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소시집|이동엽
길을 뻗어 나가면 멈추어있는 곳 외 5편
길을 뻗어 나가면 멈추어 있는 곳,
나는 이 땅이 아름답다고 말했다
저 나뭇가지 나뭇잎을 하나씩 바라보며
욕망을 털어나갈 것이다
어떤 희망들은 색깔 아래에 있는데
바람이 불길을 분질러 놓았다
세상의 모든 소리들이 한 발짝씩 불어왔다
비가 오면 긴 밧줄을 타고 그 길을 올라갔다가
내려온다
죽은 자들의 습성이 노랗게 물들어 있다
어울리지도 않을 것 같은 낱말들이 떨어져 있고
풍년 속에 한 발짝 더 다가갔다
싯구절로 치면 그건 두어 행 짜리에 지나지 않는데
그에 대한 담화는 더욱 풍성해져서
소문처럼 흘러 다니고 내 발에도 와서 밟힌다
그것은 입술의 행간을 읽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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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되고 눈물이 되며
가을이 되고 눈물이 되며 메마른 삶을 건져 올린다
그러한 삶이 그림자 진다
독특한 시각의 불빛들은 망가졌다
모든 일들은 한 발씩 늦게 당도하는
구름에 섞여 있다
구름의 마디마디가 소란한 틈을 타서
가을빛으로 전해진다
죽음의 색깔을 뒤집어서 그대가
풀을 뽑아낸다면 좋겠다
늦은 저녁의 불을 일구다가
나도 죽은 자들처럼 먹고살아야지 하는데
어떤 바람은 살의 슬픔을 떠다밀 듯
그 생생함으로 빛을 빨아들인다
강물의 속을 들여다보면
오늘 하루도 빗방울이 흘러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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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는 장미가 이름을 붉히고
잠에서는 장미가 이름을 붉히며
흩어지는 것을 경험했다
마당에서 풀을 뜯으면 잔서리가 내리고
시절이 늙어갔다
장미를 한 마디씩 끓여서 잠을 덮는다
파안대소하는 녹음이 골목길이 된다
전화상으로 누군가, 이러다 죽겠지 하고 말을 하는데
나는 아직도 자위의 색깔을 입고 있다
먼바다를 건너서 나비 한 마리
문득 꽃잎의 연기처럼 날은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실낱같은 희망이 둥둥 떠간다
콕 집어서 새들은 뼈다귀의 점령지에 올라앉아 있다
바람의 색깔을 건드리면 붉은 피가 된다
잔서리 이슬처럼 피 묻은 듯이
이 지상에는 별빛의 이름이 섞여 있다
의자를 끌어안고 그대를 슬퍼하는데
문득 끝마무리가 어설펐던 그 일을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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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산악의 눈부시고 메마른
아무것도 간직하지 않았던 시월이 왔다
시월이, 고슴도치처럼 창문을 때리며 왔다
나는 망국의 슬픈 잠재능력이다
낱말이 녹말이 되어가듯 문장을 뜯어 말리는데
악독하다고 말하는 장미가 한가로이
풀을 뜯는다
무슨 사납금을 올려서 그대가 불을 피우고
나는 창문을 뜯어먹고
일찍이 없었던 잠재능력을 시험한다
그림자들이 사납게 불끈거리며 또 여리게
그대를 슬퍼한다
'장미를 끌고 가다가 주무셨네요'
쩍쩍한 회오리바람에 낱말의 시궁창 드러나고
그대는 우는데 나는 생경하기만 하다
장미의 이슬에 낱말을 띄우니
종말의 그림자들 넉넉하구나
끓어 넘치면 빛깔이 되는 선선함이 되돌아온다
아무런 뜻도 희망도 없는 낱말들을
적어놓고 곡식을 저장하며 생각했다
마른 산악의 눈부시고 메마른 큰 송아지들
처마에는 쫓겨 올라간 빗물이 있었다
소름 돋는 장면을 기록으로 남기려는데
우중충하지도 않은 세월이 내려와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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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문 속의 산술가들
집들의 흔들리는 기억을 깨우치며
Why can't I do anything right?
