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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빚을 갚는 삶 (롬 13:8-10)
사랑의 빚진 자임을 알라
매년 6월 6일은 현충일(顯忠日)입니다.
현충일의 한자어가 궁금해서 찾아보니, '현(顯)'자는 '나타내다, 드러내다'란 의미였습니다.
그러니까 현충일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자들의 충성을 나타내고 드러내는 날'이란 뜻이었습니다.
나라를 위해서 순국한 이들의 죽음을 드러내고, 그들의 충성을 나타내자는 겁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많지만,
무엇보다 살아 있는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순국한 자들의 죽음입니다.
그 죽음 속에 담긴 나라사랑과 희생입니다.
미국도 매년 5월 마지막 주 월요일을 메모리얼 데이(Memorial Day)로 지킵니다.
원래 남북전쟁에서 전사한 사람들의 추도하면서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전쟁과 군사작전에서 사망한 모든 사람을 기리는 날로 바뀌었습니다.
매년 왜 이들의 죽음을 드러내고 또 기억해야 합니까?
그들의 용기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들의 장열한 죽음을 기억하기 위해서?
그들을 죽음을 다시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오늘 산 자들의 삶이 과거 그들의 희생과 그들의 죽음에 빚을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그들에게 진 빚을 기억할 때 오늘 우리가 바른 방향으로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진 빚이 많습니다.
오늘 우리가 대한민국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는 것은 6
0년 전 한국전쟁에서 순국한 이들의 희생의 죽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오늘의 자유는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들의 피의 대가로 쟁취된 것입니다.
지금 뭐니뭐니해도 우리나라만큼 민주화가 된 나라도 드뭅니다.
이렇게 민주화된 나라를 살 수 있는 것도 사실은 독재정권에 항거해서
고문을 당하고 목숨을 잃었던 사람들,
특별히 30년 전 5.18 광주항쟁에서 목숨을 잃었던 이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경제대국을 이루고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러한 오늘이 있습니까?
많은 노동자들이 산업전선에서
그들의 청춘을 산업근대화의 제단에 제물처럼 바친 과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오늘의 자유, 오늘의 민주, 오늘의 번영은 내가 이룬 것도 아니고,
우리 세대가 쟁취한 것도 아니고, 과거 그들의 희생과 죽음이 가져다 준 선물입니다.
과거 그들이 없었다면 오늘 우리는 없습니다. 죽은 그들이 없다면 오늘 산 자들이 없습니다.
오늘의 역사는 과거에 빚지고 있습니다.
잊혀진 이름
몇 년 전 동작동 국립묘지에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수많은 이름 모를 무덤들, 그 앞에 서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들은 조용히 누워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들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 그들에게 사랑의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동안 친일의 역사 속에서, 독재의 역사 속에서
독립투사들도 전쟁유공자들, 민주투사들이 하나 뿐인 목숨을 바쳤지만 많이 잊혀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산 자들의 그 의식 속에, 오늘의 역사 속에 드러내고 기억해야 합니다.
빚진 자의 마음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기억해야 할 사람들을 기억해야 역사가 바로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빚진 자의 마음으로
오늘 본문에서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롬 13:8)고 했습니다.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아무런 빚도 지지 말라는 뜻입니까? 아니면 사랑의 빚은 져도 된다, 많이 지라는 뜻입니까?
일차적으로는 이런 뜻입니다. 빚지지 말라는 겁니다.
빚진 적이 있는 사람은 빚지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압니다.
먼저 자신에게 힘듭니다. 갚기까지 계속 무거운 짐을 안고 사는 겁니다.
그리고 제대로 갚지 않으면 빌려준 남에게도 무거운 짐을 안기는 겁니다.
물론 현대 사회에서 돈을 전혀 빌리지 않고 사업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빚지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갚지 못할 빚을 지고 살지 말라는 겁니다.
그러나 본문의 보다 깊은 의미는 그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빚 외에 다른 빚은 지지 말라는 의미는 이런 뜻입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사랑의 빚은 지지 않고 살 수 없다는 겁니다.
산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리고 끊임없이 누군가로부터 사랑의 빚은 질 수 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빚진 자로 살지 않을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내가 지고 있는 사랑의 빚
앞에서 우리가 빚진 사람들을 잠시 생각했습니다만,
실로 우리는 모든 삶의 영역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모님들에게 갚을 수 없는 사랑의 빚을 지고 있지 않습니까!
또 그 동안 오늘의 내가 되어지기 위해
나를 가르쳐 온 모든 스승들에게 사랑의 빚을 지고 있지 않습니까!
