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감과 기다림 / 박주병
시대를 앞서갔던 것이 죄가 되었던 모양이다. 천주교에 관련되었던 정약용(丁若鏞) 일가는 이른바 책롱사건(冊籠事件)에 휘말려 풍비박산이 되었다. 그의 셋째 형인 약종(若鍾)은 나중에 옥사하고, 둘째인 약전(若銓)은 신지도로, 막내인 그는 장기로 유배되었는데, 그 해 다시 황사영의 백서사건(黃嗣永 帛書事件)이 터지자 약전, 양용 두 형제는 다시 끌려와 투옥되었다가 같이 옥에서 나와 다시 정배되었다. 나주의 북쪽에 있는 율정점(栗亭店)이라는 한 주막거리에 이르러 동짓달 찬바람에 시린 손을 맞잡고 서로 헤어져 형은 서쪽 현산(玆山:흑산도의 옛 명칭)으로 동생은 남쪽 강진으로 장사(長沙)의 길을 떠나야 했다.
형제는 유배지에서 각각 새로운 호를 갖게 되는데, 약용은 다산동암(茶山東菴)을 지었던 강진의 다산(茶山)이란 지명이 호가 되었고, 약전은 손암(巽菴)이란 호를 쓰게 되었다. 다산이란 호는 정작 정약용 자신은 한번도 쓴 적이 없었고,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을 뿐이다. 정약용의 호는 본디 사암(俟菴)이라 했다. 기다린다는 뜻이다. 훗날 다산이 지은 손암의 묘지명에서 ‘손암’의 손(巽)이란 입(入)이라 했다.(『周易』「說卦傳」에서 ‘巽爲入’이라 했다) 손암이라는 호로써 약전은 진작 모든 걸 체념했을까. 순명(順命)의 뜻이었으리라.
두 선각자가 서로 헤어져 귀양살이를 하게 되지만, 손암은 술을 더 많이 마시게 되었고 다산은 강진으로 이배되기 몇 달 전에 중풍에 걸렸었는데 강진에 가서 증세가 우심해졌던 모양이다. 왼쪽 다리는 늘 마비 증세를 느끼고 머리 위에는 언제나 두미협(斗尾峽:한강 상류의 강 이름) 얼음 위에서 잉어를 낚는 늙은이의 솜털 모자를 쓰고(다산의 초상화는 마땅히 새로 그려야 한다. 솜털 모자를 쓴 모습이라야 다산의 가장 고통스러울 때의 모습에 핍진하다. 그리고 모자를 쓰지 않을 때는 대머리로 그려야 옳다.) 입가엔 침을 질질 흘리며 혀가 굳어져서 말조차 어긋나 목숨이 길지 않을 것을 자신이 알고 있으면서도 밖으로만 치닫고 있다고 손암에게 드리는 서찰에서 다산은 스스로 토로했다. 그런 몸으로 밤낮없이 저술에만 몰두했다. 형은 그런 동생이 안쓰럽고 보고파서 일구월심 만나야겠다고 애를 태웠다. 그렇게 13년이 흐른 뒤 손암은 어렵게 내흑산(內黑山) 우이보(牛耳堡)까지 나왔지만 강준흠(姜浚欽)이란 자가 상소하여 형제의 상봉을 끝내 저지했다. 이때 다산 또한 이름조차 우이보와 형제 같은 우이봉(牛耳峰)이라고 불리는 강진읍 뒷산에 올라 아득히 현산 쪽을 바라보며 형님 생각에 눈물을 흘렸다. 형은 우이보에서 아우는 우이봉에서 한없이 울었다. 손암은 우이보에서 3년을 기다리다 끝내 한을 품고 금릉(金陵)의 고혼이 되고 말았다.(순조 16, 병자, 1816, 음력 6. 6) 시대를 앞서 간 것이 이토록 죄가 되다니…. 율정점에서 서로 나뉘어 귀양살이한 지 16년째, 손암의 나이 59세가 된다.(다산 55세) 다산은 곧바로 두 아들에게 이런 서찰을 띄웠다.(음 6. 17)
외로운 천지 사이에 다만 우리 손암 선생만이 나의 지기였는데 이제는 잃어 버렸으니, 앞으로 터득하는 바가 있더라도 어느 곳에 입을 열어 함께 할 사람이 있겠느냐. 나를 알아주는 이가 없다면 진작 죽는 것만 못하다. 아내도 나를 알지 못하고, 자식도 나를 알지 못하고, 형제 종족들이 모두 나를 알아주지 못하는 처지에 나를 알아주던 우리 형님이 돌아가셨으니 슬프지 않으랴! 경집(經集) 240책을 새로 장정해서 책상 위에 놓아두었는데 내가 그것을 불살라 버려야 한단 말이냐. 율정(栗亭)의 이별이 마침내 천고에 견디기 어려운 애절한 슬픔이 되다니…… 집안에 대덕(大德)이 계셔도 그 자식이나 조카들조차 알지 못하니 원통하지 않느냐! 선대왕(정조)께서 신하를 아심이 밝아서 늘, “형이 동생보다 낫다.”라고 하셨다. 아! 성명께서는 아마도 형님을 아셨다.
형의 죽음이 참으로 애통한 까닭을 다산은 이렇게 말한다.
