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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우리집 대소사
1.혁범 수원 건물 매입
2.신축 집으로 이사
3.손자 돌
4.사촌 종중 땅
5.해 찬 빌
6.도로 중앙 주차
7.동기생 집들이
8.여행 중 강짜
9.스마트 폰 구입
10.블랙박스 설치
1.혁범 수원 건물 매입
작은 아들 혁범이가 수원 인계동 사거리에 있는 건물을 전격적으로 인수 하였다.
본인이나 식구들 모두 예상하지 않았던 건물 인수라 환호가 쏟아졌다.
건물이 은행 담보도 많고 보증금도 많아 인수금은 별로 많지가 않아 더욱 호재라 생각하고 있다.
10년 동안 벌고 부채를 갚아 자기 건물을 만든다는 포부다.
건물은 팔달구 인계동 979-2 경수대로의 지하 1층 지상 6층 빌딩이다.
대지 131.2평, 건평 356.6평에 1층 2층은 상가고 원룸 20개 투룸 8개실이다.
매매가 35억을 2억3천 할인하여 32억 7천에 인수합의를 하였다.
융자금 15억에 보증금 14억이다.
수익률 년 8%를 예상하고 있다.
10월 6일 일요일에 작은 아들이 물건 한번 구경 가자고 하여 점심에 수원 가서 건물을 보게 되었다. 전에도 한번 아들 쫓아서 수원의 다른 원룸빌딩을 구경하였는데 사도 좋고 안사도 좋고 꼭 내가 추천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 본 건물은 모든 여건이 부합되는 것 같았다. 전에 본 건물들은 구경하고 나서 괜찮아, 괜찮아 하다가 이번 건물은 좋아 한번 해보자 하고는 아들과 부동산을 찾았다.
부동산에 가서 3억 할인하여 주면 즉시 계약하겠다고 의견을 제시하고 상경하였다. 저녁에 보자는 연락이 와서 다시 온 식구가(4인) 수원으로 내려가 건물주와 협의를 하였다. 할인 예상 3억에서 3천을 양보하고 계약을 성사시키고 귀경을 하는데 마음이 가볍고 기분이 상쾌한 것을 보면 이후에 모든 일이 잘 풀릴 것 같다.
이 건물은 부동산에 내 놓고 6개월이 되었다는데 혁범이는 3일전 나는 오늘 보고 바로 계약을 한 것이다.
건물주도 놀라는 눈치고 부동산은 조그만 원룸 빌딩을 혁범이에게 소개하다가 한번 구경하라고 보여준 큰 건물을 우리가 덥석 구입을 하니 부동산에서도 의외라고 놀라는 눈치다.
서울에서는 지금 부동산 매매가 거의 중단된 상태에서 우리가 구입을 하니 건물주도 매우 흡족해 할 것이다.
혁범이는 빌딩을 구입하고는 기분이 날라 갈듯이 좋아 잘 올라오지 않던 우리 방에도 열심히 올라오고 우리 부부의 비위를 맞추려고 애쓰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2.신축 집으로 이사
작년에 이사하기로 하고 지은 집이 이런 저런 이유로 미루어져 금년 2월 6일 이사하게 되었다. 1층은 주차장 2층서부터 5층까지는 다세대 주택이다. 우리는 5층에 입주하였다. 신축 집에 처음 입주한 주인공은 1월 5일 이사 온 202호실이다. 다음이 1월 28일 이사한 402호의 작은아들 혁범이다. 주인이 제일먼저 입주하는 것이 상례이나 건설사의 계약 불이행으로 완전치는 않으나 먼저 입주하고 마무리공사를 하기로 하였다.
작년 12월 21일 준공이 나고 확장 작업을 하다 앞집한테 곤욕을 치렀다.
앞집의 변씨 아줌마가 처음 집을 지을 때부터 먼지가 난다 소리가 시끄럽다 공사차량이 막는다며 사사건건 구청에 민원을 넣어 공사 진행에 무척 애를 먹었다. 도로 건너편의 변씨 아줌마가 창문이 보인다며 가리개를 하란다. 법적인 문제도 없는데 민원을 넣으니 구청에서 해 주란다. 앞의 창문을 모두 가리개를 하니 옆집에서도 해 달란다. 민원을 구청에서 하라는 대로 하다보니 우리 집 건물은 동서남북 모든 창문이 가리게 로 가려져 버려 집안에서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려고 해도 볼 수 없는 맹창이 되고 말았다.
구청은 법대로 했는데도 민원인이 민원을 제기하면 덮어 놓고 해주라고 하니 구청의 줏대 없는 행위도 큰 문제다. 민원인이 과도한 요구를 하면 최소한 구청은 중재 역할이라도 해야 하나 구청이 허가해 놓고 구청은 민원이 시끄러워 민원인편을 들어주니 속에서 열불이 난다.
베란다를 확장할 때는 극에 달해 우리가 구청에 뇌물을 주었다고 변씨는 삼십대의 딸 승희와 변호사까지 대동하여 구청직원을 앞에 놓고 녹음까지 하였다. 우리가 민원 때문에 구청에 호출당해 갔을 때도 변씨의 민원 전화가 왔다. 구청에서도 하도 전화가 많이 와서 목소리만 들어도 변씨인 줄 안다고 한다.
구청 직원이 변씨가 민원을 구청뿐이 아니라 시청 청와대까지 민원을 넣어 상급기관에 민원결과를 보고하고, 자기는 자체 감사까지 받아 자기가 살기 위하여 우리를 경찰서에 고발을 하겠다고 한다. 구청 직원도 자기가 근무를 하며 이렇게 지독한 민원인은 처음 본다고 한다.
우리는 집을 신축하며 경찰서에 호출당하여 조서를 받는 최악의 상황까지 온 것이다.
건축허가 낸 집을 지으며 경찰서까지 끌려갔다고는 들어보지도 못했는데 내가 그 꼴이 된 것이다.
구청의 이행강제금과 경찰서의 벌금을 호되게 얻어맞고도 말 한마디 못하고 있다.
우리 대문과 길 건너 마주한 변씨 대문 만 봐도 울화가 치밀어 온다.
우리 집 창문을 다 막고 맹창을 만들어 놓은 변씨가 딴죽을 걸며 자기 집 창문을 페어그라스로 밖에서는 안보이고 안에서는 보이는 유색 유리로 다 바꾸어 달란다.
공사할 때 변씨 아줌마가 우리 집 대문에 드러누워 공사하는 인부들이 출입을 못해 공사가 중단되는 일이 벌어졌다. 건설사에서는 빨리 공사 끝내려고 변씨 집의 3개 층의 라운드 대형 창 들을 페어그라스로 다 바꾸어 주었다.
변씨 집을 지을 때에, 우리 집을 지을 때는 아무 이의도 제기하지 않겠다는 각서까지 우리에게 써준 것은 물거품이 되었다.
골 목안 우리 집이 맨 마지막으로 짓는 집이다. 우리 집 주위 사방에 있는 집들을 재건축 할 때 우리는 모지게 한 적이 없고 오히려 도와준 기억이 있다.
우리부부가 직장에 나가 옆집 공사할 때에 빈집인 우리 집에 들어와서 작업을 하여도 아무 불평도 하지 않았는데 세태가 변해서 그런지 지금은 온 동네가 우리 집을 해코지하기 위하여 있는 것 같다.
레미콘 들어올 때 도로가 파손된다고 못 들어오게 누워서 농성을 하는 집이 없나 지붕을 낮추어라 자기 집의 무엇을 고처 달라 하며 봉 잡은 듯 달려드는데 이게 이웃사촌인가 하고 환멸을 느꼈다.
우여곡절 끝에 신축 집으로 이사를 오니 묵은 체증이 뚫린 듯 기분은 좋으나 어딘지 허전한 느낌이 있다.
방이고 거실이고 어찌나 작은지 답답해 죽겠다. 방이 하도 작아 침대하나 들어가면 여유가 없다. 처음엔 방이 작아 답답하여 문을 열어놓고 잤다. 주방하나 쓸만하다. 건축자재는 고급품으로 창문은 LG 진, 주방은 한샘, 에어컨은 삼성, 엘리베이터는 오티스 제품으로 하고 계단은 타일로 방바닥은 모노륨대신 강마루로 벽지는 실크로 거실인 아트 홀은 대리석으로 치장하였다.
집 외벽은 화강암에 단열이 잘되어 온 집이 웃풍이 없으니 살만하다.
집을 짓기 전에 삼십년 살았으니 고생스럽게 지운 이 새집에서 죽을 때 까지 살 예정이다.
3.손자 돌
큰 아들의 아들, 나한테는 장 손자다.
이 손자 순용(純瑢) 이가 8월 10일 캐나다 토론토에서 둘 잔치를 한단다.
손녀 고은 이는 서울에서 돌잔치를 했는데 손자는 캐나다에서 하니 와서 참석해 달란다.
비행기표 값 아끼느냐고 환승 비행기를 예약했더니 부모님 힘들다고 직행으로 티켓을 보내왔다.
금년에 큰 아들이 토론토에 집도 장만 하였으니 한참 쉬다가 가란다.
