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바백광(淸優波白光) 강남 오산종주
(화물터미널~청계~우담~바라~백운~광교산~문암골 종주기 : 28km)
이른 새벽, 어제 저녁 꾸려놓은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섰지만 현관문을 나서자 밀치고 들어오는 어둠과 찬바람은 매번 생경하다. 버스와 버스를 환승해서 양재역에 도착(07:00)하니 먼저 도착한 산 꾼들이 반갑게 반긴다. 다시 버스를 환승해서 오늘 종주 산행의 시작점인 청계산 화물터미널 뒤쪽 들머리에 도착하여 출발한 시간이 07:35분이다.
청계산(옛이름 청룡산 : 618m)의 유래는 과천 관아의 진산을 관악산으로 볼 때 왼편에 있어 풍수지리의 “좌청룡” 형국이라 하여 청룡이라 하고, 수리산은 관악산의 오른편에 있다고 하여 백호산이라 불렀다 한다. 서울에는 북한산, 도봉산, 관악산 등 유명한 큰 산들이 많아, 청계산은 강남 한 귀퉁이에 있는 동내 뒷산 정도로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조상 음덕으로 터를 잘 잡은 덕분에 이름에 비해 몸 값은 큰 산들보다 꾀 비싸다.
그러다가 청계산이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탄 것은 2010년 12월 초에늙은 부인과의 가정불화로 가출했다가 청계산에서 9일간이나 비박하면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가 과천 대공원 집으로 자진 귀가한 말레이 곰 “꼬마” 덕분이다.
“꼬마”가 인터뷰한 가출 이유는 혈기왕성한 6살 총각인 꼬마가 30살의 할머니(인간나이로 치면 80살 이상)와 사랑이 없는 강압적인 결혼과 거시기에 대한 불만 때문이라고 한다. 꼬마는 피가 끓는데, 할머니 색시는 피곤하다며 거시기를 자꾸 피하니까 넘치는 정력을 쏟을 방법이 없어서 가출했다고 하는데,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연하 남녀를 모시고 사는 분들도 거시기 해야 할 것 같다. 이런 분들도 사전에 거시기해서 거시기 아니 되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거시기는 나도 모른다. 영화 “황산벌”에서도 거시기란 암호는 해독하지 못했는데 난들 알겠는가? 혹시 이 글을 읽으신 분 중에서 거시기를 아시는 분은 댓 글 달아주시면, 암호를 해독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들머리에서 아름다운 여성의 선을 닮았다고 해서 지어진 옥녀봉까지는 편안한 솔밭길이 펼쳐져 있지만 고속도로와 도로, 공사장 등 서울 도심의 각종 소음들이 옥녀봉까지 따라오면서 산행의 즐거움을 방해한다. 옥녀봉을 내려와 원터고개에서 매봉까지는 약 1420개의 나무계단이 엎드려 있는데 그 계단 하나하나에는 번호와 계단 기증자의 이름이 적혀있다. 어제 내린 눈이 갈 길을 가로막아 만경대와 석기봉을 우회하여 내려오다 보면, 거대한 입석에 이수봉이라 새겨져 있고 지나가는 등산객들마다 증명사진을 찍느라 북새통이다. 왼쪽능선을 타고 오르내리다 보면 고려 충신 조윤이 멸망한 나라를 생각하던 곳이라 하여 명명된 청계산의 마지막 봉우리 국사봉이 나타난다.
청계산과 우담산을 연결하는 능선은 서울외곽순환도로에 잘려 나갔다.그 자리에는 육교가 흔들거리며 놓여있다. 국사봉 아래 양지 바른 곳에는 공동묘지가 있다. 많은 영혼들이 영면하기 위해서 누워있지만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차량 소음 때문에 한시도 편히 잠들지 못할 것 같다.
