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하늘
- 신채호
1
때는 단군 기원 4240년(서기 1907년) 몇 해 어느 달, 어느 날이던가, 땅은 서울이던가, 시골이던가, 해외 어디던가, 도무지 기억할 수 없는데, 이 몸은 어디로 해서 왔는지 듣지도 보지도 못하던 크나큰 무궁화 몇만 길 되는 가지 위 넓기가 큰 방만한 꽃송이에 앉았더라.
별안간 하늘 한복판이 딱 갈라지며 그 속에서 불그레한 광선이 뻗쳐 나오더니 하늘에 테를 지어 두르고 그 위에 뭉글뭉글한 고운 구름으로 갓을 쓰고 그 광선보다 더 고운 빛으로 두루마기를 지어 입은 한 천관(天官)이 앉아 오른손으로 번개칼을 휘두르며 우뢰 같은 소리로 말하여 가로되,
“인간에게는 싸움뿐이니라. 싸움에 이기면 살고 지면 죽나니 신의 명령이 이러하니라.”
그 소리가 딱 그치며, 광선도 천관도 다 간 곳이 없고 햇살이 탁 퍼지며 온 바닥이 반듯하더니 이제는 사람 소리가 시작된다. 동편으로 닷 동달이 갖춘 빛에 둥근 테를 두른 오원기(五員旗)가 뜨며 그 기 밑에 사람이 덮여 오는데 머리에 쓴 것과 몸에 장속(裝束)한 것이 모두 이상하나 말소리를 들으니 분명한 우리나라 사람이요, 다만 신체의 장건(壯健)과 위풍의 늠름함이 전에 보지 못한 이들이다.
또 서편으로 좌룡우봉(左龍右鳳) 그린 그 밑에 수백만 군사가 몰려오는데 뿔 돋친 놈, 꼬리 돋친 놈, 목 없는 놈, 팔 없는 놈, 처음 보는 괴상한 물건들이 달려들고 그 뒤에는 찬바람이 탁탁 치더라.
이때에 한놈이 송구한 마음이 없지 않으나 뜨는 호기심이 버럭 나 이 몸이 곧 무궁화 가지 아래로 내려가 구경코자 했더니, 꽃송이가 빙글빙글 웃으며,
“너는 여기 앉았거라. 이곳을 떠나면 천지가 캄캄하여 아무것도 안 보이리라.”
하거늘 들던 궁둥이를 다시 붙이고 앉으니, 난데없는 구름장이 어디서 떠 들어와 햇빛을 가리우며, 소낙비가 놀란 듯 퍼부어 평지가 바다가 되었는데, 한편으로 으르르 꽝꽝 소리가 나며 거의 ‘모질’다는 두 자로만 형용하기 어려운 큰 바람이 일어, 나무를 치면 나무가 꺾어지고 돌을 치면 돌이 날고, 집이나 산이나 닥치는 대로 부수는 그 기세로 바다를 건드리니, 바람도 크지만 바다도 큰 물이라. 서로 지지 않으려고 바람이 물을 치면 물도 바람을 쳐 바람과 물이 반 공중에서 접견할새 용이 우는 듯 고래가 뛰는 듯 천병만마(千兵萬馬)가 달리는 듯, 바람이 클수록 물결이 높아 온 지구가 들먹들먹하더라.
“바람이 불거나 물결이 치거나 우리는 우리대로 싸워 보자.”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아까 보던 동편의 오원기와 서편의 용봉기 밑에 있는 장졸들이 눈들을 부릅뜨고 서로 죽이려 달려드니 바다에는 바람과 물의 싸움이요, 물 위에는 두 편 장졸들의 싸움이다.
그러나 이 싸움은 동양 역사나 서양 역사에서나 보던 싸움은 아니더라. 싸우는 사람들이 손에는 아무 연장도 가지지 않고 오직 입을 딱딱 벌리며 목구멍에서 불도 나오며, 물도 나오며, 칼도 나오며, 화살도 나와 칼과 칼이 싸우며 활이 활과 싸우며 불과 불이 서로 치다가 나중에는 사람을 맞히니, 이 맞은 사람은 목이 떨어지면 팔로 싸우며 팔이 떨어지면 또 다리로 싸우다가 끝끝내 살이 다 떨어지고 뼈가 하나도 없이 부서져야 그만두는 싸움이라. 몇 시 몇 분이 못 되어 주검이 천리나 덮이고 비린내 땅에 코를 돌릴 수 없으며, 피를 하도 뿌려 하늘까지 빨갛게 물들였도다. 한놈이 이를 보고 우주가 이같이 참혹한 마당일까 하여 차마 보지 못해 눈을 감으니, 꽃송이가 다시 빙글빙글 웃으며,
“한놈아, 눈을 떠라! 네 이다지 약하냐? 이것이 우주의 진면목이니라. 네가 안 왔으면 하릴없지만 이미 온 바에는 싸움에 참가하여야 하나니 그렇지 않으면 도리어 너의 책임만 방기함이니라. 한놈아, 눈을 빨리 떠라.”
하거늘 한놈이 하릴없이 두 손으로 눈물을 닦고 눈을 들어 살피니 그 사이에 벌써 싸움이 끝났는지 천지가 괴괴하게 풍우도 또한 멀리 간지라, 해는 발끈 들어 온 바닥이 따뜻한데 깊은 구름을 헤치고 신선의 풍류 소리가 내려오니 이제부터 참혹한 소리는 물러가고 평화의 소리가 대신함인가 보더라.
이 소리 밑에 나오는 사람들은 곧 별사람들이 아니라 아까 오원기를 받들고 동편 진에 섰던 장졸들이니, 대개 서편 진을 깨쳐 수백만 적병을 씨 없이 죽이고 전승고를 울리며 돌아옴이라.
일원대장(一員大將)이 앞장에서 인도하는데 금화절풍건(金花折風巾)을 쓰고 어깨엔 어린장(魚鱗章)이며 몸엔 조의를 입었더라. 그 얼굴이 맑은 듯 위엄 있고 매운 듯 인자하여, 얼른 보면 부처 같고 일변으로는 범 같아 보기에 사랑도 스럽고 무섭기도 하더라.
그가 한놈이 앉은 무궁화나무로 향하여 오더니 문득 꽃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허허, 무궁화가 피었구나.”
하더니 장렬한 음조로 노래를 한 장(章) 한다.
이 꽃이 무슨 꽃이냐.
희어스름한 백두산의 얼이요
불그스름한 고운 조선의 빛이로다.
이 꽃을 북돋우려면
비도 맞고 바람도 맞고 핏물만 뿌려 주면
그 꽃이 잘 자라리.
옛날 우리 전성한 때에
이 꽃을 구경하니 꽃송이 크기도 하더라.
한 잎은 황해 발해를 건너 대륙을 덮고
또 한 잎은 만주를 지나 우수리에 늘어졌더니
어이해 오늘날은
이 꽃이 이다지 야위었느냐.
이 몸도 일찍 당시의 살수 평양 모든 싸움에
팔뚝으로 빗장삼고 가슴이 방패 되어
꽃밭에 울타리 노릇 해
서방의 더러운 물이
조선의 봄빛에 물들지 못하도록
젖 먹은 힘까지 들였도다.
이 꽃이 어이해
오늘은 이 꼴이 되었느냐.
한 장 노래를 다 마치지 못한 모양이나 목이 메어 더 하지 못하고 눈물에 젖으니 무궁화 송이도 그 노래에 무슨 느낌이 있었던지 같이 눈물을 흘리며 맑은 노래로 화답하는데,
봄비슴의 고운 치마 임이 내게 주시도다.
임의 은덕 갚으려 하여
내 얼굴을 쓰다듬고 비바람과 싸우면서
조선의 아름다움 쉬임없이 자랑하려고 나도 이리 파리하다.
영웅의 시원한 눈물
열사의 매운 핏물
사발로 바가지로 동이로 가져오너라.
내 너무 목마르다.
그 소리 더욱 아프고 저리어 완악한 돌이나 나무들도 모두 일어나 슬픔으로 서로 화답하는 듯하더라. 꽃송이 위에 앉았던 한놈은 두 노래 끝에 크게 느끼어 땅에 엎드러져 울며 일어나지 못하니 꽃송이가 또 가만히,
“한놈아.”
부르며 꾸짖되,
“울음을 썩 그쳐라. 세상 일은 슬퍼한다고 잊는 것이 아니니라.”
하거늘 한놈이 고개를 들어 좌우를 살피니 아까 노래하던 대장이 곧 앞에 섰더라. 그 얼굴은 자세히 뜯어보니 마치 언제 뵈온 어른 같다. 한참 서성이다가,
“아, 이제야 생각나는구나. 눈매와 이맛살과 채수염이며, 또 단장한 것을 두루 본즉 일찍 평안도 안주 남문 밖 비석에 새겨 있는 조각상과 같으니 내가 꿈에라도 한번 보면 하던 을지문덕이신저.”
하고 곧 일어나 절하며 무슨 말을 물으려 하나 무엇이라고 칭호할는지 몰라 다시 서성이니 이상하다. 을지문덕 그이는 단군 2000년(서기전 333년)경의 어른이요, 한놈은 단군 4241년(서기 1908년)에 난 아기라 그 어간이 이천 년이나 되는데 이천 년 전의 어른으로 이천 년 뒤의 아기를 만나 자애스런 품이 마치 친구나 집안 같다. 그이가 곧 한놈을 향하여 웃으시며,
“그대가 나의 칭호에 서성이느냐. 곧 선배라 부름이 가하니라. 대개 단군이 태백산에 내리어 삼신오제(三神五帝)를 위해 삼경오부(三京五部)를 베풀고 이를 만세 자손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려 하실새 삼부오계(三部五戒)로 윤리를 세우시며 삼랑오가(三郞五加)로 교육을 맡게 하시니 이것이 우리나라 종교적 무사혼(武士魂)이 발생한 처음이니라. 이 혼이 삼국시대에 와서는 드디어 꽃 피듯 불 붙는 듯하여 사람마다 무사를 높이어 절하고 서로 아름다운 이름을 지어 자랑할새 신라는 소년의 무사를 사랑하여 도령이라 이름하니,『삼국사기』에 적힌 선랑(仙郞)이 그 뜻 번역이요, 백제는 장년의 무사를 사랑하여 수두라 이름하니, 삼국사기에 적힌 바 소도(蘇塗)가 그 음 번역이요, 고구려는 군자스러운 무사를 사랑하여 선배라 이름하니,『삼국사기』에 적힌 바 선인이 그 음과 뜻을 아울러 한 번역이라. 이제 나는 고구려의 사람이니 그대가 나를 선배라 부르면 가하리라.”
