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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봉산과 홍성의 전설적인 훌륭한 인물들
(기행 수필 용봉산 제2편)
루수/김상화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온다. 필자도 산행하느라 꽤 힘들었나 보다. 이마엔 땀방울이 보석이 되어 방울방울 맺혀있다. 그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은 나에겐 보석보다 더 귀한 존재다. 하잖은 땀방울이지만 나의 건강을 지켜준 귀한 감로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고마운
땀방울을 바람이 불어와 거두어간다. 그래서 몸도 시원하고 정신까지 맑아졌다. 보석 같은 땀방울이 바람과 결합하여 날아가니 또 다른 행복을 주는
것은 웬일일까? 평소에는 땀이 흐르면 귀찮은 존재로 생각되어 손수건으로 닦아내기 바빴다. 그러나 오늘은 그 땀방울이 그리도 고마울 수 없다.
고마움을 마음에 담아 예찬하며 최영 장군께서 어릴 때 활을 쏘았다는 활터에 세워놓은 정자에 올라 잠시 앉았다.
정자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니 아름답기 그지없다. 약간의 안개가 시야를 가린다. 그러나 그 안개 사이로 보이는 경관은 너무도 평화롭고 아름답다. 넓게 펼쳐진 평야의
모습을 드러낸 풍경이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겨울 동안 잠들었다 깨어나는 나무들은 잎을 피워낼 준비를 하는 듯했다. 멀리는 조그마한 마을들이
여기저기 자리 잡고 있다. 그곳엔 사랑이 있고 평화가 숨 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웃음소리가 들릴 것이다. 그런가 하면 올망졸망하게 산의
전경이 가물가물하게 그림처럼 보인다. 너무도 아름다운 풍광이다. 마치 이 전경은 한 폭의 아름다운 수채화라 할까? 산수화라 할까?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보고 자랐기에 이 나라의 훌륭한 많은 선인이 이 고장에서 태어나지 않았나 싶다.
최영 장군의 활터를 구경하고
이준태 고문과 함께 정상으로 올라간다. 바위로 형성된 길은 참으로 위험하기 그지없다. 정상에 도달하고 보니 많은 등산객이 모여들어 발 디딜 틈이
없다. 정상은 약 50평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 좁은 정상에 돌로 탑처럼 쌓아 그 위에 용봉산(龍鳳山 381m)이라고 쓴 표석이 서 있다.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등산객들은 탑으로 먼저 올라가려고 아수라장이다. 잠시 후 우리 차례가 되어 기념사진을 찍었다. 높은 산은 아니지만, 자연이
빚어낸 지형은 금강산만큼이나 아름답다. 정상을 밟아 보았다는 것이 마음 뿌듯하다. 그래서 개선장군처럼 내려간다. 내려가는 등산길 양옆으론 진달래
나무들이 겨우내 잉태한 꽃망울을 터트려 웃을 준비를 하고 있다. 이 꽃이 환하게 피어 웃고 있으면 이 산 전체가 웃음바다가 될 것이다. 그러면
이산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아마도 봄이 익어갈 무렵에는 환하게 웃는 꽃동산을 만들어 등산객들을 행복하게 해줄 것이다. 아름답고 행복한 생각들이
머리와 가슴을 가득 메운 상태다. 이러한 기분을 만끽하며 하산을 한다
지금부터 홍성의 지명변천과 역사에 대해 인터넷과 기타 자료에
의해 알아본다.
고대= 역사학계에 의하면 삼한 시대의 소국들 중 홍성지역에는 감해비리국(監奚卑離國)이 있었다. 백제 시대에 이르러서는
고막부리현(古莫夫里縣)이 되었고 백제 부흥 운동 당시는 주류성(周留城)에 속했다. 통일신라 시대에는 지심주(支심州)에 속해 있다가 후에 웅천주로
바뀌었다.
고려 시대= 955년(성종 14년) 결성군을 통합하여 운주(運州)로 바뀌었고, 1012년(현종 3년) 홍주(洪州)로
개칭되었으며 1371년(공민왕 20년) 목(牧)으로 승격하였다.
조선 시대= 1413년(태종 13년) 홍주목과 결성현이 설치되었고
1895년(고종 32년) 홍주부(洪州俯)를 두고 인근 22개 군현을 관할했으며 이듬해 홍주 군으로 개편되었다.
