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펀의 시인들|신정
카밀, 내가 말할 차례야 외
잠에서 깬 그녀가 어젯밤 잠시 바라본 적 있는
죽음을 깨운다 히죽 웃고 있는 그림자뿐인
밤새 제 그림자만 갉아 먹다
찌그러진 캔 속으로 들어간 주검들
발에 채여 거리로 나온 걸까 거리엔
온통 비명들로 가득하다
전철을 탄, 나는 나보다 덩치가 더 큰 길쭉한 주검을 보고 박수를 친다
지금부터 시작하는 죽음을 장미꽃이라 부르기로 한다
문득 어릴 적 장미 한 송이
소환시킨다
떠난 것들을 그리워하다 낡은 책
속에서 압화가 된 꽃잎들
오후가 되자 죽음은 다시 방으로 돌아와 먹다
남긴 빵 조각 사이로 몸을 숨긴다
“무척 바쁜 하루였어”
어깨 위로 하루치만큼 자란 바람 조금씩
빠지고 있다
다시 머릿속 깊이 들어앉을 태세다
어제의 꽃 한 송이를 밀어낸다 수고했어,
어제 죽은 것들에게 인사하자 오늘의
죽음이 침대 위로 쓰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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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에서 온 남자
수억 광년을 지나온 그 남자를 알고 있다
어제 만난 그는 예전과 달라진 말들을 쏟아낸다
그가 다섯 개라고 하면
세 개로 읽어야 한다
그가 많다고 하면 좁다는 뜻이다
그의 말을 어제를 살아온 나의 언어로 듣는다
그의 뜻을 몰라도
그의 말엔 향기가 있다
그가 자릴 뜨면 금세 침묵 속 어두운 기운만 남기도 하지만
그가 지나온 행성은
붉은 기운이 가득한 곳이었을까?
그 남자는 빨갛다
우린 두 사람이다
교차점이 점점 멀어져 간다
행성이나 행간을 떠도는 남자
별들만 무심히 제 그림자를 보는 날들이 스쳐 지나가고
그가 탁자를 닦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아나기 시작했다
입술 언저리엔 말라버린 잎들만 수북하고
가끔 숟가락이
탁자 밑으로 떨어지곤 했다
그는 왜 행간에서 문득 사라졌을까?
그가 떠난 지구엔
푸른 별이 뜨고 있다
신정
경북 안동 출생으로 2022년 《심상》 신인상으로 등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