방향을 틀었다가 국물에 도달했다 Marry me
시원치 않은 삼각팬티
방향을 틀었다가 국도에 도달했다
점점 많은 집을 지었다
방향을 틀었다가 폐쇄된 도로의 한 끝에 매달렸다
여기는 꽃피는 나무들의 생태계를 떠받친
지구본의 표면
차를 버리고 경사각의 기울기를 따라 걸어갔다
너는 당도하지 않을 것이다
풀어 헤쳐진 숲속의 모든 길들을
어렵지 않게 폐쇄했다
풀어 헤쳐진 나뭇잎의 들창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통합된 시선의 관망 상태를 경험한다
한 장의 비자가 한 판의 피자와 함께 배달되었다
누런 금니빨은 소수의 선택받은 자들이다
그들이 바람을 통과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나는 지구본의 표면을 빠져나올 수 없었다
보이지 않는 손의 거대한 힘을 느꼈다
종족들의 심궈진 본능을 따라 걸어갔다
아무도 도착하지 않은 문은 폐쇄되었다
석탄기의 먼 시간대가 발에 밟힐 즈음
나는 따듯한 책망을 얻었다 Be yourself!
하늘이 삐뚜름해졌다 일정치가 않은 나뭇잎들이
바람에 날려갔다 그러므로 나는 거리의 끝에 도달해서
지나온 길을 유심히 들여다 보았다
일조량은 기울기의 각도만큼이나 일정했다
쌍권총을 뽑아 들었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이 파노라마의 술책을
유사상표처럼 즐긴다
가보지 못하고 경험해보지 못한 풍경이
삐뚜름해졌다 그대가 시월을 신발 끈처럼 동여맬 때
우리가 끄집어내야 할 것들은 이런 것들이 아니라
죽음의 일정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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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이르는 병
-그 외에는 남아 있을 만한 시간이 없다
그 외에는 남아있을 만한 나뭇잎의 산책도 없다
그 외에 우리는 죽어버린 나뭇잎을 끌어 앉아 있고
그 외에 우리는 떠다밀어야 할
쉬엄쉬엄한 사람들
그 외에 우리는 그것이 왜가 되는 줄 모르지
그렇게 치밀하지 않으면서 눅눅하다
그 외에 우리는 비 내리는 숲속에서
잠이 떨어져 나간 소식을 듣고
아직도 발설되지 못한 나뭇잎을 말하고
그 외에 우리는 그것이 일흔 살이라고 말했다
정분이 없어서 꽃피는 나무를 바라보고
시체들의 곳간을 뒤지며
돋아난 하모니가 되어서 돌아다닌다
그 외에 우리는 일찍이 없었으므로
비 내리는 숲속이
까맣게 칠해진 것을 볼 수 있었다
*
발설되지 않은 것이 길고 어둡게 꽃피어 있으니
이것이 장미의 현탁이다
그러므로 탁상의 어깨가 자라났다
무엇으로부터 일궈진 일기가 있다면
탁발승들의 주문에서 대량으로 생성된 것이다
시간이 불순해질 때쯤에는
그 사람을 잊었고 나는 나이가 모자라서
걸어 다닐 수도 없었다
이 모든 빗발들이 성기게 돋아나고 모두들
성기가 나붓끼는 거리에 들어앉아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은 자들의 성욕을 채우며
배가 불러오지 않는 먼 길을 이끌었다
*
새들의 이마와 껍데기에 돋아난 별들은
정확하지가 않다 소름의 소용돌이가 뭉게구름처럼
꽃피어났다가 스러진다
하오의 그림자들, 내가 저물면 이빨의 상처만
남을 것이다 여러 장의 시편을 읽으며 나뭇잎을
떨어뜨린다고 해도, 그대는 당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부숴진 산마루의 산책을 즐겼다