집사람이 한달만 있자고 하는 것을 나는 보름만 있겠다고 하여 집사람은 한달 일정으로 먼저 출발을 하였고 나는 보름후인 8월 2일 출발하였다.
토론토 공항에서 아들 식구들이 다 나와 나를 영접 한다.
나도 대우받는 위치에 있구나 하는 성취감이 들으니 마음이 흐뭇해진다.
공항에서 손자를 처음 보았다.
손을 내미니 손자가 거부반응 없이 나에게 안긴다. 일생 처음으로 장손을 나의 품에 안어 보는 순간이다.
일생에 태어나서 처음 보는 할아버지가 싫지는 않은 모양이다.
원더랜드 근처에 있는 집을 가 보니 타운 하우스로 지하주차장에 1층은 거실 2층은 침실로 정원도 있고 살아가기에 흡족한 집이다.
돌잔치를 준비하는데 대형 마트에 가서 돌상 치장할 풍선이나 색종이 등 데커레이션을 구입하여 집에서 준비한다.
장소는 한국식당에서 뷔페로 하기로 예약을 했는데 치장은 모두 집에서 해 가야 한단다. 한국같이 돌이나 환갑잔치 준비하는 전문 업체가 아예 없다.
돌잔치는 친척과 친구를 초청하여 간소하게 치렀다.
돌잔치가 끝나고 모든 하객이 식사하고 남은 음식을 하나도 없이 싸 가지고 간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인데 남은 음식을 싸 가지고 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아들 내외 덕분으로 캐나다 중부 온타리오 주를 곳곳으로 찾아다니며 구경 잘 하고 왔다.
캐나다 온타리오 여행
카사로마
알곤퀸파크
토버머리
데트로이트
돌
캐나다 패키지 여행하면
캐나다 동부의 밴쿠버에서 빅토리아 도시를 관광하고 캘거리에서 밴프 국립공원을 거쳐 로키 산맥을 구경하는 것이다.
세계 10대 전경이라는 레이크 루이스 호수를 거처 로키 산맥을 바라보면 주변의 경관과 치솟은 봉우리를 보고 이게 로키 산맥이구나 하고 감탄하게 된다.
캐나다 서부는 캐나다 제1의 경제도시 토론토에서 나이아가라 폭포를 구경하고 수도 오타와에서 천섬을 둘러보고 동계올림픽이 열린 몬트리올과 프랑스 언어를 사용하는 퀘벡을 관광하는 것이 전부다.
캐나다에서 내세울 관광 상품은 로키 산맥과 나이아가라 폭포 광대하게 펼쳐있는 산림의 단풍이다.
캐나다의 역사가 짧아 유물은 자랑할만한 것이 없다. 정치적으로는 영 연방이라 영국풍이지만 경제는 미국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캐나다의 복지는 미국이 쫓아오지 못할 만큼 잘 되어 있고 경제력도 막강한 G-7이다.
캐나다는 인디언 말로 ‘남의나라’ 라고 하는 말이다.
이 남의나라 캐나다에서 내가 둘러본 온타리오 주를 섭렵하려고 한다.
온타리오 주.(Ontario)
온타리오 주는 북 아메리카의 5대 호중 미시간호를 제외한 온타리오호 에리호 휴론호 슈페리어호 등 4대호를 끼고 있는 캐나다 중심부로서 토론토가 주도다.
토론토는 인디언 말로 ‘만남의 장소’ 라는 말이다.
나는 이 만남의 장소인 토론토를 삼차에 걸쳐 방문을 하게 되었다.
처음은 2006년 2월 캐나다 서부 패키지여행을 마치고 3일 체류일정에 온타리오 주 남쪽 끝 국경도시 윈저에 자리를 잡고 디큼시에 머물렀다.
캐나다 윈저에서 다리만 건너면 미국의 데트로이트다.
데트로이트.(Detroit)
GM 자동차 본사가 있는 데트로이트 시는 60년대 자동차 공장의 메카이며 흑인이 많이 사는 도시다. 경영난에 빠진 GM은 IMF 환란때 한국의 대우 자동차를 헐값에 인수하고 대우 자동차에서 나오는 이익금을 가지고 간신히 뻐팅기고 있을 때다. 데트로이트 시의 주축기업인 GM 자동차가 허덕거리니 데트로이트 시 자체도 경영난에 빠져 시 예산을 집행하지도 못하는 시가 부도 위기에 몰린 상태다.
내가 간 2006년에는 시가 이런 상태이니 시가지가 을시년 스럽고 높은 건물이 유리창이 깨져 있으며 어떤 건물은 입구에 X 자로 막고 아예 출입을 통제하는 건물도 보였다.
경제대국 미국의 데트로이트 시가 이 지경이니 경제의 파탄이 얼마나 무서운지 깨 닳겠다.
캐나다 윈저(Windsor)에서 토론토를 가다보면 런던 케임브리지 워털루 등 영국도시 이름을 차용한 도시가 계속 눈에 뛴다. 캐나다가 영국연방 이라지만 도시 작명은 지역에 맞게 지어야지 행정가의 안일한 책상머리 행정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의 지명이 중국의 지명과 같은 것이 많아 사대주의 사상이 이런 결과를 만들었다고 혼자 씁쓸해 한 적이 생각난다.
두 번째는 동년인 2006년 가을에 패키지여행으로 미 동부와 캐나다 동부를 돌고 토론토에서 4일간 체류를 하였다.
에리호와 온타리오호 중간에 있는 나이아가라 폭포는 캐나다와 미국의 경계선에 있다. 나이아가라 폭포를 미국 쪽에서 보면 전체가 안 보인다.
캐나다 쪽에서 나이아가라 폭포를 관망해야 전체를 보며 그 웅장함과 포효하는 폭포소리를 들을 수 있다.
나는 이 나이아가라 폭포를 캐나다 서부 여행 때 한번 동부 여행 때 한번 일년에 두 번씩이나 보았다.
세 번째는 2013년 8월 2주간 토론토에 머물면서 원더랜드(WonderLand) 옆인 메이플(Mayple) 아들의 집에서 숙식을 하였다.
아들의 생일, 손자의 돌을 맞아 토론토에 간 나는 아들이 새로 구입한 주택 타운 하우스에서 기거를 하며 숨 돌리지 않고 돌아가는 패키지여행과 달리 보름간 여유 있게 주위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캐나다에서 주택 매매는 매입자와 매출자가 얼굴한번 보지 못하고 위탁한 부동산 업자가 모든 매매처리를 다 하고 변호사가 공증을 하면 끝이다.
전세라는 제도가 없는 캐나다는 월세 아니면 장기저리 융자의 주택매입이 있는데 융자는 금융의 신용도가 인정 돼야 하고 이 모든 것을 부동산 업자가 하니 우리나라 부동산 업자의 하는 업무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기거하는 동안 교통은 아들 며느리 사돈이 운전하는 승용차와 밴을 이용하였다.
광활한 대지를 보유하고 있는 캐나다는 전철이나 버스를 이용하는 빈도는 극히 낮고 자가용은 필수다.
자동차가 고급차이고 중급 차의 구별이 없이 실용적이면 된다.
주택은 2, 3층으로 몇 종류의 건축 설계도면으로 지은 듯 비슷비슷하게 주택가가 몇 불럭씩 줄지어 들어서 있는데 아늑하고 조용하다.
주소는 도로를 가운데 두고 왼쪽은 홀수의 주소 오른쪽은 짝수의 주소가 설정되어 있다.
우리나라가 짝수 홀수의 주소를 흉내 내려고 주소체계를 변경하였다.
우리의 오랜 역사와 전통의 마을 이름이나 동명을 무슨도로 몇길 하고 도로 명으로 주소를 바꾸니 편리하자고 변경한 주소가 강북같이 골목이 많은 동네는 오히려 주민들의 혼돈을 일으켜 불편만 더 키운 것 같다.
고층빌딩은 토론토 시내 외에는 외곽도시에서는 볼 수 가 없다.
대지가 넓으니 사무실이나 공장도 1, 2층이 고작이다.
광활한 농토는 농부가 샐러리맨보다 부자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 같다.
트랙터 등 농기구를 보관하는 창고는 중소기업의 공장만 하다.
불편한 점은 물건을 사려고 편의점을 가려고 하여도 보통 오십 리는 가야한다,
구멍가게는 없고 대형상가가 이루어져 있으며 이 대형상가 안에 편의점이나 캐나다 인에 인기가 있는 복권판매소도 있다.
각종의 백화점들도 한곳에 모여 있다. 월마트 홈디퍼 코스트코 등이 한 브럭을 차지하고 한군데 모여 있다.
도로 휴게소에는 캐나다인이 제일 좋아하는 팀호튼 커피점이 어김없이 있다. 스타벅스 커피점이 여기서는 맥을 못 춘다.
식당도 같이 먹는 반찬은 절대로 없고 다 개인별로 준다. 식사도 햄버거나 샌드위치가 주종이고 스테이크 정도가 요리다.
