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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을 드디어 8월13일부터 18일까지 4박6일 동안 다녀왔다. 죽기 전에 한번은 갔다 오리라 생각하던 곳이었고, 백두대간 종주가 9월에 진부령에서 완주를 마치게 되어 올해에는 만사 제처두고 다녀오려고 대간팀에 공지하여 선수를 모집했지만 한분만 응해 둘이서 여행사에 신청을 했으나 인원부족으로 번번이 고배를 마시고 피크철을 지나 9월이나 10월에 다시 한번 도전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데, 5일 출근하고 조금 지나서 우리과 이강영사무관님이 백두산 여행상품이 좋은 것이 떳다고 급히 호출을 하여 검토해 보니 날짜도 황금 연휴기간이고 가격도 착해서 배리 배리 굿이었다. 일단 나는 바로 신청하고 혹시 가족여행으로 가면 어떠냐고 제안을 해서 고3 딸이 있어서 조금은 꺼림직 했지만 와이프에게 전화를 하니 숨도 안쉬고 콜이란다. 그도 나와 마찬가지로 백두산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품고 있었는데 마침 한의원도 휴가기간이라 선듯 결정을 하였고, 막내 딸도 같이 데리고 가자고 하여 우리 가족은 3명이 신청하였다. 우리과에서는 조성철 과장님과 이강영 사무관님 부부, 이상호사무관 등 총 7명이 같이 가게 되었다.
이번 백두산 여행상품이 출발 일주일전 마감이라 하루만에 모든 것을 결정하고 예약을 마치고 본격적인 여행 준비에 들어갔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복병이 도사리고 있었다. 저녁에 퇴근해서 딸들에게 이번 백두산 여행 계획을 이야기하니까 고3 큰딸은 펑펑 울면서 "어찌 고삼 수험생을 두고 가족이 일주일이나 여행 갈 수 있느냐?"며 서운해 하였다. 하지만 이번 기회가 아니면 백두산에 가기가 어려울 것 같고 아빠의 5년여 동안의 백두대간 종지부를 찍고 싶다고 설득했다. 그러니까 착하게도 방학기간이니까 아침은 학교 매점에서 해결하면 되고, 어짜피 나머지는 평소와 같으니까 학교에서 11시까지 지내고 집에 와서 잠만 자면 된단다. 마음 착한 큰딸은 잘 해결되었는데 문제는 막내였다. 본인한테 상의도 하지 않고 결정한 여행이라 못 가겠단다. 그리고 여행갔다 오면 곧바로 개학이라 방학숙제도 밀렸고 계획된 일을 다 못했단다. 헉! 이럴수가 이미 다 여행경비를 지불했는데 어찌하란 말인가. 다시 막내 설득작업에 들어갔다. 엄마, 아빠 여행가면 집에 혼자 남고, 여행을 통하여 견문을 넓혀주기 위해 신청했다고 해도 막무가네였다. 마음을 돌리려고 요즘 뜨는 '설국열차' 영화도 보여주고 맛난 것도 사주어도 요지부동이었다. 10일 저녁 최종적으로 갈것인가 말것인가에 대한 결판을 내려고 막내와 다시 대화를 시도 했으나, 눈물을 보이며 돈 때문이라면 자기가 나중에 벌어서 갑는단다. 가족여행의 의미를 다시 설명했지만 설득에 실패했고 더이상 할 말이 없었다. 아직은 어리다고 생각했는데, 질풍노도 시기인 사춘기를 지나고 있는 듯 자기 주장을 강하게 표현하는 나이가 되었구나라고 생각하고 더이상 아이에게 상처주지 말고 포기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마침 일요일이 아버님 생신이라 부모님과 형제들 5남매 가족들이 수통골 감나무집에서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같이 차타고 가면서도 막내와 나는 여전히 분위기가 냉냉하였다. 모처럼 즐겁게 식사를 하고 식당 정원에서 사진도 찍으며 가족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새기는 시간이었다. 12일 월요일 새벽에 막내가 일어나더니 엄마를 찾더니 밤새 마음에 변화가 왔는지 백두산 여행에 가겠단다. 야호! 이쁜 막내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었고 고마웠다.