그러므로 이슬의 불붙은 탐욕을 말해주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돋아난 인간이다
사랑이라는 병적인 가려움이 돋아났다가
한사코 저문다 내가 열두 점을 치고 그대는 세 시에
오고 잠을 자는 벌레들을 일깨운다
이것은 파란 잎의 그늘이다
파란 잎의 잠이 차가운 거리에 있었다
줄무늬를 바라보며 그대가 울고 그것은
얼룩말이나 기린으로 기억 속에 저장됐다
끄집어내면 묽은 하늘이다 불러 터진 살모사들이
뚝뚝 떨어지며 기어 나왔다
장미의 현탁액, 이라는 말을 기록지에 남기고
문을 닫고 나오며 벌써
시월이구나, 했다 정박하듯이 밤 물결이 찰싹거리는
소리를 들은 듯하다
나는 손가락 관절을 뚝뚝 부러뜨리며 이 모든 일을
일기장에 남겼다 그대가 없기 때문이다
없다는 것을 알고서도 그만두지 않았다
산책은 계속되었고 문에 펴 바른 페인트칠이
벗겨지도록 세월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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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소시집 시작노트|이동엽
2019 여름, 밤의 정거장
기다려라, 여름이 올 것이다. 잡아먹히지 않고 늙어가리니
이승의 햇빛들에 감사하리라.
새벽 네 시를 지나면 창밖의 길 건너 건물에 걸린 십자가는 붉은 불을 밝힌다. 그 건물의 옥상 한 귀퉁이에는 각종 전파의 중계기가 피뢰침과 함께 탑을 이루고 솟아 있다. 새벽 네 시를 지나고 다섯 시가 다 되어 뿌옇고 짙은 진청색의 여명이 스미는 듯해도 밤새 내리던 비는 그치지 않고 있다.
7월 중순이 근접해 있고, 누군가에게서 곧 초복이라는 말을 들었다. 인편으로 사람 사는 소식을 접한 지는 오래 되었다. 오후에는 멀리 떨어진 옛 친구와 문자를 주고받다가, 세탁물을 널고, 커피를 한 잔 마시고, 가만히 소파에 기대어 마치 한쪽 끝에 되돌이표라도 있는 것처럼 반복되는 조지 윈스턴의 <여름>을 듣는다. 무수히 떨어지는 물방울들, 퉁겨오르는 여름. 창밖으로 어스름이 잦아들고, 사위가 차츰 짙어갈 때, 눅눅하며 다소 처량해진 머릿속을 헤집고 문득 몇 구절의 문장이 스치면 아주 작은 신식 타이프를 꺼내 들고 그들을 소환한다. 그것들은 쇠잔하는 빛과 함께 멀어지기도 하고 어스름 속에서 서서히 조도를 높이는 가로등 불빛처럼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렇게 멀고 아득했던 추억과 기억을 끄집어내고, 그에 어울리게 아주 오래된 낱말들과 심층에 저장된 문장들을 들추어내면 그것들은 희미한 윤곽 속에서 형태를 갖추고, 또 한 꺼풀씩 속살을 내비치며 盛裝한다.
흘러넘치는 많은 날들과 그 저녁과 밤의 정거장을 지나치며 그것들은 씌여진다. 생각하건 대 잠시 잠시 퉁겨 오르는 슬픔 같은, 잎잎에 춤추듯 스쳐 가는 빛깔 같은 일들을 제대로 벗 삼았는지는 알 수 없다.
시를 쓴다는 것은 이루지 못할 꿈을 쫒는 것인데, 그 궁극은 결코 표현 되지 않는다. 이처럼 발설해보지만 단정할 수 없는 노릇이다. 어찌 알겠는가.
1962년 경북 영일 출생으로 1989년 《문학정신》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이듬해 《현대시세계》 봄호에 발표하며 활동하였으나 한동안 침묵해 있다가 2018년 <발견> 여름호에 시를 발표하며 다시 활동을 재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