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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연 시집 '쾌락의 뒷면' 발문>
수벌거리는 시
‘제가 일을 저질렀어요’
느닷없이, 이런 전화를 받았을 때 어떤 생각을 해야 맞는가. ‘저지르다’라는 한국어의 질감은 도발성을 포함하면서도 그것 이상인 무엇을 가리킨다. 그것은 도발성을 도발하는 견딜 수 없는 뜨거움이라고 생각한다. 박재연 시인의 저지레는 그렇게 한 통화의 전화를 빌어서 내게 왔다. 시인이 가마솥에 자신을 집어넣고 시시때때로 삶아대던 자기 증상의 통로에서 마침내 빠져나오는 의례였음을 그때 눈치 챘다. 첫시집의 출판이 결정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시집의 뒷동네 즉 발문이나 해설을 메꿔 볼 생각이 없냐는 제안을 받으면서 나는 이 난감에 연루되었다. 개나리가 생살을 찢고 나오는 봄날이었다.
휴가병들이나 사용하는 원주시외버스터미널 공중전화 부스 앞에서 모자를 쓴 시인과 나는 접선했다. 시인이 안고 있는 사무용 봉투가 나를 응시하는 눈치를 비껴서면서 텅 빈 제스츄어 같은 수인사를 나누었다. 시인과 나는 그렇게 거리에서 만났다. 거리에서, 이 대목이 왜 이리 상징상징 하는지 모르겠다. 상징화에 실패하는 순간이 이렇게 징징대는 것이라면 어쩌겠는가. 시인은 원고를 내게 인계했고 원고는 내게로 건너와 야릇한 체증으로 바뀌었다. 그것은 원고의 부피가 주는 모종의 압력 때문이 아닐 것이다. 시인의 만감을 즐감할 수 있다는 계산 때문만도 아닐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시인의 날생(生)이 딛고 간 조심과 뜨거움의 총액이 기입된 문자적 황홀을 먼저 시식하게 된 기묘한 즐거움이 나를 건드렸기 때문이라고 나는 단정한다. 그렇다해도 야릇함의 찌꺼지는 남는다. 마치 건조한 영화의 한 장면 구석에 남아 있는 오점처럼 말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모르는 채로 그것은 여전히 남겨 진다.
나는 이 시집의 주인에게 2년 동안 시를 가르쳤다.
바로 앞의 문장을 나는 소급적으로 수정하며 산다. 그 생각은 저급한 교만이다. 그림이나 음악이 수작업의 특성상 불가피하게 도제적 전수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시 만큼은 가르쳐지는 양식이 아니다. 시는 알아챔의 형식일 뿐이다. 누구에게 시를 배웠다든가 누구를 가르쳤다는 풍문은 민망하고 남우새스러운 자기 모멸로 귀착되기 너무 쉽다. 배를 잘 만들기 위해서는 배를 만드는 손기술이 아니라 바다에 대한 동경을 먼저 가르쳐야 한다. 생떽쥐베리 선생의 선견지명이다. 시를 쓰기 위해서 먼저 자유로운 삶에 대한 갈증을 찾는 방법을 일러줬어야 했다. 내가 이 대목을 깨우친 것은 시를 가르친다는 헛소리에 지친 훨씬 뒷날이었다. 짧게 끝난 악장처럼 시인은 내 곁을 떠나갔으니 다시 불러 일러주기에는 늦었다. 그러기에는 나의 목소리가 너무 쉬었다는 점도 아쉽지만 다행스러운 일이다.
