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상효 감독의 최근 두 영화에는 소위 ‘사회적 약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방가? 방가!>(2010)는 경쟁적 한국사회의 ‘루저’인 취업 실패자와 외국인 노동자, <강철대오: 구국의 철가방> (2012)은 여대생을 사랑한 못생긴 중국음식점 배달원의 이야기다. 흥미롭게도 육상효 감독은 이 영화들에 배우로서는 늘 ‘을(乙)’의 위치에 있던 김인권을 단독 주연으로 거듭 캐스팅하였다. 탁월한 선택이자 영화적 실천이었다.
알고 보면 같은 꿈을 꾸는 친구에게 던지는 인사, 방가!
대기업 공채에서 백화점 주차관리원까지, 지난 5년 동안 끊임없이 취업을 시도해왔으나 실패하고 고향 친구 용철(김정태)의 노래방에 기숙하고 있는 방태식(김인권)은 부탄인 노동자로 위장해서 의자 공장에 들어간다. 그의 이름이 영화의 제목인 ‘방가’다. 성이 방씨여서 방가, 부탄인으로나마 취직할 수 있는 것이 ‘방가’워서 방가. 영화는 제 앞가림도 못하는 태식이 부탄인 ‘방가’가 되어 이주노동자들의 삶을 몸소 겪고 분개하다 얼떨결에 투사도 되었다가 친구 따라 사기꾼도 되었다가 사랑에도 빠졌다가, 좌충우돌하는 이야기를 코믹하게 그려내고 있다.
“우리 엄마가, 동냥은 못할망정 쪽박은 깨지 말라 했다!” 부탄인과 한국인 사이를 오가며 방가는 연거푸 외친다. 그럼에도 영화는 이주노동자들을 ‘쪽박을 찬’ 채 동정을 받아야 할 인물쯤으로 그려내지 않았다. 어쨌거나 그들은 서로를 필요로 했다. 변두리 노래방 주인은 주말과 공장 휴무일에 노래방을 그득 채워줄 ‘불법체류’ 이주민들이 필요했고, 어린 아들만은 버젓한 한국인으로 키우고 싶은 베트남 엄마는 한국인 새남편이 필요했고, 방글라데시인 작업반장은 매몰찬 한국인 공장장 흉내를 내서라도 하루빨리 색시를 한국에 데려와야했다.
그러나 단지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현실적인 이유가 관계의 중심일까. 여기서 영화가 애써 주목하는 점은 인물들 사이의 유대감이다. 이를테면 한국사회(혹은, 정신없이 돌아가는 경쟁사회로서의 서울)에서 뿌리내리지 못하기로는 기구한 운명의 방가나, 그나마 ‘사장’ 직함이라도 갖고 있는 용철이나, 타향살이의 모욕과 핍절함을 내내 버텨야하는 이주노동자들이나 사실상 크게 다르지 않다. 무엇보다 그들은 금의환향이라는 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 소싯적 ‘담배빵’으로 영원한 우정을 약속했던 방가와 용철은 함께 상경할 때부터 줄곧 고향에 작은 식당 하나 여는 것이 소원이었다.
요컨대 외국인 노동자들과 한국인 약자를 병치하면서 영화가 호소하는 바는 온정주의도 거창한 인류애도 동정도 미안함도 연민도 ‘필요악’도 아닌, 그저 소박한 동류의식이다. 그리하여 일상에서 우리에게 타자인 이주노동자들은 영화에서 무척 친근해 보일 뿐 아니라 심지어 귀엽게 등장한다. 우락부락하고 뭔가 달라 보이지만, 그들도 잘 보면 귀여울 수도 있다고, 그저 우리의 이웃일 뿐이라고 <방가? 방가!>는 말한다.
나라는 ‘철가방’이 구한다
<강철대오: 구국의 철가방>은 혁명이 사라진 시대의 혁명에 관해 이야기하는 영화다. 단, 여기서 혁명은 체제전복적 혁명이라기보다는 일상을 변화시키는 작은 힘의 파급력에 주어진 이름이다. 그에 따르면 짜장면 배달원 ‘철가방’이 여대생을 사랑하는 것이 혁명이고, 햄버거 대신 짜장면을 먹는 것이 혁명이다. 배달민족의 영원한 식량, ‘자’장면이 아니라 ‘짜’장면을 지켜내는 것, 그리고 ‘철가방’들이 월차를 얻어내는 것.
