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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네가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시작하여 우뚝 서기를 바란다. - 김용택님의 '아들 마음 아버지 마음' 중에서 - |
이제 그만 나의 눈물 보따리를 꼭꼭 묶어야겠다.
♣ 나의 오아시스, 친구들.
그렇게 힘든 날들이 하루, 이틀, 삼일 그리고 한달, 그리고 다섯 달이 훌-쩍 지나갔다.
참으로 많은 눈물을 흘렸고 그러면서 내적으로도 많이 성숙해진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믿었다. 눈물과 고통을 먹은 만큼 나의 생각주머니도 많이 커졌을 것이라고.
그 힘들었던 호스트가족과의 초기 시절, 힘든 심신을 위로해 줄 다른 안식처를 찾아야했다.
나의 황폐한 사막같은 호스트 집에 비해 학교는 나의 오아시스같은 매체였고, 그 오아시스를 찾기 위해 나의 낙타와 동반자가 되어 주었던 것은 친구이다.
그 많은 친구 중에서 친형제처럼 나의 희노애락을 함께 했던 친구들은 바로 Virginia Blosom(버지니아)와 Stoney Wilson(스토니)였다.
버지니아는 지금 나와 같은 학교(Humboldt Senior High School)에 다니지 않지만 아직까지 그녀와 전화를 통해 소식을 주고받는다.
그녀는 나의 눈물을 본 첫 미국 친구였다 . 내가 힘들 때마다 그녀는 내 곁에 항상 있어 주었고 나보다 큰 어깨와 가슴으로 나를 꼭 껴 앉아 주었다. 우리는 Sisters(자매)였다.
우린 언제나 함께였고 그녀의 Spirit(영혼)의 한 조각이라고 지칭한 그녀의 favorite 책인 'A Girl Named Digaster' 이라는 책을 나에게 선물로 주었다. 그녀의 영혼이 담긴 책이 나에게 있으므로 한국에 가서도 그녀와 함께 언제나 같이 있는 셈이 되는 것이다.
그녀가 있었기에, 그녀가 나를 꼭 껴안아 줄 수 있었기에, 나의 마음은 봄날처럼 따뜻할 수 있었던 것 같다 .
오늘도 그녀의 따뜻한 온기가 느껴진다.
Stoney(스토니)는 이름부터 특별하다. Stone은 우리말로 '돌'을 뜻한다. 하지만 그는 돌처럼 차갑지 않고 정말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그의 이름처럼 나에게 정말 특별한 존재이다 .
스토니는 내가 bro'(brother의 줄임말 ) 또는 Mr.Wilson(내가 지은 그의 별명) 이젠 모든 친구들이 그를 Mr. Wilson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brothers(형제)이다. 스토니는 나를 sis’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형제인 셈이 되는 것이다.
스토니는 남미 국가 중 하나인 Nicaragua에서 5년 전에 아빠와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인물도 훨친하고 몸짱에다가 성격도 정말 시원시원해서 우리학교 뿐만 아니라 다른 학교의 많은 여자들이 그를 좋아한다. 스토니는 학교에서 인기가 정말 많다 . 그의 인기 관리는 어디에서나 찾아 볼 수 있지만 그 속에서도 그는 나를 정말 많이 챙겨주었다.
학교에서 친구들이 마약을 해봤냐고, 해본적이 있냐고 물을 때마다 내 앞에서 내 대답을 도와 준 친구가 바로 Stoney였다. 학교마다 한 두명씩 있을 Mean Girl이 나를 귀찮게 할 때도그때마다 그녀의 난데없고 쓸데없는 꼬투리를 잘라서 그녀의 말문을 막히게 했던 나의 흑기사도 바로 Stnoey였다.
스토니는 니카라과에 엄마를 남겨 둔 채 아빠와 함께 미국으로 이민와서 살고 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나의 마음을 잘 이해해 주는 친구였다. 정말 이곳에 와서 스토니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나와 같은 처지에 놓여있는 고참 선배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나의 고통의 시간은 더 길어졌을 것이고 암울했을 것이다.
