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의 보고, 대구의 재실
49. 군위군 산성면 화본2리 엄흥도 묘소,
의흥면 금양2리 엄흥도 재실 망월정(2)
송은석(대구향교장의·대구문화관광해설사)
(지난 호에 이어)
영월 호장 엄흥도가 대구 군위에 은거한 까닭
멸족의 위험을 감수하고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 장사까지 치른 영월 호장(戶長) 엄흥도. 그는 아들 엄광순과 함께 지금의 대구시 군위군 산성면 화본2리 ‘신남촌 분토골’에 정착, 은거한다. 은거 당시 50대 중반이었던 그는 이곳에서 10여 년을 보내고 향년 71세로 졸(卒), 분토골 북쪽 월곡(虫+越谷·가재골)에 묻혔다. 조상 대대로 영월 호장을 세습해 온 영월 토박이 엄흥도. 그는 무슨 연유로 영월에서 600여 리나 떨어진 군위까지 왔을까? 여기에는 ‘야은(野隱) 정사종(丁嗣宗)’이란 인물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영월군 동강변 민충사(愍忠祠) 인근에 세워져 있는 ‘군위현감정사종충의비’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무과 출신 정사종은 단종이 세자로 있을 때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경호원)를 지냈고 이후 군위 현감을 지냈다. 순흥부에 유배된 금성대군이 세조에 의해 죽임을 당하자 관직을 내려놓고, 단종 유배지 영월로 낙향해 밤낮으로 단종의 안위를 걱정했다. 1457년 10월 24일 세조에 의해 단종이 죽임을 당하자 엄흥도를 도와 단종 시신을 수습한 후 강물에 투신자살했다. 현재 영월군 충절사(忠節祠)에 엄흥도, 추익한과 함께 제향되어 있다.
위 내용을 참고하면 엄흥도의 군위 은거에는 정사종의 영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월로 가기 전 정사종의 신분이 ‘군위 현감’이었기 때문이다. 단종 시신 수습 당시 정사종이 엄흥도에게 이런 말을 건네지는 않았을까?
“엄호장! 이제 어쩔 셈이오. 죽을 것이라면 모르겠으나 혹여나 도망가 살 생각이라면 경상도 군위로 가시오. 내가 그곳 수령을 지냈잖소. 그중 화본리는 첩첩산중이라 숨어 살기에 적합하오. 그곳에 믿을만한 선비 한 분도 알고 있으니 내가 소개장을 써 주겠소”
이후 정사종은 강물에 몸을 던졌고, 엄흥도는 영월을 떠났다.
현재 엄흥도 친필 편지 석 장이 남아있다. 이 중 두 장이 신남촌 은거 시 인근 금양2리(검동골)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장원장(1465)’, ‘장생원(1466)’에게 보낸 편지다.(장씨는 정사종의 소개로 알게 된 인물일 수도 있다) 이 편지에서 눈에 띄는 내용이 있다. 하나는 “(편지를)보신 후 태워달라”는 내용이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자신의 존재를 숨겨야 했던 엄흥도의 딱한 처지가 잘 드러나 있다. 다른 하나는 “거견양일의대지(距詃陽一衣帶地)”라는 표현이다. 장씨가 사는 견양(지금의 금양(錦陽)으로 추정)과 엄흥도 자신이 사는 신남촌과의 거리가 ‘옷 한번 갖춰 입는 시간’만큼 가까운 거리라는 표현이다. 실제 금양과 신남촌은 차로 10분 거리다.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신남촌이 자리한 산성면은 군위군 8개 읍면 중에서 유일하게 도서벽지로 지정될 만큼 산골 오지였다.
군위 엄흥도 묘를 진묘(眞墓)로 보는 이유
550년 세월 그럭저럭(?) 조용하던 엄흥도 묘가 영화 ‘왕사남’ 이후 또다시 진묘 논란에 휘말렸다. 영월 엄씨 충의공계(忠毅公系) 군위 문중은 자신들의 표현대로 한미한 문중이다. 하지만 550년 넘는 세월 동안 세파에 흔들리지 않고 오로지 엄흥도 묘만 지켜온 문중이다. 오랜 세월 타 지역 영월 엄씨 족보에 나타나지 않았던 엄흥도와 세 아들의 생몰년도가 확인된 것도 군위 문중 ‘봉강재(鳳岡齋)’에서 발간한 충의공실기, 영월엄씨파보 덕분이었다. 또한 영월엄씨대동보(1979)에 처음으로 ‘군위 엄흥도 묘소’가 등재될 수 있었던 것도 군위 문중 덕분이다.