우리나라 요리가 장이나 반찬을 만들기 복잡하여도 세계적인 것 같은데 손이 많이 가고 시간이 걸려서 그렇지 최상위급 요리다. 간편하고 쉽게 세계인의 입맛에 맞는 한국요리를 개발하면 한국 음식점이 크게 히트를 칠 것이다.
도시나 마을마다 공원은 어김없이 있다.
도심 속의 하이파크는 여의도 보다 큰데 잘 정돈한 것이 아니라 도로만 있고 큰 나무도 있는 그대로 자연 상태로 두었다. 차를 끌고 동문으로 들어갔다 보고 나와서 또 서문으로 들어가 공원을 산책하는데 공원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
토론토 다운타운의 고급주택가에 위치한 에드워드공원은 영국왕자의 이름이다. 이 공원은 하이파크보다 비교할 수 없이 작기는 하나 우리나라 같이 정돈된 공원이다.
카사로마.(Casa Loma)
카사로마에 갔다.
카사로마는 토론토의 대 경영가인 헨리 밀 펠렛 경이 1911년 3년에 걸쳐 지은 개인 주택이다. 유럽의 중세풍의 성인데 외모를 보아도 예쁘게 지었고 내부도 당시로서는 최신식으로 개인이 할 수 있는 또 원하는 모든 것을 지은 탐나는 성이다.
개인이 얼마나 부자이면 토론토가 다 보이는 언덕에 이렇게 멋있는 성을 지었을까하고 생각하면 부럽기만 하다.
성은 디즈니랜드 같은 외형에 1,2,3,층 내부는 영국왕실의 방을 모방하여 갖다 놓은 듯이 꾸몄다.
이 아름다운 성 같은 개인 주택을 펠렛 경이 파산을 하고 시에서는 강압적으로 재산세를 10배 이상 고지를 하여 거의 강제로 빼앗았다.
집을 짓고 10년 동안 살아보고는 강제 헌납한 이 성은 현재 토론토의 관광명소가 되었다.
알곤퀸파크.(Algonquin Provincial Park)
알콘퀸 파크를 사돈 내외와 우리부부 4명이 여행길에 올랐다.
알콘퀸 파크는 토론토에서 천리 이상 떨어진 곳이고 온타리오 주의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퀘벡 주와 경계를 이루는 주립공원인데 산림이 무성하여 곰이 나오는 곳이다.
토론토에서 400번과 11번 고속도로를 타고 60번 지방도로로 알곤킨 공원에 도착하였다.
고속도로비가 무료이니 기분이 좋다.
알콘퀸 파크 전망대에 올라가서 보니 사방이 숲이다. 눈에 보이는 수십 리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수십 년 묵은 나무군락이다.
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온 산이 푸른 숲만 보이듯 전망대에서 보는 숲은 푸른 운해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면 하얀 구름이 덮협 듯 하얀 구름대신 푸른 잎사귀다.
이 넓은 알곤퀸파크는 높은 산봉우리가 있고 산자락이 있어 계곡이 있는 것이 아니다.
구릉 같은 낮은 산이고 이 구릉이 연이어 있어 제주도만 한 넓이다.
산 같지 않고 푸른 평야가 끝없이 펼쳐 있는 것 같다. 장관이라고 하기 보다는 놀라움이다.
이 끝이 없는 푸른 숲이 가을에 단풍이 들면 온 시야가 붉게 물들어 장관을 이루고 이때 느끼는 감정은 문필로 표현할 수 없을 것 같다.
가을 단풍이 이 알콘퀸 파크에서만 볼 것이 아니다.
캐나다는 숲과 호수의 천국이라 토론토에서 오타와를 거처 몬트리올까지 도로변에 우거져 있는 것이 나무라 하루 종일 차를 타고 가도 하루 종일 단풍을 구경할 수 있는 곳이다.
이 알콘퀸파크에 만약에 대형 산불이 난다면 진화할 수 있을까 걱정된다. 지형으로 보아 산불이 나면 토론토나 오타와 소방서가 헬기를 동원 하겠지만 불길이 한 달간은 잿더미로 만들 것이다.
전망대에 식당도 없고 명성에 걸맞지 않게 주위의 정리도 허술하다. 식사를 하러 전망대에서 한 시간을 달려 알곤퀸 파크 관리소를 찾아갔다. 관리소에는 안내 판프렛만 있고 흔해빠진 햄버거 가게도 없다. 점심준비를 안 해간 사람은 서너 시간은 달려가야 식당을 찾을 수 있다.
미리 준비해간 간식으로 늦은 점심을 때우고 오타와 쪽으로 알콘퀸 파크 숲 속 길을 달리는데 좌우 앞뒤 모두 나무뿐이다.
비포장도로인 산길을 들어갔다가 겁이 나서 되돌아 나왔다. 수십 미터나 되는 나무사이로 산길을 달리는데 주위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산은 적막에 싸여 있으니 별안간 오싹하며 불안이 엄습해 오니 모두 되돌아가자고 한다.
알곤퀸 파크 서쪽에서 동쪽까지 다 왔다. 파크를 지나 왔는데도 숲은 계속되어 알곤퀸 파크를 계속 달리고 있는 것 같다.
알곤퀸파크 북쪽의 17번 도로를 타면 오타와 강이 흐르는데 강물이 둑에 꽉 차서 흐르는 것이 장관이라고 하여 북쪽으로 갈 예정이었다.
일행이 공원을 실컷 구경했으니 북쪽으로 돌면 자정이나 돼야 집에 간다고 다음을 기약하자고 한다.
토버머리.(Tobermory)
토버머리는 부루스 반도(Bruce Peninsula) 맨 끝에 위치한 국립공원이다. 부르스 반도는 2백리가 넘으며 서쪽은 5대호중의 하나인 휴론 호 동쪽은 죠지아 만이 있다.
아들 내외가 우리 부부를 위하여 기획한 여행지다.
김연아 피겨선수가 왔다간 곳이라고 한인사회에서 많이 알려진 곳이다.
가다가 심코(Simcoe) 호수가 있는 배리(Barrie)에서 부루베리 농장을 들렀다.
부루 베리 나무는 크기가 사람 한 키 정도며 녹차나무 같이 열 지어 식재되어 있고 머루 알만한 것이 익으면 까맣다.
8월에 수확을 하는데 이 농장에서는 손님들이 직접 농장에서 부루베리를 따서 가지고 오면 무게를 달아 파는데 시중가 보다는 싸다.
부루베리를 많이 먹으니 변이 까맣다.
한국에서 부루베리 열풍이 불어서 그런지 이 농장에도 한국 손님들이 많다.
캐나다에선 차로 한 두 시간 달리는 것은 이웃집 가는 것 같이 생각한다.
도로는 일직선이고 편도 2차선이 대부분이다. 벌판을 지나다 네거리가 나오면 시골의 비포장도로인데도 일직선으로 보이지 않게 멀리 뻗어있다.
4차선 6차선으로 도로를 확장하지 않는 것은 도로 용지는 충분하나 지역이 넓고 차량통행이 많지 않아 도로를 확장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이다.
도로 표시판은 우리나라 골목 들어가는 표지판만 하게 작아서 눈에 잘 띠지도 않는다.
우리나라 이정표는 참 잘되어 있다는 것을 캐나다에 와서 알 수 있게 되었다.
제한속도는 80Km 인데 앞에 가는 차가 없고 속도측정 카메라도 없는데도 속도를 준수한다.
일 차선은 추월선이라 추월하곤 바로 이 차선으로 들어와 운행을 하는 것을 보면 본받을 만한 매너이다.
일단 정지선은 사람이 있건 없건 무조건 섰다 간다. 사람이 있으면 당연히 정지하는 차량을 보면 사람이 차에 우선하는 선진국다운 매너가 보인다.
우리나라는 차가 많은 이유도 있겠지만 통행선이나 추월선이나 한번 들어가면 비켜주질 않는다. 추월선에서 차의 흐름을 맞춰 빨리 가지도 못하는 주제에 비켜주지도 않으면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욕설이 나온다.
독일의 아우토반은 Keep Right (우측통행) 이라고 자동차를 운행할 때는 꼭 우측차선을 이용해야 하고 좌측추월이 공식화 되어 있다.
돌쟁이도 안전띠를 둘러 의자에 앉힌다. 아무리 울어도 운행 중에는 엄마가 안어 주는 법이 없다. 돌도 안 된 갓난애를 엄마가 안고 조심하면 될 것을 안전의자에서 울게 내버려 두니 옆에서 보면 안쓰러워 죽겠다.
돌때까지는 안전띠를 맨 유아의자를 앞이 아니라 뒤쪽을 보고 앉처야 한다. 미생아라 급 정차시 보호하고 동행자가 보살피기 위해서다.
찬스만 있으면 끼어들고 끼어들지 못하게 막아 대는 서울의 운전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전방에 차가 하나도 없는데 80Km 로 규정 속도를 유지하니 과속으로 몸이 밴 나는 참으려고 해도 갑갑해서 몸살이 나는 것 같다.
국제운전면허가 있어도 여기선 조심해야 한다.