그리고 또한 그 힘들었던 시간 뒤에 뒤늦게 찾아온 호스트가족과의 행복한 시간도 맛보지 못한 채 슬슬하게 지냈을 것이다.
그리고, 친절하고 다정했던 친구들.
처음 수영부에 입교하던 날, 낯선 분위기와 낯선 얼굴에 익숙하지 않은 나에게 다가와 친절하게 대해 준 수영부 주장 Katie, 다이빙에 턴(turn)이 미숙한 나에게 웃음으로 다가와 친절하게 가르쳐 준 키다리 아가씨 케이티. 고된 훈련과 쫓기는 시간 속에서도 단합하여 수영대회에 참가했던 수영부팀 친구들.
이런 고마운 친구들이 옆에 있었기에 나는 Minnesota St.Paul Conference Junior Varsity 10위 안에 드는 자랑스러운 기록을 남겼고 학교대표로 Varsity 경기에 나가서는 나도 놀라고 수영 코치께서도 만족해하신 2개의 상장을 받았으며 그 상은 지금도 내 책상 위 벽에 자랑스럽게 나란히 매달려있다.
Band Concert를 위해 박치, 음치인 내가 새로운 음악을 접하면서 힘들어할 때 많이 시간을 쪼개어서 나의 연주를 도와주었던 밴드부 친구들.
째즈 피아노를 연주하고, Pep-band에선 normal하게 클라리넷을 연주할 수 있게 해 준 쎄라, David와 Jevis....
아름답고 좋은 추억을 담을 수 있게 해 준 고마운 밴드부 친구들.
아무런 댓가도 점수도 바라지 않는 Friendship Club 봉사활동 친구 에띠아, 마이촐, 파...
'진정한 봉사활동의 정신'을 배우고 경험하게 했던 순수한 Friendship Club 봉사활동 친구들.
남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기쁨과 행복을 맛보게 해 준 고마운 Friendship Club 봉사활동 친구들.
우리의 만남에는 눈물도 상처도 아픔도 없는 환희와 행복만이 있었습니다.
친구들아~ 정말 고마웠어, *^^* !
♣ 내가 선택한 외딴길- AP Classes
호스트가족과의 관계가 점점 좋아지고 있을 무렵.
1학기 모든 과목들을 All A+를 받아 나의 기분 상태는 말 그대로 하늘을 날고 있었고 이런 행복이 계속 될 줄 알고 더욱더 높은 하늘을 향해 쓩쓩 발돋움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발견한 것이 바로 AP Class였다. 1학기에는 생물과 밴드과목들을 제외한 모든 과목을 Regular Class를 들었었기에 호스트 가족과 영화구경에다 쇼핑에다, 친구들과 놀아가며 공부해도 항상 A+를 받을 수 있었다.
어느 교환학생 선배의 통신원글을 통해서 너무 쉬운 길을 택하지 말고, 어려운 과목을 택해서 공부하라는 충고가 생각났다.
AP course나 Honors course반의 분위기와 수업 태도는 일반반과는 사뭇 다르고,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매력에 관심이 갔다.
그래서 호스트 가족도, 친구들도 모두 어렵다고 포기하라는 AP 과목을 과감하게 도전해 보고 싶었다.
모든 사람들이 말렸었다. 나의 결정을.
모두가 하나같이 AP 과목을 들으면 힘들거라고했다. 특히 영어가 제 2외국어인 나에게는 더욱더.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영어가 제 2외국어인 나, 한국인 김예슬은 AP과목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정규반과 다른 AP반만의 뭔가를 느끼고 싶었고 나는 서슴없이 카운슬러에게로 발길을 돌렸다. 얼굴에 하회탈 같은 큰 미소를 짓고 씩씩하게 걸어갔다.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장군처럼.
