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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모토 료마(坂本竜馬) 텐포 6년 11월 15일(1836년 1월 3일)~ 게이오 3년 11월 15일(1867년 12월 10일).
일본의 무사(도사번 향사), 메이지 유신에 영향을 끼친 정치가, 글로버 상회(자딘 메디슨의 일본 대리판매점)의 대리인으로 무기를 수입한 실업가.
도사번을 탈번한 뒤, 무역회사와 정치조직의 성질을 겸한 가메야마 조합(亀山社中:훗날의 해원대)를 결성한 뒤 삿쵸동맹을 알선하고, 대정봉환의 성립에 힘쓰는 등, 유신지사로서 활동했다. 증정 4품(1891년(메이지 24년) 4월 8일). 시바 료타로의 소설 [료마가 간다]에 주인공으로 등장한 이래, 전국민적 인기를 누리고 있다. 또한 그 사적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논의가 행해지고 있다.
정식 이름은 나오카게, 훗날 나오나리로 바꾸었다. 료마는 통칭이다. 그 밖에 사이다니 우메타로 등의 가명이 있다.
살아있을 때보다 죽은 뒤에 더욱 유명해진 인물로, 시바 료타로의 작품을 시작으로 소설이나 드라마에 여러 번 등장하지만 거기에 나오는 모습들은 실제의 료마와 거리가 있다는 지적이 많다. 그런 지적을 하는 이는 특히 역사가 중에 많아, 마쓰우라 레이 등이 대표적이다. 덤으로 료마의 전기를 쓴 역사가로는 히라오 미치오, 이케다 요시마사, 아스카이 마사미치 등이 대표적이다. (문헌에 관해서는 생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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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생애
2. 암살
3. 사후의 평판
4. 그 밖에
5. 일화
6. 동시대의 평가
7. 가계 및 계보(계보도는 생략)
8. 기념관, 현창시설
9. 문헌(생략)
10. 고치 료마 공항
11. 관련인물
12. 주석(일부 생략)
13. 관련항목(생략)
14. 외부링크(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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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
l 텐포 6년(1835년) 11월 15일(서력 1836년 1월 3일), 도사국(国) 도사군 죠가이혼마치 잇쵸메(현재의 고치현 고치시 우에마치 잇쵸메)에서 태어났다.
l 코카 3년(1846년), 모친인 유키가 사망
l 12살 때, 코다카사카의 난잔숙(塾)에서 공부하다 쫓겨남. 14살 때 고치 성 밑의 히네노 벤지 도장에 입문해 향사(하급 무사)가 배우는 오구리류 유술을 배움
l 가에이 6년(1853년), 검술수행을 위해 에도에 나와 호쿠신 일도류 검술의 시조인 치바 슈사쿠의 동생, 치바 테키치의 오케쵸 치바도장(통칭: 소치바도장)에 입문했다. 12월에는 사쿠마 쇼잔의 사숙에도 다닌 바 있다.
l 안세이 원년(1854년) 도사에 귀향. 화가인 가와다 쇼류로부터 서양 사정에 대해 듣고 배움
l 안세이 2년(1855년), 아버지인 핫페이가 사망
l 안세이 3년(1856년) 다시 에도의 소치바도장에 유학
l 안세이 4년(1857년) 도둑질을 해 할복을 할 처지에 놓인 사촌, 야마모토 타쿠마(사와베 타쿠마: 이후 일본인으로서는 사상 최초로 가톨릭 신부가 됨)
l 안세이 5년(1858년) 검술수행을 마치고 귀국. 호쿠신 일도류 면허개전을 얻음(주1).
l 분큐 원년(1861년) 3월, 도사에서 이구치 마을 칼부림사건이 일어나 료마가 속한 향사와 상사(상급무사) 간의 대립이 심화됨(주2). 반년 뒤, 향사들이 다케치 한페이타(즈이산)을 리더로 도사 근왕당을 결성하자 9번째로 가맹. (도사에서는 제 1호). 10월, 다케치의 밀사로 죠슈를 방문해 다음해 1월, 죠슈번의 수도 하기에서 쿠사카 겐즈이와 면담한 뒤 2월 말에 귀국.
