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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러시아 영화의 시작
러시아에 처음으로 영화가 출현한 것은 1896년 5월 프랑스의 뤼미에르영화사가 페테르부르크에 영화관을 개설한 때였다. 그리고 러시아인의 손으로 영화가 제작되기 시작한 것은1908년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지만 상당부분을 -재정적, 기술적- 외국(특히 유럽)에 의존해 있던 러시아의 영화 산업은, 혁명 정부가 들어선 이후가 되어 국가적 차원의 전폭적 지원을 받게 되면서 활성화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러시아 영화는 서구처럼 단순한 재미추구나 오락물이 아닌 교육과 선전의 중요한 매체로 등장했으며,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 덕에 빠르게 성장했다. 또한 탁월한 예술성과 치열한 주제의식으로 러시아영화는 세계영화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해왔고, 오늘날 러시아 영화는 세계영화사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
2. 혁명 이전의 러시아 영화
세계의 영화는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에 의해서 그 첫발을 내디뎠다. 이 뤼미에르가 만든 영화가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모습을 보인 것은 1896년 페테르부르그의 여름 극장인 아쿠아리움에서였다. 이것은 활동 사진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기술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된 계기가 되었다. 뒤이어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영화는 점차 러시아인들의 생활 속으로 파고들어 왔다. 1903-1904년부터 러시아의 대도시와 중․소 도시에는 이동 전기 극장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그것은 영화 제작의 강한 원동력이 되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러시아에서 본격적으로 영화를 제작하게 된 시기는 1908년부터였다. 이 무렵에 러시아 영화 사업가 드란코프와 한존코프는 영화 제작에 착수하였다. 독자적인 영화 제작의 가능성을 보여 준 드란코프는 러시아의 사회․정치적 사건들을 영화로 다루었고,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 독립적 뉴스를 촬영하였다. 그러나 후에 그는 투기적으로 영화 제작에 참여, 그 영화의 질은 떨어지게 된다.
한편 초기 영화 제작에서 긍정적인 인물로 평가받는 한존코프는 1904-1914년의 기간 동안 70여 편의 영화를 제작하였는데, 그는 영화의 테마와 주제를 러시아 고전 작품과 역사 속에서 찾았다. 이 시기에 영화는 문학 등 인접 예술의 영향 하에서 성장하게 된다. 그의 작품으로는 <예브게니 오네긴>, <스페이드의 여왕>, <루살카>, 레르몬토프의 <가장무도회>, 고골의 <죽은 혼>, 톨스토이의 <어둠의 왕국>,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 등을 들 수 있다. 그는 또한 역사 영화의 효시가 되었다.
1908-1914년에 제작된 대부분의 영화는 전쟁 선동 작품들이었고, 그 이외의 작품들은 범죄 영화나 비사실적인 멜로 드라마 등과 같이 흥미를 끄는 수준의 영화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작품들로는 <백작의 딸-여 스파이>, <니즈 고로드 시장의 비밀>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전쟁을 테마로 한 영화로는 <황제와 조국을 위하여>, <농민의 나라 러시아가 흔들리고 있다> 등이 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기부터 1917년 혁명기까지의 영화에서 가장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한 영화는 상류 사회를 묘사한 심리 드라마였다. 그 영화들은 인간의 심오한 내면적 체험을 잘 묘사하였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기에는 전선에서 뉴스 영화가 촬영되었는데, 그것은 사건에 대한 작가들의 평가나 사상없이 무미건조하게 정보만을 전달하는 방식을 취했다. 그러나 많은 결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뉴스 영화는, 민중들이 주요 인물로 등장하게 될 20년대 소비에트 영화의 주된 내용과 형식의 중요한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겠다. 무엇보다도 전쟁 중의 영화는 관중들의 애국심을 불러일으킬 목적으로 제작되었다. 1917년 2월 혁명기의 러시아 영화는 다양한 사회적 현상, 정치적 견해와 인간의 심리적 상태를 표방한 영화들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3. 혁명 이후의 소비에트 영화
○ 혁명 직후
1917년 10월 혁명은 영화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 분야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볼셰비키들은 정치적 선동과 선전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따라서 혁명직후의 영화예술과 영화산업은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성장했다. 1919년 레닌은 "영화산업의 국영화법령" 에서 "영화는 대중선동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기 때문에 모든 예술장르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예술"이라고 평가했다. 소비에트 영화는 이런한 기본노선에따라 공산주의 이념의 선전과 민중의 교화를 위해 만들어 졌다. 영화는 이제 단순한 오락물로서가 아니라, 대중들의 교육과 계몽의 도구로서 기능해야만 했다. 이에 이 시기의 영화는 공산주의의 이념과 민중의 교화를 위해 만들어지게 되었다.
