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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왕봉에서. 거센 바람이 눈을 쓸어냈다.
[2005년도 제 60차 산행]
1. 일자:
2. 날씨: 흐리고 눈. 핏빛 없는 얼굴 같은 태양이 두어 번 고개를 내밀기도 했으나 흐린 가운데 눈으로 시종했다. 치밭목대피소 기상현황판에 기온은 영하 12도, 바람은 초속 5미터가 표시됐다.
3. 인원: 1명
4. 대상: 지리산智異山(1,915m) 경남 산청군, 함양군 소재
- 코스: 약 18㎞ 대원교~유평마을~한판골~치밭목대피소~써레봉~중봉~천왕봉~법계사~칼바위~중산리
- 구간별 도달시간(휴식 포함 9시간 30분 소요)
5. 후기
지리산(智異山)은 우리 민족의 혼이 담긴 영산(靈山)으로 3도 5개 시·군, 즉 경남의 산청, 함양, 하동군과 전남의 구례군 그리고 전북의 남원시를 품고 있는 한국 최대의 산이다. 둘레는 대략 340㎞, 850리에 해당되며, 넓이는 1억 3천만 평에 달한다. 풍진 세상을 떠나고 싶어 했던 사람들이 한번쯤 살아보고 싶은 산이 바로 지리산이다.
이번 60차 산행은 외할머니 제삿날과 연계해 대원사 코스로 지리산 천왕봉을 혼자 찾았다. 지리산 동쪽 자락에서 계곡과 능선을 번갈아 가며 천왕봉으로 오르는 이 코스는 거리상으로나 난이도 면에서 꽤 힘든 구간이다. 하지만 눈보라 속에서 무릎까지 차오르는 순백의 신설(新雪) 위에 나만의 자국을 남기며, 깊디 깊은 지리의 품에 안겨 소중한 추억을 남긴 산행이었다.
1980년 2월 어느 날, 나는 저녁때쯤 중산리를 떠나 법계사 아래서 야영을 하고, 다음날 새벽 천왕봉에 올라 생애 첫 지리일출을 감상한 후 중봉과 써레봉을 거쳐 대원사코스로 하산한 적이 있다. 그 때 천왕봉에서 써레봉까진 엄청난 적설량으로 무척 고생했다. 특히 짐승 발자국 하나 없는 산길에 리본이나 사다리 등 인공시설물이 하나도 없어 더 힘들었다. 따라서 이번 산행은 그 때에 비해 등로가 두 배 가까이 길었지만 전체적인 면에서는 힘들지 않았다.
산행 전날 저녁, 외갓집에 도착했다. 부모님과 아내도 함께였다. 해마다 수능 시험일이 춥듯 외할머니 제사 때도 추웠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외할머니는 평소 과묵하셔서 말씀이 거의 없었으며, 외할아버지가 세상을 버리시자 반년이 채 안돼 따라가셨다. 아마 두 분의 금슬이 아주 좋으셨던 것 같다. 두 분 모두 장수하셨는데, 외할아버지는 아흔 일곱, 외할머니는 아흔 넷으로 십여 년 전에 돌아가셨다. 제사를 마치자
물 맑기로 소문난 덕천강을 왼쪽에 두고 난 도로를 따라 단성면과 시천면의 경계지점을 지나 산모퉁이를 돌아서니 곶감으로 잘 알려진 덕산이다. 천왕봉은 구름 속에 잠겼고 오른쪽으로 뻗어 내린 장대한 능선은 허연 눈을 덮어쓰고 있다. 벌써부터 마음이 설레기 시작한다.
대원사매표소를 지나자 붉은 벽돌이 깔린 길 바닥을 눈이 덮고 있었다. 속도를 줄여 천천히 올라가는데 옆에 앉은 아내가 초조한 기색이다. 아내는 차를 운전해 되돌아올 일을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는 수 없이 대원교 조금 못 미처 간이주차장에서 차를 돌렸다.
새로 건설된 대원교 부근에서.