l 하기에서 귀국한 뒤, 1개월도 지나지 않은 분큐 2년(1862년) 3월, 사와무라 소노죠와 함께 탈번. 그 직후 근왕당에 의한 요시다 도요의 암살사건이 일어나, 그 실행범이라는 의심을 받음. 규수 등을 방랑한 뒤 에도로 가 치바도장에 몸을 맡김. 그 뒤 치바도장의 후계자인 치바 쥬타로의 소개로 막부 정무소 총재직에 있는 마쓰다이라 슌가쿠와 만남. 슌가쿠의 소개장을 가지고 12월, 카츠 카이슈와 면회한 뒤 그 제자가 됨(주3).
l 분큐 3년(1863년), 카츠가 진행하던 고베 해군조련소의 설립에 힘쓰고 조련소보다 앞서 개설된 고베 해군숙의 숙장 역할을 맡음(주4). 카츠 및 마쓰다이라 슌가쿠의 운동으로 도사번주 야마우치 요도로부터 탈번의 죄를 면죄받음. 이 무렵, 카츠의 호위역으로 근왕당의 살수, 오카다 이조를 붙임. 8월 18일의 정변으로 쿄토에서 존왕양이파가 추방당하고 도사근왕당도 번에 의해 괴멸상태에 빠짐. 번의 탄압은 에도의 료마에게도 미쳐, 다시 탈번함.
l 간지 원년(1864년), 고베 해군조련소가 창설됨. 이 무렵 탄압이 더욱 심해진 쿄토의 존왕양이 과격파를 구하기 위해 에조치에의 이주계획을 개시하지만 이케다야 사건에 의해 벽에 부딪침. 이케다야 사건의 보복인 금문의 변에서 다수의 해군숙생이 죠슈측에 가담해 있었기 때문에 해군숙은 막부로부터 탄압당해, 카스도 해임당함. 카츠의 비호를 잃은 료마는 그의 소개로 사이고 키치노스케(사이고 다카모리)에 의지해 오사카의 사쓰마 번저에서 보호를 받음
l 게이오 원년(1865년), 쿄토의 사쓰마 번저로 옮긴 료마에게 나카오카 신타로들이 방문. 이 무렵부터 나카오카와 함께 삿쵸동맹 추진운동을 개시함. 사쓰마 번의 원조로 도사를 탈번한 동지들과 함께 나가사키에서 조합(가메야마 조합, 훗날의 해원대)를 조직하여 물자 및 무기 무역을 함.
l 료마는 나가사키의 글로버 상회(영국의 무기상회인 자딘 메디슨 상회의 자회사)와의 관계가 깊었으며 신용도 얻어 8월, 사쓰마번 명의로 홍콩의 자딘 메디슨 상회의 신용장에 의해 나가사키의 글로버 상회로부터 사들인 총기와 탄약을 죠슈번에 전매하는 데에 성공함. 이 해, [의롭지 않은 칙명은 칙명이 아니다]라는 문언으로 유명한 오쿠보 도시미치의 서간을 죠슈번 중역에게 전달한다는 중대 임무를 오쿠보와 사이고로부터 부탁 받은 바 있음.
l 게이오 2년(1866년) 1월, 료마의 알선으로 죠슈의 카츠라 고고로(기도 다카요시)와 사쓰마의 사이고 다카모리가 쿄토에서 만나 삿쵸동맹(삿쵸맹약)이 체결됨. 이때 료마는 카츠라의 부탁으로 맹약서에 대해 보증을 한 바 있음. 천하의 대번들 간의 동맹에 일개 낭인이 보증을 한다는 것으로 그가 얼마나 신뢰받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음(주5). 보증을 하기 직전, 데라다야에서 막부의 관리들에게 습격을 당했으나 목숨을 건짐.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아내인 오료와 함께 가고시마로 여행을 떠남. 6월, 제 2차 죠슈정벌 때에는 가메야마 조합의 배인 유니온 호(글로버 상회로부터 사쓰마번 명의로 사들여 [사쿠라지마]라 명명된 뒤, 죠슈번에 인도되어 [오츄마루]가 됨)로 죠슈번 해군을 지원
l 게이오 3년(1867년), 도사번과의 관계를 수복하여 해원대를 창설. 4월, 이로하마루 침몰사건이 일어나 어삼가 중 하나인 기슈번에게 8만 35265량 198문의 손해배상을 받아냄. 고토 쇼지로와 함께 선중팔책을 책정하고, 고토 쇼지로가 야마우치 요도를 설득해 도사번의 진언에 의한 대정봉환을 실현시킴(주6). 12월, 쿄토의 여인숙, 오미야에서 나카오카 신타로와 함께 누군가의 손에 암살당함. 음력상의 탄생일과 사망일이 같다. 암살범은 쿄토의 미마와리구미라는 설이 유력함.
