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스를 접다 / 송현숙
빈 박스를 접다 보면
오래된 주소가 비어 있거나 찢어져 있다
슬쩍 돌아가거나 뒤돌아섰던 지번들
한 개의 각이 접힐 때면
몇 해의 계절이 네 모퉁이를 거쳐 돌아온다
박스를 접다 보면 면과 면이 만나고
절벽이 생기고 작별하는 순간이 온다
박스를 접다 보면 나는 세상의 문을 하나씩 닫고 있다
검은 벽을 타고 가는 떠난 사람의 뒷모습처럼
우리는 서로 부딪히지 않는다
박스를 풀다 보면
지나가는 하루를 버스 손잡이에 보름달을 걸어두고
입석으로 지나가는 달의 노선을 돌면
동쪽과 서쪽이 포개지는
주소 없는 저녁까지 도망 와있다
한 사람이 박스를 열고 나간 뒤
오래된 박스만 남아 있다
네 개의 각도가 이웃처럼 쓸쓸하게 바라보고 있다
<심사평-김동수 시인, 김기찬 시인>
올해 처음으로 실시한 전라매일 신춘문예에 1,500여 편의 시가 전국적으로 고르게 투고됐다. 최종심에 오른 작품은 최주숙의「벚나무는 천 개의 눈을 뜨네」, 권용례의「옷장의 계절」, 문진숙의「불꽃놀이」, 신귀자의「팔자야 놀자」와 송현숙의「박스를 접다」였다.
선자들은 시인이 구사하고 있는 언어의 참신성, 독창성, 작품성에 관심을 갖고 가능성을 중심으로 심사에 임했다.
최주숙의「벚나무는 천 개의 눈을 뜨네」는 초월적 우주관, 권용례의「옷장의 계절」은 ‘겨울의 옷장’과 ‘봄날의 새싹’에 대한 동일시, 그런가 하면 문진숙의「불꽃놀이」는 신비롭고 역동적인 표현들로 심사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내용의 공소성을 극복하지 못한 점이 지적되었다.
끝까지 고심했던 작품은 신귀자와 송현숙의 작품이었다. 신귀자의「팔자야 놀자」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새로운 가치와 눈뜸의 치열성이 이를 끝내 뒷받침하지 못해 아쉬웠다.
이에 비해 송현숙의「박스를 접다」는 패배와 절망 속에서도 연민을 통해 새로운 희망을 갈구하는 휴머니즘적 시선이 그 배면에 깔려 있음을 알게 한다.
물론 상상력 부족과 상투적인 표현으로 시적 긴장감이 떨어지는 부분은 아쉬움이 크지만, 그의 다른 응모작들도 고른 수준을 보여 앞으로의 가능성을 믿고 당선작으로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