혁명 직후의 영화는 국가의 적극적인 지원 속에서 발전했다. 창조적이고 체계적인 영화 제작을 위한 목적으로 1918년 11월에 페트로그라드에 사진과 사진기술대학이 설립되었고, 1919년 10월에는 모스크바 국립영화학교(현재 러시아 국립영화대학)가 모습을 드러냈다. 반면 영화사업가들은 예술에 대한 정부 조치에 저항하였고 영화의 혁명적 테마를 무시하였다. 또한 10월 혁명의 사회적, 정치적 불안으로 배우들, 감독들과 영화 제작 인력들이 외국으로 빠져나가서 영화계는 텅 빈 상태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영화에 관련된 모든 일은 정부의 통제하에 있었다. 이 무렵에는 정치적 선동 영화, 뉴스 영화와 다큐멘터리 영화가 만들어졌다. 1918년에는 <무정부주의자들의 무장 해제>와 같은 단편 다큐멘터리 영화가 등장하였다. 또한 선동 영화에는 그야말로 소비에트 정권의 이데올로기와 명확한 혁명적 사상이 반영되었다.
1) 1920년대 소비에트 영화
1차 대전과 국내 전쟁으로 인해 황폐화된 러시아 혁명 정부는 혹독한 경제 상황을 받아들여야 했다. 당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기본 자원이 없었고 영화 제작 산업은 더욱더 악화되었다. 또한 혁명전 러시아에서 활동했던 외국영화사들은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자 모든장비와 인력을 가지고 러시아를 떠났다.
그러나 신경제정책(1921-1927)으로 국가 산업은 점차 활기를 띠게 되었고, 그 물결은 국민들에게 어느 정도의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여유를 제공하였다. 이로 인해 고스키노(1922, 소련 국가영화위원회)와 함께 국가 및 개인의 영화 산업이 활성화 되었다. 그러나 이들 영화 산업의 대부분은 국내 영화 제작보다는 외국 영화 임대에 더욱 집중되었다. 따라서 20년대 초의 영화들은 독일, 프랑스, 미국의 수사 범죄 영화, 코미디 영화, 멜로 드라마로 가득했다. 이 시기의 작품은 '독창성'보다는 '양'에 치중하게 되었던 것이다.
2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소비에트영화에 새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20년대 중반에 소비에트 영화에 다양한 혁신의 바람을 불러일으킨 사람들은 젊고 진보적인 영화인들이었다(쁘로따자노프, 뿌도프킨, 베르또프, 에이젠쉬쩨인, 코진체프, 트라우베르그, 도브젠코, 베르토프 등). 이들 영화인들은 이전 시기의 방법과는 달리 독창적이면서 개인적인 양식의 예술 방법을 채택한다. 따라서 이 시기의 영화는 새로운 형식과 표현 수단을 창출해냈다. 이것은 소비에트 영화의 발전과 다양화를 가져다 준 혁신적인 발견이었다. 또한 이 시기에 개발된 영화 기법들은 전 세계의 영화 제작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중에서 에이젠슈쩨인의 '몽타주' 이론은 영화의 구성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간단히 언급하자면 그의 몽타주는 관객을 자극하고 선동하는 방법으로서 상반된 쇼트들을 변증법적으로 합하는 편집 방법이다. 즉 그의 몽타주 이론은 정과 반의 충돌에 기초하여 쇼트들의 병치들을 유도해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몽타주 이론은 혁명 후의 소비에트 무성 영화의 고유한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20년대 중후반은 가장 유명한 소비에트 무성영화가 만들어진 시기이다. 이 시기를 대표할 만한 작품들로는 에이젠슈쩨인의 <파업>, <전함 포템킨>, <10월>, 베르토프의 <카메라를 가진 사나이>, 뿌도프킨의 <어머니>, <페테르부르그의 종말>, 도브젠코의 <조병창>, <땅>등을 들 수 있다. 20년대는 그야말로 소비에트 영화의 황금 시대였다. 이 시기에 비로소 소비에트 영화는 표현의 다양성을 획득하고 확장한 것이었다.
2) 1930-1940년대의 소비에트 영화
30년대 들어서는 세계 영화에서는 유성 영화가 등장하게되고, 소비에트 영화에서도 유성 영화가 등장하는데 유성의 사용은 뉴스 영화에서 처음 시작하였고 실제적인 유성 영화는 1931년 니콜라이 에크 감독의 <인생 안내>로부터 시작되었다.
1932년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라는 공식적 용어가 등장하면서 예술의 사회적 역할의 중요성이 더욱더 강조되었다. 이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라는 것은 사회주의 정신으로 민중을 교육시키고, 사상적 개조의 임무를 띤 혁명의 발전 속에서 현실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창작 방법으로서 받아들여졌다. 이 당시 영화의 주인공으로는 기존의 작품에서 등장한 대중이나 집단이 아닌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헌신하는 지도자와 민중의 대표자였다.