AP과목이라는 것이 얼마나 힘들면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절래절래하는지 알고 싶었다. 나는 긴장이 되었고 또한 나의 환희에 찬 흥분은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아니, 가라앉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 또 다른 모험에 뛰어든 것 같은 기분이었으므로. 나는 도전하고 싶었다. 이것이 후에 나를 외딴길로 몰았던 주된 이유였다. 도전심이 강한 나의 이 성격, 이것이 바로 나의 또 다른 장애물의 발판이였다. 이 선택으로 인해 내가 겪게 되는 고통과 서러움이 얼마나 큰지 상상도 하지 않은 채 나는 엄청한 선택을 했던 것이다.
♣ 'N(낙제)'이라는 충격과 다시 찾아온 눈물
나는 모든 과목에서 A+를 받는 그야말로 미국 선생님들과 학생들의 칭찬에 칭찬을 받던 'A+ 모범생'이였다.
그렇게 나는 나의 자랑스러운 성적표를 가슴에 담고 AP수업을 들었다. English 11 AP 수업은 문학을 좋아하는 나였기에 손쉽게 따라갈 수 있었고 더욱이 선생님의 따뜻한 가르침이 나의 성적 A를 유지시켜 주었다.
Analysis AP와 Algebra 2 Pre-AP는 미네소타 고등학교 수학경시대회에서 상을 받을 만큼 수학에 관심이 많았던 나에게는 꽤 쉬운 과목이였다. 난 수학시험에서 만큼은 줄곧 백점을 맞아가며 성적A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Korean Math Crazy Girl, Yei ser(수학에 미친 한국 소녀, 예슬)' 이라는 별명도 친구들이 지어줬을 만큼 미국에서는 나의 수학실력에 날개를 펼칠 수 있었다.
이 부분에서 한국의 동생이 피식 웃을 것 같다.
왜냐하면 한국에서는 수학을 썩 잘하는 편이 아니었다. 한국 수학 시험과 미국 수학 시험을 비교해 보면 한국 시험은 어떻게 하면 학생들이 오답을 쓸까? 를 연구하면서 문제를 출제하고 미국은 어떻게 하면 학생들이 원리를 이해하고 자기의 능력을 충분히 발취하여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을까? 를 염두에 두고 선생님들이 문제를 출제하는 것 같다.
미국 수학 시험 출제 경향은 나의 공부 스타일에 딱~ 맞는 교육 시스템이다.
Biology Pre-AP는 아주 까다로웠고 숙제도 엄청 많았지만 생물공부에 흥미를 가지며 열심히 공부했고 Mrs. Penning의 교직 생활 20년 중 A+를 받은 3번째 학생이 된 영광을 누렸다.
그녀는 나의 퍼센트가 100%를 넘어도 나에게 A+를 주시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으셨다. 그녀는 내가 내 주위 친구들의 성적을 올리기를 원하셨다. 나는 그 전부터 나의 생물 친구들을 많이 도와주었고 생물 선생님이신 Mrs. Penning께서 저에게 왜 A+를 주지 않으셨는지 그 이유를 알고 난 후, 더 적극적으로 친구들에게 생물을 가르쳐 주었다. 친구들에게 생물을 완벽하게 가르쳐 주기 위해 밤마다 생물 책을 한번씩 읽어보며 혼자 공부하는 시간을 늘렸다.
영어가 제 2외국어인 나에게는 생물 용어는 정말 어려웠고 생물은 중간중간에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물을 독하게 공부하다 보니 생물을 공부함으로써 얻는 즐거움은 날로 커져만 갔고 "진로를 변경하여 의대를 갈까?" 라는 생각도 잠시하였다. 그리고 2학기가 끝나고 나는 Mrs. Penning에게서 Exllence in Science 상장을 받았고 A+라는 성적으로 Biology Pre-AP과목을 깔끔하게 정리하였다.