간단할 것 같았던 여행준비가 막내로 인하여 며칠 속 좀 끓였지만, 이제는 어였하게 성장한 막내 우림이의 생각과 모습을 알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우리가 선정한 여행사는 거품없는 여행을 모토로 내건 노랑풍선이었고, 여행일정은 8월13일부터 18일까지 4박6일간이고, 금액은 499,000원인데 단체비자비, 유류할증료 포함하여 599,000원이고, 필수옵션으로 두만강 뗏목($20), 전신맛사지($30), 가이드/기사팁($50)은 별도였다. 대전역에서 16:38분 KTX를 타고 18:31에 구포역에 도착하여 다시 시내버스로 갈아 타고 부산 김해공항에 도착했다. 부산 김해공항에 도착해서 노랑풍선 담당자와 만나서 비행기표와 단체비자를 받았는데 전체 우리팀 인원이 우리 7명 포함해서 16명이었다. 비행기표를 보딩한 후에 짐을 부치고 간단하게 저녁식사를 하였다. 커피도 한잔 한 후에 공항 면세점에 들러 우림이에게 스와치 손목시계를 선물로 사주었다. 학교에 스마트폰을 가지고 가지 못해서 시계가 필요하다고 했는데 그동안 차일 피일 미루고 있었던 터였다. 손목시계를 찬 우림이가 너무 좋아하고 밝게 웃어서 내 마음도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우리가 타고 갈 비행기는 22:05발 에어부산이었다. 부산 김해공항을 출발한 에어부산은 기수를 북으로 돌려 대전을 거쳐 서해로 빠져나가 산둥반도 끝에 있는 항구도시인 위해를 지나고 산둥성의 옌타이를 거쳐 00:05분에 연길 공항에 도착하였다. 연길하고 우리나라와는 시차가 1시간 차이가 나서, 시간상으로 비행은 2시간이지만 실제 비행시간은 3시간인 셈이다.
연길은 길림성 동부에 위치하여 러시아, 한반도와 국경을 접하고 있고, 면적이 4만 3547㎢, 인구가 219만 5000명 정도로 11개 민족이 거주하고 있는데, 그 중 40%가 조선족이다. 조선 말기부터 한국인이 이주하여 이곳을 개척하였고, 이전에는 북간도라고 불렀다. 이후 1952년 9월 3일에 자치구가 설립되어 1955년에는 자치주로 승격되었단다. 연길공항은 규모가 작고 많이 낡아 허름하였다. 공항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현지 가이드를 만나 버스를 타고 20분을 달려 첫번째 숙소인 세기호텔에 들어가서 간단하게 씻고 가족방이라서 3개 침대에 각각 한 사람씩 차지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이튼날 14일 아침 호텔 조식으로 간단하게 식사를 마치고 연길 도문으로 이동하여 두만강에 도착하였다. 두만강은 중국과 북한의 접경에 위치한 강으로, 강폭도 그리 넓지 않아서 북한을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었다. 두만강 나룻터에서 나룻배를 타고 중국과 북한을 연결했던 철도 다리를 두개 지나 상류로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북한 땅에도 건물들이 간혹 보였으나 사람들의 모습은 보지 못하였고, 마주 보이는 산에 큰나무들이 없는 민둥산이었다.