30년대 중반 이후, 영화 창작가들의 영화 창작의 실험적인 시도는 사그라지고, 영화는 점차 획일화되어 가는 길을 걷게 되고 주로 혁명의 역사를 다룬 영화가 나오게 된다. 이 시기의혁명 영화는 민중들과 그들의 역할보다는 뚜렷한 한 인간의 영웅성과 혁명 과정 속에 나타난 그 영웅의 심리적 변화에 초점이 맞춰진다. 영화 창작가들은 인간의 구체적 모습을 통해 역사적 사건을 전개하고 그 의의를 창출하고자 했던 것이다. 또한 이 당시 영화의 두드러진 특징으로는 다양하게 형상화 된 레닌의 모습이 영화 속의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스탈린은 레닌의 절대적 모습을 통하여 자신을 신화화하려는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정책의 일환으로서 영화인들은 혁명의 지도자로서 레닌을 다큐멘터리 형식이나 뉴스 영화의 형태로, 혹은 극영화에서 등장시켰다. 영화에서 레닌에 대한 묘사는 다양했는데, 주로 그는 혁명적 지도자로서의 모습, 순수하고 겸허한 인간으로서의 모습, 일반 민중들과 불가분한 관계 속에서의 모습 등으로 표현되었다. 그러한 작품으로는 베르토프의 <레닌에 대한 세 가지 노래>, 스트로예바의 <승리자들의 세대>, 유트케비치의 <무기를 든 사나이> 등이 있다.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스탈린의 공포 정치와 개인 숭배는 더욱더 강화되어 경직된 분위기가 점차 고조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조국을 위해 영웅적으로 투쟁하는 민중들을 그린 다큐멘터리 영화와 뉴스 영화들이 쏟아져 나왔다. 또한 극영화에서는 전쟁으로 인한 사람들의 의식 구조의 변화, 전쟁의 상황, 병사들의 영웅적 행위 등이 주요한 테마로 다루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두드러진 특징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의 실제 영웅으로 스탈린을 이상화하고 절대화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스탈린을 이상화 한 영화로는 1945년 사브첸코의 <세번째 공습>과 1949년 페트로프의 <스탈린그라드 전투> 등이 있다. 이 시기의 소비에트 영화 예술은 바로 스탈린과 당 정책에 의해 정해진 예술 이론이었으며,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의 원칙은 극단적으로 해석되었고 현실을 부정적으로 그리는 영화 제작은 허용되지 않았다.
3) 1950-1960년대 소비에트 영화
스탈린이 사망하고 흐루시초프가 정권을 잡게 된 이후 영화 부문에서도 이른바 '해빙'의 시대가 도래하게 된다. 영화 검열 제도가 일부 폐지되고 소비에트 영화는 새로운 시기로 들어가게 된다. 영화 제작 편수는 빠르게 증가하였고 젊은 소비에트 영화 인력들도 유입되어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 당시 신인 감독들은 제2차 세계 대전의 폐해와 진실을 새로운 감성으로, 이데올로기 보다는 휴머니즘적인 관점에서 묘사하고자 하였다. 그러한 작품들로는 추흐라이의 <병사에 대한 발라드>-이 작품은 1960년 깐느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 작품이기도 하다-, 본다르추크의 <인간의 운명> 등이 있다. 이 시기에 주목할 만한 감독은 바로 안드레이 따르꼬프스키이다. 예술가 집안의 혈통을 물려받은 그는 모스크바 국립영화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유럽의 예술 영화에 관심을 가졌다. 그의 첫 번째 장편 영화는 <이반의 어린 시절>이다. 이 영화는, 부모의 죽음을 보고 복수하리라 맹세한 이반이 게릴라 부대의 정찰병이 되어 결국엔 나치의 손에 죽게 된다는 내용인데, 타르코프스키는 이 영화에서 전쟁의 소재를 색다른 서정주의로 그려냈다. 이 영화는 1962년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였으며 각종 영화제에서 총36개의 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4) 1960년대이후의 소비에트영화
1964년에 흐루시초프는 강제로 사임당했고 보수파인 레이니드 브레즈네프가 정권(1964-1982)을 잡게 되었다. 이 시기는 사회와 문화의 긴 '정체기'로 평가된다. 브레즈네프가 문화에 대한 통제 및 감시를 강화시킴으로써 당정책에 적합하지 않은 영화들은 재촬영되거나 상영 금지되었던 것이다.
이 시대의 또 하나의 특징으로 서민적 전통이 강하면서 정부의 징계에는 덜 노출되었던 러시아 공화국 이외의 다른 구성 공화국의 영화 제작소들이 약간은 우회적이고 시적인 영화들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우리 나라에도 상영된 블라디미르 메니쇼프의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는 여주인공의 사랑, 슬픔 등 인생 역정의 드라마를 소련 사회의 변화된 배경을 통해 보여준다. 이 영화에 나타나는 현실의 모순에 대한 무관심, 삶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은 이 시기 영화의 일반적인 성격이자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브레즈네프의 시기에 소비에트 영화는 전반적으로 정체기에 있었지만, 본다르추크와 따르코프스키와 같은 재능있는 기존의 감독들이 지속적으로 활동을 했고, 니키타 미할코프, 게르만, 슉신, 판필로프 등과 같은 신인 감독들이 출현했다는 점은 주목할만한 사실이다. 그들은 예술의 획일성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언어와 독창적인 기법으로 자신들의 영화를 만들고자 노력했다.