열심히 공부한 생물 공부는 나의 성적에도 영향을 미쳤지만, 학습이 뒤쳐진 아이들을 도와주면서 그들과 더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하지만 U.S History AP는 다른 과목보다 훨씬 어려웠고 요구하는 것도 다양했으며 외워야하는 양도 방대했다. 나의 새로운 U.S History AP 선생님이신 Miss Binko께서는 학교에서 악명 높기로 소문이 난 선생님이셨다. 그녀가 나에게 내 주신 첫 번째 과제는 Chapter 1에서 21까지 모두 읽고 공부하라는 것. 약 500쪽이나 되는 교과서(백과사전 두께 정도)를 읽고 공부하라는 것이였다. 기가 막히었지만 그게 내 과제이니, 내가 선택한 길이니 어찌하랴.
학생으로서 해야 하는 '숙제'인 만큼 최선을 다하여 공부를 하였다. 그리고 나는 이때까지 시험을 치면 항상 한 두개를 틀렸던 내 자신을 정말 굳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U.S History AP 시험은 문자 그대로 장.난.아니게 어려웠다.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 보다 훨씬 어렵고 힘들었다. 내 성적은 기가 막히게 땅을 기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땅속 깊이 숨기고 싶은 점수였다. 첫 시험에서 90문제 중 18개를 맞은 것이다. 차가운 눈빛과 함께 Miss Binko께서 나에게 주신 것은 결코 자랑스럽지 않은 시험지였다. 그리고 시험지 뒤에는 나의 성적표가 있었다. 나의 첫 Current Report에 적혀 질 그 성적을 보았다. N- 낙제였다.
잠시 충격을 받았고 정말 이 성적표가, 이 시험지가 내 것이 맞는지 확인해 보았다. 2번 3번 100번을 뚫어져라 봐도 시험지 오른쪽 상단에 적혀진 이름은 Yei ser Kim이였다.
바로 내 이름이였다. 엄마가 '예쁘고 슬기롭게' 자라라고 지어주신 이름.
이 순간만은 예쁘고 자랑스러운 이름이 아니었다. 만화에서만 보던 사람이 천둥을 맞는 기분 그때 느꼈다. 뒤통수를 맞는 느낌이었고 너무나도 당황스러워서 말문이 터지지가 않았다. 뭐라고 말을 하고 싶은데, 이건 분명 내 성적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은데 입술이 떼어지지가 않았다. 미칠 것만 같았다.
친구들의 격려의 말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것도 듣기 싫었고 아무와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그 현실 자체를 믿고 싶지 않았다.
잠을 설쳐가면서 노력한 댓가가 겨우 '낙제' 라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는 이제껏 한번도 , 단 한번도 A- 또는 B의 성적을 받아 본 적이 없다. 내 성적은 항상 최상위인 A 또는 A+였다.
U.S History AP시간이 끝나고 곧장 화장실로 달려갔다. 눈물이 났다. 내 자신이 창피했고 싫었다.
'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이제까지 이 말을 줄곧 믿고 있었다.
나는 많은 노력을 했지만 나의 성적은 결코 자랑스럽지 않았다.
' 내가 정말 이것 밖에 되지 않는가?' '괜히 어려운 AP반을 선택했나?' 후회가 되었다.
그리고 낭떠러지에 떨러진 나의 AP점수보다도 화장실에 쳐 박혀 울고 있는 내 자신이 더욱더 한심스러웠다. 매일 조금씩 시간을 쪼개어 역사공부를 하였고, 잠자는 시간도 아깝고 점심 먹는 시간도 아까워서 점심시간에 혼자 반에 남아서 공부한 나였는데… 코안이 헐어서 코피 흘려가며 공부한 나였는데…
한국에서도 이처럼 코피 흘려가면 열심히 공부한 경험이 없었는데.
나는 그렇게 내 자신을 뒤돌아보며 점심을 눈물로 먹었다.
점심시간 마침 종이 울리고 4교시 수업에 들어갔다.