대원교를 건너자 아름드리 나무들이 우거진 길이 펼쳐지고, “方丈山大源寺”라고 쓰인 편액이 걸려있는 일주문을 지나니 비구니 스님들이 수도하는 대원사다. 일정이 빠듯해 경내 관람은 생략한다.
유평마을에 올라 옛 가랑잎초등학교에 들어가려다 걸음을 멈췄다. 순백으로 덮인 운동장에 자국을 남기기 싫었다. 대신 그 풍경은 담았다. 이 학교는 해방 후 유평분교로 개교하여 한때 학생 수가 늘어 유평초등학교로 독립하였으나 1982년에 분교로 원위치 되고 1994년에 폐교되었다고 한다. 가랑잎초등학교는 1970년대 이곳에 취재 왔던 어느 기자가 붙여준 이름이다. 가을철 운동장이 낙엽에 뒤덮여, 학생들이 낙엽 치우기에 바빴다는 사연에서 유래됐다. 지금은 산청 청소년 수련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옛 가랑잎초등학교.
상가거리를 지나 조금 올라가니 왼쪽 한판골 입구에 이정표가 서있다. 여기서 천왕봉까지 10.2㎞, 사실상 이곳이 대원사계곡 코스의 들머리다. 물론 여기서 3.8㎞ 위의 새재에서 신밭골을 따라 수월하게 오르는 길도 있지만 난이도나 거리 그리고 역사 등을 고려할 때 신밭골 보다는 한판골을 들머리로 보는 것이 보편적이다.
민박집 곁으로 난 길을 따르자 이내 철조망이 막고 있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이하 공단)에서 11월 16일부터 12월15일까지 산불조심기간 운영에 따른 일부 탐방로를 통제한 까닭이다. 적어도 지리산 만은 일부 탐방로가 아니라 전역이라고 표현해야 옳다. 동부권만 보더라도 중산리에서 법계사, 새재에서 신발골을 거쳐 치밭목대피소까지의 두 구간만 개방되었을 뿐이다.
일단 철조망을 넘었다. 지금도 눈이 내리고 있고, 적설량도 만만찮아 산불이 날 염려는 전혀 없다. 다만 규정을 어긴다는 것이 조금은 부담스러웠다.
계곡으로서의 한판골은 별 가치가 없다. 계곡을 왼편에 두고 별 특징 없는 길이 고갯마루까지 이어진다. 그사이 두어 번 나타난 태양은 희다 못해 창백한 사람의 얼굴처럼 보였다. 산길에 들어선지 50분이 지나서 수량이 바닥을 핥고 있는 계곡을 건넜다. 이곳에서 경사가 급해지면서 7분여를 오르니 고갯마루, 즉 능선이다. 잠시 시야가 트이면서 은색으로 치장한 지리산 산록이 아름다움으로 다가왔다. 웅석봉까지 이어진 달뜨기능선도 저만치서 보인다.
다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가파른 능선 오르막을 10여분 힘들게 올라가니 이정표가 반긴다. 치밭목 3.6㎞. 유평에서 2.6㎞ 올라온 것이다. 산죽과 잡목이 깔린 편편한 능선 길은 조금 가다 사면으로 바뀌면서, 왼쪽 아래로 깊게 파인 장당골의 기나긴 골짜기가 끝을 알 수 없이 감돌아 내려간다. 그러나 이 골짜기도 내원사 부근에서 반대편의 내원골과 합수 되면서 명을 다한다.
장당골을 내려다보니 오래 전 뱀장어 잡으러 갔던 옛 일이 떠오른다. 1985년 여름, 나는 외갓집에 갔다가 외사촌 형을 따라 그의 친구 3명과 함께 이 골짜기에 뱀장어를 잡으러 왔었다. 골짜기를 샅샅이 훑었으나 뱀장어는 구경도 못하고, 대신 한국 고유 어종인 꺽지와 메기, 그리고 손바닥보다도 큰 피라미 등이 잡혔다. 우리는 그것들이 잡히는 족족 소주를 홀짝거렸는데 어느새 1.5리터 페트병 2개가 비워지고 있었다. 나는 그 때 메기회가 그렇게 맛있는 것을 처음 알았다.
