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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과역사 스크랩 사진으로 보는 신미양요
리얼스토리 추천 0 조회 45 10.11.29 13:0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사진으로 보는 신미양요

 

 이 사진은 강화도를 침공했던 군함 중 한척인 콜도라도호의 해군 제독과 수행원들.

제복으로 미루어 중앙에 앉은 사람이 로저스 제독으로 추측되며, 책상 위에 펼쳐 놓은 종이는 지도이고,

장소는 선상이다

 

 로저스 미 해군 제독과 수행원들

 

 로저스의 작전회의. 1871년 5월. 두 명의 중국인이 보이는데 이들은 아마 안내자나 통역관일 것이다

 

 1871년 5-6월. 미국 함선에 승선한 한 한국인.

빈 맥주병과 미국 신문인 [Every saturday] 한 부를 들고 있다.

사진 설명으로 보아 신미양요 당시 포로로 보이지는 않는다.

 

 초지진에 상륙한 미 해병대. 뒤에 이들은 광성진에서 조선군과 백병전을 벌인다.

 

 초지진 포대를 점령한 미 해병. 초지진을 점령한 부대는 킴벌레이 중령 이하 장병들이며

그 수는 약 450명이었다

 

 덕진진을 점령한 미군들. 1871년 6월 2일

 

 1871년 6월 2일. 광성보에서 결사 항전을 하다 전사한 조선군.

 

 

"조선군은 용감했다. 그들은 항복 같은 건 아예 몰랐다. 무기를 잃은 자들은 돌과 흙을 집어 던졌다.

전세가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되자 살아남은 조선군 1백여 명은 포대 언덕을 내려가 한강물에 투신 자살했고

일부는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 (앨버트 가스텔)

"남북전쟁때에도 그렇게 짧은 시간에 그렇게 많은 포화와 총알이 쏟아진 적은 없었다." (블레이크 중령)

"이 전투는 동양에서 미국 해군의 위신을 손상시키고 외교의 실책을 폭로한 최고의 사건이다"

(미 국무장관 포스터)

"서울에 있는 미국인 학교에서는 반드시 이 전적지에 수학여행 오는 것이 불문율로 되어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한국에 사는 미국인이나 여행자는 반드시 이곳을 찾아보고 그들 조상을 추념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규태의 [역사산책] 중)

 

 

 1871년 6월 2일. 광성보에서 결사 항전을 하다 전사한 조선군.

 

 미군과의 전쟁 과정에서 잡힌 조선인 포로들. (미국배 위) 이 두 사람은 나중에 곧 풀려났다.

 

 미군과의 전쟁 과정에서 잡힌 조선인 포로들. (미국배 위)
갓을 쓴 사람은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파견된 조선의 문정관(問情官)이다.

 

 미군에게 빼앗긴 사(帥)자가 쓰여진 조선군 사령관기.
현재 이 기는 미국 해군사관학교에 보관되어 있다.

 

 미군에게 빼앗긴 사(帥)자가 쓰여진 조선군 사령관기.
현재 이 기는 미국 해군사관학교에 보관되어 있다.

 

출처 : 박건호의 역사사랑

 

   ■신미양요! 그 잊을 수 없는 전쟁

(부제: 미국이여, 강화도 전투에서 빼앗은 수기를 반환해 韓國民의 자존심을 회복하라)

 

美 로저스 해군 소장의 전투보고서 말미에서 ...

『 in this  expedition our officers  and men encountered difficulties which were surmounted only by the most arduous labor, and  defeated  a determined   enemy in  a desperate  fight  with a patience and courage most admirable.』

 

미국의 강화도 침공인 광성보 전투가 있은 지 9년이 지난 후 , 대원군 부친인 남연군묘의 도굴사건으로 세계를 떠들썩하게 한 독일인 오페르트 (Ernest Oppert)는 "The Forbidden Land"(금단의 나라)라는 책을 1880년 영국과 미국에서 발간하게 된다. 하멜에 의해 조선이 유럽에 소개된 지 213년만의 일이다. 조선은 19세기말 서양인에게는 금단의 땅이었으며 미지의 세계였다.

 

당시 아시아 제국은 서방 열강에 의해 통상조약이라는 美名하에 침략행위를 당하고 있었는데 조선도 예외는 아니었다. 프랑스에서 "강화수로(한강) 봉쇄작전" (Blockade of Salee River)이라 하는 병인양요 이후 5년만에 또 한번의 서방의 침략을 받았는데 , 1871년 4월3일 남양만에 美함대가 나타나 통상조약을 요구하니 이를 "신미양요(辛未洋擾)"라 한다.