5) 개혁. 개방기의 러시아 영화
고르바초프가 정권을 잡은후 그의 개혁․개방 정책은 브레즈네프시대의 20년 동안의 긴 정체기를 끝내고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게 된다. 고르바초프는 그 동안 문화의 발전을 억누르던 검열제도를 폐지하고 언론의 자유를 허용했다. 이로 인해 백 편이 넘는 지난 시기의 상영 금지작들이 풀려났다.
그러나 개혁과 개방의 바람이 몰고 온 긍정적이고 밝은 영화의 현실은 잠깐으로 끝나고 1991년 소연방이 붕괴된 이후, 러시아의 영화계에 또 다른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영화 제작에 대한 국가지원의 중단, 시장 경제 원리에 의한 냉혹한 자유 경쟁 체제는 영화 제작에 큰 타격을 입혔고 영화의 질을 떨어뜨리게 했다. 러시아 감독들은 자금난에 허덕이게 되어 영화를 제작하기가 힘들어졌으며 영화 제작 편수도 줄어들었다. 90년대 초반에는 150편 내외로 급감하더니 1996년에는 약 40편 가량의 극영화가 제작되었다.
자본주의의 대중 문화의 범람으로 본격적인 예술 영화는 대중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했고 러시아 영화는 헐리우드 영화에 밀려났다. 90년대 러시아 영화들에서는 과거 영화의 전통을 찾아 보기가 어렵게 되었다. 물론 러시아 영화의 특유의 현실 비판과 섬세한 예술성, 슬라브 민족의 전통 문화와 고유 사상, 형식의 자유로움과 과감한 상상력 등이 문제 의식을 지닌 감독들의 일련의 작업들을 통해 힘겹게 유지되고 있긴 하지만, 모스크바에서 제작된 영화들은 이야기의 구성과 전개에 있어서 급속도로 헐리우드의 영화를 닮아가고 있는 실정이다.
4. 소비에트 몽타주기법
소비에트 영화를 얘기하면서 가장 중요한것중 하나가 소비에트 몽타주기법이다. 우선 몽타주란 원래 ‘조립 하는것’을 의미하는 프랑스어이다. 영화는 촬영되는 것이 아니라 조립되는 것, 다시 말해서 원래 따로 따로 촬영된 필름의 단편을 창조적으로 접합해서 현실과는 다른 영화적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 거기에 새로운 현실을 구축하여 시각적 리듬과 심리적 감동을 자아내게 하는데서 영화의 예술성이 성립된다고 보고 그 방법을 명확하게 하려는 이론이 몽타주이론이다. 1920년대 당시 소련 감독들은 장면내의 구성이나 카메라의 움직임 보다도 커트와 커트의 연걸성, 거기서 나오는 역동성을 중시하였다. 특히 촬영된 이후의 후반작업, 즉 편집에 더욱 주력하게 되었다.
최초의 몽타주 기법은 러시아 영화의 아버지라고 불리기도 하는 레프 꿀레쇼프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꿀레쇼프는 이전까지 시간과 공간에 충실하게 연결되었던 영화의 쇼트(shot ― 프레임의 연속된 단위)들을 충돌, 병치시킴으로서 똑같은 필름이라도 관객들에게 전해지는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내세웠다. 즉 기본적인 시공간의 재현인 a-b-c-d가 아니라 a-d-b-c, 또는 a-b-d-c라는 식으로 편집하는 것인데, 예를 들어 어두운 지하실에 앉아있는 남자의 모습을 담은 쇼트라고 하면 그 중간에 무장한 군인들이나 도시를 가로지르는 탱크의 모습을 담은 쇼트를 끼워 넣음으로써 관객들은 군인들의 쿠데타로 인한 독재정권의 억압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남자의 모습을 담은 쇼트가 다른 쇼트와 아무런 충돌도 일으키지 않고 그대로 정상적인 시간과 공간의 질서를 유지한 채 진행된다면 그 순간 관객이 느끼는 것은 다음 사건으로 쇼트가 바뀔 때까지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두 개의 쇼트를 자체적인 시공간의 질서를 무시한 채, 빠르게 병치시킴으로써 그것들이 충돌 할 때마다 그 시간과 공간을 실제보다 늘리거나 줄이는 편집을 통해 ꡐ새로운 질서ꡑ를 만들고 관객들의 시선에 새로운 이미지를 전해줄 수 있다는 것이 초기 ‘소비에트 몽타주’ 이론이다.
