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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파와 위정척사파와의 격돌로 인한 자주권 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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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사변의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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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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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되는 고종의 위기와 을사보호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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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퇴위와 헤이그 밀 사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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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실질적인 마지막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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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왕
1926년 순종이 죽자 형식상으로 왕위 계승자가 되어 이왕이라 불리었으나 일본에 머문 채 귀국하지 못했다. 일본에 강제 체류하는 동안 철저한 일본식 교육을 받았으 며 일본육군사관학교, 육군대학을 거쳐 육군 중장을 지내기도하였다. 1945년 해방이 되어 환국하고자 하였으나 국교 단절 및 국내 정치의 벽에 부딪쳐 귀국이 좌절되었다. 한편 일본의 패망으로 인해 황족의 특권이 상실되고 재일 한국인으로 등록하여 1963년까지 일본에서 보냈다. 그 후 1963년 11월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의 주선으로 국적을 회복하고 부인 이방자와 함께 귀국하였다. 귀국 당시 뇌혈전증으로 인한 실어증에 시달리면서도 1966년 오랫동안 수권하던 심신장애자 재활원인 자행회, 1967년에는 그의 아호를 빌린 신체장애자 훈련원 명휘원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하지만 지병으로 1970년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가 죽은 후 부인 이방자는 영왕기념사업회, 정신박약아 교육시설인 자혜학교, 1982년 신체장애자 교육시설인 명혜학교 등을 설립하며 그의 유업을 계승하였다. 그는 부인 이방자 여사에게서 진과 구, 두 아들을 얻었으며 맏아들 진은 어려서 죽고 둘째 아들 구는 현재 생존해있다. 능은 경기도 미금시 금곡동 홍유릉 내에 있으며 1989년 4월 30일 이방자 여사도 이곳에 함께 묻혔다.
1905년 4월 미국 유학을 마친 뒤 귀국하여 그 해 6월에 적십자총재가 되었다. 1910년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뒤에는 항일 독립투사들과 접촉하여 1919년 대동단의 전협, 최익환 등과 상해 임시정부로의 탈출을 모의하였으며 계획을 실행에 옮기던 중 그 해 11월 만주 안동에서 일본 경찰에 붙잡혀 강제로 본국에 송환되었다. 그 뒤 여러 차례 일본으로부터 도일을 강요받았으나 거부하여 항일의 기개를 굽히지 않았고 해방과 6.25를 경험한 뒤 서울 사가에서 곤궁한 생활을 하다가 1955년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슬하에 우 와 건, 두 아들을 두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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