그처럼 큰 덕과 큰 그릇, 깊은 학문과 정치한 지식을 너희들은 다 알지 못하고 다만 그 오활(迂闊)한 것만 보고서는 고박(古朴)하다고 지목하여 조금도 흠모하지 않았다. 자식이며 조카들이 이와 같은데 다른 사람들이야 일러 무엇 하랴! 이것이 지극히 애통하고 다른 것이야 애통할 게 없다.
손암이 다산에게 어떠한 지기였는가?
강진에 온 지 7년 만에 다산은 『주역사전』(周易四箋:周易心箋)이라는, 스스로 야광주에 비겼던 불후의 대작을 저술했었는데 이 책에 서문을 쓰면서 손암은 너무나 벅찬 감개를 주체하지 못했다.
…… 만년에 바닷가(강진)로 귀양을 가서 『주역사해』(주역심전)를 지었는데 나는 처음에는 놀랐고 중간에는 기뻤고 끝에는 무릎이 굽혀지는 줄도 깨닫지 못했다.…… 미용(美庸:정약용의 字)은 동이(東夷)의 사람이요, 후생의 끝이다. 사승(師承)의 도움도 없었고 홀로 보고 홀로 깨쳤으나 조그만 칼로 가르고 베는 기세가 대를 쪼개는 것과 같다. 구름과 안개가 걷히면 노예도 하늘을 본다. 이제부터는 누가 미용을 삼성(三聖)의 양자운(揚子雲)이 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으랴! …… 가령 미용이 편안하고 부하고 높고 영화로웠다면 반드시 이런 책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미용이 뜻을 얻지 못한 것은 곧 아우 자신을 위해서 행운이요, 홀로 우리 유학계만 행운인 것이 아니다. 내가 미용보다 몇 살 위지만 문장과 학식은 그의 아래가 된 지 오래다. 거칠고 얕은 말로 이 책을 더럽힐 수 없으나 선배가 영락하면 백세(百世)를 기다리기 어려우니 하늘 아래 땅 위에 이 책을 만든 자는 미용이요 이 책을 읽는 자는 오직 나인데, 내가 또 어찌 한마디 칭찬이 없을 수 있겠는가. 단지 나는 바다 섬에 갇힌 죄인으로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미용과 더불어 한세상 한 형제가 될 수 있으랴! 이 책을 읽고 이 책에 서문을 쓰는 것으로 또한 족하다. 나는 참으로 유감이 없다. 아! 미용도 또한 유감이 없을 것이다.
선배가 영락하면 백세(百世)를 기다리기 어렵다는 말은 ‘사암’이라는 정약용의 호에 빗대어 한 말이다. 즉 손암 자신이 죽고 나면 이 책을 후세에 성인이 나와야 알아볼 터인데, 성인을 두고 어찌 백세를 기약하겠는가라는 뜻이다.
‘기다리다’라는 뜻을 가진 ‘사암’이란 말은, “귀신한테 물어도 의심이 없고 백세(百世)로써 성인을 기다려도 미혹되지 않는다.”(質諸鬼神而無疑 百世以俟聖人而不惑)라는 『중용』의 한 구절에서 취했다고 담원(薝園) 정인보(鄭寅普)는 말한다. 귀신한테 물어도 의심이 없다는 것은 하늘을 아는 것이고, 백세로써 성인을 기다려도 미혹되지 않는다는 것은 사람을 아는 것이라고 자사(子思)는 부연했다. 백세란 3천년이 아닌가! 3천년 뒤에 성인이 나타나도 다산은 자신의 학문이 미혹되지 않으리라는 도도한 자존심을 자신의 호에 걸었다고나 할까.
불운이 행운이라는 손암의 이 역설에 점두하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 이 저술이야말로 그의 만년 대작 정법삼서(政法三書)인 일표이서[一表二書:經世遺表(初名 邦禮草本, 未完, 56세), 牧民心書(57세 봄), 欽欽新書(58세 여름)]로 표방한 그의 국가개혁 사상의 뿌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오늘날의 학자들이 다산의 국가개혁사상을 논하면서 하나같이, 유배 초기에 확립된 다산의 역학사상이 그의 개혁사상의 뿌리였음을 보지 못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다산은 다시 형의 묘지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악서(樂書)가 완성되자 형님은, “2천 년 긴 밤의 긴 꿈에서 지금에서야 큰 악(樂)이 정신이 들었다. 그렇지만 악률(樂律)과 음려(陰呂)는 각각 짝을 맞추되 천(天)을 3, 지(地)를 2로 해야 마땅하니, 이를테면 황종(黃鐘)의 길이 8촌 1푼의 3분의 1을 빼고 난 나머지 5촌 4푼이 대여(大呂)이고, 대주(大鍮)의 길이 7촌 8푼의 3분의 1을 빼고 난 나머지 5촌 2푼이 협종(夾鍾)이고, 나머지도 모두 이와 같은 것이니, 십이율(十二律)로 하여금 형세에 따라 차례를 매겨서는 안 된다.”라고 하셨다. 내가 형님의 말씀을 조용히 생각해 보니 참으로 바꾸지 못할 것임이 확실했다. 이에 전의 원고를 모두 파기하고 형님의 말씀대로 따랐다.
다산의 저서 가운데 『주역사전』과 더불어 긴 밤에 외로이 빛나는 또 하나의 별이라고나 할 『악서고존』(樂書孤存)의 탄생에 손암의 가르침이 이토록 컸던 것을 아는 사람이 드물다.
다산이 이룩한 학문의 경지가 도저하지만 그 경지를 알아보는 손암의 경지 또한 이에 필적하다 할 만하다. 형제는 참으로 지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