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순진리회 회보 93호
마속(馬謖) 글 교무부
“… 마속(馬謖)은 공명(孔明)의 친우로되 처사를 잘못 하므로써 공명이 휘루참지(揮淚斬之)하였으니 삼가 할 지어다”(권지 2장 38절)
마속(馬謖 : 190~228)은 중국 삼국(三國 : 魏·蜀·吳)시대 촉(蜀)나라의 무장(武將)이다. 자(字)는 유상(幼常) 양양(襄陽) 의성현(宜城縣 : 중국 중앙부에 있는 호북성 일대로, 양쯔강 중류에 위치) 사람으로, 우리에게는 ‘읍참마속(泣斬馬謖)’의 당사자로 잘 알려져 있다.
『삼국지(三國志)』01 「마량전(馬良傳)」에 따르면, 그의 형제는 모두 다섯 명이었는데, 모두 무술(武術)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계략에도 능했다고 한다. 특히 마속은 다른 형제들에 비해 다양한 병법서(兵法書)를 습득하여, 전략과 전술이 출중하였다. 그러한 그가 유비(劉備 : 161∼223) 진영에 처음부터 합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맏형 마량(馬良 : 187∼222)의 후광이 컸기 때문이다.
마량은 마을에서 ‘마(馬)씨 오형제 중 백미(白眉 : 마량을 가리킴. 그의 눈썹이 남달리 흰색이여서 붙여진 별칭)가 단연 으뜸이다(馬氏五常, 白眉最良)’라는 민요가 불릴 정도로 높이 칭송을 받던 인물이었다. 마침 촉의 유비는 적벽대전(赤壁大戰)02을 승리로 소실된 병력 충원과 이 일대의 민심 평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야 했다. 이 시기에 한 군신의 천거로 마량이 등용되었던 것이다. 마량은 등용되면서도 병법에 능한 동생 마속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았다.
마속은 맏형의 도움으로 촉(蜀)에서, 면죽현령(竹縣令)과 성도현령(成都縣令) 그리고 월수군태수(越郡太守)를 두루 거치게 되었다. 그러나 든든한 후원자였던 형 마량은 애석하게도 이릉대전(夷陵大戰)03에서 전사하고 만다. 이를 누구보다 슬퍼한 사람은 제갈량(諸葛亮 : 181∼234)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호형호제할 정도로 가까웠고, 신의(信義)가 두터웠다고 한다. 그래서 제갈량은 애도의 뜻으로, 마속을 직속 참모로 인사 조치를 단행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마속은 두각을 나타내었다. 『삼국지(三國志)』 「마량전(馬良傳)」에 ‘마속은 재능이 뛰어나고 군사 전략에 능했다.’, ‘승상 제갈량은 그를 깊이 신임하여, 두 사람은 철야로 정사를 나눌 때가 많았다’라는 기록이 그것이다. 실제로도 제갈량은 마속의 건의를 상당 부분 받아들여 실행에 옮겼다.
『삼국지(三國志)』 「양양기(襄陽記)」에 그 실례를 볼 수 있다. 촉(蜀) 건흥(建興) 3년(225) 제갈량이 남중을 정벌하기 위해 출병할 무렵, 마속이 수십 리를 따라와 전송을 하였다. 헤어질 때쯤 제갈량은 마속에게 “우리 둘이 비록 수년 동안 작전 계획을 짜왔으나, 나는 오늘 그대가 더 좋은 건의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네.”라고 말했다. 마속은 이에 바로 ‘16자 방침’이라는 병법을 내놓게 된다. 그것은 바로 ‘용병의 대원칙은 마음을 공격하는 것이 상책(上策)이고, 성(城)을 공격하는 것은 하책(下策)이다. 심리전을 하는 것이 상책이고, 군대로 싸우는 것은 하책이다’(夫用兵之道 攻心爲上 攻城爲下 心戰爲上 兵戰爲下)라는 것이었다. 제갈량은 그 책략을 받아들여, 남만의 명장 맹획(孟獲 : ?~?)을 얻게 되었다.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칠종칠금(七縱七擒 : 일곱 번 잡았다가 일곱 번 풀어준다는 뜻으로, 인내를 가지고 상대가 숙여 들어오기를 기다린다는 말)’이라는 말이 다름 아닌 이 전략에서 나왔다.
한편 위(魏)는 사마의(司馬懿 : 179~251)를 총사령관으로 하여, 장합(張 : ?~231)을 선봉장에 세워 촉(蜀)으로 감행을 하였다. 이 정보를 접한 제갈량은 양군의 전초전이 가정(街亭 : 감숙성 장랑현)에서 맞붙을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가정은 전략상의 요충지이며, 군량미의 집결지이기도 했다. 그런 점들로 인해 제갈량은 먼저 점거하는 쪽이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았다. 그래서 신속하게 그 중책을 맡을 적임자를 물색하던 중, 참모인 마속이 자청(自請) 하였다.