 

 

<<  콜로라도호, 빼앗은 수기앞에서 미군들의 기념촬영>>

 

이 신미양요는 당시 미국내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기에는 충분치 못했지만 전투의 내용이 "NEW YORK HERARD"紙에 "Our Little War with the Heathen"(이교도와의 작은 전쟁)이라는 표제로 알려졌고 美 아시아 함대 사령관인 "존 로저스" 해군소장이 해군장관에 보낸 보고서와 브레이크대령의 보고서 그리고 탈턴의 일기등에 그 전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고종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등 조선측 자료에도 신미양요의 기록은 나와 있다.

 

이 전쟁에서 잊을 수 없는 것은 치열한 전투뿐 아니라 조선군의 자존심인 수자기("帥"字旗)를 탈취당한 일이다. 강탈 당한 "수"자기("帥"字旗)는 매릴랜드주의 애나폴리스(Anapolis) 해군사관학교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현재 한국에 남아 있는 동일 유형의 수기는 全無하다고 하니 그 귀중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에 한국민의 자존심을 세우고 양국의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확립하기 위해 1871년(고종 8년)미국이 강화도 침공에서 빼앗은 수자기("帥"字旗)를 반환해 줄 것을 정중히 요청한다.

 

19세기말 한미관계의 서막은 1866년 대동강어귀에서 통상을 요구하던 미국인 프레스턴의 선박인 제너럴셔먼호가 불에 탄 것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중국 상해, 지부, 천진등에 거주하는 서양인들에게는 조선에 있는 왕릉안에 마치 이집트의 투탕카문의 무덤처럼 금은 보화가 가득 들어 있는 것으로 인식이 되었다. 불과 다음 해 벌어진 오페르트 일행의 남연군묘 도굴 미수사건에서 잘 알 수 있다.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에서 불에 타 23명이 함께 죽은 사건이 발생한 후 미국은 조선에 강력히 항의하고 두 차례의 탐문항행을 실시한 후 손해배상과 통상관계를 요구하며 1870년(고종8년) 조선원정을 결정한다. 1871년 미국의 아시아 함대사령관인 JOHN RODGERS 해군소장은 콜로라도호를 비롯 군함5척과 수병 1230명 함선 탑재 대포 85문을 적재후 나가사키에서 출항하기에 이른다.

 

 

6월 1일 좁은 강화수로(염하)를 통과하기 적합한 모노카시호와 파로호는 탐측 항행중 손돌목에서 포격사건이 있었고 난 후 10일에는 모노카시를 비롯한 기함 4정과 759명이 승선하여 오전 10시 강화수로를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오후 1시에 미군은 강화도의 초지진을 향해 일제히 포격을 개시했고 다음날 광성보에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광성보에는 진무중군 어재연과 조선수비병 600여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48시간 계속된 이 전투에서 전사한 조선군 243구는 소각되었으며 100구 이상의 시신이 강으로 떠내려가 350명 이상이 사망, 실종된 조선으로서는 피해가 실로 큰 전투였었다. 그러나 미군은 MCKEE중위와 3명의 수병만이 전사했을 뿐 5명 중상에 5명 경상을 입는 데 불과했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광성보위 깃대에서 펄럭이는 큰 황포(黃布)를 끌어 내려 돛에 걸고 전리품과 함께 싣고 함대로 돌아갔다.죽은 세병사는 작약도에 묻혀졌고 (영종대교 쪽) 항행중 숨을 거둔 맥키중위는 고향인 켄터키주 렉싱턴의 국립묘지에 묻혔다.

 

한국과 미국의 첫 인연은 이렇게 생겨났다. 이것이 신미양요의 전모다.

몇 해전 경주 동국대학교에 근무중인 THOMAS DUVERNAY 교수가 미국의 애나폴리스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서 가로 4미터 세로 4미터의 흰 천에 검은글씨로『帥』가 씌여진 1871년 신미양요때 미군이 탈취한 조선의 『수기(帥旗)』를 확인하고 미시간 하원의원등에게 한국에 수기를 반환해야 한다고 요청했다고 한다. 미시간 의원들은 한국에만 전리품을 반환하는 예외를 인정할 수 없다고 이를 거절했다.