우리 가이드는 김송일이라는 조선족인데 고향이 두만강 끝에 위치한 장춘시란다. 아직도 부모님이 그곳에 계시고 나중에 시간되면 한번 들러보란다. 장춘시는 러시아, 중국, 북한 3개국이 마주하는 국경선이 지나는 곳이라 남다른 의미가 있다고 한다. 한 많은 두만강을 뒤로 하고 드넓은 옥수수 밭을 바라보며 달려간 간 곳은 일제시대 저항시인 윤동주의 시비와 생가였다. 큰길가에 '명동 윤동주 생가'라고 커다란 표지석이 세워져 있고 표지석 아래로 오분정도 내려가면 생가 입구에 '중국조선족애국시인 윤동주생가'라고 한글과 중국어로 된 표지석이 작년에 세워져 깔끔하였다. 윤동주 생가는 비교적 깔끔하게 복원되어 있었고, 생가 주변으로 한글로된 시비가 돌에 새겨져 있고, 간혹 중국어로도 적혀 있었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은 우리가 그동안 배웠던 시인 윤동주와 조금은 거리감이 있는 듯 했다. 한국인을 이렇게까지 추앙하는 것에 다소 의아스러웠다. 그 의문은 나중에 민속박물관에서 풀렸지만, 생가 입구표지석에 새겨진대로 중국인으로서 윤동주시인 생가를 복원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윤동주생가 투어 후에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용정으로 와서 '미미사'라는 식당에서 맛난 점심을 푸짐하게 먹었다. 중국식이라서 선입견이 향이 맞지 않을거라 생각했지만, 전혀 향이 나지 않고 조선족이 만든 요리라서 그런지 우리 입맛에 매우 잘 맞아 맛있었다. 점심 후에 항일 독립 투사들의 거점이었다는 대성중학교를 둘러보았는데, 1994년 한국의 금성출판사에서 지원하여 복원하였다고 한다.
대성중학 투어 후에 백두산 가까이 있는 도시인 이도백하로 이동하는데 비암산 정상에 자리잡은 일송정을 창밖으로 바라보며 지나는데, 일송정은 원래 산 정상에 우뚝 선 한그루 소나무로서 그 모양이 정자처럼 생겼다하여 붙여진 명칭이었단다. 그런데 이곳이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하던 곳으로 산 정상에 독야청청한 모습으로 우뚝 선 일송정은 독립의식을 고취하는 상징이었다고 한다. 1933년 윤해영의 노랫말에 조두남이 곡을 붙인 가곡 《선구자》에 나오는 "일송정 푸른 솔"이 바로 이 소나무이다. 일제(日帝)는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이 소나무에 위해를 가하여 1938년 결국 고사시켰다고 전한다. 1991년 3월 12일 룽징시 정부는 한국 각계 인사들의 후원으로 옛 자리에 소나무를 다시 심어 복원하고 정자를 신축하여 현재는 룽징시 문물관리위원회에서 보호문물로 지정하였다고 한다.
용정에서 이도백하까지는 약 4시간정도 걸렸다. 중간에 휴게소가 있었는데, 휴게소 뒷산에는 백두산 장뇌삼 기지를 만들어 놓고 잠시 휴식 중에 산 중턱에 오르면 장뇌삼이라고 20년, 30년, 40년, 50년 팻말을 꽂아 놓고 가격 흥정을 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 중에서도 몇명 장뇌삼을 사서 즉석에서 씻어 먹기도 하였는데, 그다지 신뢰가 가지는 않았다. 큰 고개를 두어개 넘고 지천에 널린 옥수수 밭을 지나 6시경 이도백하에 도착하여 저녁을 먹고 길가 노상에서 과일도 사서 숙소인 호림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호텔은 삼성급인데 비교적 깔끔하였지만, 일부 방은 물이 잘 나오지 않아서 샤워하는데 애를 먹었다. 나는 3명이라서 와이프와 딸내미가 방을 함께 쓰고, 나 혼자 독방을 주어 사랑방에 우리팀 모두 모여 백두산에서 첫날밤에 맥주 한잔하며 내일 날씨가 맑아 백두산 천지를 볼 수 있기를 빌었다.