' 이것은 시작일 뿐이다. 어려운 줄 알면서도 내가 선택한 길이다. 울지마라. 다시 일어서라. 그리고 다시 부딪쳐라.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내가 누구인가, 자랑스런 한국인, 김예슬이다.' 굳은 다짐과 함께.....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나의 정신력으로, 그리고 할 수 있다는 나의 마음가짐으로 내 자신을 다시 타일렀다.
"고통에서도 피하지 말라. 고통의 밑바닥이 얼마나 감미로운가를 맛보라." 헤세의 말처럼 나는 고통의 밑바닥의 그 감미로움을 새로운 접근 방법을 통해 찾고자 하였다.
새롭게 US History AP과목에 접근 방법을 구하기 위해 친구들의 조언도 받을려고 노력했지만 헛수고였다.
나의 가려운 부분을 시원하게 해 줄 수 친구는 없었다.
그래서 학생들의 질문에 대답 잘 안해 주기로 소문난 Miss Binko께 용기를 내어 찾아갔다. 선생님의 쌀쌀맞은 조언을 들어가며 에세이 쓰는 양식부터 바꾸어 나갔다. 내 글의 스타일을 바꾸는데에 걸린 시간은 엄청났고 거기에 투자한 시간도 대단했지만 그녀가 원하는 스타일의 에세이에 나만의 에세이 장점을 첨가해 선생님께서 말하시는 완벽에 가까운 수준의 역사 에세이를 쓸 수 있게 되었다. 완벽에 가까운 수준의 역사 에세이- 이것이 바로 나의 역사 성적을 점차 올려주게 되는 발판이 되었다. 선생님께서 요구하시는 프로젝트도 점차 나아졌고 마침내 선생님께서 가장 만족해하시는 프로젝트를 작성해 갔을 때부터 나의 성적은 이미 A+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런 후, US History AP Current Report에서 A+라는 가장 높은 성적을 받았고, 영광스러운 The most improved student in Social Studies 상을 받았다. 그래도 나는 자만하지 않았다.
항상 마음속으로 엄마가 해 주신 말을 기억했다.
"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도 있고, 해가 쨍쨍 비추더라도 기뻐하지 말아라. 곧 비가 올 것이니깐."
그래서 2학기 final에서도 AP역사 반에서 유일하게 A+를 받는 영광을 누렸고, 지금 마지막 학기인 3학기에서도 A+를 받는 소수의 학생 중 한명의 자리에 앉아있다.
제 자신도 놀라 자빠지는 줄 알았던 점수, 100% 이면 A인데 나는 17x.x % 받았다.
뿐만 아니라, 어렵고 힘든 Presidential View 프로젝트에서 400점 만점에 1050점을 획득했다.
지금 나의 G.P.A 는 4.60 이다.
다른 학교와는 달리 우리 학교는 Pre-AP과목이라고 해서 더 높은 크리딧을 주지 않고 그냥 정규반하고 똑같은 크리딧을 주기 때문에 Pre-AP과목을 수강하는 나로서는 약간의 아쉬움도 있는 점수이다.
물론 이렇게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은 친구들의 도움 뿐만아니라, 선생님들의 친절한 가르침과 세심한 배려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뒤늦게 들어간 수학반에서 수학경시팀에 나를 추천하여 좋은 경험과 우수한 성적을 얻을 수 있도록 지도해 주신 열정적인 수학 선생님.
전자사전을 잃어버려, 두꺼운 사전을 들고 다니는 내가 안스러워 좋은 영영전자사전을 선물해 주시며 더 열심히 공부할 것을 당부해 주신 사려 깊으신 영어 선생님.
2학기 과목 변경으로 프랑스어를 선택할 수 없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시며, 방과 후 개별로 남아 가르쳐주신 자상하신 프랑스어 선생님.
그리고 선생님들.....
선생님~! 감사합니다.