그 후 몽타주 기법을 이어받은 대표적인 인물로는 뿌도프킨과 에이젠쉬쩨인을 예로 들 수 있다. 이 둘의 몽타주 기법은 약간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뿌도프킨은 몽타주 이론을 벽돌쌓기에 비유하였는데, A+B=AB라는 공식에 의거해서 커트와 커트의 연속은 이야기 구축을 위한 점진적인 축적이라고 결론지었다. 그의 작품중 <어머니>, <성 뻬쩨르부르크>를 보면 이 기법은 잘 나타나있다. 그에 반해 에이젠슈쩨인의 몽타주는 커트와 커트가 단지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충돌하고 갈등하여야 하는 관계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의 공식은 A*B=C 라는 것인데, 두 커트가 충돌하면 A도 B도 아닌 제 3의 의미 C가 탄생한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헤겔의 변증법과 한자의 상형원리 (口(입)+鳥 (새)=鳴(울다), 門(문)+耳(귀)=聞(듣다))를 따른 것이다. 에이젠쉬쩨인은 이러한 원리를 바탕으로 편집의 기법을 다섯가지로 체계화 하였다.
* 에이젠쉬쩨인의 다섯가지 체계화된 몽타주
운율의 몽타주-길고 짧은 커트가 충돌하는 것.
율동의 몽타주-정지된 것과 움직이는 커트를 대비시킨 것.
음조의 몽타주-어둠과 밝음이 부딪히는 것.
배음의 몽타주-운율.율동.음조의 몽타주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
지적인 몽타주-은유적이고 상징적으로 연결된 것.
5. 러시아 영화를 대표하는 거장들
지금부터는 러시아영화사를 대표할 수 있는 영화감독들에 대해 잠깐 살펴보겠다.
1) 안드레이 따르꼬프스키
안드레이 따르꼬프스키는 작품수는 그렇게 많지는 않으나 러시아 영화감독들중에 가장 역량있는 감독으로 평가 받고 있으며, 그는 세계 영화사에서 가장 뛰어난 감독들 가운데 한명이라고도 할수 있다. 그의 작품들은 전통적인 줄거리와 드라마적인 요소보다는 인상적인 시각적 이미지와 상징적인 비주얼로 전혀 다른 속도로 사고하며, 전혀 다른 이미지의 방향을 그려 나갔다.
안드레이 따르코프스키는 1932년 4월4일 볼가강 근처에 이바노프지방의 자브라쥐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아르세니 따르코프스키는 유명한 시인이자 번역가 였다. 그의 어머니 마야 이바노브나 비쉬냐코바도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그의 가족은 1935년 모스크바로 이사를 갔고, 그곳에서 안드레이는 학교를 다니며 어린시절을 보낸다. 안드레이가 태어나고 몇 년 후부터 그의 부모의 결혼과계는 이상이 생기기 시작해서 후에 이혼을 하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중 2년간을 안드레이와 그의 여동생 마리나와 그의 어머니는 할아버지가 살았던 유리예베츠라는 작은 마을로 대피했고 그의 아버지는 종군기자로 전쟁터에 나가게된다. 그가 할아버지의 집에 있었던 그의 어린 시절의 모습은 영화 <거울>에 잘 묘사되어있다. 그 당시 그에게는 행복이 있었고, 모든 것이 가능하게 느껴졌었다. 전쟁중에 안드레이가 몰두했던 생각은 생존에 대한 물음과 그의 아버지의 귀환이었다. 결국 그의 아버지는 돌아오기는 했으나 이미 예전의 그가 아니었고, 가족과도 다시 어울릴수 없었다. 1943년 안드레이가족은 모스크바로 돌아왔고, 안드레이는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안드레이는 눈에 띄게 똑똑하거나 성실한 학생은 아니었다. 그는 음악학교에서 전통음악을 배웠고, 미술학교에서 미술도 공부했다. 안드레이의 어머니는 아들이 창조적인 분야에서일하기를 바랬다. 따르코프스키도 후에 말하기를 어린시절 배운 음악과 미술의 기초교육이 없었다면 영화감독으로서의 자신을 생각할 수도 없었다고 했다. 학교를 마치고 그는 1951년 동양학 전문학교에 입학하지만 운동중 부상으로 학교생활을 중단했고, 회복한 후에 그는 공부를 다시 시작하지 않고 시베리아 지방을 탐사하는 지질학 조사팀에 참여했다. 실제로 그는 시베리아에서 지질 연구자로 일하면서 관찰의 훈련을 했다고 말했고, 해저 탐사반에 참가하면서 해저 밑의 느린 물결의 흐름을 보게된 후에 그러한 흐름을 영화에 담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다고 한다. 이 경험은 확실히 그를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결심을 굳게 만들었고 1954년 그는 결국 굴립영화학교에 입학하여 6년간 공부했다.