여대생 서예린(유다인)을 짝사랑하게 된 짜장면 배달원 강대오(김인권)는 예린의 생일파티인 줄 알고 나갔다가 얼떨결에 대학생 미대사관 점거 시위대에 합류하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여대생과 배달원, 햄버거와 짜장면, 철방패와 철가방, 화염병(불)과 물폭탄(물), 극약인 청산가리(죽음, 극도의 피로 상태)와 양약인 레모나(피로 회복과 원기 충전) 같은 일련의 대립구도다. 혁명가들의 은어 못지않게 전문적이고 심오한 은어가 배달원의 세계에 있다는 점도 그렇다. 물론 인물들 사이의 차이를 극복하는 유대감은 <강철대오>에서도 여전히 주요한 정서적 동인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영화에서 사태 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위의 각 대립항들에서 전자가 아니라 후자였다. 대학생과 배달원들과 전경들과 미군 간부와 미문화원 원장, 외국인 교수 등의 유대감과 화합을 만들어내는 힘은 함께 주저앉아 흡입하는 짜장면에서 나왔고, 위기에 처한 투사의 몸을 보호한 것은 태극기가 아니라 성조기였다. 그런 점에서 전경부대의 철방패를 대오의 철가방이 쓰윽 가리면서 지나가는 영화 초반의 한 장면은 영화 전체를 걸쳐 가장 의미 있는 이미지를 품고 있다. <강철대오: 구국의 철가방>은 어쩌면 첫사랑의 추억이 되어버린 혁명정신에 대한 향수와 애도의 다른 표현이자, 동시대 가능한 ‘혁명’에 대한 고민의 결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루저’들이 전하는 시선과 실천의 메시지
<방가? 방가!>가 한국사회에 공동체 구성원으로 엄연히 존재하지만 흔히 공적 영역에서 배제되거나 주변화된 이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다면, <강철대오: 구국의 철가방>은 더 나아가 공동체성의 회복을 위해 일상생활에서 가능한 변화와 실천 방법에 대한 가벼운 팁을 제공한다. 이들은 다원화된 사회에서 더 이상 국가와 민족의 개념으로 혹은 기존 공동체의 의미를 바탕으로 한국사회를 규정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을 전제로 하되, ‘우리는 다 형제다’라는 식의 범인류적인 가치관과 동질성을 주장하거나 우리 안의 타자들에 대해 우리가 불쌍히 여겨 무작정 선을 베풀어야할 존재들이라고 섣불리 단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구체성을 띤 설득이면서 개인적인 삶의 도전이다.
정의를 공동선의 영역으로 규정했던 마이클 샌델은 「정의란 무엇인가」(김영사 역간)에서 정의로운 사회에는 강한 공동체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샌델의 주장처럼 공동선을 위한 미덕과 정책을 키워나가는 것이 도덕적 가치관과 영적 갈망을 피해갈 수 없는 문제라면, 성도로서 그리스도인들이 우선 점검해야 할 일은 사회 공동체와 특히 공동체에서 배제된 이들을 향한 시선과 태도일 것이다. 우리의 관심사는 단순한 사회정의와 화합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하나님의 공의는 사랑과 긍휼을 동반하며, 그분의 은혜와 긍휼에 위계는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긍휼이 필요한 이들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일반은총의 보호하심 아래 함께 거하는 동료이자 공동체 구성원이라는 겸허한 받아들임이 먼저다. 그것은 부의 공정한 분배와 약자를 향한 동정이나 개인적 선행이라는 구분을 넘어서는 영역이며, 공동의 실천을 통해 촘촘히 메워야할 일종의 간극이자 틈새다. 그런데 이러한 받아들임은 지극히 일상적인 영역에서 더욱 투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우리가 친구를 사귀고, 사랑을 하고, ‘기분 좋다고 소고기를 사 먹고’, 짜장면과 커피와 초콜릿을 사고, 여행을 하고, 자녀 교육비를 지출하고, 시간과 재능을 사용하고, 종이컵을 사용하거나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는 것과 같은 참으로 하찮은(?) 일들에서 말이다.
최은은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에서 영화이론을 공부했고, 중앙대학교, 청어람아카데미 등에서 강의했다. <영화와 사회>(한나래), <알고 누리는 영상문화>(소도)를 함께 펴냈으며, 대중영화가 동시대 관객과 소통하는 방식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