여러 장수들은 난색을 보였다. 지금껏 병법의 이론은 많이 접했지만, 실전 전투경험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생전에 유비가 제갈량에게 “마속은 허풍이 심합니다. 중용할 수 없는 인물입니다. 승상은 그를 잘 살피도록 하십시오!”라고 특별한 충고가 마음 한편으로 걸렸다. 하지만 앞서 느낀 재능과 다량의 병서 습득을 인정하여, 반대를 무릅쓰고 마속을 총사령관에 발탁한다. 그리고 유사시에 대비하여 실전 경험이 많은 왕평(王平 : ?∼?)을 부장으로, 조운(趙雲 : ?∼?)은 지원군을 맡게 하였다. 곧바로 제갈량은 가정의 지형을 설명하며 두 가지의 작전을 지시했다. 첫째, 적을 섬멸하기 보다는 가정 산자락에 가도(假道 : 다른 나라로 가기 위하여 만든 임시 길)를 따라 포진하여, 적병 한 사람도 넘어 오지 못하게 하라. 둘째, 산 밑에 진지를 구축하여, 이곳을 사수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속이 가정에 도착해서 보니 제갈량의 명령은 오판이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지나가는 이들이 한 눈에 식별이 가능했으며, 길이 좁고 매복을 해도 들킬 염려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제갈량의 지시를 잊어버리고, 기어이 산 위에 진을 치고 말았다. 이 사실을 안 왕평은 극구 만류했으나, 이미 마속의 마음은 정해진 상태였다. 반면 이러한 지형적 특색을 위(魏)에서도 모를 리가 없었다. 오히려 산 정상에 구축된 촉(蜀) 진지를 겹겹이 포위하여, 식수를 구할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견디다 못한 마속이 뚫고 나가려 했지만, 장합의 가세로 더 궁지에 몰려 끝내 참패하고 말았다. 구사일생으로 돌아온 마속은 군법에 따라 가정전투의 패배를 문책을 받게 되었다. 『삼국지(三國志)』 「마량전(馬良傳)」에 따르면, 문책을 받는 동안 마속은 군율을 어김과 자신의 오만함을 참회하는 편지를 제갈량에게 보냈다고 한다.
“승상(제갈량)께서는 저 마속을 친아들처럼 대했습니다. 저 마속 역시 승상을 마치 아버지를 존경하는 것처럼 여겼습니다. 그래서 만약 명공께서 치수에 힘을 쓰지 않은 곤(鯤)을 대순(大舜)이 처벌한 것처럼 저를 벌하신다면 저는 우리의 부자지간과도 같은 은혜의 정을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저 마속은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마침내 제갈량은 군법회의에서 마속을 법에 따라 사형을 선고하였다. 이와 같은 선고에 몇몇 장수들이 군(軍) 사기저하를 우려하여 선고를 취소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또한 장완(蔣琬 : 188~245)은 병력 손실이 큰 상황에서 그런 결정을 왜 내릴 수밖에 없는지를 제갈량에게 질문을 하였다. 그러자 제갈량은 “손무(孫武)가 천하무적이 된 까닭은 그가 법을 엄하고 분명하게 집행했기 때문이다. 현재 천하는 사분오열돼 있어, 전쟁이 언제 끝날지 아무도 모른다. 만약 기율과 법을 준수하지 못하고 명령과 금지 사항마저 지켜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에 의지해 적을 이기겠는가?”라고 단언하였다. 잠시 후 제갈량은 눈물이 가득 고인 채 마속을 참하였다. 이렇게 마속은 대사(大事)에 임하는 마음자세를 가벼이 여기고, 지나친 자신감으로 인해 39세라는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게 된다.
◈ 참고문헌 『二十五史』 「陳修 三國志」 이중톈의 著 홍순도 譯, 『삼국지 강의』, 김영사, 2007 서전무 著 정원기·최계량 譯, 『삼국지 상식 백가지』, (주)현암사, 2005
01 여기서 『삼국지(三國志)』는 진수(陳壽 : 233∼297)가 나라의 명을 받고 찬술한 정식 역사서를 가리킨다. 그래서 제목 앞에 ‘정사(正史)’라는 관형사를 흔히 붙여 부르기도 한다. 총 65권이며, 인물의 전기 위주로 역사를 기술하는 기전체(紀傳體) 방식이다. 또한 나관중(羅貫中)이 쓴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와 혼선을 빚기도 하는데, 이 책은 소설이지 정사가 아니다.
02 『삼국지』의 3대 대전의 하나로, 208년 중국 후한(後漢) 말기에 조조가 손권·유비 연합군과 싸웠던 전투이다. 원소(袁紹)를 무찌르고 화북(華北)을 평정한 조조는 중국을 통일하려고 약 18만 대군을 이끌고 남하, 적벽에서 손권·유비 연합군과 대치하였다. 그러나 손권의 장수 황개(黃蓋)가 화공(火攻) 계략을 세워 전선(戰船)이 불타는 대패를 당하고 화북으로 후퇴했다. 이 결과 손권의 강남 지배가 확정되고 유비도 형주(荊州:湖南省) 서부에 세력을 얻어 천하 3분의 형세가 확정되었다.
03 『삼국지』의 3대 대전의 하나로, 222년 촉나라의 유비가 군사를 이끌고 관우와 장비의 원수를 갚기 위해 손권의 오나라를 침공한 전투이다. 초기에는 승리했으나, 육손의 계략으로 대패해 많은 인재들을 잃었다.
출처:대순진리회 여주본부도장 홈페이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