내가 보기에(그렇다는 말은 그렇지 않다는 말도 되는가) 박재연 시인은 시라는 물건을 ‘같잖은 기둥서방’(「시가 뭐길래」) 모시 듯 끼고 살면서 시를 ‘앓아(/’알아‘도 되는가)’ 왔다. 삼키지도 못하지만 뱉아내기에는 또 그것 없이는 정신이 섭섭한 일련의 난감이 시인의 임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에게 ‘앓음-알이’의 형식이야말로 시였을 것으로 본다. 시를 앓는 자의 목젖이 보였다면 너무 얍삽한 수사인가? 그래도 그것이 한때 시를 가르치는 ‘척’ 했던 나의 발견이요 기대였다면 또 어쩌겠는가. 이제는 까놓고 말할 수 있지만 시인의 지병으로 촉진되는 미열을 다스려주기보다는 그 시심의 배후를 의심하고, 빈정대고, 짓밟기 일쑤였다는 혐의 쪽으로 나는 자주 소환된다.
시인은 병없이 앓는다. 이 시집의 주인도 병 없이는 한 시도 살 수 없는 태(胎)를 가졌는지도 모른다. 시인의 출발점이 거기 있다면 나는 무심코 동의하겠다. 시인의 얼굴에서 시작되는 저 ‘세계의 밤’을 드로잉한 듯한 무정형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자주 덧나는 자기 증상을 덮어가리는 환상이라면 나는 또 그러려니 믿겠다. 자기 환상의 무대화가 그녀의 시라는 차원의 수긍이다. 시인에게 그것은 팔루스였을 것이 아닌가. 시를 가진 척 하는 차원이 아니라 시(詩)인 척 하는 차원의 팔루스라면 어쩌겠는가. 시인이 체질화한 환상은 동터오기 직전의 어둠발을 더 즐기면서 그 환상으로부터 도망치지 않으려는 동동거림이었을 것이다. 나는 시인의 시를 그렇게 읽어왔고 시인을 그와 같은 이미지로 스캔한다.
우리 시에서 너무 많이 말해졌으면서도 여전히 덜 말해진 영역은 여전히 남아 있다. 과잉이 결여가 되는 지점이다. 박재연의 시는 여기 과잉의 대열에서 저기 결여의 지점을 주목한다. 서정시의 정식성을 참조하는 가운데 자기식 발성을 탐문하고 있다. 대상과 인식과 판단은 지루한 서정시의 문법이지만 시인의 열심과 내공을 담아내는 시적 방법이기도 하다. 박재연의 시가 한국시의 평균적 자장 안에서 시민권을 부여받는 지점도 여기다. 시인의 시편 가운데 괜찮은 시들은 대체로 이 언저리에 있다. 다르게 말하면 한국시가 개척해놓은 등산로를 자기 보폭으로 걸어갔다는 뜻이다. 그 작업은 안전하다는 이점을 챙길 수는 있지만 생각만큼 소득이 적다는 위험부담을 지불해야만 한다. 한국시의 주형 속에 자기를 집어넣는 일은 쉽고 편하다. 박재연의 시는 이 점에서 한국시가 합의한 틀을 잘 체화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더불어 독자에게 편하고 익숙하게 읽히는 공감의 영역을 확보한다.
시인의 시가 더 이상 젊지 않은 어떤 지점에서 파생되고 발견되는 자기 성찰의 흔적이라면 어쩌겠는가. 삶의 미래로부터 시인을 기다리고 있던 시간과 비로소 해후하면서 마음과 몸에 자연스럽게 번지는 메시지들을 만나고 있다면 어쩌겠는가. 자신의 증상적 메시지와의 화해/불화가 이 시집의 육체를 헤집는 난감한 스물거림이요 야릇함의 정체일 것이다. 박재연의 시에는 달아난 젊음에 대한 야속함이나 청춘 없는 지금에 대한 조바심이 발견되지 않는다. ‘10년 동안 눈 맞추고 이름도 묻지 않는/ 무심한 저 여자 걸어’(「비비추」)갈 뿐이다. 무심하지만 심하기도 한 내면의 풍경이다. 무/심함은 그래서 시집의 중핵을 심심히 함축할 수 있는 코드로 읽혀진다. 시를 향한 덜 익은 흥분과 초조가 제거되는 순간이다. 이 지점이 시집의 미덕으로 거론될 수 있다면 어쩌겠는가. 시를 감정의 강박으로 몰지 않고, 값싼 초조의 산물로 구성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그러하다. 때로 이런 관점은 시인의 욕망과 다르게 뻔하고 위험스런 지점으로 시를 데려가기도 한다. ‘도에 들고 싶은’(「박물관 뜰 앞에서」) 유혹까지가 시이지, 도에 들면 도사가 되고 시는 사라진다.
