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농병 일치의 번상병제가 무너지고 용병제가 도입되었다. 조선 전기의 5위는 대부분 농민 출신의 정군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군역의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번갈아 군사훈련을 받는 번상병이었다. 이러한 번상병제는 농병 일치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 그러나 훈련도감을 비롯한 조선 후기 5군영의 군인은 대체로 일정한 급료를 받고 복무하는 직업적인 상비군이었다. 그러면 농병 일치제가 무너지고 용병제로 바뀌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원래 조선시대 군역의 원칙은 양인 개병제와 농병일치제였다. 그러나 보법이 시행되면서 군역의 요역화가 일어나고 군역의 요역화를 견디지 못한 농민들 사이에 사람을 사서 군역을 대신 시키는 대립제가 성행하였다. 대립제는 농민이 대립가를 소속된 기관에 납부하면 담당관이 그것으로 노비나 유민을 사서 대립케 하는 방군 수포의 형태로 행해졌는데 이 대립가가 지나치게 가혹하여 농민들의 군역 부담이 가중되었다. 이에 정부에서는 방군 수포를 양성화하여 군적 수포제를 실시하였다. 군적 수포제는 농민들이 군사 훈련을 받지 않고 대신 군포를 납부하는 제도였다. 그러므로 실제로 군사 훈련을 받는 군인은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왜란을 겪자, 정부는 임시 방편으로 훈련도감을 실시하여 용병을 모집하였다. 그 결과 번상병이 직업군으로 대체되면서 농병 일치제는 무너지고 용병제가 도입되었다. 둘째, 5군영의 성립으로 국왕의 군사 지휘권과 왕권이 약화되었으며 반대로 양반들, 특히 서인들의 정치 권력이 강화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국왕이 삼군부를 통해 5위에 대한 지휘권을 장악했으나 조선 후기에는 서인들이 5군영을 장악했기 때문에 국왕의 군사 지휘권이 약화되었던 것이다. 서인들은 어영청, 총융청, 수어청을 설치하여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한 군사적 기반으로 삼았다. 후에 정조가 장용영을 설치하고 대원군이 삼군부를 부활시킨 것은 국왕의 군사 지위권을 강화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기 위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