좌회전할 때 파란불이고 앞에서 차가 오는데 좌회전을 한다. 앞에서 오는 차는 천천히 오며 지나가게 한다. 이게 법이란다.
좌회전 표시가 날 때만 좌회전 하는 우리습관으로는 좌회전 할 때 꼭 앞에서 오는 차와 부딪칠 것 같다.
우리나라 같으면 그냥 달려서 좌회전 하는 차를 들이받아 보험금을 타 먹을 텐데 우리와 너머 다른 규칙이다. 우리나라에 캐나다 법칙을 적용하면 교통이 마비될 것 같다.
서울은 열대야라고 하는데 토버머리 항구는 바람이 불고 초겨울 날씨같이 춥다.
시부모를 위해서 간 여행이 손자를 감기 몸살 나게 하여 약방에 뛰어가게 만들었으니 우리 꼴이 말이 아니다. 호텔에서 1박만 하고 귀가하기로 하였다.
토버머리는 휴양지답게 식당이나 상점이 들어서 있으며 호객행위는 없다.
토버머리 항구에서 크루즈 선으로 후라워퐅(Flowerpot)섬을 한바퀴 돌며 바다에 가라앉은 대형 유조선이나 등대를 구경하는 것은 생략하고 토버머리 끝의 등대를 찾아갔다.
브루스 반도 맨 끝의 등대라 기대를 하고 찾아갔는데 크지도 않고 심미감도 없고 실망스러우나 여기서는 관광명소에 꼭 집어넣는다.
충청도만 한 브루스 반도는 숲이 우거져 요소요소마다 캠핑장소가 있고 방갈로가 있다. 죠지아만 쪽으로는 라이온 헤드(Lion Head)와 위아톤(Wiarton)시가 있으며 휴론호 쪽으로는 대형비치가 있어 수영 객에게 인기가 있는 샤블비치(Sauble Beach)가 있다.
반도 끝에 있는 덩크만(Dunks Bay)에 가보고 놀란 것이 있다.
크지는 않은 덩크만에 모래사장이 있는데 학교 운동장만 한 넓이만 남겨놓고 양 옆으로 철조망이 처져 있다.
양 옆의 모래사장이나 해안가가 개인 소유란다. 한사람 소유도 아니고 여러 사람 소유로 구별되어 있으며 별장들이 들어서 있다.
넓은 땅에 개인소유가 좀 있다고 별문제는 없다고 하더라도 여기는 공원이고 비치 아닌가. 큰길에서 이 해안까지는 십여 리에 일직선으로 나 있는 도로에 양쪽으로는 숲이 우거져 있고 집은 한 채도 없는데 해안가에 오니 개인 사유지라니 당혹스럽기 짝이 없다.
한 여름인데 날씨는 추워서 수영을 할 수는 없고 울창한 나무와 해안가가 있더라도 계속 보니 흥미를 잃어간다.
부르스 반도는 시간도 있고 요트도 있고 별장도 있으면 여름에 즐기기 좋은 반도다.
돌잔치
돌잔치에서 본 장면이다.
돌을 한국 음식점에서 뷔페로 하였는데 돌상을 차리고 데커레이션을 하는 것은 모두 본인이 해야 된다. 결혼이나 돌잔치 준비하는 업체가 없다.
식사가 끝나고 돌아갈 때에 봉숭 외에 빈 도시락 통에 뷔페에서 남은 음식을 원하는 대로 각자 싸 가지고 간다. 고기는 물론 김치까지 싸가지고 간다. 뷔페 그릇에 남은 음식이 하나도 없고 빈 통만 남았다.
집이 살만하다고 하는 사람도 예외 없이 남은 음식을 싸 가지고 간다.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장면이다.
이민 십년차 이상 된 분들이라 사고방식은 우리나라 70년대에 머물러 있다. 지금 우리나라는 젊은이들이 개인주의로 바뀌어 부모공양을 허술히 하는데 캐나다에서는 이조시대 유교 방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행동하는 것 같다. 마치 중국에서 없어진 유교사상을 찾으려면 한국에 오는 것 같다.
캐나다가 복지시설이 잘되어서 편안하게 살지 이민 와서 출세하거나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나는 캐나다에서 교민 중에 자수성가하여 성공하였다는 평화식품 구사장을 만나 식사를 같이 하며 고생담을 들었다.
캐나다에서는 어린이 위주고 어린이가 유치원이나 학교에 등하교할 때 보호자가 꼭 동행을 하여야 한다. 부모가 회사에 있을 때라도 학교에서 연락이 오면 즉시 학교에 가 봐야 되고 회사는 이를 당연시 하는 어린이 천국이다.
행정 집행은 아주 늦어 사회주의 같이 세월아 가라 나는 나대로 한다는 식이다.
행정 처리뿐 아니라 공사도 완벽하게 하려는지 진행속도가 느리지만 법 집행은 강력하여 모든 국민이 준법정신이 투철한 것 같다.
우리같이 빨리 빨리가 몸에 밴 사람들은 갑갑해서 몸살이 나지만 준법정신만큼은 우리가 본받아야 한다.
우리나라 토기유물이 있는 박물관, 어린이들의 정서발달을 위하여 놀이터로 만든 과학 체험관, 어린이 놀이터인 네고랜드(Legoland), 캐나다 대륙 이주 초기의 생활상을 담은 민속촌을 구경하고, 조지아만 서쪽 끝에 있는 와사가 비치(Wasaga Beach)에서 잠시나마 수영도 해 보고 토론토에서 귀국을 하였다.
4.사촌 종중 땅
아버님은 형제분이고 우리 대에 내려와서 큰집이 2남2여 우리 집이 3남4여로 식구가 불어났다. 부모들이 다 돌아가시고 난 후에 사촌과 우리 집이 왕래가 끊어져 이웃사촌보다 못한 사이가 지속되어 왔다.
우리 집은 시골에서 못 살고 사촌은 서울에서 잘 사니 우리와 왕래를 하는 것이 조금도 보탬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사촌 집엘 찾아가도 살갑게 대해주지 않고 동네사람 마실 오는 것 같이 대한다.
할아버지 제삿날에 찾아가도 아파서 제사 못 지낸다고 하여 돌아오곤 했다.
사이가 이러니 자연히 왕래가 끊어지고 연락도 서로 하지 않는 어설픈 친척이 되고 말았다.
서로 비방이나 싸움한번 없이 연락을 주고받지 않는 기간이 길어지니 자식들의 혼사도 알리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옆에서 보면 기가 막힌 일이다.
큰집의 큰형이 장손이라고 선대의 종중산을 종중 명의가 아닌 개인 명의로 부동산을 등기 설정하였다. 종중 땅을 개인 명의로 했다고 개인 땅이라고 생각하는데서 부터 잘못이 시작되었다.
청계산 하오고개에 30세 할아버지인 5대조 산소가 있고 증조할아버지 묘는 금토동에 있다. 19세부터 22세 정익공도 금토동에 있다. 25세는 용인에 28세는 음성에 있다. 아버지부터 4대조 까지도 청계산 하오고개에 있다.
사촌 큰형이 자기 명의 부동산이라고 청계산 종중 땅부터 팔아먹기 시작 하였다.
판교에서 안양을 넘어가는 하오고개까지 저수지 양쪽 골짜기가 거의 우리 종중 땅이다. 골짜기의 남쪽을 응달말 북쪽을 양지말 이라고 불렀다.
청계산 하오고개에 있는 산만 160정보가 넘으니 50만평 정도다.
정신문화원(한국학 연구원)자리가 사기막골 이라고 우리산소를 보는 묘지기가 살고 있었다. 정신문화원 위로 운중 저수지가 있다. 이 저수지가 생기기 전에 묘지기가 추석에 산소에서 차례를 지내려고 두 사람이 지게를 지고 저수지 길로 우리 5대조 산소까지 차례상을 날랐다.
내가 군대 전역을 하고 추석에 식구들과 산소엘 가는데 묘지기가 차례상을 준비하지 않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으니 묘지기가 우리 사촌이 응달말 산을 팔아 버리고 옆에 있는 위토도 다 팔아 버리고 묘지기를 고만두라고 하였다 한다.
하오고개 남쪽의 산을 모두 팔아버린 것이다.
묘지기는 위토로 농사를 지어서 살고 대신 차례상과 사초를 하는데 이제 사초도 우리가 하게 되었다.
핑 도는 눈물을 참고 운중동으로 급하게 내려가 북어와 술만 사서 빈한한 차례를 올리는 불경을 저지르고 말았다.
사촌 큰형 오청이가 몰래 팔아먹고는 동네에 있는 우리에게는 말도 안하고 차례는 나 몰라라 하는 것이다.
차례는 물론이고 4대 봉사는 생각 자체도 하지 않고 있다.
우리는 벙어리처럼 말 한마디 안하고 병신처럼 지내고 있다.
여기서 그쳤으면 좋겠는데 금토동 안산의 증조할아버지 산소 땅을 또 팔아먹었다.
종중 땅을 개인 땅으로 생각하고 팔아먹은 사촌 큰형 오청이가 장가도 안가고 총각으로 환갑도 되기 전에 죽고 말았다.