이 시인의 시세계--증상이라 해도 달라지지 않겠고--를 우리 앞에 대면시키는 시는 등단작이기도 한「수목 한계선」일 것이다. 수목이 자랄 수 있는 한계선의 ‘한계’가 표상하듯이 이 한계는 시인의 삶의 정점으로 환원된다. ‘멋 모르고 올랐더니/내려 갈 길이 아뜩해져/마냥 주저앉고 싶은/후들거리는 나이’(「수목 한계선」)의 앞뒤, 사이사이에 촘촘히 스미고, 끼이고, 달라붙고, 금이 간 시적 주체의 환상에 대한 ‘수벌수벌’(「궂은비 내리는 날」)은 즉설주왈, 시인의 손에 익은 언표구조가 되고 있다. ‘수벌수벌’은 사전에 없는 비표준적인 어휘다. 세상은 이런 언어군을 방언이라 부른다. 그러나 수벌수벌은 자신이 방언인 줄 모르는 방언이다. 이미 방언이 아니라는 뜻이 아닐까. 시가 자신이 시인지조차 모르면서 존재하듯이 말이다. 나는 박재연의 시적 말하기 방식이 이 ‘수벌거림’의 자기 방언을 껴입고 있다고 본다.
‘수벌수벌’은 무슨 뜻일까? 아니 어떤 의미여야 하는가? 이 말은 중얼중얼로 대체될 수 있는 낱말로 보인다. 소리와 모양을 절묘하게 겹쳐놓은 듯한 기괴함을 동반한다. 소리와 모양의 자웅동체 같다. 그렇다면 수벌거림은 말해지면서 감춰지는 또는 언표되지만 언표내용을 포착하기 어려운 언표행위가 된다. 말하기 위해 입은 움직이되 대상을 향한 메시지는 펼쳐지지 않는 안타까운 내성의 언어다. 그런 차원에서, 수벌거림은 시인이 선택했거나 포획된 말하기 방식이다. 자기 증상에 대한 수벌거림의 무대화 혹은 수벌거림에 의탁한 자기 누설이 박재연 시의 중심이라면 어쩌겠는가. 수벌거리는 문장은 의미를 묘하게 뭉개놓는다. 일부러 또랑또랑한 언어를 회피한 것처럼 보이는 말씨는 이 시집의 도드라지는 특징이 된다.「가을비」는 수벌거림의 매력적인 성취가 돋보이는 예가 된다. 느끼고 씹는 것은 독자의 몫으로 비워두겠다. 필자가 시의 함의를 다 누설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날 흐리고 어둑한
방안에 누워
두 손을 허리 밑에 찌르고
빗소리 듣는다
오줌 누는 소리
달랼 후라이 익는 소리
소 여물 씹는 소리
깍두기 씹는 소리
이상해라
아무리 들어도 무얼 먹는 소리
고쳐 들어도 섬유질 씹는 소리
들밥 먹는 소리
바스락, 마른 것들이
쉬지도 않고
쓸쓸한 조갈증이
식도를 다치지 않도록
찬찬하게 조심스레
억센 풀뿌리를 씹는 소리
자신의 부스럭거림을 딛고 있는 듯, 환각에 기댄 듯, 수줍은 향락에 기댄 듯한 수벌거림을 통해 시인이 불러온 시적 주체는 다름아닌 시인 자신이 아니었던가. 부러워라. 자신의 몸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는 견딜 수 없는 시적 본능은 은근한 질투를 자아낸다. ‘물방울이 물방울에게 다가가’(「물방울이 닿는다」)서 한몸이 되는 황홀은 시인의 시에서 왕왕 발견되는 시적인 정황이다. 그것은 에로티시즘도 아니고 그 비슷한 것도 아니다. 감각으로 불러들이는 무엇이 아니라 관념으로 호출하는 무엇이라면 어쩌겠는가. ‘남자 없이도 살만한 나이’(「시가 뭐길래」)는 다소의 허장성세를 감춘 무의식이다. 그렇다는 말을 그렇다는 뜻으로 새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말은 ‘자기도 알지 못하는 지식’인 무의식에 연루된 증상으로 읽힌다. 