광복 이전= 1914년
홍주 군과 결성 군을 합쳐 홍성군(洪城郡)으로 개칭되었으며, 1941년 홍주면이 홍성읍으로, 1942년 광천 면이 광천읍으로 각각 승격하였다.
대한민국= 홍성군이 2개 읍 7개 면을 관할하였고 1983년 서산군 고북면 대사리와 1989년 서산군 안면읍 죽도리를 편입하여 현재 2개읍 9개
면으로 관할하고 있다. 개도(開道) 110년 만에 충청남도청이 대전에서 홍성지역으로 이전되었다.
홍성군의 내포
문화
내포란?= 내포는 지형상으로 가야산 주변의 평야 지대를 포함하고 있으며 천혜의 자연자원과 고유의 문화자원이 풍성하다. 충청남도의
홍성, 서산, 예산, 태안, 당진, 서천 지역과 아산, 보령 일부 지역이 내포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는데 이는 해당 지역 주민들이 예로부터 동일한
문화와 의식을 공유해 왔던 데에 기인한다.
내포의 중심 홍성= 산과 들, 바다가 조화를 이루면서 어우러진 금수강산, 홍성이다. 오서산의
억새 물결, 용봉산 돌기둥이 빚어낸 절경, 끝없는 갯벌과 호젓한 백사장, 푸른 파도 위를 나는 갈매기, 붉게 물든 낙조 등 천연의 자연환경은
다른 지역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살아 있는 자연 학습장이며 다양한 체험생태학습이 가능한 곳이다. 또한, 많은 위인의 숨결이 살아 있어 생생한
역사의 향기가 물씬 풍기며, 사라져가는 우리 문화 전통이 아직도 곳곳에 배어 있는 고장이다. 너그러운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이 삶의
터전에는 남당리의 대하와 새조개, 광천의 토굴 새우젓, 홍성의 한우고기, 용봉산의 더덕구이 등 계절에 따라 먹거리 또한 풍성하다. 가까운 이들,
사랑하는 가족들이 꽃피우는 정담이 가득한 곳, 바로 홍성이다.
무민공(武愍公) 최영(崔瑩:1316-1388)
시호는
무민(武愍)이시다. 무민공(武愍公) 최영(崔瑩) 장군께서는 홍성군 홍북면에서 태어나셨다. 고려 말기 명장이자 충신이었던 무민공(武愍公) 최영
장군은 "너는 마땅히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부친의 가르침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실천하였다. 1352년 조일신의 난을 평정하여 호군에
오른 후, 북으로는 홍건적을 격퇴하고 원나라의 공격을 막아내는 한편 남쪽에서 노략질하며 날뛰던 왜구를 토벌하였다.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하여
문화시중 위치까지 올랐으나, 1388년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요동 정벌이 좌절되고 권력에서 밀려나 처형당함으로써 청빈과 충절의 일생을
마감하였다. 장군의 약력은 다음과 같다 1352년 조일신의 난을 평정하고 호군에 오름
1354년 서북면 병마부사로서 압록강 서쪽의 8참
수복
1358년 양광, 전라도에 침입한 왜선 400여 척을 격파
1359년 홍건적을 격퇴하고 전리 판서에 오름
1376년 삼남
지방 왜구를 대파하고 철원 부원군에 봉해짐
매죽헌(梅竹軒) 성삼문(成三問:1418-1456)
호는 매죽헌(梅竹軒) 이시고 자는
근보(謹甫)이시며 홍성군 홍북면에서 출생하셨다. 성삼문(成三問)은 조선의 대학자였다. 선생은 태어날 때 하늘에서 "낳았느냐"라고 묻는 소리가 세
번 들려서 이름을 "삼문"이라 하였다 한다. 어려서부터 타고난 기품이 단정하고 총명하며 성품이 강직하더니 1438년에 문과에 합격하고,
1447년에는 중시에 장원하여 벼슬이 승지에 이르렀다. 세종의 총애를 받아 집현전 학사가 된 후 신숙주, 박팽년 등과 함께 어학과 음운 그리고
사성을 연구하여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에 크게 기여하였다.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단종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1456년 처형당한 사육신 중 한
사람이다
성삼문(成三問)의 약력은 다음과 같다.