드디어 15일 아침 7시에 호림호텔을 출발하여 백두산 북파로 향하였다. 장백산 매표소까지 호텔에서 10분정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른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백두산을 오르려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날씨도 너무 쾌청하여 부픈 마음이었다. 입장권을 사서 셔틀버스로 갈아 타고 백두산 아래까지 30여분을 달려갔다. 가는 도중에 날씨가 점점 흐려왔다. 조금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이제와서 어쩌겠는가! 가는데까지 가는 것이다. 셔틀버스에서 내려 다시 10인승 봉고로 갈아타고 본격적으로 백두산 정상을 향하여 오르기 시작했다. 우림이가 하는 말이 하얀 봉고들이 연신 줄지어 오르는 모습을 보면서 '흰개미들이 행진'하는 것 같다고 말했는데, 쉼없이 꼬리를 물고 올라가는 모습에 딱맞는 표현이었다. 예전에는 짚차로 올랐으나 얼마전부터 봉고차로 바꾸었다고 한다. 지그재그, 고불고불한 길을 쉼없이 달려 가는데 점점 올라갈수록 운무가 껴서 주변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봉고로 30여분을 오르니 드디어 백두산 정상 주차장에 내렸다. 차에서 내리자 마자 백두산의 세찬 바람이 볼을 쓰다듬었다. 운무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일단 정상에 있는 휴게소 안으로 들어갔는데 이미 그곳도 사람들로 발디딜틈도 없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장백산이 중국에서 10대 명산중에 하나에 들어가서 꽤나 유명하여 중국인들도 많이 찾았다. 백두산 천지를 보려면 운무가 겉치기를 기다리는 것 밖에 도리가 없었다. 9시30분에 도착해서 2시간정도 기다려도 운무가 겉힐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쉬운 마음에 천지 주변을 한번 둘러보는데, 천지 위에 천지 표지석이 보였다. 우리팀들을 급히 데리고 와서 아쉽지만, 천지표지석을 배경으로 인증샷을 남기고 내일의 백두산 서파를 기대하며 하산하였다. 다시 봉고를 타고 내려와서 휴게소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다음 일정인 녹색연목인 녹연담으로 향했다. 물빛이 녹색인 것이 신비하였고 폭포와 더불어 묘한 느낌을 주는 풍경이었다.
녹연담 다음 코스로 장백폭포를 가려고 했으나 폭우로 길이 막혀 통제되어 가지 못하고, 물이 들어오는데는 있는데 나가는 곳이 없다는 '소천지'에 갔는데 비가 다시 억수같이 쏟아져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조그만 웅덩이만 감상하고 내려왔다. 2시50분경 지하삼림 코스에 도착했는데 산림욕을 하는 곳으로 산책로는 나무로 이어져 길을 만들어 놓아 백두산의 원시산림을 한바퀴 돌아 볼 수 있게 조성해 놓았다. 다시 호텔로 돌아오는 버스안에서 다들 백두산 천지를 보지 못해 풀이 죽어 있었다. 아쉬움을 달래려고 가이드가 설래발을 친다. 백두산 천지는 이 세상에서 백두산 천지를 보지 못한 사람이 천지라서 그렇다고 하고, 또다른 말은 백두산이란 백번오면 두번정도 천지를 볼 수 있어서 백두산이라고 한단다. 무슨 말을 해도 위로가 되지는 못하지만 아직 내일이 있기에 희망을 가져본다.
16일 9시20분경 호텔에서 2시간여를 달려 백두산 서파 매표소에 도착했다. 다시 입장권을 사서 셔틀버스를 타고 1시간여를 달려 서파 입구에 도착했다. 이곳에서는 백두산 정상까지 1442계단을 걸어서 올라가야만 한다. 역시나 운무에 쌓여 한치 앞을 볼 수 없어 일부는 운무가 겉히기를 기다렸다가 올라가기로 하고, 우리팀은 곧바로 백두산 정상을 향하여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나쁜 날씨에도 불구하고 우리 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백두산 정상으로 한발 한발 내딛었다. 노약자나 어린아이들을 지고 나르는 가마꾼들도 간간히 보였다. 이런 악천후로 내몸 하나 올라가기 힘든데, 돈을 벌기 위하여 가마를 매고 오르는 사람들을 보니 힘이 불꾼 솟았다. 중간에 잠시 시원한 바람이 불더니 가렸던 산하가 보이는듯 하더니 이내 운무 속으로 사라져 겨우 앞사람만 보일 정도였다.