l 메이지 4년(1871년) 8월 20일에 료마의 핏줄이 끊기는 것을 막기 위해 천황의 명에 의해 누나인 치즈루의 장남 다카마쓰 타로가 [사카모토 나오]로서 료마의 뒤를 이음.
l 묘소는 교토시 히가시야마구의 교토 료잔 호국신사 참배길 중턱. 또한 야스쿠니 신사에도 합장되어 있음.
2. 암살
사카모토 료마 상(고치현의 카츠라 해변)
제 2차 대전 기간 중의 금속공출 시에도 이 동상 만은 공출을 면한 바 있다.
자세한 내용은 [오미야 사건] 참조
료마는 암살 당일인 게이오 3년 11월 15일(1867년 12월 10일)에는 감기에 걸려 쿄토 시내에 위치한 가와라마치의 타코야쿠시거리에서 간장가게를 운영하는 오미야 신스케의 집 2층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일에는 육원대의 나카오카 신타로나 도사번사인 오카모토 켄자부로, 화가인 오미 카이도 등이 방문했다. 나카오카는 그대로 료마와 이야기하던 중 토쓰가와 향사(鄕士)라고 칭한 남자 몇 명의 습격을 받아 도상(刀傷)을 입었다. 료마들은 오미야의 인간이 들어온 것이라 생각하여 방심하고 있었으며, 칼을 차고 있지 않았다. 료마는 먼저 뺨을 깊이 베인 뒤 분전하지만 그 상처가 원인이 되어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 나카오카도 중상을 입지만 며칠 동안 살아 있었으며 의식도 있어 사건을 증언했다.
3. 사후의 평판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사카모토 료마는 살아 있을 때보다도 죽은 뒤에 유명해진 인물이다.
료마가 알려지게 된 최초의 계기는 메이지 16년(1883년), 고치의 [도요 신문]에 사카자키 시란이 쓴 한혈천리마가 게재되어 대호평을 받은 일이다.
다음으로 료마 붐이 일어나는 것은 러일전쟁 때이다. 니혼카이해전(동해해전) 직전, 료마가 황후의 침대 머리맡에 서서 [일본 해군은 반드시 이깁니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이다. 황후는 이 인물에 대해 알지 못했으나 궁내대신인 다나카 미쓰아키가 료마의 사진을 보여줬더니 틀림없이 이 인물이라고 이야기했다 한다.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확실치 않지만 이 이야기가 전국 신문에 게재됨으로써 사카모토 료마의 평판이 전국적으로 퍼지게 된다.
4. 그 밖에
쿄토 국립박물관에는 몇 군데에 핏자국이 남은 족자가 소장되어 있다. 그것은 오미 카이도가 암살 당일, 생일 선물로 료마에게 준 [바이친즈(梅椿図)]라는 작품이다. 묻어 있는 핏자국은 암살당한 료마의 것으로 보인다.
5. 일화
l 데라다야 사건으로 왼팔에 부상을 입은 뒤, 사진 등에는 왼손을 숨기고 있는 것이 많다.
l 료마의 인격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은 계모인 이코의 친정, 시모다야(가와시마 가)라고 한다. 료마는 누나인 오토메와 함께 우라도 만에서 노를 저어 당시 도사번의 조선소 가 위치한 다네자키에 있던 가와시마 가문을 때때로 찾아가서는 나가사키나 시모노세키로부터 전해진 이야기 등을 들었다고 한다. 또한 세계지도나 여러 가지 수입품을 보고 바깥 세상에의 동경심을 키웠다고 한다.