나 한 사람이 예수 믿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위해 수고와 희생의 땀을 흘려야 했는지?
지금도 내 믿음이 이 자리에 있기까지 수고한 믿음의 선배들, 목회자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복음을 전해온 전도자들, 구역장들에게 빚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야 할 사랑의 빚이 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큰 사랑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바울 자싞은 무엇보다 이것을 잘 알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인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아무런 자격이 없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
이것은 아무리 갚으려고 해도 영원히 갚을 수 없는 엄청난 사랑의 빚을 진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는 핍박자였습니다. 스데반을 돌로 쳐죽이는 일에 가담했습니다.
그것이 부족해서 예수 믿는 사람을 조직적으로 잡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악한 일이었습니다.
남을 죽였던 그는 자신이 죽어 마땅했습니다.
그런 바울이 지금 살아 있으니 살아 있다는 것조차도 빚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사를 주셨습니다. 여러 신앙의 경험을 하게 하시고, 많은 이적을 행했습니다.
물론 핍박도 받고, 매도 맞았지만 그가 받은 은혜와 은사가 너무 많습니다.
내가 뭔데 나를 통해 이적이 나타나고, 내가 뭔데 나의 설교를 통해서 복음이 젂파되는 것입니까?
도대체 내가 뭔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나를 크게 써주시는 것입니까?
생각할수록 모든 것이 다 사랑의 빚입니다.
그래서 그는 나의 나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했습니다.
또 이방인 때문에 구원을 받았으니
복음을 전해야 할 이방인들에게도 사랑의 빚을 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서 매를 맞아 죽을 지경이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때 무슨 마음으로 찬송을 불렀을까요?
혹시라도 찬송 부르면 옥문이 열릴지도 몰라, 이런 생각에서 찬송을 부른 것은 아닙니다.
그때 바울이 어떤 마음으로 찬송했을까요?
이런 마음이었을 겁니다. 나는 죄인이요 남을 죽인 사람이니, 죽어 마땅한 사람이 아닌가!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고, 이제 복음을 전하게 되었고, 이제 순교자까지 되게 생겼구나!
이것 자체가 얼마나 귀하냐! 너무 사랑의 빚을 많이 졌다.
살려주시면 감사하고, 이대로 죽어도 감사할 뿐이다, 왜냐, 빚졌으니까!
빚진 자
바울만이 다른 사람에게, 그리고 하나님에게 크게 빚진 자가 아닙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태복음 18장 21절로 35절을 보면 빚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 말씀이 있죠.
1만 달란트 빚진 자가 채권자인 주인에게 불려왔습니다.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라도 빚을 갚으라는 영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갚을 능력이 없습니다. 참아달라고 사정을 합니다.
주인이 이를 보고 불쌍히 여겨서 아예 그 빚을 없었던 것으로 깨끗이 탕감해줍니다.
큰 빚을 연기해주는 것도 아닙니다.
일부나마 갚으라는 것도 아닙니다. 아예 없었던 것으로 깨끗이 탕감해줍니다.
당시 로마사람들의 경우에는 빚을 지면 갚아야 됩니다.
이자까지 합쳐서 일생을 두고라도 갚아야 합니다.
만일에 돈으로 못 갚으면 노동으로 갚아야 돼요. '하루에 얼마씩'이라 해서 몸으로 갚아야 합니다.
그것으로도 부족하면 일평생 노예가 되고 맙니다. 그래도 못 갚고 죽으면 그 자식도 노예가 됩니다.
자식 때에 가서라도 반드시 갚아야 됩니다. 갚기 전에는 절대로 자유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빚입니다.
이 비유가 말하는 것이 뭡니까? 우리는 모두 우리가 진 빚을 다 갚고 사는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죄인인 내가 용서받고 구원을 받아 산다는 것은 평생 다해도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고 있는 것이고,
또 누군가에게 사랑의 빚을 계속 지고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빚진 자라는 것을 안다면 감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빚을 조금이라도 갚고자 합니다.
사랑의 빚을 갚으며 살라.
빚을 갚으며
오늘 본문 8절에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그리고 이어 나오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사랑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십계명의 계명들이 나옵니다.
간음하지 말고, 살인하지 말고, 도둑질하지 말고 탐내지 말라는 계명이 나옵니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는 겁니까?
먼저 우리는 모두 사랑의 빚을 지고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
그렇다면 우리는 그 사랑의 빚을 갚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빚을 갚는 것은 소극적으로 말하면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않는 것입니다.