그래서 시집에 간간이 비치는 성적 암시들은 시인의 점잖은 발뺌으로 보인다. ‘연신 체위를 바꾸’(「부론강」)거나, ‘한 나무에 두 몸이 벅차’(「도화, 바람나다」)거나, ‘신혼의 이불이 부끄럽게 널린 집’(「삼합리에서」)이거나 ‘능이 먹어도 그냥 못 자요’(「흥양리 야담」)라는 표현들은 흔한 주이상스를 슬쩍 건드리고 사라지는 언어적 퍼포먼스가 아니었을까. 이와같은 시의 영역은 나이 든 시인들의 체면치레용이기도 하겠으나 젊은 시인들이 너무 많이 해먹은 뒤라 더 해 볼 건덕지가 없다는 착안도 작용했을 것으로 ‘좋게’ 이해해 버린다.
어슷비슷한 맥락이지만 시인은 ‘생은 왜 사랑 아니면 외로움인가’(「얼큰이 칼국수」)라는 무모한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 앞에 나는 아무 말도 덧대지 못하겠다. 사랑은 사랑이 아니고 외로움은 외로움이 아닐지로 모르기 때문이고 그것은 사랑을 믿거나 외로움을 자각하는 각자의 오인과 왜곡 속에서만 현시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시집에 탑재된 시들은 이 난감성 질문에 대한 각주이자 자기 응답이다. 박재연에게 시는 그녀가 한번도 가져보지 못한 그것을 원치 않는 사람에게 주려고 안달하는, 사랑에 관한 지젝의 정의와 닮은 욕망의 산물이다. ‘누군가가 다가오다가 돌아서는’ 환상은 사랑의 정체와 닮았다. 사랑에 관한한 시인도 신경증자가 된다. 남의 욕망을 채워주되 다 주어서는 안 되는, 뭔가 조금은 남겨 두어야 하는, 영원히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존재를 히스테리자라 부른다. 사랑과 외로움에 관한한 시인을 히스테리자로 불러야 된다면 어쩌겠는가. 신경증적 시쓰기의 징후가 주로 ‘사랑’을 건드리는 시에서 발견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왜 사랑을 사랑하고 있는가? 어쩌다 시를 쓰는 존재가 되었는가? 시인은 그런 질문에 포획된 신경증자이다.
집으로 돌아갈 버스를 기다리며
불빛 휘황한 옷가게의
처마 밑에서 비를 그었다
끊임없는 수직의 선들이
마음을 끌고 간다
빗줄기는
곧장 내리다가
옆으로 쓸리다가
바람결에 흩날린다
하염없이 나의 생각도
내리다가 쏠리다가 흩날린다
누군가 조금씩 다가오다가
돌아서서 또박또박 멀어지다가
이내 골목 끝으로 사라졌다
버스는 아직 오지 않는다
얼굴에 부딪는 빗방울 핑계 삼아
제 풀에 좀 서글퍼져서
빗방울인 척 울어본다
「빗방울인 척」은 사랑인 척, 눈물인 척, 외로움인 척 하는 시적 가면이다. 가면의 사랑과 외로움이 눈물로 대신된다면 어쩌겠는가. 가면이 울고 있는 동안 가면 뒤에 숨은 시적 주체도 눈물을 흘리고 있을까. 그렇다고 나는 쓴다. 가면과 가장이 진실이므로 그렇다. 가면의 뒤는 맨얼굴이 아니라 텅 빈 무로 채워져 있다. 사랑도 너무 이르거나 너무 늦게 도착한다. 그래서 누구도 그 중심에 다다르지 못한다. 오직 오인을 인정함으로써 사랑은 사랑이 된다. ‘여자는 남자의 증상’이라고 갈파한 라캉의 말처럼 사랑이야말로 생존하는 인류의 불치적 증상이다. 지치지도 않고 꼭 그 자리로 되돌아오는 얼룩처럼 말이다. 시인의 사랑 혹은 외로움도 이런 네크워크 속에 기재된다.