Ourage is very important. Like a muscle, it is strengthened by use. 용기는 대단히 중요하다. 용기는 근육과 같이 사용함으로써 강해진다. |
♣ 인생의 3번의 기회 중 하나였던 '교환학생'
사람은 인생에 3번의 큰 기회가 온다고 한다. 나는 그 큰 기회 중 하나가 바로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참가한 일
이라고 생각한다.
2달 후면 교환학생이라는 꼬리표가 떨어지겠지만, 교환학생이 되어서 배웠던 나의 천금같은 경험과 추억, 그리고 나의 내적 성숙은 내 가슴속에 절대로 버려지지 않고 평생 나와 함께 할 것이다.
교환학생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호스트 가족과의 생활이였을 것이다.
호스트맘과 맞지 않은 생활코드 때문에 정말 많이 힘들었다. 정말 많은 고통을 느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 고통을 참고 이겨 지금의 내가 있다는 것을.
이제는 호스트맘의 마음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다.
왜 그렇게 호스트맘이 유독 언니에게 집착하고 나에게 냉담하셨는지를.
어느 날, 2층 내 방에서 학교 숙제를 하고 있는데,
" ...... 너, 이번에도 또 감옥에 가고 싶어....." 괴성과 함께 흐느끼는 호스트맘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맹이 아이의 찢어질듯한 울음소리도 들려왔다.
호스트 오빠가 동거중인 언니와 1차 대전을 끝내고, 딸을 데리고 와서 호스트맘과 2차 대전을 벌리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이 집에 오기 전에 호스트 아빠와 오빠의 싸움으로 인해 호스트 오빠가 감옥생활을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말썽많고 문제거리인 세 아들과는 달리 언니는 착하고 온순하며 호스트집의 보물이었다.
그래서 호스트맘은 언니에게 유달리 관심이 많았고, 애정을 솟았던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온 이방인 동생이 언니보다 키도 크고, 체격도 좋고, 성적도 우수하고, 붙임성도 끝내주고.....
이런 점이 호스트맘에게는 눈의 가시였던 것이다.
그래서 내가 교회 봉사활동 하는 것을 싫어했고, 교회 성가대에서 클라리넷 연주하는 것을 반대하셨던 것이다.
오직 언니만이 우리집의 빛이요 영광이요 보물이기 때문에 언니만 사람들 앞에 자랑하고 내세우고 싶으셨던 것이다.
이 대전 이후로 나는 언니와 더욱더 친해졌고, 호스트맘의 마음을 조금 더 많이 이해하기로 다짐했다.
마음이 훨씬 가벼워졌고, 편했다.
호스트맘의 아픈 상처를 미리 알았더라면, 내 마음도 이렇게 상처 받지 않았을 텐데.
' 인간의 성격은 편안한 생활 속에서는 발전 할 수 없다'는 것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나는 내 자신이 너무 대견하고 자랑스럽다.
나의 힘든 호스트 생활을 지켜보던 주위의 친구들과 이웃에서 나의 호스트 하기를 자청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내가 가야할 세상은 이보다 더 힘들고 더 높은 벽으로 둘러 쌓여있기 때문에 이 벽을 넘지 못하고 호스트를 바꾸고 싶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이 결정이 나의 앞날에 밑거름이 될 것이다.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느낄 그 소중한 삶의 진리와 진실을 나는 조금씩 깨달아 가고 있다.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공부하면서 외국에서 공부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줄 깨달았다.
미국 오기 전 한국을 떠나면 정말 열심히 공부하면 뭔가가 이루어 질 것만 같았다.
미국에 오면 시험에서 해방되고, 숙제에서 자유로울 줄 알았다. 공부하기가 한국보다 훨씬 쉽다고 생각했다.
그건 나의 오산이었고 착각이였다.