한놈이 이에 다시 고구려의 절로 한 무릎은 세우고 한 무릎은 꿇어 공손히 절한 뒤에,
“선배님이시여, 아까 동편 서편에 갈라서서 싸우던 두 진이 다 어느 나라의 진입니까?”
물은데 선배님이 대답하되,
“동편은 우리 고구려의 진이요, 서편은 수나라의 진이니라.”
한놈이 놀라며 의심스런 빛으로 앞에 나아가 가로되,
“한놈은 듣자오니 사람이 죽으면 착한 이의 넋은 천당으로 가며 모진 이의 넋은 지옥으로 간다더니 이제 그 말이 다 거짓말입니까? 그러면 영계(靈界)는 육계(肉界)와 같아 항상 칼로 찌르며 총으로 쏘아 서로 죽이는 참상이 있습니까?”
선배님이 허허 탄식하여 하시는 말이,
“그러하니라. 영계는 육계의 영상이니 육계에 싸움이 그치지 않는 날에는 영계의 싸움도 그치지 않느니라. 대저 종교가의 시조인 석가나 예수가 천당이니 지옥이니 한 말은 별도로 유의한 뜻이 있거늘 어리석은 사람들이 그 말을 집어먹고 소화가 못 되어 망국 멸족 모든 병을 앓는도다. 그대는 부디 내 말을 새겨들을지어다. 소가 개를 낳지 못하고 복숭아나무에 오얏열매가 맺지 못하니 육계의 싸움이 어찌 영계의 평화를 낳으리요? 그러므로 육계의 아이는 영계에 가서도 아이요, 육계의 어른은 영계에 가서도 어른이요, 육계의 상전은 영계에 가서도 상전이요, 육계의 종은 영계에 가서도 종이니, 영계에서 높다, 낮다, 슬프다, 즐겁다 하는 도깨비들이 모두 육계에서 받던 꼴과 한 가지다. 나로 말하더라도 일찍 살수싸움의 승리자이므로 오늘 영계에서도 항상 승리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저 수주(隨主) 양광(楊廣)은 그때에 전패자이므로 오늘도 이같이 패하여 군사를 이백만이나 죽이고 슬피 돌아감이어늘 이제 망한 나라의 종자로서 혹 부처에게 빌며 상제께 기도하며 죽은 뒤에 천당을 구하려 하니 어찌 눈을 감고 해를 보려 함과 다르리요.”
을지 선배의 이 말이 그치자마자 하늘에 붉은 구름이 일어나 스스로 글씨가 되어 씌었으되, ‘옳다, 옳다, 을지문덕의 말이 참 옳다. 육계나 영계나 모두 승리자의 판이니 천당이란 것은 오직 주먹 큰 자가 차지하는 집이요, 주먹이 약하면 지옥으로 쫓기어 가느니라’ 하였었더라.
2
1) 왼몸이 오른몸과 싸우다.
2) 살수싸움의 정형이 이러하다.
3) 을지문덕도 암살당을 조직하였더라.
4) 사법명이 구름을 타고 지나가다.
한놈이 일찍 내 나라 역사에 눈이 뜨자 을지문덕을 숭배하는 마음이 간절하나 그에 대한 전기를 짓고 싶은 마음이 바빠 미처 모든 글월에 고구(考究)하지 못하고 다만『동사강목(東史綱目)』에 적힌 바에 의거하여 필경 전기도 아니요, 논문도 아닌『사천년 제일대위인 을지문덕(四千年 弟一大偉人 乙支文德)』이라 한 조그마한 책자를 지어 세상에 발표한 일이 있었더라.
한놈은 대개 처음 이 누리에 내려올 때에 정과 한의 뭉텅이를 가지고 온 놈이라 나면 갈 곳이 없으며, 들면 잘 곳이 없고, 울면 믿을 만한 이가 없으며, 굴면 사랑할 만한 이가 없어 한놈으로 와, 한놈으로 가는 한놈이라. 사람이 고되면 근본을 생각한다더니 한놈도 그러함인지 하도 의지할 곳이 없으며 생각나는 것은 조상의 일뿐이더라. 동명성왕의 귀가 얼마나 길던가, 진흥대왕의 눈이 얼마나 크던가, 낙화암에 떨어지던 미인이 몇이던가, 수양제를 쏘던 장사가 누구던가, 동명성왕의 임유각의 높이가 백 길이 못 되던가, 진평왕의 성제대(聖帝帶)가 열 발이 더 되던가. 동묘〔東牟〕의 높은 산에 대조영 내조의 자취를 조상하며, 웅진(熊津)의 가는 물에 계백 장군의 대움을 눈물하고, 소나무를 보면 솔거의 그림을 본 듯하며, 새 소리를 들으면 옥보고의 노래를 듣는 듯하여 몇 치 못 되는 골이 기나긴 오천 년 시간 속으로 오락가락하여 꿈에라도 우리 조상의 큰 사람을 만나고자 그리던 마음으로 이제 크나큰 을지문덕을 만난 판이니, 묻고 싶은 말이며 하고 싶은 말이 어찌 하나 둘뿐이리요마는 이상하다. 그의 영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골이 펄떡펄떡하고 가슴이 어근버근하여 아무 말도 물을 경황이 없고 의심과 무서움이 오월 하늘에 구름 모이듯 하더니 드디어 심신에 이상한 작용이 인다.
오른손이 저릿저릿하더니 차차 커져 어디까지 뻗쳤는지 그 끝을 볼 수 없고 손가락 다섯이 모두 손 하나씩 되어 길길이 길어지며 그 손 끝에 다시 손가락이 나며, 그 손가락 끝에 다시 손이 되며 아들이 손자를 낳고, 손자가 증손을 낳으니 한 손이 몇만 손이 되고, 왼손도 여봐란 듯이 오른손대로 되어 또 몇만 손이 되더니, 오른손에 달린 손들이 낱낱이 푸른 기를 들고 왼손에 딸린 손들은 낱낱이 검은 기를 들고 두 편을 갈라 싸움을 시작하는데 푸른 기 밑에 모인 손들이 일제히 범이 되며 아가리를 딱딱 벌리며 달려드니, 붉은 기 밑에 보인 손들은 노루가 되어 달아나더라.
달아나다가 큰 물이 앞에 꽉 막히어 하릴없는 지경이 되니 노루가 일제히 고기가 되어 물 속으로 들어간다. 범들이 뱀이 되어 쫓으니 고기들은 껄껄 푸드득 꿩이 되어 물 밖으로 향하여 날더라.
뱀들이 다시 매가 되어 쫓은즉 꿩들이 넓은 들에 가 내려앉아 큰 매가 되니 뱀들이 아예 불덩이가 되어 매에 대고 탁 튀어, 매는 쪼각쪼각 부서지고 온 바닥이 불빛이더라. 부서진 매조각이 하늘로 날아가며 구름이 되어 비를 퍽퍽 주니 불은 꺼지고 바람이 일어 구름을 헤치려고 천지를 뒤집는다. 이 싸움이 한놈의 손 끝에서 난 싸움이지만 한놈의 손 끝으로 말릴 도리는 아주 없다. 구경이나 하자고 눈을 비비더니 앉은 밑의 무궁화 송이가 혀를 치며 하는 말이,
“애닯다! 무슨 일이냐 쇠가 쇠를 먹고 살이 살을 먹는단 말이냐?”
한놈이 그 말씀에 소름이 몸에 꽉 끼치며 입이 벙벙하니 앉았다가,
“무슨 말씀입니까? 언제는 싸우라 하시더니 이제는 싸우지 말라 하십니까?”
하며 돌려 물으니 꽃송이가 예쁜 소리로 대답하되,
“싸우거든 내가 남하고 싸워야 싸움이지, 내가 나하고 싸우면 이는 자살이요 싸움이 아니니라.”
한놈이 바싹 달려들며 묻되,
“내란 말은 무엇을 가르치시는 말입니까? 눈을 크게 뜨면 우주가 모두 내 몸이요, 적게 뜨면 오른팔이 왼팔더러 남이라 말하지 않습니까?”
꽃송이가 날카롭게 깨우쳐 가로되,
“나란 범위는 시대를 따라 줄고 느나니 가족주의의 시대에는 가족이 ‘나’요 국가주의의 시대에는 국가가 ‘나’라, 만일 시대를 앞서 가다가는 발이 찢어지고 시대를 뒤져 오다가는 머리가 부러지나니 네가 오늘 무슨 시대인지 아느냐? 희랍은 지방열로 강국의 자격을 잃고 인도는 부락사상으로 망국의 화를 얻으니라.”
한놈이 이 말에 크게 느끼어 감사한 눈물을 뿌리고 인해 왼손으로 오른손을 만지니 다시 전날의 오른손이요, 오른손으로 왼손을 만지니 또한 전날의 왼손이더라. 곁에는 을지문덕이 햇빛을 안고 앉다.
우리나라는 저울과 같다.
부소(扶蘇) 서울은 저울 몸이요,
백아(百牙) 서울은 저울 머리요,
오덕(五德) 서울은 저울추로다.
모든 대적을 하루에 깨쳐 세 곳에
나누어 서울을 하니,
기울임 없이 나라 되리니,
셋에 하나도 잃지 말아라.
를 외우더니 한놈을 돌아보며 가로되,
“그대가 이 글을 아는가?”
한놈이,
“정인지(鄭麟趾)가 지은『고려사』속에서 보았나이다.”
하니 을지문덕이 가로되,
“그러하니라. 옛적에 단군이 모든 적국을 깨치고 그 땅을 나누어 세 서울을, 세울새, 첫 서울은 태백산 동남 조선땅에 두니 가로되 ‘부소’요, 다음 서울은 태백산 동북 만주 밑 연해주땅에 두니 가로되 ‘오덕’이라.
이 세 서울을 하나만 잃으면 후세자손이 쇠약하리라고 하사 그 예언을 적어 신지에게 주신 바이어늘 오늘에 그 서울들이 어디인지 아는 이가 없을 뿐더러 이 글까지 잊었도다. 정인지가『고려사』에 이를 쓰기는 하였으나 술사(術士)의 말로 들렸으니 그 잘못함이 하나요, 고려의 지리지를 좇아 단군의 삼경(三京)도 모두 대동강 이내로 말하였으니 그 잘못함이 둘이라.”
한놈이,
“이 세 서울을 잃은 원인은 어디에 있습니까?”