그가 영화 공부를 하던 시기는 소비에트 영화의 르네상스 시기였다. 이때에는 많은 사상들이 난립했고, 따르코프스키 자신도 내적으로 빠른 발전을 거듭했다. 1960년 그는 우수하게 영화학교를 마쳤다. 그의 졸업작품 <증기롤러와 바이올린>에는 이미 따르코프스키의 전형적인 모티브들이 드러나 있었다. 비록 영화제작하는 곳이 었던 모스필름이 그 영화에 대한 약간의 제한을 표명했지만, 언론들로부터의 전반적인 갈채가 있었고, 그러한 사실이 따르코프스키의 가까운 장래에 큰 도움이 되었다. 1961년 따르코프스키는 모스필름에서 아발로프가 찍다가 그만둔 영화를 떠맡게 되는데 그 영화가 그의 대표작이기도 한 <이반의 어린시절>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그 영화를 다시 찍어 작품을 만들어 냈다. 영화는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었고,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다음영화 <안드레이 루블료프(1966)>-칸느영화제 국제 비평가상 수상-에서 당국의 간섭이 본적적으로 시작된다. 영화를 상영하기 위해 5년간의 기간이 필요했고, 영화가 서방에 보여지기까지도 3년의 시간이 걸렸다. 거기에는 재정적인 문제와 사상적문제가 있었다. 따르코프스키의 타협하지 않는 완강한 성격은 바로 그가 그의 생애에 그러한 고난들에 기인한다.
그의 영화가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되자 소비에트 당국은 이념적인 우려를 나타내게 되고, 결국 1973년에 소비에트 영화 분과에 의해 영화 수출에 대한 심의를 받게 된다. 마찬가지로 1974년 완성된 영화 <거울> 강한 관료적 제재로로 서방 세계에 상영되기 까지는 기간이 필요했다. 따르코프스키는 스태니슬로램의 공상과학 소설 한편을 영화화 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영화 <솔라리스(1971)>-칸느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이다. 솔라리스는 소비에트 사회에 상대적으로 해가없는 주제이나 여기에서도 그의 접근은 반대와 비판을 낳았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경도된 조국에서 그의 영화는 달갑지 않은 감상주의로 매도되었기 때문이다. 따르코프스키는 1977년 소비에트 시절의 마지막 영화인 <스토커>가 완성될때까지 스트레스와 많은 제작비로 인한 빚 그리고 그의 영화를 둘러싼 여러 제재등으로 생긴 심장병으로 고통을 받아왔다. 결국 그는 1982년 이탈리아에 머물면서 이탈리아의 RAI제작사의 도움으로 <노스텔지어(1983)>-칸느영화제 창조대상수상-를 찍는다. 그리고 이탈리아로 망명을 하게된다. 1983년작 노스텔지어는 고향을 떠나있는 예술가의 시간들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나타나있다.그는 그의 마지막 작품인 <희생(1986)>을 제작하기위해 스웨덴에 머무르게되고, 그해 암선고를 받고 프랑스로 건너가 암센터에서 치료를 받는다. 결국 따르코프스키는 자신의 마지막영화의 개봉을 보지 못하고 1986년 12월 29일 폐암으로 생을 마감한다. 자신의 아들 안드루샤에게 바친 <희생>은 깐느영화제 그랑프리, 최우수 공헌상, 기술상, 국제 영화비평가협회상 등 4개부문을 휩쓸었다. 따르코프스키는 지금 프랑스에 묻혀있다. 그의 묘비에는 이렇게 쓰여있다고 한다. ‘천사를 만난 사람’...
2) 에이젠 쉬쩨인
에이젠 쉬쩨인을 대표하는 몽타주이론은 앞에서도 설명을 했기에 여기서는 그의 연보와 작품에 대해 살펴보겠다.
에이젠 미하일로비치 쉬쩨인 그는 반세기의 짧은 삶을 살았지만 초기 무성영화의 혼돈스런 상황을 정리하고 예술과 선동으로서 영화역사를 개척하여 영화의 질적 비약을 가능하게 하였던 감독이다. 에이젠 쉬쩨인은 영화활동을 하기 전에는 연극무대에서 활동을 주로 하였다.
그의 연보를 살펴보면
1989년 : 라트비아 리가시에서 출생
1905년 : 1차 러시아 혁명. 전함 포템킨호의 반란
1919년 : 소련 영화국유화 선언, 국립영화기술학교 개설
1920년 : 제9회 소련 공산당 대회에서 영화가 계몽 선전의 수단으로 규정됨
1922년 : 레닌 퇴임, 스탈린의 서기장 취임
1924년 : 레닌 사망, 에이젠쉬쩨인 연극에서 영화로의 전환을 결심
최초의 장편 영화 '파업'완성
1925년 : '파업' 공개, '전함 포템킨' 촬영
파리 국제장식미술전람회에서 '파업'의 스틸과 포스터로 금상 수상
'전함 포템킨'을 혁명식전에서 최초 공개
1926년 : '전함 포템킨' 일반 공개, '전선'의 시나리오 집필
'10월'의 촬영 준비 개시, '전선' 촬영 개시
1927년 : '전선' 촬영 중단, '10월' 제작
'10월' 촬영개시(레닌그라드; 현 뻬쩨르부르그)
10월 혁명 기념식에서 '10월' 최초 공개; 스탈린의 비판으로 재편집
1928년 : '10월' 일반 공개, '전선' 촬영 개시, 사운드 영화 공표
1929년 : '전선'에 대한 스탈린의 비판으로 '낡은 것과 새로운 것'으로 개명
영화기술연수차 베를린 외유, 스위스에서 '라 사라즈의 폭풍' 연출
런던과 파리에서 강연 및 일부 영화에 관여 및 연출
1930년 : 프랑스 국내여행(아인슈타인과 조우), 소르본느 대학 강연
파라마운트 영화사와 계약
할리우드 입성, 채플린등과 조우, 미국내 에이젠쉬쩨인 배척 운동
'아메리카의 비극' 시나리오 집필, 시나리오 거부와 계약 파기
업튼 싱클레어와 멕시코에서 영화제작 계약