박재연은 수벌거림이라는 다소 낯선 개인적 방언의 변주 속에서 자신의 경험의 층과 결과 속을 누설한다. 이것은 시인의 방법이자 내용이자 시적 개성으로 다가오지만 일정한 소통 장애를 거느릴 위험도 안고 있다. ‘시 비슷한 시’ 또 그런 분위기 연출에 시인과 시가 함께 속아넘어갈 때 시는 독자 앞에 로딩되지 않는다. 시가 살아있는 언어에 의지해서, 언어 그 자체로 삶을 전시하는 수벌거림이 아니라면 누가 ‘총 맞은 것처럼’ 시를 쓰겠는가. 앞으로 이 점에 유념하면서 자기 시의 숨통을 터나가기를 바란다.
이제 나의 수벌거림을 마감하고 글의 처음으로 돌아간다. 시외버스가 원주에 도착하던 그리고 시인과 접선하기 직전의 잠 없는 졸음을 깨우던 순간으로 돌아가서 태연하게 버스의 트랩을 내려선다. 원주에 꼭 맞는 내 가면을 골라 쓰면서. 낯선 사람들이 모여 사는 메마른 원주가 내 삶에 끼어들었음을 만끽하는 순간이다. 지금처럼 원주에 시가 있다는 소문이 들릴 때마다 나의 우울증은 덜어진다. 나의 우울증은 시가 읽히지 않는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시쓰는 즐거움을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기반한다. 박재연의 첫시집 원고는 그렇게 나의 증상을 돌아보게 했다. 언젠가, 동문 카페에 매달린 댓글 ‘바람 불어 대충 쓸쓸해져서 링크 따라 간절곶에 왔다’는 언표의 주체가 그녀일 것이다. 어떤 시인의 말투처럼 그녀야야 한다. 나는 그 말을 기점으로 이 글을 여기까지 끌고 왔다.
모든 기억은 소급적으로 재구성된다. 내가 이 글에서 시인 박재연과 그녀의 시에 대해 중얼거린 것은 나의 시선이 만들어낸 오인이다.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피사체는 사라졌는데 우리는 피사체가 남겨놓은 이미지에 자꾸 속는다. 속고 싶어한다. 렌즈 앞에서 웃던 피사체는 이미 사진의 고정점을 벗어나서 다른 풍경 속에 있다는 사실을 나는 너무 자주 망각한다. 지금쯤 이 책의 저작권자는 더 좋은 시와 더 넓은 열망을 향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하여 지나간 날과 오지 않은 날을 넘어서서, 그의 시가 번개시장처럼 떴다가 사라진 문예창작과가 존립했던 원주 일각의 그 아련한 자리를 증거하는 터무늬가 되어주면 좋겠다.
이 자리가 한때 누구에겐가 시를 ‘가르친다고 가정된 그러나 열심히 속여먹은 주체’ 의 수벌거림을 다문 얼마간이라도 탕감받을 수 있는 기회였거니 믿고 싶다. 이제 독자들이 시집을 읽을 차례다. 나는 이 시집의 맛을 대신할 재간이 없다. 독자인 당신의 감식안에 즐거운 그 일을 맡겨야 한다면 어쩌겠는가.
첫댓글 내가 시인이나 소설가가 되지 않은것은 잘 한 일이다. 내가 시인이나 소설가가 되지않았기에,한국의 문학의 미래는 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