물으니 을지문덕이 가로되,
“아까 권력이 천당으로 가는 사다리란 말을 잊지 안하였는가? 우리 조선 사람들은 이 뜻을 아는 이 적은 고로 중국 이십일 대사 가운데 대(代)마다 조선 열전이 있으며 조선 열전 가운데마다 조선인의 천성이 인후하다 하였으니, 이 ‘仁厚’ 두 자가 우리를 쇠하게 한 원인이라. 동족에 대한 인후는 흥하는 원인도 되거니와 적국에 대한 인후는 망하게 하는 원인이 될 뿐이니라…….”
3
……(원문 탈락) 한참 재미있게 을지문덕은 이야기하매 한놈은 듣는 판에 벌건 동편 하늘이 딱 갈라지며 그 속에서 불칼, 불활, 불돌, 불총, 불대포, 불화로, 불솥, 불범, 불사자, 불개, 불고양이떼 들이 쏟아져 나오니 을지문덕이 깜짝 놀라며,
“저것이 웬일이냐?”
하더니 무지개를 타고 빨리 그 속으로 향하여 가더라.
4
가는 선배님을 붙들지도 못하며 내 몸으로 쫓아가려고 해도 쫓지 못하여 먹먹하게 앉은 한놈이,
“나는 어데로 가리요?”
한데, 주인으로 있는 꽃송이가 고운 목소리로,
“네가 모르느냐? 신과 마(魔)의 싸움이 일어 을지 선배님이 가시는 길이다.”
한놈이 깜짝 기꺼하며,
“나도 가게 하시옵소서.”
한데, 꽃송이가,
“암, 그럼 가야지, 우리나라 사람이 다 가는 싸움이다.”
한놈이,
“그대로 가면 어떻게 가리까?”
물은데, 꽃송이가,
“날개를 주마.”
하므로 한놈이 겨드랑이 밑을 만져 보니 문득 날개 둘이 달렸더라. 꽃송이가 또,
“친구와 함께 가거라.”
하거늘, 울어도 홀로 울고 웃어도 홀로 웃어 사십 평생에 친구 하나 없이 자라난 한놈이 이 말을 들으매 스스로 눈에 눈물이 핑 돈다.
“친구가 어디 있습니까?”
한데,
“네 하늘에 향하여 한놈을 부르라.”
하거늘, 한놈이 힘을 다하여 머리를 들고 한놈을 부르니 하늘에서,
“간다.”
대답하고 한놈 같은 한놈이 내려오더라. 또,
“네가 땅에 향하여 한놈을 부르라.”
하거늘 한놈이 또 힘을 다하여 머리를 숙이고 한놈을 부르니 땅 속에서,
“간다.”
대답하고 한놈 같은 한놈이 솟아나더라. 꽃송이 시키는 대로 동편에 불러 한놈을 얻고 서편에 불러 한놈을 얻고 남편, 북편에서도 각기 다 한놈을 얻은지라 세어 본즉 원래 있던 한놈이 와 불려 나온 여섯 놈이니 합이 일곱 한놈이더라.
낯도 같고 꼴도 같고 목적도 같지만 이름이 같으면 서로 분간할 수 없을까 하여 차례로 이름을 지어 한놈, 둣놈, 셋놈, 넷놈, 닷째놈, 엿째놈, 일곱째놈이라 하다.
“싸움터가 어데냐?”
외치니,
“이리 오너라.”
하고 동편에서 소리가 나거늘,
“앞으로 갓!”
한마디에 그곳으로 향하더니 꽃송이가 ‘칼부림’이란 노래를 한다.
내가 나니 저도 나고
저가 나니 나의 대적이다
내가 살면 대적이 죽고
대적이 살면 내가 죽나니
그러기에 내 올 때에 칼 들고 왔다
대적아 대적아
네 칼이 세던가 내 칼이 센가 싸워를 보자
앓다 죽은 넋은 땅 속으로 들어가고
싸우다 죽은 넋은 하늘로 올라간다
하늘이 멀다 마라
이 길로 가면 한 뼘뿐이니라
하늘이 가깝다 마라
땅 길로 가면 만만 리가 된다
아가 아가 한놈 둣놈 우리 아가 우리 대적이 저기 있다
해 늦었다 눕지 말며
밤 늦었다 자지 마라
이 칼이 성공하기 전에는
우리 너희 쉴 짬이 없다
그 소리 비장강개하여 울 만도 하며 뛸 만도 하더라.
한놈은 일곱 사람의 대표로 ‘내 친구’란 노래로 대답하였는데 왼머리는 다 잊어 이 책에 쓸 수 없고 오직 첫 마디의,
“내가 나자 칼이 나고 칼이 나니 내 친구다.”
단 한 구절만 생각난다.
답가를 마치고 일곱 사람이 서로 손목을 잡고 동편을 바라보고 가니 날도 좋고 곳곳이 꽃 향기, 새 소리로 우리를 위로하더라.
몇 걸음 못 나아가 하늘이 캄캄하고 찬 비가 쏟아진다. 일곱 사람이 한결같이,
“찬 비가 오거나 더운 비가 오거나 우리는 간다.”
하고 앞길만 찾더니 또 바람이 모질게 불어 흙과 모래가 섞이어 나니 눈을 뜰 수 없다.
“눈을 뜰 수 없어도 가자.”
하고 자꾸 가니 몇 걸음 못 나가서 가시밭이 있거늘,
“오냐, 가시밭길이라도 우리가 가면 길 된다.”
하고 눌러 걷더니 또 몇 걸음 못 나가서 땅에다 시퍼런 칼 같은 것을 모로 세워 밟는 대로 발이 찢어져 피 발이 된다.
“피 발이 되어도 간다.”
하고 서로 붙들고 가더니 무엇이 머리를 꽉 눌러 허리도 펼 수 없고 한 발씩이나 되는 주둥이가 살을 꽉꽉 물어 떼여 아프고 가려워 견딜 수 없고 머리털 타는 듯 고추 타는 듯한 냄새가 나 코를 들 수 없고 앞뒤로 불덩이가 날아와 살이 모두 데이니 일곱째놈이 딱 자빠지며,
“애고, 나는 못 가겠다.”
한놈과 및 다섯 친구들이 억지로 끌어 일으키나 아니 들으며,
“여기 누우니 아픈 데가 없다.”
하거늘 한놈이,
“싸움에 가는 놈이 편함을 구하느냐?”
꾸짖고 할 수 없이 일곱 친구에 하나를 버리니 여섯 사람뿐이다.
“우리는 적과 못 견디지 말자.”
하고 서로 권면하나 길이 어둡고 몸이 저려 기다, 걷다, 구르다, 뛰다 온갖 짓을 다 하며 나가는데 웬 할미가 앞에 지나가거늘 일제히 소리를 쳐,
“할멈, 싸움터를 어디로 가오?”
하니 지팡이를 들어,
“이리 가라.”
하고 가리키는데 지팡이 끝에 환한 광선이 비치더라.
“이곳이 어데요?”
물은데,
“고됨 벌이라.”
하더라.
광선을 따라 나아가니 눈앞이 환하고 갈 길이 탁 트인다. 일변으로는 반갑기도 하지만 일변으로는 눈물이 주르르 쏟아진다.
“살거든 같이 살고 죽거든 같이 죽자고 옷고름 맺고 맹세하며 같이 오던 일곱 사람에 일곱째놈 하나만 버리고 우리 여섯은 다 오는구나. 일곱째놈아, 네 조금만 견디었으면 우리같이 이 구경을 할 걸 네 너무도 참지 못하여 우리는 오고 너는 갔고나. 그러므로 마지막 씨름에 잘 하여야 한단 말도 있고 최후 오 분간을 잘 지내란 말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쓸데 있나, 이 뒤에 우리 여섯이나 조심하자.”
하고 받고 차며 이야기하며 가더니 이것이 어디기에 이다지 좋은가, 나무 그늘 가득한 곳에 금잔디는 땅에 깔리고 꽃은 피어 뒤덮였는데 새들은 제 세상인 듯이 짹짹이고 범이 오락가락하나 사람 보고 물지 않고 온갖 풀이 모두 향내를 피우며 길은 옥으로 깔렸는데 얼른얼른하여 그 속에 한놈의 무리 여섯이 비치어 있고 금강산의 만물상같이 이름 짓는 대로 보이는 것도 많으며 평양 모란봉처럼 우뚝 솟아 그린 듯한 빼어난 뫼며, 남한산의 꽃버들이며, 북한산의 단풍이며, 경주의 삼기팔괴(三奇八怪)며, 원산의 명사십리 해당화며, 호호 탕탕 한강물에 뛰노는 잉어며, 천안 삼거리 늘어진 버들이며, 송도 박연에 구슬 뿜듯 헤치는 폭포며, 순창 옷과 대발이며, 온갖 풍경이 갖추어 있어 한놈의 친구 여섯 사람으로 하여금 ‘아픈 벌’에서 받던 고통은 씻은 듯 간 데 없다. 몸이 거뜬하고 시원함을 이기지 못하여 서로 돌아보며,
“이곳이 어데인가? 님의 나라인가? 님의 나라야 싸움터도 지나지 않았는데 어느새 왔을 수 있나?”
하며 올 것이 가는 판이러니 별안간 사람의 눈을 부시게 빛이 찬란한 산이 멀리 보이는데 그 위에 붉은 글씨로 ‘황금산’이라 새기었더라. 앞에 다다라 보니 순금으로 쌓은 몇만 길 되는 산이요, 한 쌍 옥동자가 그 산이마에 앉아 노래를 한다.
난 사람이 그 누구냐
내 이 산을 내어 주리라
이 산만 가지면
옷도 있고 밥도 있고
고대광실 높은 집에
한평생을 잘살리라
이 산만 가지면
맏아들은 황제 되고
둘째 아들은 제후 되고
셋째 아들은 파초선 받고
넷째 아들은 쌍가마 타고
네 앞에 절하리라
이 산을 가지려거든
단군을 버리고 나를 할아비 하며
진단(震檀)을 던지고 내 집에서 네 살림 하여라
이 산만 차지하면
금강석으로 네 갓 하고
진주 구슬로 네 목도리 하고
홍보석으로 네 옷 말아 주마
난 사람이 그 누구냐
너희들도 어리석다
싸움에 다다르면 네 목은 칼밥이요
네 눈은 활 과녁이요
네 몸은 탄알밥이라
인생이 얼마라고 호강을 싫다 하고
아픈 길로 드느냐?
어리석다 불쌍하다 너희들……
노래 소리 맑고 고와 듣는 사람의 귀를 콕 찌르니 엿째놈이 그 앞에 턱 엎드러지며,
“애고, 나는 못 가겠소. 형들이나 가시오.”