l 당시 도사번사 사이에서는 긴 칼을 차는 것이 유행했다. 어느 날 료마의 옛 친구가 료마와 다시 만났을 때, 료마는 짧은 칼을 차고 있었다. 거기에 대해 지적을 하자, [실전에서는 짧은 칼 쪽이 쓰기 편하다]고 대답해, 납득한 옛 친구는 짧은 칼을 차기로 했다. 다음으로 만났을 때, 옛 친구가 의기양양하게 칼을 보이자 료마는 품 안에서 권총을 꺼내 들며 [칼이란 총 앞에서는 힘을 못쓴다]고 이야기했다. 납득을 한 옛 친구가 서둘러 권총을 구입했다. 세번째로 재회했을 때, 옛 친구가 새로 산 권총을 꺼내자 료마는 만국공법(국제법) 서적을 꺼내들고, [앞으로는 세계에 대해 알아야만 한다]고 이야기했다. 옛 친구는 더 이상 따라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것은 료마의 성격을 선명하게 묘사하고 있지만 사실은 아닌 듯 하다. 이 일화의 기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확실치 않다.
l 데라다야 사건 직후 오료와 결혼을 한 료마는 같은 사건으로 입은 상처를 치료하는 겸 해서 오료와 함께 사쓰마에 머물렀다. 이것이 일본 최초의 신혼여행이라고 한다.
S&W 모델 1
l 료마가 애용한 권총은 두 자루다. 하나는 다카스기 신사쿠로부터 받은 S&W 모델 2 군용 33구경으로 데라다야 사건 때 격발된 것은 이 총이다. 하지만 사건의 혼란 속에 분실되어 다시 사들인 것이 S&W 모델 122구경으로, 이 것은 아내인 오료와 함께 하나씩 소지하고, 사쓰마에 머물 때에는 이것으로 사냥 등을 즐겼다고 한다. 이 총은 암살당할 때에도 휴대하고 있었으나, 격발되지 않았다.
l 어린 시절 수련(수영)을 하러 가는 도중, 친구가 [이런 비 속에 수영을 할 거냐]라고 묻자 [젖는 것 어차피 똑같은데 비가 온다고 못할 게 뭐냐]고 이야기한 뒤 강으로 갔다고 한다.
l 신장 6척(약 182cm, 사진과 당시 착용하고 있던 문복(문장이 들어간 옷)의 사이즈를 근거로 연구자가 계산한 결과로는 180cm)으로 에도시대치고는 보기 드문 거한이라 할 수 있다. 다른 연구에서는 174cm나 169cm라는 설도 있다.
l 등에 검은 털이 돋아 있었다.
l 어린 시절에는 오줌싸개에다 울보. 학습진도를 따라가지 못해 사숙에서 쫓겨난 바 있다.
l 다케치 한페이타와는 [턱돌이], [점박이]라는 별명을 쓸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l 시집을 간 누나인 유키의 집에 자주 놀러 가서는 지붕 위에 올라가 태평양을 바라보곤 했다.
l 사이고에게 [나는 세계의 해원대를 만들겠습니다]라고 이야기한 바, 같은 자리에 있던 무쓰 무네미쓰는 여기에 감명을 받아 이후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회상을 했다고 하지만 이것은 후세의 창작이라고 한다.
l 료마는 탈번 뒤 계속적으로 접촉해 온 토머스 글로버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바, 삿쵸동맹, 가메야마 조합, 해원대, 선중팔책은 료마의 완전한 창작이 아니라는 지적이 있다. 글로버 상회는 아편 전쟁을 주진한 영국의 자딘 메디슨의 자회사이며, 글로버의 직합은 [메디슨 상회 나가사키 대리인]이었다. 료마가 권력자들과 폭넓게 교류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개인적 자질보다도 그가 당시 동양권 최대 군수기업의 영업맨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더욱 진실에 가깝다는 주장이 있다.
l 나가사키의 글로버 저택에는 료마를 비롯한 탈번 지사들이 숨어 살 수 있던 비밀의 방이 있다.
l 료마는 계급적으로는 도사번 무사의 최하층인 향사였으나, 본가인 사이다니야는 도사에서 손꼽히는 거상으로, 가정 환경에 있어서는 웬만한 상사보다 유복했다.
l 이로하마루 침몰 사건 당시 기슈번을 상대로 배 안에 미니에총 400자루 등 총화기 35630냥 어치를 비롯, 금괴 및 도자기 등 모두 합쳐 47896냥 198문이 실려 있었다고 주장해 그에 대한 변제를 받아냈다. 하지만 근래 행해진 조사에서는 사카모토 료마가 주장한 총화기 등은 발견되지 않았음이 명백해졌다.