하오고개를 지나 가쁜 숨을 몰아 쉬며 된비알을 올라서서 만나는 산이 우담산이다. 도심의 소음은 어느 사이 사라지고, 소음이 사라진 숲 속에는 눈으로 된 하얀 카펫이 깔려있고, 등산로에는 눈 썩인 낙엽과 황금 빛 솔 잎이 깔려있어 부지런한 사람들을 반기는 듯하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고즈넉한 이 길을 “박 목월”의 시 속에 나오는 강나루 건너 밀밭 길을 걷는 기분으로 구름에 달 가듯이 걸어 간다. 두런두런 이야기도 하면서, 누군가의 흥얼거리는 노래 가락도 들으면서 간다.
우담산(425m)과 바라산(428m)은 불교에서 따온 산 이름으로 추정된다. 우담바라는 불교경전에서 말하는 꽃으로 나무는 있지만 평소에는 꽃이 없다가 3000년 마다 한 번, 여래(如來)가 태어날 때나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나타날 때에만 그 복덕으로 말미암아 꽃이 핀다고 한다. 산의 이름이 심오한 식물에서 따와서 그런지, 아님 부처님의 불법이 미쳐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우담산과 바라산의 정상 표식은 다른 모든 산들이 볼품없는 이름을 돌에다 뻔뻔하게 새겨놓은 것과는 달리 초라한 나무 조각에 그 아름다운 이름을 새기고 나무 위에 수줍은 듯 매달려 있다. 아마 나무가 자라는 만큼 이들 산의 높이도 저절로 높아지리라. 그 소박함과 지혜가 훈훈하게 다가온다.
바라산을 넘어 능선을 오르내리다 보면, 철탑과 송신소의 위성 안테나가 위풍당당하게 도열해 있는 봉우리들이 줄지어 서 있는 곳이 백운산이다. 흰 구름이 산 봉우리에 걸려있다고 해서 붙여진 백운산(564m)은 전남 광양, 경남 함양, 충북 제천, 경기도 포천, 강원도 정선 등 전국 각지에 같은 산 이름들이 산재해 있지만 여기는 등산객들의 탐방객수에 비해 인터넷에서도 검색이 잘 안될 정도로 이름이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도 산봉우리를 누르고 있는 철 구조물 때문에 산의 기가 쇠한 때문이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백운산부터는 평탄한 능선 길이 이어진다. 운치 있는 소나무도 즐기면서 천천히 걷다 보면,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간이 대피소도 있고, 곧이어 오늘 종주산행의 마지막 산인 광교산 정상인 시루봉이 나타난다. 고려 태조 왕건이 현재의 이름으로 명명했다고 전해지는 광교산(582m)은 수원과 용인의 북쪽에 있는 산으로 바람을 가두고 물을 얻게 한다는 장풍득수(藏風得水)의 역할을 하는 진산이라고 한다.
정상에서 발길을 수십 미터 뒤로 되돌아 오다가 나타나는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내려오면 정비가 잘된 능선길이 나타난다. 그 길 따라 토끼재, 비로봉, 양지재, 형재봉을 지나서 만나는 문암재까지 단숨에 내려온다. 문암재에서 다시 우측으로 내려오면 평탄한 숲길이 2km 정도 펼쳐진다. 숲 길 따라 이어진 비포장길 끝자락은 신갈~안산간 고속국도가 갈 길을 막아 선다. 제대로 된 길인지 어쩐지는 모르지만 국도 밑으로 뚫린 수로를 통과해서 나오면 시야가 트인 골자기가 나타나는데 그 곳이 오늘 종주산행의 날머리인 문암골이다. 시간은 15:35분을 나타내고, 약 8시간 소요 되었다. 또 한 구간이 끝났다.
이런 종주산행은 고통과 인내를 필요로 하지만 산행 후에는 성취감과 희열을 선물한다. 그러나 성취감과 희열은 중독성이 강해서 우리 몸은 일정한 기간마다 더 강력한 처방을 원한다. 그래서 또 다른 장거리 종주산행을 기획하고, 무모하게 도전한다.
그렇지만 성취감과 희열은 사람들이 가슴속에 품고 있는 고독과 공허함까지 치유할 수 없다. 그것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은 받는 사랑이 아니라 주는 사랑과 비어있는 마음만이 채워줄 수 있기 때문이다.
2010. 12. 19
마바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