한놈의 친구가 또 하나 없어진다. 기가 막혀 꼬이고 꾸짖으며, 때리며 끌며 하나 엿째놈이 그 산에 딱 들어붙어 일어나지 않더라.
하릴없이 한놈이 인제 네 친구만 데리고 가더니 큰 냇물이 앞에 나서거늘 한놈이 친구들을 돌아보며,
“이 내가 무슨 내인가?”
하며 그 이름을 몰라 갑갑한 말을 한즉 냇물에서 무엇이 대답하되,
“내 이름은 새암이라.”
“새암이란 무슨 말이냐?”
한데,
“새암은 재주 없는 놈이 재주 있는 놈을 미워하며, 공 없는 놈이 공 있는 놈을 싫어하여 죽이려 함이 새암이니라.”
“그러면 네 이름이 새암이니 남의 집과 남의 나라도 많이 망쳤겠구나.”
“암, 그럼. 단군 때에는 비록 마음이 있었으나 도덕의 아래라 감히 행세치 못하다가 부여의 말년부터 내 이름이 비로소 나타날새, 금와(金蛙)의 아들들이 내 맛을 보고는 동명왕을 죽이려 했고, 비류(比流)란 사람이 내 맛을 보고는 온조왕과 갈라지고, 수성왕(遂成王)이 내 맛을 보고는 국조(國祖)의 부자(父子)를 죽이며, 봉상왕(烽上王)이 내 맛을 보고는 달가(達賈) 같은 공신을 베고, 백제의 신하인 백가(苩加)가 동성왕을 죽이며 패업(覇業)을 꺾음도 나의 꾀임이며, 좌가려(左可慮)가 고국천왕(故國川王)을 싫어하며 연나(椽那)에 반(叛)함도 나의 홀림이라. 나의 물결이 가는 곳이면 반드시 화환(禍患)을 내어 삼국의 강성이 더 늘지 못함이 내 솜씨에 말미암음이라고도 할지나 그러나 이때는 오히려 정도(正道)가 세고 내가 약하여 크게 횡행치 못하더니 세강속 말하여 삼국의 말엽이 되매 내가 간 곳마다 성공하며, 백제에 들매 의자왕의 군신이 서로 새암하여 성충(成忠)이며, 흥수(興首)며, 계백(階伯)이 같은 현상맹장(賢相猛將)을 멀리하여 망함에 이르며, 고구려에 들매 남생(男生)의 형제가 서로 새암하여 평양이며, 국내성이며, 개모성 같은 명성을 적국에 바쳐 비운에 빠지고 복신(福信)은 만고의 명장으로 풍왕(豊王)의 새암에 장심(掌心) 꾀이는 악형을 받아 중흥의 사업이 꿈결로 돌아가고 검모잠(劍牟岑)은 개세의 열장부로 안승왕(安勝王)의 새암에 흉참(凶慘)한 주검이 되어 다물(多勿)의 장지(壯志)가 이슬같이 사라지고 이 뒤부터는 더욱 내 판이라.
고려 왕씨조나 조선 이씨조는 모두 내 손에 공기 노는 듯하여 군신이 의심하며, 상하가 미워하며, 문무가 싸우며, 사색(四色)이 서로 잡아먹으며, 이백만 홍건적을 쳐물린 정세운(鄭世雲)도 죽이며, 수십 년 해륙전에 드날리던 최영(崔瑩)도 베며, 팔 년 왜란에 바다를 진정하여 해왕의 웅명(雄名)을 가지던 이순신(李舜臣)도 가두며, 일개 서생으로 왜장 청정(淸正)을 부수고 함경도를 찾던 정문부(鄭文孚)도 죽이어 드디어 금수강산이 비린내가 나도록 하였노라.”
한놈이 그 말을 듣고는 몸에 소름이 끼쳐 친구를 돌아보며,
“이 물이야 건널 수 있느냐?”
하니 넷놈 닷놈이 웃으며,
“그것이 무슨 말이요, 백이숙제(伯夷叔齊)가 탐천물을 마시면 그 마음이 흐릴까요.”
하더니 벗고 들어서거늘 한놈, 둣놈, 셋놈, 세 사람도 용기를 내어 뒤에 따라 서며 도통사 최영이 지은,
까마귀 눈비 맞아 희난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夜光明月)이 밤인들 어둘소냐
임 향한 일편단심 가실 줄이 있으랴
한 시조를 읊으며 건너니라.
저편 언덕에 다다라서는 서로서로 냇물을 돌아보며,
“요만 물에 어찌 장부의 마음을 변할쏘냐? 우리가 아무리 어리다 해도 혹 국사에 힘써 화랑의 교훈을 받은 이도 있으며 혹 한학에 소양이 있어 공자, 맹자의 도덕에 젖은 이도 있으며, 혹 불교를 연구하여 석가의 도를 들은 이도 있으며, 혹 예배당에 출입하여 양부자(洋夫子)의 신약도 공부한 이 있나니 어찌 접싯물에 빠져 형제가 새로 새암하리요.”
하고 더욱 씩씩한 꼴을 보이며 길에 오르니라.
싸움터가 가까워 온다. 임나라가 가까워 온다. 깃발이 보인다. 북소리가 들린다. 어서 가자 재촉할새 가장 날래게 앞서 뛰는 놈은 셋놈이더라.
넷놈이 따르려 하여도 따르지 못하여 허덕허덕하며 매우 좋지 못한 낯을 갖더니,
“저기 적진이 보인다.”
하고 실탄 박은 총으로 쏜다는 것이 적진을 쏘지 않고 셋놈을 쏘았더라.
어화 일곱 사람이 오던 길에 한 사람은 고통에 못 이기어 떨어지고 또 한 사람은 황금에 마음이 바뀌어 떨어졌으나 오늘같이 서로 죽이기는 처음이구나!
새암의 화가 참말 독하다.
죽은 놈은 할 수 없거니와 죽인 놈도 그저 둘 수 없다 하여 곧 넷놈을 잡아 태워 죽이고, 한놈, 둣놈, 닷놈 무릇 세 사람이 동행하니라.
인간에서 알기는 도깨비가 임에게 대하여 만나면 으레 항복하고 싸우면 으레 진다 하더니 싸움터에 와보니 이렇게 쉽게는 말할 수 없더라.
임의 키가 열 길이 되더니 도깨비의 키도 열 길이 되고, 임의 손이 다섯 발이 되더니 도깨비의 손도 다섯 발이 되고, 임의 눈에 번개가 치면 도깨비의 눈에도 번개가 치고, 임의 입에 우뢰가 울며 임이 날면 도깨비도 날며, 임이 뛰면 도깨비도 뛰며, 임의 군사가 구구는 팔십일만 명(九九=八十一萬名)인데 도깨비의 군사도 꼭 그 수효이더라.
『고구려사』에 보면 동천왕이 위장(魏將) 모구검(母丘儉)을 처음에 이기고 웃어 가로되,
“이같이 썩은 대적을 치는 데 어찌 큰 군사를 쓰리요.”
하고 정병은 다 뒤에 앉아 있게 하고 다만 오천 명으로써 적의 수만 명과 결전하다가 도리어 큰 위험을 겪은 일이 있더니 임나라에서도 이런 짓이 있도다.
싸움이 시작되자 임이 영(令)을 내리시되,
“오늘은 전군이 다 나갈 것 없이 다만 9분의 1 곧 1999만 명만 나서며 또 연장은 가지지 말고 맨손으로 싸워 도깨비의 무리가 우리 재주에 놀라 다시 덤비지 못하게 하여라.”
하니 좌우는 안 될 것이라고 간하나 임이 안 들으신다.
진이 사괴매 임의 군사가 비록 날쌔나 어찌 연장 가진 군사와 겨루리요. 칼이며, 총이며, 불이며, 물이며 온갖 것을 다하여 임의 군사를 치는데 슬프다.
임의 군사는 빈 주먹이 칼에 부서지고, 흰 가슴이 총에 꿰뚫리며, 뛰다가 불에 타며, 기다가 물에 빠져 살 길이 아득하다. 입으로는,
“우리는 정의의 아들이다. 악이 아무리 강한들 어찌 우리를 이기리요.”
하고 부르짖으나 강적 밑에서야 정의의 할아비인들 쓸데 있느냐? 죽는 이 임의 군사요, 엎치는 이 임의 군사더라.
넓고 넓은 큰 벌판에 정의의 주검이 널리었으나 강적의 칼은 그치지 않는다.
한놈의 동행인 닷놈이 고개를 숙이고 탄식하되,
“이제는 임의 나라가 고만이로구나, 나는 어디로 가노?”
하더니 청산 백운 간에 사슴의 친구나 찾아간다고 봇짐을 싸며, 셋놈은 왈칵 나서며,
“장부가 어찌 이렇게 적막히 살 수야 있나, 종살이라도 하며 세상에서 어정거림이 옳다.”
하고 적진으로 향하니라.
이때 한놈은 어찌할까 한놈은 한놈의 짐을 지고 왔으며 너희들은 각기 너희들의 짐을 지고 왔나니 짐 벗어 던지고 달아나는 너희들을 따라가는 한놈이 아니요, 가는 놈들은 가거라, 나는 나대로 하리라 함이 정당한 일인 듯하나, 그러나 너는 내 손목을 잡고 나는 네 손목을 잡아, 죽으나 사나 같이 가자 하던 일곱 사람에 단 셋이 남아 나밖에는 네 형이 없고 너밖에는 내 아우 없다 하던 너희들을 또 버리고 나 홀로 돌아섬도 또한 한놈이 아니도다.
한놈이 이에 오도가도 못 하고 길 곁에 주저앉아 홀로,
“세상이 원래 이런 세상인가? 한놈이 친구를 못 얻음인가? 말짱하게 맹세하고 오던 놈들이 고되다고 달아난 놈도 있고, 할 수 없다고 달아난 놈도 있어 일곱 놈에 나 한놈만 남았구나.”
탄식하니 해는 서산에 너울너울 넘어가 사람의 사정을 돌보지 않더라. 이러나저러나 갈 판이라고 두 주먹을 부르쥐고 달리더니 난데없는 구름이 모여들어 하늘이 캄캄해지며 범과 이리와 사자와 온갖 짐승이 꽉 가로막아 뒤로 물러갈 길은 보이지만 앞으로 나아갈 길은 없더라.
할 수 없이 다시 오던 길을 찾아 뒤로 몇 걸음 물러서다가,
“뺀 칼을 다시 박으랴!”