장당골의 하얀모자.
산비탈을 가로지르듯 계속된 사면 길은 너덜지대가 나타나면서 힘이 든다. 이른바 “히든 크레바스”에 발목이 빠지지 않으려고 조심해야 했다. 얼마 후 나무계단 두 개를 잇따라 지나 조금 더 가니 어느덧 산길은 장당골 계곡물과 만나면서 울창한 숲 속으로 변한다.
여기서 치밭목까진 1.8㎞. 계류를 따라 20여분 오름짓을 하자 무제치기폭포다. 30여 미터의 3단 바위로 이루어진 이 폭포는 수량이 부족하고 그 아래 소가 발달하지 못한 것이 흠. 그러나 지금은 눈과 얼음으로 분장하여 본 모습을 감추고 있어 그나마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다. 아무래도 이 폭포의 진면목은 장대한 물줄기를 쏟아내는 장맛마철이라야 볼 수 있을 것이다. 맨 위의 바위 중간으로 물이 흐르고 있었고, 가운데 바위의 중·하단부는 고드름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매달려 있다.
무제치기폭포.
폭포 감상을 마치고 다시 산길에 들어섰다. 숲 속의 개울물을 따라 오르는데 여자 산객 두 명이 내려온다. 반갑게 인사를 건네고 어디서 오느냐고 물으니 아침에 새재에서 치밭목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중이란다. 발자국의 주인공들이었다. 참으로 대단한 여전사들이다. 그들과 헤어지고 얼마 후 경사 급한 오르막을 치고 오르니 1차 목적지인 치밭목대피소에 당도했다. 유평마을을 떠난 지 2시간 40분만이었다.
눈보라가 휘몰아쳐 급히 대피소로 들어섰다.
조개골과 장당골의 경계를 이루는 능선 평지에 위치한 이 대피소는 아담한 단층 슬라브 건물로 40명 정도 수용할 수 있는 구식 건물이다. 무인산장으로 방치돼 오던 것을 지금의 소장
나는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말랑말랑한 곶감 하나를 민 소장에게 건네며 원두커피를 한잔을 부탁했다. 다른 산객들은 내가 점심 먹는 사이 모두 하산하고 민 소장과 나 둘만 남았다. 그들은 어제 올라와 이곳에만 머물다가 간 것이다. 잠시 후 나는 그와 따스한 커피잔을 손에 들고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창 밖을 바라보면서 많은 얘기를 나눴다. 마치 내가 알프스의 어느 산장에 와있는 듯 착각이 들었다. 대화 중에도 나는 정상에 오르는 문제를 놓고 머릿속이 복잡했다. 나의 그런 마음을 읽었을까. 그는 무리하지 말고 여기서 놀다가 내려가란다.
써리봉능선에서.
가시거리 불량. 구곡산 능선이나 순두류고원은 조망되지 않았다. 반면 생명을 다한 앙상한 고사목과 암괴 등이 각 종 나무들과 어울려 핀 설화는 아름답기 그지없다. 여기서부터 중봉까지는 암릉구간으로 안전에 각별히 신경을 쓰면서 가야 했다.
위험한 낭떠러지나 벼랑지대는 없고, 쇠줄 난간과 철사다리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작은 벼랑에는 많은 눈이 쌓여 있어 한발한발 내딛기가 힘들었다. 이렇게 30분쯤 운행했을까 써리봉 이정표가 반긴다. 편편한 바위봉우리인 써리봉에 올라 배낭을 내렸다.
이곳 역시 조망은 안된다. 구상나무를 배경으로 배낭과 스틱을 편편한 바위에 올려놓고 카메라에 담았다. 체온 유지를 위해 오래 머물 수는 없었으나 컨디션을 조절을 위해 조금 쉬었다. 그 사이 상봉을 향해 계속 올라야 할지 결정을 내려야 한다. 우선 구급약통을 꺼내 아스피린 한 알을 꼭꼭 씹어 먹었다.