우리는 죽었다는 연락도 못 받아 죽었는지 조차 모르고 있었다.
오청이가 죽으니 사촌 작은형 오영이와 두 누이 셋이서 종중산을 똑같이 나누어 가졌다. 시집간 딸이나 양자간 자식이나 똑같이 나누어 가졌다는 말이다.
오영이는 은행 지점장 시절에 당숙에게 양자를 갔는데 당숙이 3년 만에 돌아가셔서 당숙의 그 많은 재산을 독식하게 되었다.
당숙에게 먼저 친형인 오택이가 양자를 갔다가 파양을 한 자리에 오영이가 들어가서 횡재를 한 것이다.
오영이가 당숙에게 양자를 갔으면 나에게 4촌에서 6촌으로 변했는데 상속법에서는 양자를 갔다고 해도 4촌의 권한이 그대로 남아 오청이의 재산을 상속했다는 것이다.
오청이나 오영이나 사대봉사는 해본 적이 없고, 4대조나 작은 아버지 산소가 청계산 어데 있는지 알지도 못하고 산소에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인물들이다.
종중 땅은 조상에 봉사하라고 내려온 땅인데 개인 명의라고 독식하고는 장손인데도 조상에게 제사도 안올리고 재산만 챙기고 있다.
오청이 형이 죽으니 청계산 하오고개 양지말 쪽에 남은 산을 사촌 3남매가 나누어 가졌다. 사촌 큰 누이 지분을 공짜로 작은누이에게 주었다. 작은누이가 이 땅을 담보로 하여 14억을 대출받고 상환을 못하니 경매에 넘어갔다.
수원 지방법원 성남지원 2013타경 1206번 권숙자 성남시 운중동 산 80번지
168,281m2
추석 전인 9월 18일 사촌 오영이를 만나자고 하여 국일관 커피숍에서 만나 하나하나 따졌다.
5대조 시향을 잡수셔야 하는데 나보고 언제 세향제를 잡을 것이냐고 물어 난처했다.
5대조 봉토가 있어 세향 준비를 하라고 하는데 어떤 땅을 내 놓을 것이냐고 물으니 묵묵부답이다.
사대봉사를 해야 하는데 사촌은 제사 한번 지내지 않았는데 어떻게 할 작정이냐.
사촌은 정월 추석 차례한번 참석하지 않았는데 차례를 사촌이 지내야 하지 않느냐.
현재 청계산 5대조 있는 산이 경매에 넘어갔는데 사촌 형이 풀어라.
종중 땅을 큰아버지가 만주에서 돈을 많이 벌어 산을 산 것이라고 우긴다.
큰아버지가 무관으로 있다가 책을 썼는데 언제 돈을 벌어 5대조 4대조가 있는 산을 샀느냐, 큰아버지가 쓴 책도 봤고, 군 동기생 앨범인 사막천도 내가 가지고 있다. 종중산을 큰아버지 산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마라.
오영이가 제사도 안 지낸 것 등 미안하다고 하여 이게 말로 미안하다고 하고 지나갈 문제가 아니다.
모든 것을 정상으로 풀 으라고 한 시간 반 동안이나 이야기 하였다.
어떻게 은행 지점장까지 지낸 사람이 종중 땅인지 개인 땅인지 구별도 못하고 있었다니 저의가 의심스럽다.
경매에 넘어간 것 빼고 운중동 산 80-8번지 84,141m2 만 오영이 이름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또 동생 숙자가 음성 종중 땅에 대고 소송을 했느냐고 물어봤다. 자기는 모른 척 한다. 그래서 2008년 6월 충주 변호사한테서 받은 봉투를 보여주며 여기 오영이 형이 재산을 숙자에게 넘겨준다고 도장 찍지 않았느냐고 하니 자기는 그런 기억이 없는 눈치다.
내가 청주지방법원 충주지원에 낸 동생 권숙자의 소장을 가지고 가서 따진 것이다.
7필지에 14억이 넘는 소송인데 큰 누이와 오영이가 숙자에게 지분을 양도했다고 나온다.
음성 승지공파 종중에서 하는 말은 시집을 간 숙자에게 모든 땅을 넘겨주면 권씨 땅이 숙자의 남편인 최씨한테 넘어가는 것이 아니냐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다고 사촌을 나무란다.
청계 산을 팔아먹더니 음성 종중까지 들 쑤셔 놓았다.
음성 변호사도 걱정 안 해도 된다고 한다.
음성 승지공파 종중 땅을 소송을 하더니 취하해 버린다.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취하를 하려면 처음부터 소송을 하지 말던지 해야지 원고와 제일 가까운 나만 입장이 곤란하여 졌다.
이 와중에 소송 걸려있는 음성 승지공파 혁윤이가 자살하는 소동이 벌어진다. 장례를 우리한테 알려 주지도 않았다.
창피하고 치사한 집안 이야기를 하고 싶지도 않다.
5.해 찬 빌
30년 전에 상월곡동에서 살다 신사동 집을 사서 이사를 오게 되었다.
결혼하고 월곡동에서 전세로 살다 2년 만에 상월곡동 집을 샀다. 성모병원에서 큰아들을 낳고 병원에서 퇴원하고 삼일도 되기 전에 상월곡동 집으로 이사를 하였다. 그리고 5년도 되기 전에 신사동 집을 사서 이사를 오게 된 것이다.
결혼하고 백일만에 정능집을 사서 전세를 놓았다.
신사동 집이 행정명이 바뀌어 강남구 논현동으로 바뀌었다.
이 논현동 새집에서 30여년을 살았으니 구옥이 되어 집을 허물고 그 자리에 새로 다가구 주택을 지었다.
1층은 주차장 2층에서 5층까지는 다가구 주택 9가구다.
원룸 투 룸으로 이루어 졌으며 우리는 5층에서 살기로 하였다.
이 새로 지은 다가구 건물의 이름을 ‘해찬빌’ 이라 명명 하였다.
해가 찬란히 비추는 빌라라는 의미 이지만 실상은 집사람 이름과 내 이름에서 한자씩 따와 해찬빌 이라 이름을 지은 것이다.
강남구 신사동 295-5번지에서 논현동 11-15호로 행정명이 바뀌었고 2014년 1월 1일부터는 행정명이 또 강남구 도산대로 12길 17-9로 바뀌었다.
해가 찬란히 비추는 것 같이 건물에 입주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찬란한 미래가 비추어 지길 기원한다.
6.도로 중앙 주차
우리 집 앞의 도로는 ㄷ 자형 이면 도로다.
골목을 회전하여 나갈 수 있는데 길 한가운데 아무차도 다닐 수 없게 승용차를 주차 해놓고 있다. 우리앞집의 변씨 아줌마가 제네시스 승용차를 길 한가운데 주차하는지가 몇 개월이 되었는데 비켜줄 생각을 않는다.
차에는 전화번호나 연락처도 안 써 논다.
생각다 못하여 경찰 백차를 불렀다.
경찰이 마이크를 대고 차주인 나오라고 하여도 꿈적도 않는다. 경찰이 변씨 집에 들어가 길 가운데 있는 차를 빼라고 하여도 자기는 주차하겠단다.
골목에 무슨 일만 나도 구경나오던 동네 사람이 경찰이 백차를 끌고 와서 마이크로 떠드는데도 아무도 안 나와 본다.
경찰은 도로 중앙에 주차해 있는 승용차를 해결 못하고 철수하였다.
이면 도로의 사도는 견인을 못해가는 모양이다.
강남 개발할 때 집들을 지으며 토지주인이 도로용지로 구청에 기부 체납하여 이면도로가 생겼는데 구청에서 기부 체납한 것을 행정처리를 하지 않아 지금 사도로 되어 있다. 도로 주인은 필동에 사는데 지금 자기의 땅이 있는지도 모르고 있다.
구청에 도로 중앙에 주차를 하고 있는 승용차를 해결해 달라고 하니 무소식이다.
이 승용차 때문에 도로의 구실을 못하고 양방 통행이 막혀버린 것이다.
처음에는 11-19호 새로 지을 때 없던 주차장 문을 우리 안 골목으로 내었다.
가뜩이나 주차 때문에 잡음이 심한 골목으로 문을 낼 이유가 무엇이냐며 본래대로 1층 앞으로 내라고 하며 골목에서 이의를 제기하고 구청에 민원을 냈었다.
구청에서는 법에 하자 없다고 하니 건물주는 공사를 밀어부처 주차장 문을 또 냈다.
이 때문에 민원의 중심에 있는 변씨 아줌마가 자기 집 앞으로 차가 못 다니게 강제행사를 하는 줄 알았다. 19호는 옆집과 협의가 끝나 위쪽 골목으로만 다니는 길을 텄다.
29호의 문제가 다 끝났는데도 승용차가 골목 가운데 그것도 우리 집 남측 주차장 들어가는 문을 막고 있으니 우리는 울화가 날 수 밖에 없다.
우리 집을 짓기 전 구옥에 대문 앞에 우리 승용차를 바짝 세워 주차를 하였다. 물론 다른 차는 비켜 지나갈 수 있고 원하면 항시 차를 빼 주었다.