근년에 엄흥도 진묘 논란에 대해 학술적으로 접근한 예가 있다. 택민국학연구원이 발표한 「충의공 엄흥도의 삶과 묘소 진위(眞僞)에 관한 고찰」(2009)이다. 이 논문에서는 군위 묘를 진묘로 보았다. 이후 밝혀진 사실 등을 종합하면 군위 묘의 진정성이 더욱 뚜렷해진다. 타 지역 묘에 대한 부정설은 일단 제외하고 군위 진묘설 일부를 살펴보면 이렇다.
○엄흥도는 멸족을 피해 영월을 떠나 아들 엄광순과 함께 대구 군위에 은거하고 사망했다.(충의공계 파보, 충의공행장, 묘갈명, 묘소변의(墓所辨疑), 장원장에게 보낸 친필 편지, 은거지 분토골 구전 등에서 확인된다.)
○충의공실기, 영월엄씨파보 및 군위, 함흥, 청주 문중의 가승·보첩 등에도 엄흥도의 묘가 의흥(군위)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1733년(영조 9) 조정으로부터 충신 엄흥도 후손의 복호(復戶)를 명한 완문(完文)이 군위 문중으로 내려왔고 300년 가까이 소장하고 있다.(2019년 국립중앙도서관 기탁)
○기존 엄흥도의 2남으로 알려진 엄광순이 영월엄씨파보(충의공계)(1840·1939)에는 1남으로 등재되어 있으며, 그의 묘 또한 엄흥도 묘 인근에 현존한다.
○진묘를 숨기기 위해 묘역 내 봉분을 여러 개 조성했다.
기타 흥미로운 사실들
‘군위 엄흥도 이야기’는 알면 알수록 흥미롭다. 사학자의 시각이 아닌 이야기꾼의 시각에서 보면 더욱 그렇다. 금양2리 검동골 망월정 앞산 기슭에 회양목 군락지가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단종 유배지 청령포 노산대(魯山臺)에도 회양목 군락지가 있다.(이는 대구향토사학자 이정웅 선생이 발굴한 내용이다). 검동골 주민 증언에 의하면 예전에는 검동골에 울타리목으로 회양목이 많았다고 한다. 또 검동골에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영월 하송리 은행나무 묘목을 옮겨 심은 것이란 설이다. 하송리 은행나무는 영월 엄씨 시조가 심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수령 약 1,000-1,200년 된 고목이다. 다슬기와의 연관성도 있다. 영화에서 중요한 소재로 등장한 다슬기탕. 다슬기는 영월 특산품인데 군위 역시 다슬기로 이름난 곳이다. 군위군은 2015년 제1회 군위골부리(다슬기) 축제를 개최한 적이 있다. 엄흥도 묘를 풍수에서는 ‘해혈(蟹穴)’ 또는 ‘월혈(𧑅穴)’이라고 한다. 소라게가 소라껍데기를 이고 다니다 여차하면 껍데기 속으로 숨는 것처럼 묏자리도 숨는 자리였다.
에필로그
‘爲善被禍 吾所甘心’(선을 행하다 화를 입는다면 달게 받겠다). 엄흥도의 말이다. 영월에서 충절을 다한 엄흥도. 그는 여생을 대구 군위에서 숨어 살다 군위에 묻혔다. 이처럼 영월과 군위 두 곳에 동시에 이름을 남긴 영월 호장 엄흥도. 이참에 영월의 엄흥도와 함께 대구 군위의 엄흥도도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다. 지난 5월 22일 필자가 영월 장릉을 방문했을 때 현지 해설사도 엄흥도 묘는 대구 군위에 있다고 해설했다.