마침내 11시30분경 백두산 서파 정상에 올랐다. 운무에 쌓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중국과 조선의 경계석을 배경삼아 인증샷을 찍고, 운무 뒤에 넘실댈 천지를 배경삼아 만세도 부르고 점프도 하면서 백두산 정상에 섰음을 만끽하였다. 어제 소주에 담궈둔 장뇌삼 뇌두주로 백두산 정상에서 한잔씩하며 화이팅도 외쳤다. 12시30분까지 1시간여 동안 운무가 사라지기를 기다렸지만, 끝내 보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 다음을 기약하였다. 다시 1442개 계단을 걸어서 내려와 휴게소에서 뜨끈한 컵라면으로 얼었던 몸을 녹였다.
마지막 희망이었던 백두산 서파에서도 천지를 보지는 못했지만, 우리가 언제 '구름이 바람을 탓하던가!' 나중에 구름이 만나 비가 되고 다시 운무가 되고 바람이 되고... 돌고 도는 자연 아니겠는가! 그래도 고마운 것은 백두산 정상을 두번이나 내 발로 밟을 수 있게 날씨를 허락했다는 것이다. 일년에 60일 정도만 백두산 천지가 열린다는데 나는 그나마 백두산 정상에 오른것만이라도 뿌듯하고 백퍼 만족한다. 백두산 높이가 2744m인데 자동차로 너무 쉽게 올라가서 그 높이에 대한 경외감이 덜한 듯한데, 그동안 백두대간 종주를 하면서 운무에 쌓여 주변산하를 보지 못한게 부지기수다. 단연코 트래킹을 했다면 백두산 정상에 서기만 했어도 행복감이 충만했을텐데 너무 쉽게 접근한 탓에 다들 아쉽게만 생각하는것 같았다.
아쉬움을 뒤로한체 계속 일정을 이어나가 2시20분경 제자하라는 곳을 보았는데, 제자라는 말은 '사다리'라는 뜻으로 지각 변동으로 지면이 갈라져 형성되어 지하에 물이 흐르는 계곡 모양이 사다리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3시20분경 금강대협곡을 탐험했는데, 이곳은 1000년전 백두산의 화산폭발로 천지가 용암을 불출할 때 만들어진 협곡으로 폭이 200~300m, 깊이가 80~100m에 이르며 기묘한 형태의 바위와 낭떠러지가 절경을 이루었다.
마지막날 17일은 아침에 이도백하를 떠나 연길로 와서 연길 민속박물관을 관람하였는데, 박물관은 규모도 크고 대리석으로 멋지게 지어져 있었지만 중국의 동북아공정에 대한 실상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자리였다. 우리나라 고대 역사중 발해와 고구려의 흔적을 말끔히 지워버리고 조선족이 조선 말기부터 이주하여 정착한 것으로 침소봉대한 역사를 버젓이 적어 놓았고, 윤동주시인 등 항일투사들을 중국인조선족으로 인정하여 우리나라 역사와는 선을 그어 우리 국민이 아닌 것으로 나타내려고 애쓴 흔적이 역역하였다. 또한, 옥저 등 고대지도에서 동해를 일본어로 표기하는 등 우리나라 역사를 인정하기 싫은 현장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중국의 56개 소수민족을 통치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족 또한 중국인이되 조선말을 쓰는 존재 정도만 인정하고, 조선족 또한 중국인으로 살아 가고 있는 것이 현실임을 느끼었다. 첫날 연길 공항에 도착해서 연길 시내 모습에서 거리간판들이 한국어과 중국어가 나란히 적혀 있어서 신선한 충격이었는데, 막상 실상을 들여다 보니 중국 정책의 일환이었다는 생각을 갖게 되니 마음 한편이 헛헛 하였다.
