작가 선생님 고생만 시키는거죠 뭐 ㅎㅎㅎ~~ 오죽하면 망막이 고장날까요?? ㅎㅎ ~~ 이담에 저 원망들을거 같아요^^ 그런데 앞으로도 계속 작가 선생님 괴롭힐건데요...ㅎㅎ~`
이..사회는 선인들의 후덕으로 존재하고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글을 읽으니 저도 부자가 되고 싶네요
또한 숙연해 지네요
자손들 또한 후덕으로 잘 살으시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