1438년 생원으로 식년문과 급제
1442년 삼각산 진관사에서
사가독서
1447년 문고중시에 장원
1454년 집현전 부제학, 예조참의 엮임
1455년 예상승지에
임명됨
지산(志山) 김복한(金福漢:1860-1924)
호는 지산(志山) 이시며 자는 원오(元五) 이시다. 홍성군 홍성읍에서
태어나셨다. 김복한(金福漢) 선생은 독립운동가이시다. 1892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였고 1894년 승정원 우부승지에 올랐으나 이듬해 명성황후 시해
사건 후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그해 단발령이 내리자 이설, 안병찬 등과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 투옥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후
이완용 등 매국노 처단을 상소하여 재투옥되었고, 1906년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가 옥고를 치렀다. 1910년 국권 피탈 후에는 두문불출하던 중
1919년 유림 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발송하였다가 투옥되었다. 이후 홍성 서부에 인지제를 세우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지산(志山) 김복한(金福漢) 선생의 약력은 다음과 같다.
1892년 별시문과에 급제
1894년 승정원우부승지에
오름
1895년 을미사변 후 단발령이 내리자 의병을 일으킴
1906년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가 재차 투옥됨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 발송 후 다시 투옥됨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1879-1944)
호는 "만해(萬海)"이시고
자는"정옥(貞玉)"이시다. 홍성군 결성면에서 출생하셨다. 한용운(韓龍雲) 선생은 민족독립, 불교 유신, 자유문학의 3대 사상가로서 위대한 행적을
남기셨다. 만해는 26세 되던 1905년 설악산 백담사에 들어가 불문에 입도하였다. 친일적 불교에 맞서 불교의 혁신과 자주성 회복을 선도하다가
1912년 만주에 들어가 독립운동을 하였으며, 3.1운동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의 민족대표가 되었다. 불교 잡지인 유심(惟心)을
발간하였고 불교대전, 조선불교유신론, 채근담 강의, 그리고 시집 님의 침묵과 소설 흑풍 등의 걸작을 남겼다.
만해 한용운(韓龍雲) 선생의
약력은 다음과 같다.
1905년 인제 백담사 승려
1916년 월간지 유심 발간
1919년 3.1운동 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
1931년 월간지 불교 인수, 발간
1937년 항일단체 만당 사건 배후자로 검거됨
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1889-1930)
호는 "백야(白冶)"이시며 홍성군 갈산면에서 태어나셨다. 백야 김좌진(金佐鎭) 장군께서는
독립운동가이시다. 김좌진(金佐鎭) 장군은 부유한 명문 출신으로 15세 때 이미 집안 노비를 해방하고 소작민에게 땅을 분배한 바 있다. 청년
시절부터 지방에 호명 학교와 장학 단체를 세웠으며 고아원 설립, 신문발간, 사업체 운영 등을 통해 사회 계몽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8년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을 양성하여 1920년 31세 때 청산리에서 전사자 1,200명을 포함하여 3,300여 명의 일본군 병력을 섬멸한 역사적
대승을 거두었다. 그 후 정예 사관을 양성하고 정규독립군을 강화하던 중 공산당원의 흉탄에 맞아 풍운아로서의 생을 마쳤다.
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 장군의 약력은 다음과 같다.
1905년 육군무관학교 수학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북로군정서
총사령관
1920년 청산리 전투 총지휘하여 일본군 2개 사단 대파하였음
1929년 한국 총연합회 (신인부 후신)
주석
상기와 같이 역사적인 훌륭한 인물을 배출한 홍성이다. 홍성의 훌륭하신 선인들의 기(氣)를 받고 금년도 무사 안일하게 해달라고
시산제도 잘 끝냈다. 또 아름다운 용봉산(龍鳳山) 산행도 무사히 맞이고 서울로 올라가려고 버스에 올랐다. 이 산악회를 총지휘하는 황진남 회장이
한 사람 한 사람 손을 잡으며 오늘 당신 때문에 산울림 가족이 모두 행복했다 하며 감사하다는 정이 듬뿍 담긴 인사를 한다.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특히 지난번에 산행하다 발을 다쳐 몇 개월간 입원하느라 고생하신 김남경 고문님께서 참석하시어 반가웠다. 무사히 퇴원하심을 글로나마 축하드립니다.
홍성의 많은 기를 받은 산울림 가족은 무술년(戊戌年)은 어느 때보다도 건강한 삶과 하고자 하는 모든 일이 잘 이루어 지리란 생각이 든다. 산울림
가족 여러분 오늘도 글을 쓸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2018년 02월 25일
첫댓글 감사합니다
여기까지 오셔서 댓글 달아 주셨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