 

사실 미국과의 신미양요가 발발하기 전 1866년에 있은 프랑스의 강화도를 침략에서 조선은 강화유수부의 수많은 전각과 4700여권의 외규장각도서가 불에 탄 사건이 있었다. 이때 강탈당한 외규장각 도서 191종 297책 等이 미테랑 대통령이 1993년 9월 한불정상회담에서 반환한다는 합의를 하였지만 <휘경원소감의궤〉1권만 전달된 미증유의 사건이 되고 만 적이 있다.

 

얼마전 <미군의 궤도차량 사건>으로 한미간의 관계가 克美를 넘어 反美로 치닫는 지금 신미양요의 잘못된 단추를 다시 채우는 일은 이 시점 한미간의 우의를 다지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이 될 수 있으리라 본다.

 

그럼 앞서 미시간 의원들이 언급한 문화재 반환의 예는 없었을까.

프랑스와 라오스는 1950년에,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아는 1976년에, 프랑스와 알제리는 1968년에 식민관계의 청산이란 의미에서 반환이 이루어졌다. 각국 박물관끼리의 장기계약방식의 반환도 있어 왔다.

 

미국은 멕시코와의 조약인 "The Treaty of Cooperation between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and the United Mexican providing for the Recovery and Return of Stolen Archaeological , Historical and Cultural properties 1970"에서 문화재반환의 법적 근거가 제시되고 있고 미국과 페루와의 행정협정에서 회복, 반환의 청구가 외교적 경로를 통해 이뤄지도록 되어 있다.

 

국제조약을 보면 1919년에 체결된 베르사이유조약(제 245조)은 1차대전뿐만 아니라 1870년 보불전쟁때 발생한 문화재 반환까지 소급토록 규정하고 있고 상제르망조약은 1718년까지 소급하고 있다.

 

2차대전 이후 Unesco의 창설에 따른 1954년의 Hague Convention에서는 "무력분쟁시의 문화재 보호에 관한 협약"과 의정서가 마련된 바 있다. 더구나 1970년 Unesco 협약과 1981년 UN총회의 "문화재 원소유국 반환 결의"에 따른다면 미시간 하원의원들이 주장한 전리품의 반환 예가 없다는 것은 타당성이 없으며 신미양요때 미군이 강탈한 수기의 반환은 당위성을 갖는다.

 

우리는 미군이 광성보 침입시 대포등 전리품으로 가져간 나머지 물건을 말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엄청한 가치를 지닌 문화재를 반환해 달라는 것도 아니다.

350명 조선병사와 4명의 미군의 죽음을 앗아간 무모한 전쟁에서 수기를 반환함으로 한미관계의 상징성을 가지자는 것이다.

 

美국방부가 기꺼이 수기를 반환해 준다면 한국민은 영예롭게 이를 받아 이 전쟁에서 散花한 양국의 전몰 군인들을 위로하고자 하며 이로인해 한미간 신뢰가 더욱 돈독해 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한국측에서는 복제한 수기에 양국의 영예로운 동반자관계를 적어서 다시 애나폴리스 해군박물관에 기증할 수 있었으면 한다. 국내에 全無한 만큼 오랜 기간 소장한 미군에 고마움을 표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일일 것이다.

 

강화역사관 2층 입구에 걸려 있는 복제된 수기("帥"旗)를 보면 신미양요는 아직 끝나지 않고 우리의 가슴에 엉어리 진 전쟁으로 남은 건 아닐까 생각한다. 130여 년이 지난 지금 정부와 시민단체는 이를 원상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1905년 일본군 제2예비사단의 이케다 마시스케 여단장이 일본으로 강탈한 임진왜란의 승전 내용이 담긴 북관대첩비를 시민단체가 "반환추진위"를 만들어 수년간의 노력한 끝에 94년만에 빈환 받은 것은 문화재 반환의 좋은 선례가 된다.

 

몇 해전 THOMAS DUVERNAY 교수의 노력으로 펜실베니아에 살고 있는 워드롭(WARDROP)씨가 한국을 방문한 일을 기억한다. 그는 신미양요 참전미군의 후손으로 어재연 장군의 제사에 참가하여 "후손으로서 당시의 일을 진심으로 사과한다"는 말을 남겼다.

 

이제 미국 당국자는 "잊을 수 없는 전쟁"의 상처로 남은 "帥"기(General's Flag)를 반환하여 참담한 전투에서 피어난 아름다운 이야기를 萬古에 전할 수 있도록 결단을 내려 주기 바란다.

 

小窓 차문성 (아사달) (sochang@chol.com)

 

<이글을 빌어 한국의 문화에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계신 THOMAS DUVERNAY 교수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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