세상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가장 낮은 점수인 D도 아닌 N을 받음으로써 항상 높은 자리에서도 고개를 숙일 수 있는 겸손함을 배웠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했던가. 나는 그 '벼'의 겸손함을 배운 것이다. 그 덕분에 N을 받고 있는 친구들을 절대 무시할 수 없고 그들을 도와주면서 옛날의 나 자신을 생각할 수 있는 작은 미덕을 배웠다. 내가 아무리 잘났어도, 모든 친구들이 나를 GENIUS(천재)라고 불러도 나는 자만하지 않았다. 언젠가 다시 나의 큰 코를 정말 큰 코를 다칠 날이 올 것을 나는 알고 있으므로.....
'태양을 바라보고 살아라. 너의 그림자를 못 보리라.' - 헬렌켈러 -
덩치는 산만하면서 최후에 결정조차 못내렸던 내가 이젠 혼자서 내 결정에 만족감을 느끼고 반성을 하면서 또 다른 무언가를 느끼는 결단력도 길렀다. 무엇보다도 내 결정에 후회하지 않는 그 결단력을 길렀다는 점에 내 자신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
내 돈을 내 스스로 관리함으로써 난 생활력도 길렀다. 돈을 쓰고 싶은데로 쓰면 꼭 필요한 시점에서 남에게 구걸해야 한다는 것도 알았으며 돈이 넘쳐날 때는 나의 가족과 주위 사람들에게 선물 하나 사 줄 수 있는 관용과 여유로움이 생긴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 다이아몬드가 가공 대상이 되는 이유는 다이아몬드이기 때문이다. 단순한 돌멩이라면 아무도 가공하려 하지 않는다.' - 가토 다이조의《열등감을 자신감으로 바꾸는 심리학》중에서 - |
그렇습니다.
누구나 자기 안에 다이아몬드가 있습니다.
채 발견하지 못했거나 가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도 빛을 내지 못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스스로 돌멩이라 생각하면 내 안에 숨겨진 보석도 끝내 빛을 보지 못합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다이아몬드를 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비록 그 것이 돌멩이라면 갈고 닦아서 다이아몬드로 바꾸어 빛을 발할 수 있는 사람이 됩시다.
내가 가장 깊게 배운 것이 있다면 바로 '가족의 소중함'이다. 가족과 떨어져 살면서 정말 많은 내적 성장을 하면서 가족의 중요성과 소중함을 절실히 깨달았다.
내가 필요할 때 항상 내 곁에 있어 주셨던 어머니.
내가 큰 잘못을 저질렀을 땐 매로써 나 자신을 반성하게 만들어 주셨던 어머니.
내가 책을 읽기 싫어할 때 거실에서 책을 읽으시면서 나에게 독서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깨닫게 해 주신 어머니.
내가 진로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을 때 나에게 맞는 직업을 찾아주셨던 나의 훌륭하신 아버지
내가 방황의 길을 걷고 있을 때 항상 격려의 편지를 써 주시며 나의 눈시울을 적히게 하셨던 나의 자상하신 아버지.
내가 변덕을 부릴 때 테니스를 통해 나에게 집념과 끈기를 가르쳐 주셨던 나의 자랑스러운 아버지.
미국에서 내가 정말 힘들 때마다 편지로 나를 감싸주시고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던 어머니와 미국에와서 나에게 좋은 조언과 충고를 주신 아버지께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나를 대신해서 나의 빈자리를 채워준 나의 의젓한 동생 민동이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 잔소리꾼 시어머니'없다고 좋아할 동생에게 미안한 마음도 함께 보낸다.
한국에서 내가 한국 음식 먹고 싶지 않을까 항상 마음 졸여하시는 할머니, 할아버지, 나를 항상 응원해 주신 삼촌, 숙모, 내 사촌 동생 연아, 외할머니, 외삼촌, 외숙모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그리고 나를 키워준 8할의 뿌리가 된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운영해 주신 한겨레교육과 미래 모든 가족분께도 큰 감사의 말씀을 전해드리고 싶다 .
또 잊을 수 없는 분들, 나의 통신원글에 항상 잊지 않고 댓글로 칭찬과 위로와 격려, 충고를 보내주신 나의 팬 여러분께 고개 숙여 큰 감사의 절을 올린다.