변씨 아줌마는 자기가 이사 온지 11년 되었으니 11년 동안 이렇게 세워놓고 살겠단다. 세워 놓으려면 최소한 차에 연락처라도 써 놓던지, 빼 달라면 빼 주어 다른 차가 갈수는 있게 해 주어야 되는데 오기로 아주 길 가운데 주차해 놓고 버틴다.
집사람이 변씨 아줌마와 주차 관계로 서로 쌍말을 하며 싸우고는 처다도 안 본다.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변씨 아줌마는 칠십이 다 되었는데 기본적인 예의도 없고 매너도 없는 얼굴에 철판을 깔은 여자다.
7.동기생 집들이
동기생들이 우리 집을 작년에 새로 짖고 금년에 이사한 것을 알고 있다.
봄부터 동기생들이 모일 때마다 ‘야 너 집들이 안하냐? 지신을 밟아 줘야지 집안이 잘 되는 거야.’ 하며 초청하라며 새집 지은 것을 축하해 주겠단다.
축하해 주겠다는데 초청하는 것은 문제가 없으나 친구들이 들어오면 방이 작아 앉아 있을 장소가 없다.
설계 도면만 보고 방이 이렇게 작게 나온다는 것을 몰랐고 감지했을 때는 이미 공사가 많이 진행되어 수정 불능 상태였다.
열댓 명이라도 비집고 앉을 수 있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하고 궁리를 하다 복도를 없애고 거실로 만들어 공간을 넓히기로 하였다.
우리 집을 지은 예림건설에 부탁을 하니 하청업자 원 인테리어를 소개한다.
한쪽 벽을 허물고 마루를 만드는데 먼지가 장난이 아니다. 온 집안을 다 비닐로 막아도 헛일이다. 집안 살림을 놓고 수리한다는 것은 못할 일이다.
벽을 파쇄 하는데 소음은 얼마나 큰지 집 공사할 때 옆집에서 계속 민원을 제가한 것을 기억하니 신경이 곤두 세워져 밖에서 인기척만 나도 가슴이 설렁한다.
공사 중에 벽 속에 오수관을 막아버린 것을 찾아냈다.
오수 환기관은 밖으로 끌어내서 악취를 배출해야 한다. 벽 속의 오수관을 막아버리니 화장실 냄새가 밖으로 배출이 않되 화장실에서 악취가 계속 나기 때문에 고생을 하였는데 기본 원인을 찾아냈다.
집 공사를 할 때 설비업자가 예림건설에 불만이 있는 것을 우리 집한테 분풀이를 한 것 같다. 이 설비업자가 공사한 화장실이나 수도 계량기가 물이새서 건물 전체를 누수탐지기를 동원하기도 하였다.
겨울에 3층 화장실에서 물이 새어 나오는 것이 2층 벽을 타고 1층 주차장 처마로 흘러내려 고드름이 매달린 것이 초가집 겨울 고드름 매달린 것 같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업자를 잘 만나야 하는 것이 불변의 원칙이다.
거실을 넓히느냐고 천만 원을 들여 보름간 공사를 하였다.
공사하는데 먼지도 나고 소리도 나고 주차 방해도 했을 터인데 앞집 옆집에서 다행히 조용하였다. 집을 지을 때 하고 싶은 만큼 우리를 괴롭혀 진이 빠진 모양이다.
비좁지만 한자리에 열댓 명이 앉아 식사할 공간이 생겼다.
중문도 다 없애버려 공간이 넓어지니 문을 열고 들어오면 속이 다 시원해진다.
11월 19일 저녁에 동기생 열댓 명을 초청하여 출장 뷔페로 집들이를 하였다.
강남요지에 빌딩을 갖고 노후준비 완벽하게 했구나 하고 덕담을 하는데 나름대로 흐뭇하였다.
나는 아들 자랑하겠다며 우리아들이 이번에 수원에다 7층 빌딩을 샀다고 하며 빌딩사진을 보여주었다. 친구들이 자식 잘 두었다고 하니 다른 친구가 ‘야 아들이 삼성전자에 다니잖아’ 하며 호흡을 맞추어 주었다.
8.여행 중 강짜
해외여행을 여러 날 하다보면 몸이 피곤하여 신경이 예민하여지고 포용력이 없어져 다른 여행객과 말다툼을 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몸이 피곤하지 않더라도 성격이 예민하여 협동심이 떨어져도 다른 여행객들에게 피해를 주며 따돌림을 받게 된다.
성격이 샤프한 사람은 본인이 자신의 성질을 알고 매사 참으려고 하면 의외로 다른 여행객들에게 호감을 사기도 한다.
여행객중에 자기성질대로 성깔부리는 사람이 한 두 사람 있으면 그 여행은 내내 분위기가 냉랭해 여행의 진수를 느끼지 못하고 여행을 망치게 된다. 이런 사람은 자기 때문에 다른 여행객이 신경을 쓰고 피해를 본다는 생각을 못 하는 것 같다.
나는 집사람이 중국에서의 돌출행동, 또 싱가포르에서 여행객 앞에서 성질 나는 대로 큰소리 지르는 것에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였다. 별것 아닌 것을 가지고 조금만 참으면 될 것을 성질대로 행동하니 여행의 분위기를 순식간에 망치고 말았다.
성질이 예민하여 참지를 못한 결과다.
여행가기 싫다는 집사람을 데리고 해외여행을 여러 번 다니다 보니 집사람이 다른 여행객과 잘 어울리고 즐겁게 여행을 하는 것을 보면 여행객과 어울리는 것을 많이 익혔구나 하고 다행스럽게 생각하였다.
여행객들이 집사람을 떠받들면 주도권을 잡으며 상승작용을 하여 더 즐겁게 떠들며 어울린다.
문제는 자기와 라이벌이라고 생각하던지 비위를 상하게 하면 그때부터 문제가 일어난다.
이런 문제가 발칸반도 여행에서 일이 벌어졌다.
발칸반도의 본 여행이 시작되기 전날 짤스브르크에서 호텔 룸을 배정받기 전이다. 시간이 남아 각자 자기 자랑을 하려고 여행담을 꺼내놓기 시작하였다.
발칸반도 여행을 올 정도면 세계각지 웬만한 곳은 다 갔다 왔다는 여행의 베테랑들이다.
명품 옷을 입고 나름대로 세련된 여인이 ‘인도에 갔다 오니 거지새끼들만 보이고 더러워 혼났다’고 하였다. 이에 집사람이 끼어들며 인도는 인간미가 있고 개한테도 인사를 하고 구경할 곳이 참 많은 곳이라고 반박을 하였다.
인도를 놓고 극에서 극으로 보는 관점이 다르니 여기서부터 두 여인의 감정이 뒤틀리기 시작하였다. 발칸반도 여행을 다니며 서로 건건이 상대방을 헐뜯기 시작하였다. 두 사람 다 양보할 기미는 보이지 않으며 암투는 계속되었다.
여행이 끝나는 베오그라드에 왔을 때는 우리 집사람이 거의 액팅 단계에 왔다. 이런 감정의 불꽃이 나에게 튀어 강짜를 부리기 시작했다.
내가 제지하며 욕했다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도 나에게 말도 한한다. 자기편 들어줄 것 같지 않은 나에게 말해봤자 도움도 않되 말할 필요가 없단다.
아예 남편을 잘못 선택했단다.
남편을 무시하는 집사람의 언행에 내 자존심도 무너지는 것 같고 속에서 열불이 난다.
베오그라드 중심가 명품상가 거리에서 휴식시간이 있었다.
집 사람에게 이리와 단 둘이 이야기를 좀 하자니까 안 온단다. 시내 중심가에서 내 억양이 커졌다. 외국인들이 다 쳐다본다. 내가 가면 집사람이 피한다. 휴식시간에 부부가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다.
남편을 남편같이 생각 안하는 여인과 같이 있으려니 속에서 울화가 치밀어 온다.
휴식시간이 끝나고 고색창연한 건물을 보는데 하나도 멋있지가 않다. 구경을 하려면 감정과 느낌이 실려야 하는데 감정이 사라지니 멋있는 건물도 나무토막 보는 것 같고 여행의 흥미와 재미도 없어졌다.
이래도 집사람과 계속 여행을 다녀야 하나 하고 다시 생각해 본다.
귀국 후에도 한 달간 집사람과 냉랭하게 지냈다.
발칸반도 여행
여행지 ; 발칸반도 9국, 경유 3국. 13일
발칸반도 ;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알바니아, 마케도니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세르비아.
경유국 ; 아랍에미레이트,독일,오스트리아.
일 자 ; 2013년6월16일 오후 10시 30분 인천공항 집합. 새벽 01시10분 출발
2013년 6월 28일 오전 11시 50분 Ethiad 항공으로 인청공항 도착
여행 비수기라 여행사의 패키지 연합 상품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인천공항에서 밤비행기를 타고 아랍 에미리트 아부다비에서 환승하여 독일 뮌헨에 도착한 후 김제(Chiem see)호수가 있는 프린으로 이동하여 헤렌킴제성을 본 다음 오스트리아 짤스브르크에서 숙박한 후 본격적인 발칸반도 여행에 돌입하였다.