여행의 마지막 일정은 언제나 처럼 쇼핑관광으로 이어졌다. 북한약방, 라텍스공장, 죽섬유 등 그 동안 보았던 것들이라 새로울것도 살것도 없어서 시간만 죽이다가 버스로 왔다. 마지막 저녁식사는 류경호텔의 평양식당에서 간단한 북한 배우들의 쇼와 함께 곁들여 졌는데, 음식도 정갈하고 맛있고 만족스러웠고 반주로 나온 들쭉술도 맛났다. 귀향 비행기 시간이 새벽2시30분이라 시간이 남아 마지막으로 전신맛사지를 받으며 그동안의 여독을 풀었다. 2시30분발 에어부산을 타고 연길공항을 출발하여 6시10분 부산 김해 공항에 무사히 도착해서 구포역 9시28분 KTX을 타고 대전역에 11시14분 귀향하였다.
이번 백두산 여행은 4박6일 동안 멋진 동료와 사랑스런 가족과 함께 한 아름다운 여정으로, 아쉽게 백두산 천지는 보지 못했지만 백두산 정상을 두번이나 밟아 행복한 여행이었다. 먼 훗날 북한과 통일이 된다면 통일된 조국의 땅을 걸어 백두산 정상에 서서 천지를 볼 수 있기를 기원하며, 통일!! 그날이 오면 못다 한 백두대간 구간인 진부령에서 다시 시작해서 북한땅으로 이어가 백두산 정상에서 백두대간 완주!!를 외치리라~~
** 사진은 종주동영상 카테고리 참조 !!
<참고> 백두산 [白頭山] (두산백과)
높이 2,750m로 북위 41˚01´, 동경 128˚05´에 있으며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백색의 부석(浮石)이 얹혀 있으므로 마치 흰 머리와 같다 하여 백두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백두산에서부터 지리산에 이르는 백두대간은 한국의 기본 산줄기로서 모든 산들이 여기서 뻗어내렸다 하여 예로부터 성산(聖山)으로 숭배하였다. 또 단군(檀君)이 탄강(誕降)한 성지로 신성시해왔다. 중국 금대(金代)인 1172년에는 영응산(靈應山)이라 하여 제사를 지냈으며, 청대(淸代)에는 이곳을 왕조인 애신각라(愛新覺羅)의 발상지라 하여 숭배하였다.
북동에서 서남서 방향으로 뻗은 백두산맥[白頭山脈]의 주봉으로 최고봉은 장군봉(2,750m)이다. 장군봉은 일제강점기에는 병사봉이라 불리며 해발 2,744m로 측량되었으나, 북한에 의하여 2,750m로 다시 측량되었다. 2,500m 이상 봉우리는 16개로 향도봉(2,712m), 쌍무지개봉(2,626m), 청석봉(2,662m), 백운봉(2,691m), 차일봉(2,596m) 등이 있다. 남동쪽으로 마천령산맥(摩天嶺山脈)이 뻗어 있다.
활화산으로 고생대부터 신생대까지 여러 시대의 지층들이 발달하였으며, 특히 중생대와 신생대의 구조운동에 의해 형성된 단열구조, 파열구조 단층이 발달하였다. 화산분출은 쥐라기(약 6억 년 전)에서 신생대 제4기까지 지속되었는데 특히 신생대 제3기부터 활발히 진행된 화산활동으로 현무암질 용암이 대량 유출되어 약 5,350㎢의 넓은 백두용암대지가 만들어졌다.
약 200만 년 전부터 화산활동이 약화되어 지금의 산세를 형성하였다. 화산활동 후기에는 대연지봉, 소연지봉, 대각봉, 무두봉, 베개봉, 청봉 등 부속화산들이 형성하였으며 이들은 적갈색 다공질현무암용암의 분출로 생겼다.
최근의 분출은 1597년·1668년·1702년에 있었다고 문헌에 전하고 현재는 백두산 주변 50km 내외에 진도 2∼3의 약한 지진이 발생하고 있다. 화산폭발시 용암이 잘게 부서져 쌓인 부석층이 곳곳에 남아 있는데 천지 부근의 부석층은 두께가 20m 가량 된다. 화산재, 화산탄, 화산모래 등의 층도 남아 있다.
토양은 여러 해 동안 동결층의 영향과 한냉한 기후에서 형성된 토양, 평탄한 현무암대지에서 형성된 토양과 수평대성을 띤 포드졸성 갈색산림토 등이 다양하게 이루어져 있다.