소리를 지르고 앞을 헤치고 나아가니 임의 형상은 보이지 않으나 임의 발소리가 귀에 들린다.
“네 오느냐? 너 홀로 오느냐?”
하시거늘 한놈이 고되고 외로워 어찌할 줄 모르던 차에 인자하신 말씀에 느낌을 받아 눈에 눈물이 핑 돌며 목이 탁 메여 겨우 대답하되,
“예, 홀로 옵니다.”
“오냐, 슬퍼 말라. 옳은 사람은 매양 무척 고생을 받고야 동무를 얻나니라.”
하시더니 칼을 하나 던지시며,
“이 칼은 3925년(서기 1592년) 임진왜란에 의병 대장 정기룡(鄭起龍)이 쓰던 삼인검(三寅劍)이다. 네 이것을 가지고 적진을 쳐라!”
하시더라. 한놈이 칼을 받아 들고 나서니 하늘이 개며 해도 다시 나와 범과 사자들은 모두 달아나 앞길이 탁 트이더라.
몸에 임의 명령을 띠고 손에 임이 주신 칼을 들었으니 무엇이 무서우리요. 적진이 여우 고개에 있단 소문을 듣고 그리로 향하여 가는데 칼이 번쩍번쩍하더니 찬바람 치며 비린내가 코를 찌르거늘,
“에쿠, 적진이 당도하였구나.”
하고 칼을 저으며 들어가니 수십만 적병이 물결 갈라지듯 하는지라. 그 사이를 뚫고 들어간즉 어떤 얼굴 괴악한 적장이 궤에 기대어 임진 전사를 보는데 한놈의 손에 든 칼이 부르르 떨어 그 적장을 가리키며소리치되,
“저놈이 곧 임진왜란 때에 조선을 더럽히려던 일본 관백(關白) 풍신수길(豊臣秀吉)이라.”
하거늘 원수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한놈이 어찌 용서가 있으리요. 두 눈에 쌍심지가 오르며 분기가 정수리를 쿡 찔러 곧 한칼에 이놈을 고깃장을 만들리라 하여 힘껏 겨누며 치려 한즉 풍신수길이 썩 쳐다보며 빙그레 웃더니 그 괴악한 얼굴은 어디 가고 일대 미인이 되어 앉았는데 꽃 본 나비인 듯, 물 찬 제비인 듯, 솟아오르는 반월인 듯…….
한놈이 그것을 보고 팔이 찌르르해지며 차마 치지 못하고 칼이 땅에 덜렁 내려지거늘 한놈이 칼을 집으려 하여 몸을 굽힌 새 벌써 그 미인이 변하여 개가 되어 컹컹 짖으며 물려고 드나 한놈이 칼을 잡지 못하여 맨손으로 어쩔 수 없어 삼십육계의 상책을 찾으려다가 발이 쭉 미끄러지며,
“아차!”
한마디에 어디로 떨어져 내려가는지 한참 만에 평지를 얻은지라. 골이 깨어지지나 않았는가 하고 손으로 만져 보니 깨어지지는 않았으나 무엇이 쇠뭉치로 뒤통수를 딱딱 때려 아파 견딜 수 없고 또 쇠사슬이 어디서 오더니 두 손을 꽉 묶으며 온몸을 굴신할 수 없게 얽어 매고 불침, 불칼이 머리부터 시작하여 발끝까지 쑤시는도다.
한놈이 깜짝 놀라,
“아이고, 내가 지옥에 들어왔구나. 그러나 내가 무슨 죄로 여기를 왔나?”
하고 땅에 떨어진 날부터 오늘까지 아는 대로 무릇 삼십여 년 사이의 일을 세어 보나 무슨 죄인지 모르겠더라. 좌우를 돌아보니 한놈과 같이 형구를 가지고 앉은 이가 몇몇 있거늘,
“내가 무슨 죄로 왔느냐?”
물은즉 잘 모른다 하며,
“너희들은 무슨 죄로 왔느냐?”
하여도 모른다 하더라.
한놈이 소리를 지르며,
“사람이 어찌 아무 죄로 왔는지도 모르고 이 속에 갇혔으리요?”
하니, 대답하되,
“얼마 안 되어 순옥사자(巡獄使者)가 오신다니 그에게 물어 보라.”
하더라.
5
아픔도 아픔이어니와 가장 갑갑한 것은 내가 무슨 죄로 이 속에 왔는지를 모름이다.
“순옥사자가 오시면 안다 하니 언제나 오나.”
하며 빠지는 눈을 억지로 참고 며칠을 기다리더니 하루는 삼백예순다섯 가지 풍류 소리가 나며,
“신임 순옥사자 고려 문하시랑 동문장사 강감찬(高麗門下侍郞同文章事 姜邯贊)이 듭신다.”
하더니 온 옥중이 괴괴한데, 한놈이 좌우의 낯을 살펴보니 어떤 사람은,
“나야 무슨 죄가 있나, 설마 순옥사자께서 곧 놓아 보내겠지.”
하는 뜻이 있어 기꺼운 낯을 가지며, 어떤 사람은,
“내 죄는 이보다 더 참혹한 지옥에 갇힐 터인데 순옥사자가 오시면 어찌하나.”
하는 뜻이 있어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낯을 가지며, 어떤 사람은,
“아이고, 이제는 큰일났구나. 내 죄야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만 순옥사자가 아마 덮어놓고 죽이실걸.”
하는 뜻이 있어 잿빛 같은 낯을 가지며, 지옥이 무엇인지 천당이 무엇인지 순옥사자가 가는지 오는지도 모르고 앉아 있는 사람도 있으며,
“오냐, 지옥에 가두어라. 가두면 장 가두겠느냐, 나가는 날에는 또 도적질이나 하자.”
하는 사람도 있으며,
“우리 어머니가 내 일을 알면 오죽 울겠느냐? 순옥사자시여! 제발 놓아 주옵소서.”
하는 사람도 있으며,
“옥이고 깻묵이고 밥이나 좀 먹었으면.”
하는 사람도 있으며,
“순옥사자가 오기만 오너라. 내 죽자사자 해보겠다. 인간에서 하던 고생도 많은데 또…… 내가 돈이 백만 냥이 있으니 순옥사자의 옆구리만 쿡 지르면 되지.”
하는 사람도 있으며,
“나는 계집인데 순옥사자가 밉지 않은 나야 설마 죽이겠니.”
하는 사람도 있어, 빛도 각각이요 말도 각각이더라.
옥중에 서기가 돌며 순옥사자 강감찬이 드시는데 키가 불과 오 척이요, 꼴도 매우 왜루하지만 두 눈에는 정기가 어리고 머리 위에는 어사화(御賜花)가 펄펄 난다.
이때에 당하여 사방을 돌아보니 억센 놈도 어디 가고, 다리 긴 놈도 어디 가고, 겁 많은 놈도 어디 가고, 돈 많은 놈도 어디 가고, 얼굴 좋은 아가씨도 어디 가시고, 온 옥중에 있는 사나이나 계집이나 모두 오래 젖에 주린 아이가 어미 몸을 보는 듯하여 콱 엎드리자 흑흑 느끼어 가며 운다.
강감찬이 보시더니 불쌍히 여기사 물으시되,
“왜 처음에 지옥이 무서운 줄 몰랐더냐? 죄를 왜 지었느냐?”
하니 옥중이 묵묵하여 아무 대답이 없거늘 한놈이 나서며 여짜오되,
“우리가 나가고 싶단 말도 없었는데 임이 우리를 인간에 내시고 우리가 오겠다고 원하지도 않았는데 임이 우리를 지옥에 넣으시니 우리들이 임의 일이 답답하여 우나이다.”
강감찬이 웃으시며,
“임이 너희들을 내셨다더냐? 또 지옥에 올 때도 임이 가라고 하시더냐?”
“그러면 누가 내시고 누가 이리 오게 하셨습니까?”
강감찬이 크게 소리를 질러,
“네가 네 일을 모르고 누구에게 묻느냐?”
하고 꾸짖으니 온 옥중이 모두 한놈과 함께 황송하여 일제히 그 앞에 엎드리며,
“미련한 것들이 알지 못하오니 사자님은 크게 사랑하사 미혹을 열어 주소서.”
강감찬이 지팡이를 거꾸로 받드시더니 모든 옥수에게 말씀하시되,
“너희들이 짓지 않으면 지옥이란 이름이 없으리니 그러므로 지옥은 임이 지은 것이 아니라 곧 너희들이 지은 지옥이니라.”
한놈이 일어서 아뢰되,
“우리가 지은 지옥이면 깨기도 우리 힘으로 깰 수 있습니까?”
강감찬이 가라사대,
“작은 죄는 자기 손으로 깨고 나아갈지나 큰 죄는 제 손은 그만두고 님이 깨어 주려 하여도 깰 수 없나니 천겁 만겁을 지옥에서 썩을 뿐이니라.”
한놈이 묻되,
“어떤 죄가 큰 죄오니까?”
강감찬이 가라사대,
“처음에 단군이 오계를 세우시니,
1) 나라에 충성하며,
2) 집에서 효도하고 우애하며,
3) 벗을 미덥게 사귀며,
4) 싸움에서 뒷걸음질 말며,
5) 생물을 죽이매 골라 죽임이라.
옛적에는 오계에 하나만 범하여도 큰 죄라 하여 지옥에 내리더니 이제 와서는 나라일이 급하여 다른 죄를 이루 다 다스릴 수 없어 오직 나라에 대한 죄만 큰 죄라 하여 지옥에 내리느니라.”
한놈이,
“나라에 대한 큰 죄가 몇입니까?”
물으매 강감찬이,
“네가 앉아 들어라!”
하시더니 하나씩 세신다.
첫째는 국적을 두는 지옥이 일곱이니,
㈀ 국민의 부탁을 맡아 임금이 되자거나 대신이 되어 나라의 흥망을 어깨에 메인 사람으로 금전이나 사리사욕만 알다가 적국에게 이용된 바가 되어 나라를 들어 남에게 내어 주어 조상의 역사를 더럽히고 동포의 생명을 끊나니 백제의 임자(任子)며, 고구려의 남생(男生)이며, 발해의 말제(末帝) 인찬(諲譔)이며, 대한말(大韓末)의 민영휘(閔泳徽), 이완용(李完用) 같은 무리가 이것이다. 이 무리들은 살릴 수 없고 죽이기도 아까우므로 혀를 빼며 눈을 까고 쇠비로 그 살을 썰어 뼈만 남거든 또 살리고 또 이렇게 죽이되 하루 열두 번을 이대로 죽이고 열두 번을 이대로 살리어 죽으면 살리고 살면 죽이나니 이는 곧 매국 역적을 처치하는 ‘겹겹지옥’이니라.