슬로베니아의 블레드에 있는 호수는 정말로 아름답다. 절벽위에 있는 성이나 호수 안에 있는 섬의 성당에서 보면 사방이 아름다워 감탄사가 절로 나오며 물은 맑아 수영을 즐기는 사람을 보면 부럽다.
산위의 블레드 성도 호수와 어울리게 잘 꾸며져 있다. 전쟁을 위한 성이 아니라 귀족들의 휴양이나 도피처로 보인다.
포스토이나로 이동하여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긴 종유동굴을 보았다. 동굴 안을 꼬마기차로 이동하여 관람하는데 헨리 무어가 가장아름다운 자연미술관이라고 격찬하였는데 내가보기엔 과찬인 것 같다. 종유석도 특별히 예쁜 것도 아니다.
크로아티아의 국립공원 플리트비체를 보았다. 16개의 호수와 폭포로 구성된 호수공원은 유네스코 자연유산으로 발칸반도 국립공원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세계에서 물을 구경하려면 중국의 구체구와 크로아티아의 플리트비체공원을 보면 더 이상 볼 것이 없다고 한다.
중국의 구체구가 규모나 물색갈이나 감흥이 플리트비체보다 한수 위인 것 같다.
스플릿으로 이동하여 디오클레시안 궁전을 보았다. 마리안 해안가에 있는 이 궁전은 상점들이 다 점령하고 궁전의 골격만 유지하고 옛날의 석주만 남아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상점으로 변해버린 궁전의 미로 같은 길과 유적이 남아있다.
보스니아의 모스타르에 있는 스타리모스트 다리를 보았다. 가장 오래된 다리라고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는데 역사적인 가치는 몰라도 규모도 작고 볼품도 없다.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의 내전시 최전선이었던 이곳은 양 민족의 화해의 상징이었던 다리가 살육의 현장으로 바뀐 곳이다.
아드리아해안을 따라 크로아티아의 드브르브니크 해안도시를 보는 순간 이렇게 아름다운 해안도시도 있구나 하고 감탄하였다. 해안경치가 아름다워서가 아니고 해안도시 전체를 보는 순간 빨간 테라코타 지붕의 건물이 밀집되어 있는데 해안과 건물이 어우러져 발칸의 꽃이라 불리울 만한 도시라고 느꼈다.
도시전체에 빈민가의 흔적이 없고 건물은 비슷비슷한데 부유한 도시라는 냄새가 난다.
오노플라안 분수 하얀 대리석이 깔려있는 플라차거리 세르비아 정교회 렉터궁전 초기 조선소자리 등 역사의 흔적도 많다. 성벽을 올라가서 한바퀴 돌면 시가지 구경의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다.
나는 저녁에 리조트 해안가에서 아드리아 해에 들어가 잠시나마 수영으로 더위를 식혔다. 해안가는 바위로 불합격품이다.
몬테네그로의 코도르는 중세도시로 도시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고대성벽 성트뤼폰성당이 있으며 도시 규모가 작다.
알바니아의 수도 티라너에 도착하여 스탄더르베그광장에 도착하여 모스크나 오페라 하우스를 보니 크로아티아나 슬로베니아에서 느끼는 흥분된 감정이 하나도 나지 않는다. 한눈에 보아도 경제력이 한참 뒤졌다고 보인다.
마케도니아의 오흐리드에 가니 호반의 도시답게 휴양도시로서의 면모가 보인다.
바다 같은 호수를 끼고 언덕을 오르니 거의 원형이 살아있는 로마극장터 세계문화유산인 요새 지금 발굴중인 최초의 대학 터 성소피아성당 영화촬영으로 유명한 아기자기한 성당을 보았다.
오흐리드호반 카페 앞에 수영을 즐기는 인파가 몰려 있는데 호반가가 백사장도 아니고 협소하여 수영장으로선 적격이 아니다.
지금까지 보아온 관광지들은 호반을 끼거나 아드리아 해를 끼고 발전한 도시나 관광지들이고 이제부터는 발칸반도의 내륙으로 가는 코스로 발칸의 강국들이다.
마케도니아의 수도인 스코프예 광장에 서 있는 최대의 동상이라는 알렉산더대왕의 동상을 보았다. 그리스와 알렉산더 대왕이 자기나라사람이라고 다투고 있어 동상을 그리스에 있는 동상보다 크게 제작한 것이다. 신 구 시가지를 이어주는 터키식 돌다리를 건너니 알렉산더대왕의 일대기 동상을 또 세웠다. 옆에는 성인들의 동상이 있는데 키릴문자를 만든 키릴주교 상도 있다.
키릴문자는 오스만 터키가 발칸반도를 지배할 때 각 민족이 문자가 없어 통치하기에 불편을 느껴 키릴주교에게 명하여 만든 문자로 발칸에서 사용하고 있는 문자나 소련에서 현재 쓰고 있는 문자이다. 알파벳을 한글같이 표음문자로 표기하여 쉽게 읽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발칸반도 최대의 터키탕이라는 다우트파샤 목욕탕이 있는데 우리나라 대형 사우나탕보다 작다.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에 도착하니 지금까지 본 도시들과 건축물의 크기가 완연히 다르게 대형이다.
고대성벽인 세르디카 발칸반도 최대의 교회라는 알렉산더 네프스키교회가 유적으로 있다. 세인트 페트가 지하교회가 있는데 나는 지하교회라 땅속에 있는 줄 알았더니 움푹 패인곳에 땅위로 치솟지 못하게 지어진 건물로 이슬람교가 자기들의 권위를 자랑하려고 높이 짓지 못하게 한 것이다. 소피아 중심인 레닌광장의 대로를 황금색 벽돌로 도로포장을 한 것이 눈에 띤다.
불가리아 왕국의 수도였던 벨리코트누노보는 왕국의 성채였던 차르베르 언덕과 벨리코트누보성을 보았는데 옛 영화는 다 어데 가고 거의 폐허로 남아있다.
루마니아의 수도 부카레스트로 가는데 온통 들판이 노란 해바라기로 덥혀있다. 쏘피아로렌이 주연한 영화 해바라기를 보며 소련은 저렇게 해바라기가 많이 피는구나하고 생각했는데 이 발칸반도에는 여기저기 해바라기 농장이 장관을 이룬다. 유채꽃으로 오인을 했는데 이 많은 노랑꽃이 다 해바라기 꽃이다. 여기서는 해바라기 기름과 씨가 싸다.
부카레스트 혁명광장에 새로운 탑이 생겼다. 독재자 차우셰스쿠는 물러가라고 데모를 하니 차우셰스쿠가 혁명광장에 친정부 민간인을 모아놓고 연설을 하는 도중 민중 속에서 별안간 독재자 차우셰스쿠는 물러가라고 소리치니 친정부 민중이 별안간 반정부 시위대가 되어 차우셰스쿠는 헬기로 도망을 치다 잡혀 처형당하고 만다. 이를 기리기 위한 탑이다.
세계에서 단일 건물로는 미국의 펜타곤 다음으로 크게 지었다는 차우셰스쿠궁전은 외모만 보아도 대단하고 멋있다. 현대식으로 지은 궁전을 사방에서 보아도 흠잡을 때 없이 크고 조화가 잘되어 있어 세계에 내 놓아도 손색이 없다.
이 궁전 앞에서 가수 마이클 잭슨이 부다페스트 여러분 했다가 부카레스트 청중에게 야유를 받았다는 것이다.
차우셰스쿠가 신시가지 조성할 때 구역 안에 정교회가 있는데 허물라고 하였다. 주교가 간청을 하여 구역 밖으로 300m 이동을 하는데 규모가 큰 목재도 아닌 콘크리트 건물을 작키와 선로를 놓아 손색없이 이동을 하였는데 이동기술도 놀랍다. 기초과학이 세계에서 제일 높다는 나라답다.
브라쇼브에서 시가지를 보고 브란으로 갔다. 브란에는 흡혈귀 드라큘라로 알고 잇는 드라큘라성이 있다.
한 부족의 귀족이며 족장이고 루마니아의 영웅인 드라큘라를 서구에서 흡혈귀로 폄하하여 루마니아에서는 몹시 못마땅했으나 그 바람에 지금은 루마니아의 최대 관광명소가 되어 버렸다.
언덕배기에 지어진 드라귤라 성으로 알려진 브란성은 규모는 크다고 할 수 없으나 내부는 오밀조밀하게 각 용도에 맞게 잘 배치되어 있다.
시나이아에 있는 루마니아 국보1호인 펠레슈성의 외부를 보아도 여름별궁답게 멋있다. 내부는 당시 직접 사용했던 무기들로 장식을 하였다. 장식된 이 무기의 현재시가도 천문학적인 금액이다.
루마니아의 궁이나 집들은 지붕이나 외관을 미적으로 멋있게 지어 건축비는 더 들어갈지 모르지만 보기에 참 좋다.
크라이오버에서 숙식을 하였다.