멕시코의 벽화운동가 디에고 리베라, 시케이로스, 오로스코와조우
1931년 : '멕시코 만세' 시나리오 초고 완성
1932년 : 싱클레어의 영화 제작 중지
멕시코를 떠나 귀국, 국립영화대학의 감독과 주임 취임
1933년 : 국립영화대학 감독과 교육 프로그램 제작, <감독론> 집필 착수
1935년 : 전소련 영화인 창작회의 연설로 그에 비판 여론이 일기 시작함
'베진초원'의 촬영 대본 착수, '베진초원' 프롤로그 촬영
1936년 : '베진초원' 제2판 촬영
1937년 : 그에 대한 형식주의비판 개시, '베진초원'의 촬영 중단
1938년 : 논문 <몽타주 1938> 집필,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촬영, 일반 공개
1939년 : 레닌훈장 수상,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상영 중지
(독소 불가침 조약 체결로 인해)
1940년 : 논문 <수직의 몽타주>집필
1941년 :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로 스탈린상 수상
(독일의 소련 침공을 배경으로)
1942년 : '폭군 이반' 촬영대본 집필, 최초의 영역논문집 <영화감각> 출판
논문 <디킨즈, 그리피스 그리고 오늘날의 영화> 완성
1943년 : '폭군 이반' 촬영 개시
1944년 : '폭군 이반' 1부 편집 완료
1945년 : '멕시코 만세'의 필름을 멕시코로부터 받아들임
1946년 : '폭군 이반' 1부로 스탈린상 수상, 제2부 편집완료
심근경색증으로 입원, '폭군 이반' 2부 미공개 취급, 3부는 폐기
1948년 : 50세를 일기로 2월 13일 세상을 떠나 노보데비치 묘지에 안장됨
*에이젠쉬쩨인의 대표작 전함포템킨..
1925년에 무성영화로 제작되어 지금까지 촬영기법의 빼어난 교과서로 활용되고 있는ꡐ전함 포템킨ꡑ은 50여 년이 지난 후인 1976년 소련영화기금과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 박물관의 협찬을 받아 새 필름으로 재생될 정도로, 전세계 영화평론가들에 의해서 항상 가장 위대한 영화로 손꼽혀 오는 고전 최고의 명작이다. <전함 포템킨>은 구조면에서 5막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무성영화의 특성상 의미전달의 한계라는 특성을 극복하는데 크나큰 도움을 준다. 막의 구조를 가짐으로써 줄거리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주제의식을 높이는데 도움을 얻는 것이다. 이영화가 무성영화이고 흑백영화이면서도 아직도 세계 최고의 위치를 누릴 수 있는 까닭은 ꡐ몽타쥬ꡑ라 불리우는 편집기법과 화면 자체의 그래픽이 지니고 있는 놀라운 힘 때문이며, 여기에다 거의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뛰어난 촬영 기법과 픽션이 훌륭하게 어우러져 역사를 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3) 비탈리 까네프스키
따르꼬프스키 이후 러시아 영화의 신념을 지키고 있는 감독으로 꼽을수 있는사람이 바로 비탈리 까네프스키이다.
그는 1935년 시베리아의 스찬에서 태어났다. 비탈리 까네브스키는 소꾸로프와 함께 따르코프스키 이후의 ꡐ러시아영화ꡑ를 지키는 첫번째 세대의 감독이자 구 소련의 기억을 이야기할 수 있는 마지막 세대의 감독일 것이다. 그는 1960년에 모스크바 국립영화학교 연출과에 입학했으나 1966년 강간 혐의를 뒤집어쓰고 수감되어 8년 반을 감옥에서 보냈다. 출감후 41세가 되던 1977년에서야 국립영화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졸업 직후인 1977년 비엘로루스필름에서 단편영화 <네번째 비밀>을 찍었고, 1981년에 렌필름에서 단편 <시골 이야기>를 만들었지만 사상성과 대중동원력에 있어서 ꡐ쓸모 없는 감독ꡑ으로 낙인찍혀 소련 영화계에서 배척당하고 실직상태로 몇 년을 지냈다. 그러던 중 시나리오 작가 에두아르드 볼로다스키가 그의 자전적 시나리오를 읽은 후 주선에 나서게 되었고, 그의 재능을 인정했던 렌필름의 프로듀서 알렉세이 게르만의 지원을 받게 된 까네브스키는 거리의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자신의 유년기와 비슷한 모습을 한 파벨 나자로프라는 비행소년을 카메라 앞에 세우고, 렌필름의 흑백 재고필름을 배급받아 자신처럼 ꡐ무능하기로 소문나 있던ꡑ 촬영감독 블라디미르를 데려온 까네브스키는 제작비 30만 루블로 석달 반만에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꺼야>를 완성했다. 그러나 제작사인 렌필름의 트로츠키 스튜디오는 이 ꡐ우울한ꡑ 영화는 돈을 벌 수 없을 거라고 판단하고, 소벡스포르트 영화사에 40만 루블을 받고 팔아버렸다. 그러나 알란 파커의 적극적 지원으로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꺼야>는 깐느에 소개되었고, 까네브스키는 53세의 나이로 깐느영화제 황금카메라상을 받아 영화역사상 최고령 신인감독으로 데뷔하게 되었다. 그후 그는 7개 마을 60여곳의 촬영지를 돌며 광활한 시베리아 설원을 시각적 언어로 형상화 시킨 작품 <눈오는날의 왈츠>를 발표하고 92년 깐느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받게된다. 그리고 1994년에는 다큐멘트리영화 <우리, 20세기 아이들>을 발표하게된다.