㈁ 백성의 피를 빨아 제 몸과 처자를 살찌우던 놈이니 이놈들은 독 속에 넣고 빈대와 뱀 같은 벌레로 그 피를 빨게 하나니 이는 ‘줄줄지옥’이니라.
㈂ 혓바닥이나 붓끝으로 적국의 정책을 노래하고 어리석은 백성을 몰아 그물 속에 들도록 한 연설쟁이나 신문기자들은 혀를 빼고 개의 혀를 주어 날마다 ‘컹컹’ 짖게 하나니 이는 ‘강아지지옥’이니라.
㈃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해먹을 것 없으니 정탐질이나 하리라 하여 뜻있는 사람을 잡아 적국에게 주는 놈은 돼지껍질을 씌워 ‘꿀꿀’ 소리나 하게 하나니 이는 ‘돼지지옥’이니라.
㈄ 겉으로 지사인 체하고 속으로 적 심부름하던 놈은 그 소위가 더욱 밉다. 이는 머리에 박쥐감투를 씌우고 똥집을 빼어 소리개를 주나니 이는 ‘야릇지옥’이니라.
㈅ 딸각딸각 나막신을 끌고 걸음걸음 적국놈의 본을 뜨며 옷 입고 밥 먹는 것도 모두 닮으려 하며 자식이 나거든 내 말을 버리고 적국 말을 가르치는 놈은 목을 잘라 불에 넣으며 다리를 끊어 물에 던지고 가운데 토막은 주물러 나나리를 만드나니 이는 ‘나나리지옥’이니라.
㈆ 적국놈에게 시집 가는 년들이며 적국의 년에게 장가 가는 놈들을 불칼로 그 반신을 끊나니 이는 ‘반신지옥’이니라.
둘째는 망국노를 두는 지옥이니,
㈀ 나라야 망하였든 말았든 예수나 잘 믿으면 천당에 간다 하며, 공자의 글이나 잘 읽고 산림에서 독선기신(獨善其身)한다 하여 조상의 역사가 결딴남도 모르며 부모나 처자가 모두 남의 종이 된지는 생각도 않고 오히려 선과 천당을 찾는 놈들은 똥물에 튀하여 쇠가죽을 씌우나니 이는 ‘똥물지옥’이니라.
㈁ 정견을 가진 당파는 있어야 하지만 오직 지방으로 가르며, 종교로 가르며, 사감(私感)으로 가르며, 한 나라를 열 쪽에 내어 서로 해외로 다니며 싸우고 이것을 일로 아는 놈들은 맷돌에 갈아 없애야 새싹이 날지니 이는 ‘맷돌지옥’이니라.
㈂ 말도 남의 말만 알고 풍속도 남의 풍속만 쫓고 종교나 학문이나 역사 같은 것도 남의 것을 제 것으로 알아 러시아에 가면 러시아인이 되고 미국에 가면 미국인 되는 놈들은 밸을 빼어 게같이 만드나니 이는 ‘엉금지옥’이니라.
㈃ 동양의 아무 나라가 잘되어야 우리의 독립을 찾으리라 하며, 서양의 아무 나라가 우리 일을 보아 주어야 무엇을 하여 볼 수 있다 하여, 외교를 의뢰하여 국민의 사상을 약하게 하는 놈들은 그 몸을 주물러 댕댕이를 만들어 큰 나무에 감아 두나니 이는 ‘댕댕이지옥’이니라.
㈄ 의병도 아니요, 암살도 아니요, 오직 할 일은 교육이나 실업 같은 것으로 차차 백성을 깨우자 하여 점점 더운 피를 차게 하고 산 넋을 죽게 하나니 이놈들의 갈 곳은 ‘어둥지옥’이니라.
㈅ 황금이나 여색 같은 데에 빠져, 있던 뜻을 버리는 놈은 그 갈 곳이 ‘단지지옥’이니라.
㈆ 지식이 없어도 아는 체하고 열성이 없어도 있는 체하며, 죽기는 싫으나 명예는 차지하려 하여 거짓말로 남 속이고 다니는 놈들은 불로 지져 뜨거움을 보여야 하나니 이는 ‘지짐지옥’이니라.
㈇ 머리 앓고 피 토하여 가며, 나라일을 연구하지 않고, 오직 남의 입내만 내어 마치니의『소년 이태리』를 본떠 회(會)의 규칙을 만들며 손일선(孫逸仙)의『군정부 약법(約法)』을 번역하여 자가(自家)의 주의를 삼아 특유한 국성(國性)이 없이 인판(印板)으로 사업하려는 놈들이 갈 지옥은 ‘잔나비지옥’이니라.
㈈ 잔꾀만 가득하여 일 없는 때는 칼등에서 춤이라도 출 듯이 나서다가 일 있을 때는 싹 돌아서 누울 곳을 보는 놈은 그 기름을 빼어야 될지라. 고로 가마에 넣고 삶나니 이는 ‘가마지옥’이니라.
㈉ 아무래도 쓸데없다. 왼손으로 총을 막으며 빈 입으로 군함 깰까 망한 판이니 망한 대로 놀자 하는 놈은 무쇠두멍을 씌워 다시 하늘을 못 보게 하나니 이는 ‘쇠솥지옥’이니라.
㈊ 돈 한푼만 있는 학생이면 요릿집에 데리고 가며 어수룩한 사람이면 영웅으로 추켜세워 저의 이용물을 만들고 이를 수단이라 하여 도덕 없는 사회를 만드는 놈의 갈 곳은 ‘아귀지옥’이니라.
㈋ 공자가 어떠하다, 예수가 어떠하다, 나폴레옹이 어떠하다, 워싱턴이 어떠하다, 하며 내 나라의 성현 영웅을 하나도 모르는 놈은 글을 다시 배워야 하나니 이놈들의 갈 곳은 ‘종아리지옥’이니라.
이 밖에도 지옥이 몇몇이 더 되나 너희들이 알아둘 지옥은 이만하여도 넉넉하니라.
온 옥수(獄囚)가 악머구리 울듯 하며,
“사자님은 크게 어진 마음으로 죄를 용서하시고 이곳을 떠나게 하소서.”
강감찬이,
“공은 공대로 가며 죄는 죄대로 간다.”
하고 부채로 썩 가리우니 모든 옥수가 어디에 있는지 보지는 못하나 마음에 그 참형당할 일이 애달퍼 강감찬의 앞에 나아가 매국적 같은 큰 죄는 할 수 없거니와 그 나머지는 다 놓아 보냄을 청하니 강감찬이 한놈의 등을 만지며,
“그대가 이런 마음으로 임나라에 갈 만하지만 다만 두 사랑이 있으므로 이곳까지 옴이로다.”
하거늘 한놈이 그제야 미인의 홀림으로 풍신수길을 놓치던 일을 생각하고 묻자와 가로되,
“나라 사랑하는 사람은 미인을 사랑하지 못하옵니까?”
강감찬이 땅 위에 놓인 칼을 가리키며,
“이 칼 놓은 자리에 다른 것도 또 놓을 수 있느냐?”
“안 될 말입니다. 한 물건이 한 시에 한 자리를 차지할 수가 있습니까?”
강감찬이 이에 손을 치며,
“그러하니라. 한 물건이 한 시에 한 자리를 못 차지할지며 한 사상이 한 시에 한 머릿속에 같이 있지 못하나니 이 줄로 미루어 보아라. 한 사람이 한 평생 두 사랑을 가지면 두 사랑이 하나도 이루기 어려운 고로 이야기에도 있으되 ‘두 절개가 되지 말라’ 하니 그 부정함을 나무람이니라.”
한놈이 또 묻되,
“그 줄이 있습니까?”
강감찬이 대답하되,
“소경은 귀가 밝고 귀머거리는 눈이 밝다 함은 한 길로 가는 까닭이라. 그러기에 석가여래가 아내와 아들을 다 버리고 보리수 밑에서 아홉 해를 지내심이니라.”
“애국자의 일도 종교가와 같으오리까?”
“하나는 출세자(出世者)의 일이요, 하나는 입세자(入世者)의 일이니 일은 다르지만 종교가가 신앙밖에 다른 사랑이 있으면 종교가가 아니며, 애국자가 나라밖에 다른 사랑이 있어도 애국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마다 몸은 안 아끼는 이 없지만 충신이 일에 당하면 열두 번 죽어도 사양치 않으며 누가 처자를 안 어여삐하리요만 열사가 나라를 위함에는 가족까지 희생하나니 이와 같이 나라밖에는 딴 사랑이 없어야 애국이어늘 이제 나라도 사랑하며 술도 사랑하면 술로 나라 잊을 적이 있을지며, 나라도 사랑하며 미인도 사랑하면 미인으로 나라 잊을 때가 있을지니라.”
한놈이 절하며 그 고마운 뜻을 올리고 그러나 지옥에서 나가게 하여 달라 하니 강감찬이 가로되,
“누가 못 나가게 하느냐?”
“못 나가게 하는 사람은 없사오나 몸이 쇠사슬에 묶이어 나갈 수 없습니다.”
강감찬이 웃으시며,
“누가 너를 묶더냐?”
하니 한놈이 이 말에 대철대오하여 본래 묶이지 않은 몸을 어디에 풀 것이 있으리요 하고 몸을 떨치니 쇠사슬도 없고 옥도 없고 한놈의 한 몸만 우뚝하게 섰더라.
6
천국은 하늘 위에 있고 지옥은 땅 밑에 있어 그 상거가 천 리나 만 리인 줄 아는 것은 인간의 생각이라 실제는 그렇지 않아서 땅도 한 땅이요, 때도 한 때인데 제치면 임나라고 엎치면 지옥이요, 세로 뛰면 임나라고 가로 뛰면 지옥이요, 날면 임나라며 기면 지옥이요, 잡으면 임나라며 놓치면 지옥이니, 임나라와 지옥의 상거가 요것뿐이더라.