써리봉에서.
올라 가자!
벼랑을 내려오다 두어 번 패대기를 치긴 했어도 몸 상태는 아직도 괜찮았다. 이렇게 결정하니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 배낭을 메고 다시 능선에 붙었다. 여기서 중봉까지는 1시간 남짓. 맑은 날씨라면 천왕봉은 물론 조개골과 중봉골, 순두류고원 등을 두루 조망할 수 있지만 상상으로 대신했다. 가파른 비탈을 서너 번 오르내리면서 두어 번 미끄러지고 마지막 경사구간에서 힘을 좀 쓰고 나서야 겨우 중봉에 올라섰다.
중봉에서.
천왕봉이 지척이건만 자태를 드러내지 않아 답답하다. 눈 길을 헤치고 와서인지 평소보다 체력소모가 많았다. 여기서 천왕봉까진 900미터로 능선안부에 내려섰다가 다시 치고 올라야 한다. 안부에서 천왕봉까지의 20~30여분이 이번 산행에서 마지막 힘든 구간이 될 것이다.
능선안부로 내려서자 20’회색 컨테이너박스가 한 동 있는데, 산사태와 관련한 시설물이 아닌가 싶다. 왼쪽 중봉골 쪽으로 150미터 내려가면 중봉샘이 있다. 수통에 물이 가득 있어 그냥 지나친다. 길은 왼쪽 사면으로 가다가 다시 오른쪽(북동쪽) 사면으로 접어들면서 가팔라지기 시작한다. 가파른 바위사면을 힘겹게 치고 오른다. 이제 체력도 많이 떨어졌다. 곧이어 이정표가 나타나고 중산리(법계사) 쪽으로 내려가는 급한 비탈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난이도가 높은 스키장의 슬로프 같다.
15분 후, 하산시간을 고려해 상봉을 떠났다. 천왕샘 부근까지의 급경사 200여 미터 구간을 매우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천왕샘은 눈 더미에 속에 꼭꼭 숨었다. 여기서 마지막으로 그림 석장을 카메라에 담고, 하산시간 단축에만 모든 신경을 쏟으며 아무 잡동작 없이 내려간다.
천왕샘 부근을 내려서며.
개선문을 지나 법계사 위쪽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곳에 높은 철조망이 가로막았다. 담을 넘기가 어려워 왼쪽 옆으로 돌아서 빠져 나왔다. 다행히 감시초소에는 아무도 없다. 바위 슬랩을 간신히 타고 내려와 로터리산장에 다다르니 또 철망이 가로막는다. 바로 전과 같은 방법으로 돌아 나와 인기척을 내며 산장 안으로 들어갔다(
산장에 들어선지 10분만에 일어섰다. 랜턴 불에 의존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길은 잘 다져 있어 속도를 내기에 충분했다. 중산리에서 이곳 법계사까진 개방돼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다녀간 모양이다. 너무 다져져 미끄러운 곳도 더러 있었으나 끝내 아이젠은 착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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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후덥지근한 여름에 겨울 지리의 모습을 보니 허 시원하구만요....
요즘 산행기 쓴지도 오래라, 그것도 년식 지난 겨울 산행기 한 편 올렸습니다.
더위 식히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네요. ㅎㅎ
도대장의 산행일지는 항상 마음을 그곳으로 빠져들게하는 마력이있는것같네 ..제미있게 잘읽었오..
간만에 보는 지리산에 쌓인 눈을 보니 많은 것들을 떠올리게 하네요...갑자기 시원해지는 이 느낌은....
관심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산악회는 무엇보다 [산행기 방]이 좀 북적거려야 하는데...
앞으로 산행 후 간단한 기록만이라도 서로 공유하기 바랍니다.
저는 지난 산행기라도 가끔 올릴테니 이해해주시고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