시적인 영상과 세심한 화면구도가 돋보이는 그의 영화는 소련의 사회문제를 과격하지 않은 방법, 우울한 시적 영상으로 묘사하여 새로운 리얼리즘을 제시하며 21세기의 러시아 영화를 정화할 신념을 가진 감독으로 평가받고 있다.
6. 결론 : 러시아 영화의 현재와 미래
90년대 말의 러시아 영화는 외관상 새로운 중흥기를 맞고 있는 것처럼 보여진다.
‘타이타닉’의 기록을 경신한 <시베리아 이발사>-국내에서는 '러브 오브 시베리아‘ 라는제목으로 개봉함.-를 위시하여 헐리웃 블록버스터와 흥행대결에서 낙승하는 이른바 민중영화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칸,베를린,로카르노 등의 굵직한 국제영화제에서 전해오는 러시아영화의 수상 소식이 이제는 월례 행사로 느껴질 만큼 러시아영화는 해외에서 인정 받고 있다. 즉 영화가 가지게 되는 양면성(예술로서의 영화와 산업으로서의 영화)에서 러시아 영화는 선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 영화의 성공을 영화가 지니는 문화적속성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러시아 영화에는 현재 커다란 위험성이 내포되어있다.
지구촌 모든 국가에는 자국의 고유문화가 존재한다. 예술은 문화의 일부분으로서 문화 속에서 생성되고 존재하는 것인데, 가령 타국에서 생성된 새로운 예술 장르라도 특정지역의 문화권에 소개되면 그 지역의 고유문화에 흡수되어 재창조되고 소비되는 것이다. 영화도 예외는 아니어서, 서구에서 탄생한 이 움직이는 사진은 지구촌 곳곳에 퍼져 각나라의 고유문화에 흡수되고 재창조되어 다양성과 끊임없는 자기발전을 도모할 수 있었다. 과거 꿀레쇼프, 에이젠쉬쩨인,뿌도프킨에 의해 연구되어진 몽타주는 혁명 후에 진보적이고 혁신적인 사회속에서 탄생한 러시아 무성영화의 고유한 특징이었으며, 스탈린사후 해빙기시절에 만들어진 박애주의 영화들은 60-70년대 러시아영화의 특징을 대변해주고 있다. 러시아 영화에는 슬라브민족의 전통문화와 고유사상이 담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러시아영화에서 자국영화의 전통과 맞닿아 있는 영화를 발견하기란 쉬운일이 아니다. 모스크바에서 제작된 영화들은 이야기의 구성과 전개에서 급속도로 헐리웃 영화를 닮아가고 있으며, 서유럽 자본에 의존하여 제작된 대다수의 뻬쩨르부르그 영화들은 자신의 세계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감독들의 성향으로 인해 현실과의 소통불능에 빠져버렸다. 영화 형식에 대한 왕성한 실험정신과 박애주의 구현의 전통, 그리고 이른바 러시아 리얼리즘으로 불리웠던 현실에 대한 집요한 관찰과 가감없는 묘사는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 추억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알렉세이 게르만’, ‘꼰스딴찐 로뿌샨스키’, ‘소꾸로프’등에 의해 힘겹게 유지되고 있는 러시아 영화의 미학적 전통은 예술에서 산업으로 탈바꿈되어 양적 팽창 일변도를 걷고 있는 러시아 영화에서 존재의 의미를 잃어가게 될 것이다. 이대로 진행된다면 앞으로 러시아 영화는 자국의 정체성을 상실할 것이다. 이런 결과를 초래하지 않기위해서는 자국영화의 정체성 유지와 스크린쿼터유지를 통한 자국영화의 생존권사수가 급선무이다. 앞으로 러시아 영화계가 이런문제들을 잘 해결해 나간다면 과거 러시아 영화계의 황금기는 잊혀져가는 옛이야기가 아니라 앞으로 두 번째 세 번째의 황금기가 올 수도 있는 미래이야기가 될 것이다.
[출처] 러시아 영화사[영화는 그 시대를 반영한다]|작성자 R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