지옥이 이미 부서지매 한놈이 눈을 드니 금으로 지은 집에 옥으로 쌓은 담이 어른어른하고 땅에 깔린 것은 모두 진주와 금강석이요, 맑고 향내나는 공기가 코를 찔러 밥 안 먹고도 배부르며, 나무마다 꽃이 피어 봄빛을 자랑하며 새는 앵무, 공작, 금계, 백학, 꾀꼬리같이 듣고 보기가 좋은 새들이며 짐승은 사람을 물지 않는 문호(文虎), 문표(文豹) 같은 짐승들이요, 거리마다 신라의 만불산(萬佛山)을 벌여 놓고 집집에 고구려의 수모욕을 깔았으며 입은 것은 부여의 문수(紋繡)와 진한의 겸포며 두른 것은 발해의 명주와 신라의 용초며 들리는 것은 변한의 가야금이며 신라의 만만파 쉬는 저며 백제의 공후도 있고 고려의 국악도 있더라. 한놈이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이제는 내가 임나라에 다다랐구나.”
하고 기꺼워 나서니 임나라의 모든 물건도 모두 한놈을 보고 반기는 듯하더라. 임을 보이려 하나 하늘같이 높으시고 바다같이 넓으시고 해같이 밝으시고 달같이 둥그시고 봄같이 따뜻하고 가을같이 매우사 한놈의 좁은 눈으론 볼 수가 없다.
그 좌우에 모셔 앉으신 이는 신앙에 굳으신 동명성제(東明聖帝), 명림답부(明臨答夫), 치제(治劑)에 밝으신 백제의 초고대왕(肖古大王), 발해 선왕(宣王), 이상이 높으신 진흥대왕(眞興大王), 설원랑(薛原郞), 역사에 익으신 신지선인(神誌先人) 이문진(李文眞), 고흥(高興), 정지상(鄭知常), 국문에 힘쓰신 세종대왕, 설총, 주시경, 육군에 능하신 발해 태조, 연개소문, 을지문덕, 해군에 용하신 사법명(沙法名), 정지(鄭地), 이순신, 강토를 개척하신 광개토왕(廣開土王), 동성대제(東聖大帝), 윤관(尹瓘), 김종서(金宗瑞), 법전을 편찬한 을파소(乙巴素), 거칠부(居柒夫), 망국 말엽에 쌍수로 하늘을 받들던 백제 부여의 복신(福信), 고구려의 검모잠(劒牟岑), 판탕시대에 한칼로 외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편히 하던 고려의 최영, 강감찬, 이조의 임경업, 외지에 식민한 서언왕(徐偃王), 엄국시조(奄國始祖), 고죽시조(孤竹始祖), 타국에 가서 왕이 된 고운(高雲), 이정기(李正己), 김준(金俊), 사후에 용이 되어 일본을 도륙(屠戮)하려던 신라 문무대왕(文武大王), 계림의 개 되어도 일본의 신인은 아니 된다던 박제상(朴堤上), 홍건적 이백만을 토평(討平)하고 간계에 죽던 정세운(鄭世雲), 본국 팔성(八聖)을 제 지내고 금나라를 치려던 묘청(妙淸), 중국 흥수에 오행치수의 줄로 하우(夏禹)를 가르친 부루태자(夫婁太子), 일위(一葦)로 대해를 건너 도국 만종(島國蠻種)을 개화시킨 혜자 선사(慧慈禪師), 왕인(王仁) 박사, 안시성에서 당태종 이세민(李世民)의 눈을 뺀 양만춘(楊萬春), 용인읍에서 철례탑(撤禮塔)의 가슴을 맞추던 김윤후(金允侯), 교육계의 종주 되어 서양을 쓸리게 하던 영랑(永郎), 남랑(南郎), 국수(國粹)의 무너짐을 놀라 화랑을 중흥하려던 이지백(李知白), 동족에 대한 의분으로 발해를 구원하려던 곽원(郭元), 왕가도(王可道), 왕실을 다물(多勿)하려 하여 피 흘리던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 두문동(杜門洞) 칠사현(七士賢), 강자를 제재함에는 암살을 유일 신성으로 깨달은 밀우(密友), 유유(紐由), 황창(黃昌), 안중근(安重根), 넘어지는 대하(大厦)를 붙들려고 의기(義旗)를 잡은 이강년(李康年), 허위(許蔿), 전해산(全海山), 채응언(蔡應彦), 조촐한 진단의 여자몸으로 어찌 도적에게 더럽혀지리요 하던 낙화암의 기빈(妃嬪)들, 임진년의 논개(論介), 계월향, 출세한 사람으로 나라일이야 잊을쏘냐 하던 고구려의 칠불(七佛), 고려의 현린 선사(玄麟禪師), 이조의 서산대사(西山大師), 사명당(四溟堂), 국학에서 비록 도움이 없지만 일방의 교문에 통달하여 조선의 빛을 보탠 불학의 원효(元曉), 의상(義湘), 유학의 회제(晦齊), 퇴계(退溪), 세상에 상관없는 물외한인(物外閑人)이지만 청풍고절(淸風苦節)의 한유한(韓惟翰), 이자현(李資玄), 연진수도(鍊傎修道)의 참시(旵始), 정염(鄭 ), 건축으로 거룩한 임류각(臨流閣), 황룡사(皇龍寺) 등의 건축자, 미술로 신통한 만불산 홍구유(紅氍兪)의 제조자, 산술로 부도(夫道), 그림으로 솔거(率居), 음률로 우륵(于勒), 옥보고(玉寶高), 칼을 잘 만드는 가락의 공장(工匠), 맹호를 맨손으로 때려잡는 발해의 장사, 성력(星曆)에 오윤부(伍允孚), 이술(異術)에 전우치(田禹治), 귀귀래래시(歸歸來來詩)로 물질 불멸의 원리를 말한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폭국은 베어도 가하다 하여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의 노설(奴說)을 반대한 죽도(竹島) 정여립(鄭汝立), 철주자(鐵鑄字) 발명한 바치, 비행기 시조 정평구(鄭平九), 이 밖에도 눈 큰 이, 입 큰 이, 팔 긴 이, 몸 굵은 이, 어느 때 외국과 싸워 이긴 이, 어느 곳에서 백성에게 큰 공덕을 끼친 이, 철학에 밝은 이, 도덕에 높은 이, 물리에 사무친 이, 문학에 잘한 이, 한놈이 듣지도 보지도 못하던 선민들도 많으며 또 한놈이 그 자리에서 보고 이제 기억하지도 못할 이도 많이 이 책에 올리지 못하거니와 대개 이때 한놈의 마음은 임나라에 온 것이 기쁠 뿐만 아니라 여러 선왕, 선성, 선민 들을 뵈옴이 고맙더라.
임나라에는 이렇게 모여서 무슨 일을 하시는가 하고 한놈이 눈을 들어 본즉 이상도 하고 기질도 하다. 다른 것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직 낱낱이 비를 만들더니 긴 막대기에 꿰어 드니 그 길이가 몇천 길 몇만 길인지 모를러라. 그 비를 일제히 들더니 곧 하늘에 대고 썩썩 쓴다. 한놈이 놀라 일어나며,
“하늘을 왜 씁니까? 땅에는 먼지나 있다고 쓸지만 하늘이야 왜 씁니까?”
모두 대답하시되,
“하늘을 못 보느냐? 오늘 우리 하늘은 땅보다도 먼지가 더 묻었다.”
하시거늘 한놈이 하늘을 두루 살펴보니 온 하늘에 먼지가 보얗게 덮이었더라. 몇천 몇만 비들을 들이대고 부리나케 쓸지만 이리 쓸면 저쪽이 보얗게 되고 저리 쓸면 이쪽이 보얗게 되어 파란 하늘은 어디 갔는지 옛책에서나 옛이야기에나 듣지도 못하던 흰 하늘이 머리 위에 덮이었더라.
“하늘도 보얀 하늘이 있습니까?”
한놈이 소리를 질러 물으니 누구이신지 누런 옷 입고 붉은 띠 띤 어른이 대답하신다.
“나도 처음 보는 하늘이다. 임 나신 지 삼천오백 년경부터 하늘이 날마다 푸른 날고 보얀 빛이 시작하더니 한 해 지나 두 해 지난 사천이백사십여 년 오늘에 와서는 푸른 빛은 거의 없어지고 소경눈같이 보얗게 되었다. 그런즉 대개 칠백 년 동안에 난 변이요, 이 앞서는 이런 변이 없었나니라.”
하더니 그만 목을 놓고 우는데 울음 소리가 장단에 맞아 노래가 되더라.
하늘이 제 빛을 잃으니 그 나머지야 말할쏘냐
태백산이 높이야 줄어 석 자도 못 되고
압록강이 터를 떠나 오백 리나 이사 갔구나,
아가 아가 우리 아가
네 아무리 어려도 잠 좀 깨어라
무궁화꽃 핀 가지에 찬바람이 후려친다.
그이가 노래를 마치더니,
“한놈아!”
하고 부르더니 서편을 가리키거늘 한놈이 쳐다보니, 해와 같이 나란히 떠오르는데 테두리가 다 네모가 나고 빛은 다 새까맣거늘 보는 한놈이 더욱 놀라,
“하늘이 뽀얗고 해와 달이 네모지며, 또 새까마니 이것이 임나라의 인간과 다른 특색입니까?”
한데, 그이가 깜짝 뛰며,
“그게 무슨 말이냐? 하늘이 푸르고 해와 달이 둥글며 힘은 임나라나 인간이 다 한가지인데 지금 이렇게 된 것은 큰 변이니라.”
한놈이,
“임의 힘으로 이를 어찌하지 못합니까?”
그이가 눈물을 흘리더니 가라사대,
“임나라에야 무슨 변이 나겠느냐? 때로는 모두 봄이요, 땅은 모두 금이요, 짐승도 사람같이 착하니 무슨 변이 나겠느냐? 다만 이천만 인간이 지은 얼로 하늘을 더럽히고 해와 달도 빛이 없게 만들었나니 아무리 임의 힘인들 이를 어찌하리요.”
한놈이,
“인간에서 얼만 안 지으면 해도 옛 해가 되고 달도 옛 달이 되고 하늘도 옛 하늘이 되겠습니까?”