간음치 않고 살인치 않고 도둑질하지 않고 탐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적극적으로는 그들에게 사랑을 행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빚진 자들은 사랑을 갚으면서 살아야 하는데,
그 사랑이 구체적으로 이웃에게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겁니다.
이방인의 사도로서
사랑의 빚을 졌다는 것을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의 빚을 지고 삽니다.
그러나 그 짂 빚을 갚는 방식은 다양하고 다릅니다.
바울은 그 빚을 갚으려고 했는데,
그의 경우는 이방인에게 선교를 하는 것이 그가 하나님과 사람에게 진 빚을 갚은 것이었습니다.
알다시피 그는 기독교인을 잡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아나니야를 통해 바울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해서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 9:15).
그는 그때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신 것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기 위함임을 알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구원은 이방인을 위해서 구원받은 것임을 알았습니다.
바울은 늘 한편 하나님께 빚을 진 것이요, 또 한편 이방인에게도 빚을 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이방인에게 전도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롬 1:14).
그리고 이 사랑의 빚을 갚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은 곧 화를 받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세 종류의 사람들
우리도 사랑의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사랑의 빚을 갚으려고 하며 삽니다.
그것이 은혜를 아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살아보면 세 종류의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은 늘 자신을 채권자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내가 준 것은 만다. 그러나 받은 것은 적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나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을 권리와 자격이 있는 사람처럼 늘 생각합니다.
그래서 원망이 그치지 않습니다.
또 한 사람은 개인주의자입니다.
나는 받은 것도 없다. 그러니 줄 것도 없다. 당신들이 나에게 해준 것도 없으니 내가 줄 것도 없다.
사랑의 빚진 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니 사랑의 빚을 갚으려는 마음도 전혀 없습니다. 많은 현대인의 특징입니다.
또 한 사람은 자신을 채무자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부모님으로부터, 교회로부터,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많이 받았다.
나는 크게 빚진 자이다. 나는 갚으면서 살아야 한다.
그러니 이 사람에게 고마움이 있습니다. 은혜가 있고 베품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똑똑하고 공부를 잘해서 장학금을 받고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좋은 자리에서 일합니다. 이것을 빚으로 알지 않는 사람은 자기가 잘난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빚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릅니다.
공부할 수 있는 머리를 주신 하나님께, 공부할 기회를 주신 여러 사람들에게 빚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는 공부를 마친 후에 그 사랑의 빚을 갚는 마음으로 살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사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큰 사업을 일구게 되었습니다.
사랑의 빚을 지고 산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다 자기 잘난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빚진 자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 빚지고 또 이 사회에 빚지고 사람에게 빚진 것임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 빚을 갚으려고 살아가게 됩니다. 진 빚을 갚는 것이 사명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런 빚진 자의 마음으로 살아 보십시오. 교만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남이 용납해줘서 내가 있고, 하나님이 용납해줘서 내가 사랑의 빚으로 있다. 나는 다만 빚 갚는 것이다,
이미 빚을 진 사람이니까 내가 아무리 수고를 한다 해도 수고로 끝날 따름이요
무슨 보상을 받을 것은 없다고 생각하면, 칭찬 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때로 핍박이 오고 고난을 당한다 해도
빚진 자의 마음으로 살면 원망하지 않을 수 있고, 자유로움이 있습니다.
하늘을 두루마리로 삼아도 바다를 먹물로 삼아도 하나님의 그 사랑을 다 갚을 수 없다.
우리는 큰 빚을 진 사람입니다. 빚진 자의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감사가 흘러 나오기를 바랍니다. 자유롭기를 바랍니다.
사랑의 선순환이 일어나게 하라.
갚을수록 빚이 더 늘어나는 사랑의 빚.
이렇게 사랑의 빚을 갚으면 어떻게 될까요? 보통은 빚을 갚으면 그 빚이 줄어듭니다.
그러나 사랑의 빚은 그 반대입니다.
오히려 갚을수록 그 빚이 더 늘어납니다. 이상하지맊 그렇게 눈덩이처럼 늘어납니다.
보십시오. 나는 사랑의 빚을 누군가에게 갚습니다.
그러면 그 빚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편이 다시 사랑의 빚을 지게 됩니다.
한 사람에게 받은 사랑의 빚을 두 사람에게 베풀면 두 사람에게 사랑의 빚을 지우게 됩니다.
그 두 사람이 네 사람에게 사랑의 빚을 지우게 됩니다.
그러니까, 사랑하면서 산다는 것은 서로가 진 빚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그 빚을 크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랑의 빚이 자꾸만 눈덩이처럼 커지는 것입니다.