발칸반도는 딸러나 유로 화를 사용하지 않아 현지 화폐로 환전 하여 사용하려니 불편이 따른다. 유로를 받는 곳도 5유로 이하는 천대를 받는다. 물가가 싸지도 않고 공산품은 수입에 의존을 하니 쌀 수가 없다.
각국의 국경을 넘을 때도 일일이 여권을 조사하여 불편하기 짝이 없다.
대우자동차가 있을 때는 대우소리만 들어도 짐 조사도 없이 국경을 통과 했단다. 대우자동차 공장 덕분에 김우중은 불가라아 최고 훈장을 받은 적이 있다.
발칸의 중심인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로 갔다.
1차 대전 후 이 발칸반도는 유고슬라비아라는 한나라였다.
빨치산 대장 출신인 티토가 터키로부터 연승을 하여 발칸반도를 통일하고 전 세계에 티토이즘을 과시한 나라다.
사회주의이지만 소련이나 중국과 이념이 다르고 서방세계와 가까워 냉전시대에 미국과 쏘련 간 중재역할은 티토가 했다. 이렇게 강력한 유고슬라비아가 티토가 죽고난후에 밀로세비치가 등장하며 세르비아인을 우대하여 아르마니아인 등 각 종족이 반기를 들고 각종족이 국가를 만들어 독립을 하니 유고슬라비아는 십여 개국으로 쪼개지고 말았다.
독립을 막으려고 무력을 쓰고 종족간 인종청소를 하다보니 한마을에 살았던 이웃을 인종이나 종파가 틀리다고 살육하는 피비린내 나는 그 시발점은 사라예보였다.
발칸은 로마카토릭에서 나온 동방 정교회가 주류를 이루며 오스만 터키가 장악을 하며 이슬람과 같이 평화로이 공존을 하다 발칸의 화약고가 되어 전 세계가 살육의 현장을 보게 된 것이다.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 거리는 1차대전 후에는 온통거리가 꽃으로 장식되어 있었다고 한다. 서방세계에서 베오그라드 한번 가는 것이 원이었다고 하는 곳이 지금은 황량한 거리로 변하였다. 시내에 있는 국방부를 비롯한 대형건물들이 포탄에 맞아있는 체로 수리를 하지 못하고 방치하고 있다.
국가는 예산이 없고 건물을 일괄 내놓아도 사서 새로 건축하려는 기업도 나서지 않고 있는 참담한 실정이다. 포탄에 맞은 건물은 보기 싫지 않게 천으로 가려놓은 상태로 있다.
베오그라드의 칼라메그단 요새 앞에는 1차대전 때 사용했던 무기들을 전시하고 있다.
베오그라드의 중심거리인 크네즈 마하일로거리는 유명상표의 매장이 줄지어 있다. 청춘남녀는 유행을 자랑하고 서구와 같이 자유분방함이 보인다.
발칸반도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사보르나 정교회 정문 앞에는 최초의 카페가 있는데 상호가 ? 이다. 처음 상호를 사보르나 카페로 하였는데 주교가 성스러운 교회 앞에 카페의 이름이 교회와 같으면 되느냐고 하여 바로 사보르나 카페라는 상호를 떼고 상호이름이 정해지지 않아 새로 이름이 지어질 때까지 임시로 달아놓은 상호가 ? 인데 지금까지 이 ? (물음표) 상호가 붙어있다.
세르비아는 세르비아 정교회 루마니아는 루마니아 정교회 그리스는 그리스 정교회 소련은 동방정교회 등 각 나라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모두 정교회라고 한다. 오소독스라고 모두 동방정교회라고 보면 틀림이 없다.
정교회는 로마 카토릭이 타락하여 천당티켓을 파는 등 썩을 대로 썩었다고 판단하여 동방인 콘스탄티노플에서 카토릭 본래의 의식과 규범대로 예식을 하는 전통방식을 따라 지금도 똑같이 의식을 하고 있는 곳이 동방정교회다.
발칸반도는 유럽에서 제3세계의 핵으로 그 위풍을 자랑하다 유능한 지도자 티토가 죽자 대를 이은 오만한 지도자가 나타나 유고슬라비아를 산산조각을 내고 십여 개국으로 쪼개어 졌다. 그 과정에서 종족간 인간살륙이 일어나고 인종청소에 종파간 싸움까지 겹쳐 온 발칸반도가 아수라장이 되었다.
한 국가의 지도자가 유능하고 무능한지의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곳이 발칸반도다.
9.스마트 폰 구입
내가 핸드폰을 구입하여 사용한지가 20년이 넘었다.
통신사는 SK 011을 고수하며 지금까지 한 회사만 지조를 지키며 사용해 왔다.
구형 핸드폰에서 새로운 모델이 나오면 바꾸기도 여러 번 했다. 기기를 현금을 주고 구입하기도 하고 회사 할인 행사 때 바꾸기도 하였다.
통신사를 바꾸면 공짜로 신형 핸드폰을 준다고 하여도 고집을 부리며 지조 있게 SK 011을 고수하였다.
핸드폰은 고장도 나고 화장실에도 빠트리기도 하며 생활의 일부로 전화 노이로제에 걸릴 정도로 애착을 갖고 사용해 왔다.
일반 전화나 공중전화는 사라지고 핸드폰이 버스고 지하철이고 아무데서나 울려 퍼진다. 길거리에서 이어폰을 꽂고 혼자 이야기 하는 것을 보면 꼭 미친 사람처럼 보인다.
지하철에서도 너 몇째 칸에 탔니? 하고 통화를 하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 사람은 핸드폰 없으면 시체나 다름없는 것 같다.
이 잘나가던 통신망을 정부에서 강제로 모든 통신망은 010으로 바꾸란다. 물론 노인들이 많이 가지고 있는 2G 핸드폰을 4G로 바꾸지 않는다고 끊어버리진 않겠지만 꼭 강제로 입법화해야 하는지 의문이 간다.
IT 강국, 세계에서 핸드폰 사용 상위 국가이면서 핸드폰 생산 세계1위의 삼성이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있을만한 일이다.
이번에도 SK를 고수하려고 이런저런 살펴보니 20년이나 지조를 지킨 고객에게 아무런 혜택이 없다. 다른 통신사를 선택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 이제 결별의 날이 온 것 같다. 미련 없이 LG를 선택하고 최신형 4G인 삼성의 Galaxy S4 LTE-A SHV-E330L를 구입하였다.
컴퓨터를 안 쳐본 사람은 이 신형 모바일을 사용하려면 애를 먹고 사용법을 익혀야 될 것 같다. 조그만 잘못 눌러도 이것저것 나오고 화면은 확확 지나가고 우리에겐 불필요한 프로그램이 꽉 짜여있고 이것저것 보려면 눈알이 빙빙 돈다. 조금 사용하다 보면 익숙해지겠지만 단순하게 만들어 전 국민이 편히 사용할 수 있는 핸드폰이 나왔으면 좋겠다.
10.블랙박스 설치
블랙박스란 비행기에 설치하여 비행기 사고나 추락 시에 사고의 경위를 밝히는 기기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이 블랙박스를 내 승용차에 달았다.
블랙박스 설치 : 2013년 3월 19일. 아이나비 블랙 마하 시리즈 :
FXD 700 Full HD Video 1950 x 1080 GPS (전방) 2ch Rear 640 x 480 (후방)
보험 만기가 되어 승용차에 블랙박스를 달면 보험료 할인을 하여 준다고 하여 즉시 달았다.
강남에 외제차가 많아 조금만 외제 차에 흠집이 나도 수리비가 깜작 놀랄 정도로 많이 나와 블랙박스로 시시비비부터 가리는 것이 급선무였다.
나는 3년 연속 소소한 사고로 보험료가 올라가 있었다.
건널목에서 젊은이가 내차 운전석 백미러를 처서 백미러가 접히기만 하였는데 내 잘못이라고 떼를 쓰며 병원에서 진료를 받았다. 현장에 출동한 보험사 직원이 십만 원만 줘서 보내라는 것을 쾌심하여 주지 않은 결과다.
또 한해는 U 턴을 하는데 옆 차선에서 덩달아 U 턴을 하더니 내차 조수석 바퀴 휀다를 받았는데 보험사에서는 신호위반으로 쌍방과실 이란다.
또 한해는 안전선에서 천천히 나가는데 50미터 이상 떨어진 곳에서 좌회전을 하며 내차가 있는데 까지 와서 부딪친다. 충분하게 내차를 발견하고도 남는 거리인데 내차를 보지 않고 충돌을 했다.
보험사 직원이 현장 출동하여 하는 말이 안전선에 조금이라도 걸려 있으면 나의 과실이란다. 내 차를 받았는데 억울하다고 하니까 쌍방과실이면 잘 처리 해 주는 것이란다.
큰 사고는 아니지만 매년 보험사고 처리를 하니 보험료가 공배수로 올라가며 내려오지를 않는다.
차의 앞뒤에 카메라를 달아 블랙박스를 설치하고 최소한 억울한 처리를 받지 않으려고 머리를 쓴 것이 블랙박스를 설치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