그이가 가라사대,
“암, 그 이를 말이냐? 대개 고려 말세부터 별별 하늘이 우리 진단에 들어오는데, 공자 석가는 더 말할 것 없고 심지어 보살의 하늘이며, 제군(帝君)의 하늘이며, 관우(關羽)의 하늘이며, 도사의 하늘까지 들어와 님의 하늘을 가리워 이천만 사람의 눈이 한쪽으로 뒤집혀서 보고하는 일이 모두 딴전이 되어 국전(國典)과 국보(國寶)가 턱턱 무너지기 시작할새 역사의 제1장에 우리 임 단군을 빼고…… 부여를 제껴 놓고 한 나라 반역자 위만으로 정통을 가지게 하며, 고구려의 혈통인 발해를 물리어 북맥(北貊)이라 하며, 백제의 용무(勇武)를 싫어하여 이를 무도지국(無道之國)이라 하며, 우리의 윤리를 버리고 외국의 문교로 대신하고, 만일 국수(國粹)를 보존하려 하는 이 있으면 도리어 악형에 죽을새 죽도 선생 정여립이 구월산에 들어가 단군에게 제 지내고 시대의 악착한 풍기를 고치려 하여 ‘충신불사이군’이 성인의 말이 아니라고 외쳤나니, 이는 사자후(獅子吼)이어늘 진안(鎭安) 죽도사(竹島寺)에서 무모한 칼에 육장(肉漿)이 되고 그나마 현상(賢相)이며, 명장이며, 위인이며, 재자며, 장사며, 협객이 이 뽀얀 하늘 밑에서 몹쓸 죽음 한 이가 얼마인지 알 수 없나니, 이제라도 인간에서 지난 일의 잘못됨을 뉘우쳐 하고 같이 비를 쓸어 주면 이 하늘과 이 해와 이 달이 제대로 되기 어렵지 않으리라.”
하며 눈물이 비 오듯 하거늘 한놈이 크게 느끼어 ‘그러면 한놈부터 내 책임을 다하리라’ 하고 곧 비를 줍소서 하여 하늘에 대고 죽을 판 살 판 쓸새 무릇 삼칠은 이십일 일을 지나니, 손이 부풀어 이리저리 터지고, 발이 아파 비를 들 수 없었고, 두 눈이 며칠 굶은 사람처럼 쑥 들어가 힘을 다시 더 쓸 수 없는데, 하늘을 쳐다본즉 여전히 뽀얗더라. 한놈이 이어,
“내 힘은 더 쓸 수 없으나 또 내 뒤를 이어 이대로 힘쓰는 이 있으면 설마 하늘이 푸르러질 날이 있겠지.”
하고 이 뜻으로 가갸 풀이를 지었는데,
가갸 거겨 가자 가자, 하늘 쓸러 걸음 걸음 나아가자
고교 구규 고되기는 고되지만, 굳은 마음은 풀릴쏘냐
그기 가 그믐 밤에 달이 나고, 기운 해 다시 뜨도록
나냐 너녀 나 죽거든 네가 하고, 너 죽거든 나 또 하여
노뇨 누뉴 놀지 않고, 하고 보면 누구라서 막을쏘냐
느니 나 늦은 길을 늦다 말고, 이 악물고 주먹 쥐자
다댜 더뎌 다 닳은들 칼 아니랴, 더 갈수록 매운 마음
도됴 두듀 도령님의 넋을 받아 두려운 놈 바이 없다
드디 다 드릴 곳 있으리니, 지경 따라 서고 지고
라랴 러려 나팔 불고 북도 쳤다, 너나 말고 칼을 빼자
로료 루류 로동하고 싸움하여 루만 명에 첫째 되면
르리 라 르르릉 아라, 르릉 아리아 자기 아들 같이
마먀 머며 마마님도, 구경 가오 먼동 곳에 봄이 왔소
모묘 무뮤 모든 사람, 모두 몰아 무쇠 팔뚝 내두르며
므미 마 먼 데든지 가깝든지, 밀어치며 나아갈 뿐
사샤 서셔 사람마다 옳고 보면, 서슬 있어 푸르리라
소쇼 수슈 소름 찢는 도깨비도, 수컷에야 어이하리
스시 사 스승님의 뜻을 받아, 세로 가로 뛰고 지고
아야 어여 아무런들, 내 아들이 어미 없이 컸다 마라
오요 우유 오죽이나 오랜 나라 우리 박달 우리 겨레
으이 아 응응 우는 아기라도, 이 정신은 차리리라
자쟈 저져를 읽으려 하는데 뽀얀 하늘 한가운데에서 새파란 하늘 한쪽이 내다보이며 그 속에서 소리가 난다.
“한놈아, 네 아무리 성력(誠力) 깊지만 한갓 성력으로는 공을 이루기 어려우리니 그리 말고 임의 설시한 ‘도령군’을 가서 구경하여라.”
한놈이,
“도령군이 무엇입니까?”
물은데,
“아! 도령군을 모르느냐? 역사 본 사람으로…….”
하거늘 한놈이 눈을 감고 앉아 역사를 생각하니,
‘대개 도령은 신라의 화랑을 말함이라,『삼국사기』악지(樂志)에 설원랑이 지었다는 도령(徒領) 노래가 곧 화랑의 노래니, 도령은 도령의 음 번역이요, 화랑은 그 뜻 번역인데, 화랑의 처음은 신라 때에 된 것이 아니라, 곧 단군 시조가 태백산에 내려올 때 삼랑과 삼천 도를 거느림이 화랑의 비롯이요, 천왕당 해모수가 도자(徒者) 수백 명을 거느리고 웅심산에 모임도 또한 화랑의 놀음이요, 고구려의 선인은 곧 화랑의 별명인데, 동맹은 선인의 천제(天祭)이며, 백제의 소도는 화랑의 별명인데, 천군은 또 소도제(蘇塗祭)의 신명(神名)이라 명호(名號)는 시대를 따라 변하였으나 정신은 한가지로 전하여 모험이며, 상무(尙武)며, 가무며, 학식이며, 애정이며, 단결이며, 열성이며, 용감으로 서로 인도하여 고대에 이로써 종교적 상무정신을 이루어, 지키면 이기고, 싸우면 물리쳐, 크게 국광을 발휘한 것이 다 신라의 진흥대왕이 더 큰 이상과 넓은 배포로 폐(弊)될 것을 덜고 미와 굳셈을 더 보태어 화랑사의 신기원을 연 고로 영랑, 남랑의 교육이 사해에 퍼지고, 사다함(斯多含), 김흠춘(金欽春) 등 소년의 피꽃이 역사에 빛내었나니, 비록 배화노의 김부식으로도 화랑 이백의 방명미사(芳名美事)를 찬탄함이라. 그 뒤에 문헌이 잔결(殘缺)되므로 어떻게 쇠하고 어떻게 없어짐을 자세히 알 수 없으나,『고려사』에 보매 현종(顯宗) 때 거란이 수십만 대병으로 우리에게 덤비매 이지백이 생각하되 화랑을 막을 정신이 있으리라 하며, 예종이 조서(詔書)로 남랑, 영랑 등 모든 화랑의 자취를 보존하라 하며, 의종도 팔관회에 화랑을 뽑아 고풍을 떨칠 뜻을 가졌었나니, 이때까지도 도령군 곧 화랑의 도가국 중에 한 자리 가졌던 일을 볼지나 이 뒤로 어떻게 되었느냐?’
외우며 생각하고 생각하며 외우더니, 하늘이 다시 소리하기를,
“내가 역사 속에 있는 어려이 생각한다마는 다만 한 가지 또 있다.
『고려사』「최영」전에 최영이 명태조 주원장(朱元璋)과 싸우려 할새, 고구려가 승군 삼만으로 당병 백만을 깨쳤으나, 이제도 승군을 뽑으리라 하였는데, 그 이른바 고구려 승군은 곧 선인군이니, 마치 신라의 화랑도 같은 것이라 그 혼인을 멀리하고, 가사를 돌보지 않음이 승과 같은 고로 고대에도 혹 그 이름을 승군이라고도 하며, 최영은 더욱 선인이나 화랑의 제도를 회복할 수 없어 승으로 대신하려 하여 참말로 승가의 승을 뽑음이나 만일 최영이 죽지 않고 고려가 망치 않았다면, 임의 세우신 화랑의 도가 오백 년 전에 벌써 중흥하였으리라.”
하시거늘, 한놈이 고마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땅에 엎드려 절하고,
“한놈이 도령군 곧 화랑이 우리 역사의 뼈요, 나라의 꽃인 줄을 안 지 오래오며, 또 이를 발휘할 마음도 간절하오나, 다만『신지시사(神誌詩史)』나 거칠부의『선사(仙史)』나 김대문의『화랑세기』같은 책이 없어지므로, 그 원류를 알 수 없어 짝없는 유한을 삼았더니, 이제 임이 도령군을 구경하라 하시니, 마음에 감사할 이 대일 곳 없사오니, 원컨대 바삐 길을 인도하사 평생에 보고 지고 하던 도령군을 보게 하옵소서.”
하며 어린아기 어미 찾듯 자꾸 임을 부르더니, 하늘에서 홍등 한 개가 내려오며, 앞을 인도하여 오색 내를 지나 옥뫼를 넘어 한곳에 다다르니, 돌문이 있는데 금글씨로 새겼으되 ‘도령군 놀음 곳’이라 하였더라.
문 앞에 한 장수가 서서 지키는데 한놈이,
“임나라 서울로부터 구경하러 왔으니 들어가게 하여 주소서.”
한즉,
“네가 바칠 것이 있어야 들어가리라.”
하거늘,
“바칠 것이 무엇입니까? 돈입니까? 쌀입니까? 무슨 보배입니까?”
“그것이 무슨 말이냐? 돈이든지 쌀이든지 보배이든지 인간에서 귀한 것이요, 임나라에서는 천한 것이니라.”
“그러면 무엇을 바랍니까?”
“다른 것 아니라 대개 정이 많고 고통이 깊은 사람이라야 우리의 놀음을 보고 깨닫는 바 있으리니, 네가 인간 삼십여 년에 눈물을 몇 줄이나 흘렸느냐? 눈물 많은 이는 정과 고통이 많은 이며, 이 놀음에 참여하여 상등 손님이 될 것이요, 그 나머지는 중등 손님, 하등 손님이 될 것이요, 아주 적은 이는 들어가지 못하나니라.”
“어려서 젖 달라고 울던 눈물도 눈물입니까?”
“아니라. 그 눈물은 못쓰나니라.”
“열하나 열둘 먹던 때 남과 싸우다가 분하여 운 눈물도 눈물입니까?”
“아니다. 그 눈물도 값없나니라.”
“그러면 오직 나라 사랑이며, 동포 사랑이며, 대적에 대한 의분의 눈물만 듭니까?”
“그러니라. 그 눈물에도 진가를 고르느니라.”
이렇게 받고 차기로 말하다가 좌우를 돌아보니, 한놈의 평일 친구들도 어데로부터 왔는지 문 앞에 그득하더라. 이제 눈물의 정구가 되는데 한놈의 생각에는 내가 가장 끝이 되리로다. 나는 원래 무정하여 나의 인간에 대하여 뿌린 눈물은 몇 방울인가…… (이하 원문 탈락)
출전:단재신채호전집, 단재 신채호 선생 기념사업회(19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