사랑의 빚을 갚는 자는 감사하게 되고, 사랑의 빚진 자는 다른 사람에게 그 빚을 갚고,
이렇게 하다 보면 점점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에게 감사하고 고맙게 생각하게 됩니다.
서로가 더 사랑의 빚을 갚는 마음으로 더 섬기게 됩니다.
블라인드 사이드 이야기
미국에서 [블라인드 사이드]란 영화를 봤습니다. 마이클 오어 선수의 실화로 만든 영화랍니다.
마이클 오어, 그는 어린 시절 약물 중독에 걸린 엄마와 강제로 헤어진 후, 여러 가정을 전전하며 커갑니다.
건장한 체격을 갖고 있고, 남다른 운동 신경을 가졌기 때문에
미식축구 코치에 의해 상류 사립학교로 전학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습니다.
백인 학교에서 덩치만 크고 공부도 못하는 흑인은 왕따가 됩니다.
운동연습은 커녕 무관심 속에서 하루하루 잘 곳과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추수감사절 하루 전날 밤, 차가운 날씨에 반팔 셔츠만을 걸친 채 체육관으로 향합니다.
그때 '리 앤'이란 짂실핚 크리스챤 여성이 그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를 집으로 데려와 잠자리를 내어주고, 함께 추수감사절을 보냅니다.
갈 곳 없는 그를 보살피는 보살핍니다.
시간이 흐르며 마이클의 법적 보호자가 되면서 마이클을 진짜 가족으로 삼습니다.
그래서 이 마이클이 유명한 미국의 풋볼 선수가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빚을 지고 있음을 아는 한 여성이 핚 사람에게 사랑의 빚을 갚습니다.
그러면 그 사랑의 빚을 진 또 마이클 오어가 그 사랑의 빚을 선수로 활동하면서,
또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갚습니다. 그러면 사랑의 선순홖이 일어납니다.
사랑의 선순환
서로가 은혜를 입은 자로 살아간다는 것을 알고 사랑의 빚을 갚아가는,
일종의 <사랑의 빚 지우기>는 거룩한 사랑의 선순환이 됩니다. 계속해서 커집니다.
사랑의 빚쟁이란 바울의 이야기는, 사랑할 때 생기는 끊어질 수 없는 사랑의 선순환을 말하는 겁니다.
벵갤이란 학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모두는 사랑에 빚진 자로서 빚 갚는 삶을 살며, 그를 통해 남을 빚 지우며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사랑을 통해 「불멸의 채무관계」에 들어갑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바울의 디모데에 대한 사랑, 그 사랑의 빚을 디모데가 다른 사람에게 갚아가는 것, 이것이 사랑의 모습입니다.
6월 6일은 현충일입니다.
살아 있는 이들은 먼저 죽은 많은 사람들의 큰 사랑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누리는 이 자유, 이 민주, 이 풍요는 그들이 준 선물입니다.
우리는 사랑의 빚쟁이입니다. 우리가 이런 빚진 자의 마음을 갖는다면 좀더 조국을 사랑할 겁니다.
선거에 당선된 사람들도 이런 빚진 자의 심정이 되면 좋겠습니다.
북한에 대해서도 빚진 자의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공산화 안되고, 복음도 받고 경제적 번영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 받은 빚을 북한에 갚아야 합니다.
지금 북한과 너무 힘겨루기를 하지 말고, 북한에 빚진 자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선교하면서 사랑의 빚을 갚아야 합니다. 우리가 선교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제 선교의 나라가 되어 카작스탄의 한 마을을 병원을 세워 섬깁니다.
또는 아프리카의 한 마을를 섬긴다고 합시다. 우리는 받았던 사랑의 빚을 카작스탄과 아프리카에 갚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빚을 갚지만 그들은 사랑의 빚을 집니다. 앞으로 다른 나라를 섬기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사랑의 빚을 지고 삽니다. 빚을 갚는 마음으로 살아가십시오.
그럴 때 축복이 있습니다. 그럴 때 자유가 있습니다. 겸손과 감사가 있습니다.
어차피 사랑의 빚을 지고 삽니다. 평생 갚아도 사랑의 빚을 지고 삽니다. 한 없는 사랑을 받았습니다.
지금 이곳에서 조금이라도 더 빚을 갚는 마음으로 사랑하면서 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죽을 때에도 우리의 사랑을 기억핛 수 있도록, 빚을 갚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랑의 빚 갚음을 통해서 사랑의 선순홖이 일어나게 합시다.
- 서울영동교회 정현구 목사 설교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