6. 동시대의 평가
l 스미타니 토라노스케
사카모토 료마는 성실한 검술가지만, 세상 돌아가는 물정에는 매우 어둡다. (에도 수행 뒤)
l 히라이 슈지로
료마는 그릇이 큰 인물이지만 좀처럼 독서를 하지 않기 때문에 때때로 착오를 일으킬 때가 있다. (탈번 뒤)
l 다케치 한페이타
도사라는 일개 번에는 과분한 녀석 (탈번 뒤)
태어나면서부터 담대한데다 자연스레 기략이 샘솟아 신출귀몰하니, 그야말로 용이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다. (도사 근왕당 탄압으로 사형에 처해지기 전, 감옥 안에서)
l 히가시쿠세 미치토미
[료마를 만났다. 대단한 인물이며, 기략가이다] (삿쵸동맹 직전)
l 카츠 카이슈
[사카모토 료마, 나를 죽이러 온 녀석이었지만 상당한 인물이었어. 그때 나는 웃으며 받아넘겼지만 침착하고 뭐랄까. 범하기 어려운 권위를 가지고 있는 남자였지.] (유신 후)
l 사이고 다카모리
[나는 지금까지 많은 지사와 교류해 왔다. 하지만 도량의 크기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료마와 같은 자를 아직까지 본 일이 없다. 료마의 도량은 끝을 알 수 없다.]
l 히지카타 히사모토
[언행이 의표를 찔러, 때로는 굉장히 바보 같은 일을 저지르는가 싶다가도 실로 비범한 사상을 가지고, 그것을 이루어냈다.]
l 미요시 신조
[과격해지는 일이 없다. 또한 소리 높여 논쟁을 하는 일도 없으며, 대단히 온화한 사람이다. 호방해 보이는 용모와는 달리 만사에 온화하게 대처하지만 담력만큼은 대단히 강하다.]
7. 가계 및 계보(계보도는 생략)
사카모토 가는 세이와 겐지의 방계에 해당하는 미노 겐지 도키씨의 서류, 전국시대의 무장, 아케치 미쓰히데의 부장이자 사위인 아케치 히데미쓰의 자손이라 칭한다. 사카모토 성의 유래는 혼노지의 변 이전, 아케치 씨의 영토였던 사카모토(현재 시가현 오츠시 사카모토)에서 유래한 바 있다. 하지만 이것은 후세의 창작일 것이라는 목소리가 강하다. 문장은 [짜맞춰 놓은 사각형 안의 도라지].
한편으로 료마 자신은 기씨로 기노 쓰라유키(헤이안 시대의 가인)의 자손을 칭했다고 한다. 묘비에도 [사카모토 료마, 기 나오나리]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
사카모토 가문이 주군에게 바친 족보에는 [시조, 사카모토 타로고로, 고향은 야마시로, 더 자세한 위치는 알 수 없음, 전란을 피해 나가오카 군 사이다니 촌에 정착. 그 외의 세부 경력, 아내의 고향, 사망한 시기에 관해서는 알 수 없음]이라 적혀 있다.
텐쇼 16년(1588년) 사이다니 촌의 토지검사에서 촌의 3번째 백성으로 등록되어 있을 뿐으로, 3대째인 타로자에몬까지는 공식적인 성조차 가지지 못한 백성 신분이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2대째인 히코사부로, 3대째인 타로자에몬까지 사이다니 촌에서 농사를 지었다. 4대째인 모리유키, 5대째인 쇼테이는 사이다니 촌 안의 지명 중 하나인 오하마 성을 칭하기 시작했다.
칸몬 6년(1666년), 3대째인 타로자에몬의 차남, 핫페이가 고치 성 밑으로 나가 전당포를 개업(상호는 사이다이야)하고 양조업, 의류업 등을 겸하는 거상이 되었다.