이제 Minnesota에 머물 시간도 얼마남지 않았다.
정말 눈 깜빡 할 사이에 지나간 나의 8개월이라는 미국생활, 이제 남은 시간도 최고의 최선을 다하는 생활을 할 것이다.
' 시간은 흐르는 물과 같다'는 말이 요즘 들어 절실히 실감한다.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통해 배우고 얻은 것이 많다.
내 안에 숨어있는 잠재력과 무한한 가능성을 키웠고, 스스로를 콘트롤하여 더욱더 생산적이며 창조적인 방법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알았다.
무엇보다도 '새로운 가족'을 하나 더 얻었다는 사랑의 기쁨은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
나를 기억하고 계시는 분들의 기대에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 오늘도 성실의 땀을 흘리고 있다.
나는 내 자신을 굳게 믿는다.
최악의 호스트생활을 지금의 행복한 호스트생활로 변화시켰고, N이라는 바닥의 성적에서 A+라는 최상의 성적을 얻었던 것처럼, 끊임없이 노력하는 나에게 무지개가 찾아 올 것이라는 것을 굳게 믿는다.
그 무지개를 위하여 나는 지금 가치있는 새로운 과제에 도전장을 던졌다.
도전장은 5월에 있는 US HISTORY AP EXAM과 영어 AP EXAM 이다.
3일 동안 치르게 되는 미역사 시험과 영어시험은 나를 더욱더 긴장시키고 활기차게 만든다.
영어시험은 이틀동안 언어영역 AP Exam, 영어 문학영역 AP Exam을 치르게 된다.
이 AP시험에 합격하면 College Credit따면 대학에 가서 영어과 역사과목을 이수하지 않아도 되고, 그 시간에 다른 elective courses(선택 과목)을 들을 수 있도 있어서 시간과 노력과 경제면에서 많은 혜택이 뒤따른다.
이런 이유보다도 나의 능력과 잠재력을 테스트해 보기위해 어렵고 힘든 AP EXAM에 도전장을 던졌다.
물론 합격하면 좋겠지만, 불합격하더라도 나는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을 것이다.
나를 믿고 AP EXAM을 추천해 주신 선생님과 나를 믿고 응원해 주는 친구들이 있기 때문에 오늘도 잠과 싸우면서 책상에 앞에 있어도 행복하다.
요즘 학교대표로 track부에서 얼굴이 까맣도록 고된 훈련을 하고 있다.
그러나 나의 미래와 마음은 하얀 목련처럼 환하고 밝은 웃음으로 피어날 것이다.
예비 교환학생 여러분!
교환학생을 계획하고 있는 후배 여러분!
가슴을 열고, 넓은 눈을 가집시오.
우리는 아직 '젊음'이 있기에, 무한한 가능성이 있기에 새로운 세계에 도전장을 던져보십시오.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마십시오.
편안하고 쉬운 길보다는 남들이 가기 싫어하는 외롭고 좁은 길을 가십시오
여러분 속에 꼭꼭 숨겨진 다이아몬드가 제 빛을 찾아 아름다움과 희망을 낳을 것입니다.
나는 내일도 내 꿈을 향하여 힘차게 전진 할 것이다. 이 세상은 내가 도전하고 싸워 볼 만한 가치가 있기에.
마지막으로 부족한 이 글이 후배 여러분들의 눈물과 아픔과 한숨을 덜어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지금의 내가 있게 날 키워준 '교환학생'프로그램에 감사하며, 나를 Mentor로 생각하여 나에게 도움의 손을 내미는 후배들에게, 먼저 배우고 느낀 지혜와 경험을 전해주고 싶다.
내가 받은 많은 사랑과 은총을 다른 사람에게도 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겨 너무 행복하다.
혹, 더 알고 싶은 내용이 있으시면 한겨레 통신원글 12기 김 예슬편 을 참고하시고,
더 의논 할 내용이 있으시면 ddalgi0504@hotmail.com로 노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