기후는 전형적인 고산기후이며, 한국에서 기후변화가 가장 심하다. 연평균 기온은 6∼8℃, 최고기온 18∼20℃, 1월 평균기온 -23℃(최저 -47℃), 1월의 평균 일교차는 7.5℃, 7월의 평균 일교차는 4.8℃이다. 연평균 상대습도는 74%이며 여름에 가장 높고 겨울에 낮다. 북서풍과 남서풍이 강하게 불고 최대 풍속은 40m/s, 연중 강풍일수는 270일이며, 천지 부근은 강한 돌개바람인 용권이 자주 일어난다.
남쪽의 더운 공기와 몽골지방에서 오는 찬 공기가 마주치면서 안개가 많이 끼는데 7~8월에 안개가 끼는 날수는 33일 가량 되며, 구름이 많고 천둥현상이 잦으며 주로 눈·비를 동반한다. 벼락회수는 연간 약 50회이고 그중 60∼70%는 6∼7월에 있다. 연평균 강수량은 1,500mm이며, 겨울 날씨가 연중 230일 정도 계속된다.
백두산에는 검은담비, 수달, 표범, 호랑이, 사향노루, 사슴, 백두산사슴, 산양, 큰곰 등의 희귀동물이 서식하고 있다. 또한 204종의 조류가 서식하는데,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삼지연메닭(348호)·신무성세가락딱따구리(353호) 등이 있으며, 특별보호대상 조류로 메닭, 세가락메추리, 북올빼미, 긴꼬리올빼미, 흰두루미, 재두루미, 원앙, 청둥오리, 붉은허리제비, 숲새 등이 있다. 북살모사와 긴꼬리도마뱀 등의 파충류와 무당개구리·합수도룡뇽 등의 양서류가 있으며, 천지에는 천지산천어가 살고 있다.
300과 2,700여 종의 식물이 분포하는데 분비나무, 가문비나무, 종비나무, 잎갈나무, 좀잎갈나무, 백두산자작나무가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비교적 분포속도가 빠른 식물종이 다른 지역보다 많은 비중을 차지하며 화산 분출에 의해 피해를 받기 전의 식물종들이 정일봉을 비롯한 일부 지역에 자란다. 이 지역에서는 백두산의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흰병꽃나무·구름꽃다지·백리향·만삼·왜당귀 등이 자란다. 빙하기 이후 고산조건에 적응한 담자리꽃나무, 시로미, 물싸리, 두메김의털, 장군풀, 산할미꽃, 두메아편꽃, 큰산싱아, 각씨투구꽃, 끈끈이주걱, 두루미꽃, 눈사버들, 구름국화, 바위구절초, 만병초 등 한대성 식물들이 자란다.
또 매저지나무·들쭉나무·백산차 등의 냉대성 관목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으며, 금방망이·삼잎방망이·자주꽃방망이·무수해·황기·부채붓꽃·손바닥란·동의나물·분홍노루발풀·왕바꽃·메바꽃·구름범의귀풀·물매화 등 냉대성 초본식물들이 있다.
산 정상에는 칼데라호인 천지(天池)가 있는데 면적 9.165㎢, 평균수심 213m, 최대수심 384m이다. 천지의 물은 높이 67m의 장백폭포(長白瀑布)가 되어 얼다오바이강[二道白河]으로 떨어져 쑹화강[松花江]으로 흐른다. 천지에 시원을 둔 폭포는 백두폭포·사기문폭포·형제폭포·백두밀영폭포 등이며 압록강 상류, 두만강 상류, 산다오바이강[三道白河]으로 흘러들어간다. 천지에는 백암온천과 새로 개발된 백두온천이 있으며, 주변에 장백온천과 제운온천이 있다.
허항령에서 북쪽으로 2km 떨어진 지점에 있는 삼지연(三池淵)은 대소 4개의 얕은 호수로 이루어져 있는데 주위 길이가 4.5km, 수심 3m인 천연호수로서 주변 경관이 뛰어난 휴양지이다. 문화재로는 1712년(숙종 38)에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세운 백두산정계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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