쿄호 15년(1730년) 무렵 혼마치의 장로직을 맡아 번주를 알현하기에 이르렀다. 메이와 7년(1770년) 6대째인 나오마스가 향사의 신분을 사서 장남, 나오미를 향사 사카모토 가문의 초대로서 분가시킴으로써 묘지다이토(名字帯刀), 즉 공식적인 이름을 쓸 수 있으며, 신분의 상징으로서 두 자루의 칼을 찰 수 있는 신분에 도달했다. 차남인 나오기요에는 상인가문인 사이다니야를 계승시켰다. 향사 사카모토가 3대째인 나오타리는 하쿠사츠 향사(白札郷士:향사 중 최고신분, 상사의 바로 밑에 위치) 야마모토 가쿠에몬의 차남으로 태어나 사카모토 가의 양자로 들어갔다. 나오타리의 차남이 나오나리(사카모토 료마)이다. 아내는 오료(나리자키 료), 또한 치바 사나코와 약혼을 한 사이였다고 한다.
8. 기념관 및 현창시설
l 고치현립 사카모토 료마 기념관
l 고치시립 료마가 태어난 고장 기념관
l 료마 역사관
l [료마를 길러낸 길]- 고치시 우와마치와 주변 사적을 도는 길의 이름
l 홋카이도 사카모토 료마 기념관 – 하코다테 시에 2009년 11월 15일 개관
9. 문헌(생략)
10. 고치 료마 공항
l 그 명칭은 공공 인프라나 출판물 등으로 상당히 보급되어 있으나 항공회사의 웹사이트 등에는 아직 [고치]라는 표기가 남아 있다.
l 고치 료마 공항에 대한 지사의 기자회견이 있다. (하시모토 지사의 기자회견)
11. 관련인물
l 나카오카 신타로
l 다케치 즈이산(한페이타)
l 요시무라 토라타로
l 카츠 카이슈
l 다니 다테키
l 고토 쇼지로
l 이와자키 야타로
l 치바 사나코
l 사카모토 오토메
l 사카모토 나오유키: 홋카이도 출신의 화가. 사카모토 쵸칸의 손자이자 향사 사카모토 가문의 8대 당주에 해당한다.
12. 주석(일부 생략)
1) 호쿠신 일도류 면허개전이라 전해지지만 실제로는 [호쿠신 일도류 나기나타 병법, 목록]을 받았을 뿐.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검술이 아니라 나기나타 병법으로 면허도 아니고 면허개전도 아닌, 호쿠신 일도류에서 가장 낮은 [초목록]이었다. 다만 치바도장에서 숙장을 했던 것이나 동세대 인물의 증언에 [면허개전을 전수받았다]는 증언이 남아 있기에, 면허개전장은 단지 현존하지 않는 것일 뿐이라 추측된다(료마의 유품은 재해나 도난 등으로 일부 소실되어 있다).
2) [유신 도사근왕사] [사카모토 등, 일단 이케다의 집에 모여 상급무사들에게 대항할 기세를 보이다]. 또한 사건의 당사자로서 할복한 이케다 토라노신의 목을 벤 것이 료마이며, 그 피에 칼집 끈을 적시며 향사의 단결을 맹세했다는 일화가 널리 알려져 있으나, 이것은 사카자키 시란의 소설 [한혈천리마]가 지어낸 허구다.
3) 일설에는 카츠를 암살하기 위해 갔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해 정확한 사실이라 하기는 어렵다. 다만 카츠를 죽이려다 역으로 설득 당해 카츠의 제자가 된 인간이 다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입문 시기나 카츠를 같이 찾아간 인물에 대해서도 여러 설이 있다.
4) 다만, 카츠 카이슈의 연구자로 저명한 역사가 마쓰우라 레이를 비롯한 몇몇 역사가들은 료마가 숙장 역할을 맡았다는 설에 대해 회의적이다.
5) 삿쵸동맹은 료마 최대의 공적이라 평가되지만 실제로는 사이고나 오마쓰 다데와키 등 사쓰마번의 지시를 받아 움직였다는 설도 있으며, 삿쵸동맹이 실현에 이르기까지 해낸 역할의 중요성에 대해 평가가 분분하다.
6) 책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정말로 료마가 작성한 것인가 의문시하고 있는 연구자도 존재한다. 료마가 [선중팔책]을 작성한 것은 통설이지만, 그에 대한 사료적 근거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13. 관련항목(생략)
14. 외부링크(생략)
경매번역 일본어전문 번역사 - 쿠로우토
http://cafe.daum.net/transauction
첫댓글 쿠로우토님, 좋은 자료를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